2007.03.26 /[강론] 대화의 음익[류해욱신부님]

2007. 3. 27. 오후 12:31:49

글자

제 1장 : 관대함- 대화라는 예술을 배우기


1. 대화의 음악


종교 간의 대화라는 새로운 여정의 체험을 책으로 출판하는 일은 나의 의도는 아니었다. 나는 오로지 두 위대한 영적 스승에 매혹되어 그들과 함께 걷는 기쁨을 누리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가톨릭 신자이며 도미니크 수도회 수사 신부이다. 도미니크 수도회는 700 년 전 에크하르트가 속했던 수도회이다. 나는 1983년 첫 서원을 하고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때 내가 어느 날 불교의 한 사원에서 선(禪) 수행을 하고 종교 간 대화에 참여하리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진정 삶은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비록 영적 수행과 전통의 면에서는 다르지만 불교의 선승(禪僧)과 도미니크회 수사들의 일상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바로 이 점이 종교 간의 대화를 흥미롭게 이끌어준다.

나는 남 캘리포니아의 디어 파크 사원에서 스님들과 함께 생활하는 체험을 통해 그들과 우리 수도회가 아주 비슷한 일과를 보낸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꼈다. 어느 날의 한 순간이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수백 명의 불교도들이 타이와 함께 저녁 예불을 드리는 시간이었다. 은은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사원은 깊은 침묵의 바다로 가라앉았다. 곧 이어 불경의 한 구절을 읊는 젊은 스님의 청아한 목소리가 한 점 파문을 일으켰다.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단아하고 경건한 불경의 음률이 고요한 사원에 울려 퍼졌다. 나는 형언할 수 없는 감동에 눈물이 스몄다. 종교의 위대한 전통은 영적 수행, 문화, 예술, 그리고 음악을 통해 우리 서로에게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풍요로움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 깨달았다.

그 젊은 스님이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로 불경을 노래하는 것을 들으며 나는 가톨릭과 도미니크 수도회가 지닌 풍요로운 유산(遺産)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그 순간 깊은 은총을 느꼈다. 우리 수도회에서 일상 삶의 중심은 성무일도의 시편을 노래하는 것이다. 불경을 노래하는 스님의 삶이 충만함으로 가득 차 있듯이 시편을 노래하는 나의 삶도 마찬가지로 은총에 가득 차 있다. 우리가 종교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위대한 유산을 나누지 못하고 문을 닫아 둔 때가 있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젊은 스님이 계속 노래하는 불경을 들으며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침묵 속에서 노래가 울려 퍼지는 이 곳이 곧 종교 간 대화를 여는 문이 될 것이라고. 우리 서로를 가르는 한계를 넘어 일치를 이루는 가장 좋은 것은 바로 서로의 거룩한 음악을 나누는 것이라고.

타이는 그의 저서 <살아 있는 부처, 살아 있는 예수>에서 스리랑카 해변에서 어린아이들과 만났던 체험을 이렇게 나누고 있다.


문명의 공해가 전혀 없는 푸른 섬에서 맨발로 뛰어 노는 아이들을 만났지요. 아이들은 제게로 뛰어왔어요. 서로 언어는 달랐지만 나는 팔을 벌려 그 아이들을 안았어요. 모두 여섯 명의 아이들이었지요. 우리는 서로 포옹한 채로 서 있었어요. 나는 문득 고대의 불교 언어인 팔리어로 불경을 노래하면 아이들이 알아들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불경을 노래하기 시작했지요. ‘부담 사라남 가차미’라는 노래였지요. ‘부처님에게 귀의하나이다’, ‘부처님 안에서 평안함을 누리나이다’ 라는 뜻이지요.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노래를 알아듣고 나와 함께 부르기 시작했어요. 네 아이는 함께 불렀지만 다른 두 아이는 경탄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지요. 나는 그 아이들에게도 노래를 따라 부르라고 손짓했어요. 그러자 아이들은 수줍게 미소지으며 노래를 불렀지요. 그 노래는 ‘성모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나이다’라는 노래였어요. 그 노래의 음률은 우리 불교의 노래와 별로 다르지 않았지요. 나는 아이들 하나 하나와 깊은  일치감을 맛보았어요. 그 아이들은 제게 평화를 가져다 주었지요. 


두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의 음률이 불교의 노래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말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이다. 타이는 여기에서 순진한 아이들과의 만남 이상의 어떤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부르는 노래의 말은 서로 다르지만 어떤 공통의 음률이 우리 모두를 통해 그리고 우주를 통해 우리들에게 흐르고 있음을 깨우쳐 주고 있다. 이는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더 크다는 것을, 그리고 분리시키는 면보다 일치시키는 공통점이 더 많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도미니크 수도회 전통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가톨릭의 수도회는 하루에 여러 번 성무일도를 노래하기 위해 모인다. 우리 수도회는 보통 좌우 두 편으로 나누어 한 편씩 교대로 노래한다. 젊은 수사였을 때 나는 이것이 단지 연습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서 서로 잠시 여유를 갖고 숨을 고르기도 한다. 그러나 오랜 시간 성무일도를 하면서 나는 이런 전통이 단지 숨을 고르거나 연습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서로 하느님의 말씀을 나누면서 거룩한 대화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편에서 노래를 부르는 동안 다른 편에서는 귀를 기울인다. 노래는 가슴 깊은 곳의 가장 고요한 곳까지 울려 퍼진다. 노래 사이 사이 우리는 잠시 동안 침묵 속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린 후 다시 노래를 부른다. 내게 떠오른 이 이미지는 종교 간의 대화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완벽한 은유처럼 느껴졌다.

 

대화는 고대 전통의 음악 안에 이미 뿌리내려져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만남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존경심을 지니고 주의 깊게 듣는 연습이 필요하다. 타이는 이것을 ‘깊이 듣기’라고 부른다. 이 방법은 서로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서로에게 익숙하지 않은 유산(遺産)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대화는 서로 주고받는 것이다. 위대한 신비의 음악에 귀를 기울이면서 깊은 통찰을 얻고 그것을 서로 나누어야 한다. 세계의 모든 종교들이 마음을 열고 서로의 보물을 나눌 수 있다면, 오늘날 세계의 모습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그들이 영적 유산을 나눔으로써 뿌리 깊은 갈등의 골을 해소할 수 있기를 바란다. 만약 예루살렘에서 유대인과 그리스도인과 이슬람교인이 함께 그들 고유의 성가를 부르면서 기도한다면 그곳은 원래의 이름대로 평화의 도시가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꿈을 비현실적인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상상력의 한계를 넓혀야 한다.

디어 파크 사원에 머무는 동안 불교도들은 내게 우리의 영적 수행과 삶에서 서로 다른 점을 나누어 달라고 했다. 타이는 설법을 하면서 베네딕트회 규칙을 인용했고 그들은 도미니크회의 규칙과 삶의 양식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들의 삶의 양식과 수행을 배우기 위해 그 곳에 갔다. 그런데 그들이 오히려 존경심을 지니고 내가 속한 종교 전통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우리는 두 차례에 걸쳐 오랜 시간 동안 대화하고 서로의 말을 경청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그들과 일치되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 만남의 시간에 나는 요한 복음 20장 19절에서 23절을 읽고 묵상한 것을 이야기했다. 예수님께서 공동체에 성령을 불어넣어 주시는 대목이었다. 갑자기 스님 한 분이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브라이언 형제, 불란서에 있는 플럼 마을에 와서 성경에 대해 강의를 해 주실 수 있습니까?”

나는 그의 요청에 무척 고무되었다. 내 존재의 깊은 곳에서 세계가 하나로 일치를 이루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경계를 뛰어넘는 일치와 화합의 체험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해방감이기도 했다. 나는 진정한 세계의 평화와 일치를 위해서는 우리가 서로 영적인 수행을  나눔으로써 종교 간의 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나는 오래 전 도미니크회 수사로서 성 도미니크가 800년 전 설립한 수도회의 형제로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삶을 선택했다. 선택은 오랜 수련 기간을 거쳐 나의 전 생애를 수도회의 회원으로 바친다는 서원을 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도미니크 회원들은 외적으로는 오직 한번의 서원을 한다. 바로 순명 서원이다. 많은 사람들이 순명 서원에 대해 다소 오해하고 있다. 하지만 순명 서원이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 명의 목소리가 모여 화음을 이루듯 보다 커다란 공동체에서 일치를 이루고자 하는 선택이다. 순명 서원은 내게 나 자신의 소리만을 내지 않고 어떻게 조화로운 화음을 이룰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었다. 수도생활을 해 오는 동안 나는 순명 서원을 매일 매일의 수행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서로의 관심과 존경으로 이루어나가는 사랑의 투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순명은 ‘자아’라는 나 자신의 속박으로부터 나를 완전히 자유롭게 해 주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미니크회의 티모시 래드클리프 신부는 도미니크 회원으로서의 순명은 깊이 듣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고 했다.

“순명으로 우리는 공동체의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은 존경심을 가지고 서로 대화하면서 의견을 나누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순명이라는 말은 라틴어로 obedire인데 어원적으로 보면 ob-audire에서 온다. 바로 to listen, ‘듣는다’에서 온 것이다. 진정한 순명의 시작은 우리의 형제들이 말할 때 그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들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순명 서원이라는 것은 존경심을 지니고 듣는 삶을 살겠다는 약속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종교 간의 대화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타이는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진정한 대화란 양쪽이 기꺼이 서로를 나누는 것이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밖에서도 진리를 찾을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그러한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대화는 시간낭비일 따름이다. 만약 우리만이 진리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으로 대화 속으로 들어간다면 옳은 방법이 아니다. 대화는 자아를 버리는 자세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다른 전통이 가지고 있는 선하고 아름답고 의미 있는 것들이 우리를 변화시킬 것이라는 믿음을 지녀야 한다.


나는 디어 파크 사원에서 불교도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러한 확신을 지니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귀 기울여 경청했다. 함께 노래하고 기도하면서 친밀감이 더해지는 것을 느꼈다. 우리는 각자의 전통 안에 있는 지고한 선(善)과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이렇게 대화가 전개될 때 상대는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다. 그는 바로 우리의 형제이며 자매가 된다.

타이는 모든 영적 전통을 사는 사람들은 다른 전통과 만나기 전, 먼저 자신의 전통의 뿌리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다른 종교의 사람이 수행을 배우려고 사원을 찾아오면, 먼저 자신의 종교의 영적 뿌리를 깊이 이해하고 그 안에서 화해가 이루어진 다음 불교의 영적 유산에 자신을 열라고 가르친다. 타이의 가르침 안에는 참 지혜가 있다.

나는 타이의 말을 들으면서 눈을 감고 상상 속에서 그리스도교의 영적 유산을 거대한 상수리나무로 그려보았다. 그 나무는 수세기에 걸친 유대 그리스도교의 믿음과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나무의 무성한 가지는 밖으로 뻗어나가 다른 영적 전통의 가르침과 지혜를 받아들인다. 나무의 뿌리는 튼실하게 본래의 유산에 뿌리내리지만 가지는 밖으로 자신을 뻗어나간다. 예수님께서 겨자씨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 바로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두셨는지도 모른다.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세계의 여러 종교의 큰 나무들은 다양한 목소리와 빛깔의 새들이 깃들 터를 마련하고 있다. 서로 다른 나무들이 함께 모인 숲은 매우 다양성을 지니게 될 것이다. 이러한 다양성 속에서 나무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며 어우러진다.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날아다니는 새들은 다양한 멜로디로 노래를 부른다. 그 새들이 부르는 노래의 음률은 서로 다름에도 노래는 신비로운 하나의 멜로디로 합쳐진다. 우리가 이 노래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 때 우리는 위대한 신비의 음악의 세계로 인도될 것이다.

에크하르트와 타이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느님의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두 사람 모두 내게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이해하게끔  도와주었다. 1993년의 어느 날 나는 틱낫한의 책을 처음 접했다. 멕시코의 키아패스라는 도시의 한 서점에서였다. 스페인어로 된 책의 제목에 나는 즉시 이끌렸다. Ser Paz, 즉 ‘평화의 존재’라는 뜻이었다. 그 당시 나는 온도로스에 새로 세운 도미니크회 공동체에 살고 있었다. 나는 중남미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평화와 정의 증진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몇 년 동안 나는 보다 조화로운 균형을 이루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일에 투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평화를 위해 헌신하면서도 나의 내면은 끊임없는 내적 갈등에 시달리고 있었다.   세계 평화를 위해 일할수록 나의 내적 평화는 고갈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되돌아보면 타이의 책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내적 평화였다. 그것은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노래였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보다 평화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타이는 내게 깨우쳐 주었다. 타이를 통해 나는 산상수훈의 행복 선언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마태 5, 3-10)

타이는 내게 예수님이 선언하는 행복을 사는 자만이 진정 평화를 이루면서 동시에 평화를 위해 일할 수 있다는 것을 성찰하게 해주었다. 타이와의 운명적 만남 이후 나는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여정에 틱낫한의 가르침에 의해 많은 영감을 얻었다.

에크하르트의 음악은 그 후 몇 년이 지나서야 내 삶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온도로스에서 5년의 시간을 보낸 후 영적 쇄신과 성장의 필요성을 깊이 느꼈다. 장상에게 일 년의 시간을 청했다. 나는 온도로스의 작은 산에 위치한 은수자들을 위한 오두막에 머물렀다. 나는 기도와 침묵 속으로 들어갔다. 해가 거의 끝나갈 무렵 장상은 내게 도미니크 수도회의 관상 전통의 영성에 대해 공부할 것을 권유했다.

1997년 1월 나는 오클라호마의 다종교 사원인 평화 아쉬람으로 갔다. 그곳은 아름다운 숲 속에 자리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베네딕트회 수녀들 몇 분과 도미니크 수녀회의 수녀들과 함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저서와 강론집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지만 틱낫한의 가르침에서 나온 문구인 ‘나는 드디어 고향에 왔다’를 그 때 나는 이미 체험하고 있었다. 내 마음은 고향에 온 기쁨으로 노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의 수련 동안 나는 타이의 가르침이 지닌 단순성과 부드러움이 에크하르트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체험했다. 나의 메마른 영적 토양에 물을 뿌려야 할 바로 그 때 두 스승은 종교적인 경계를 넘어 영적 자양분을 발견하게 해 주었다. 타이의 마음을 모으는 수행의 방법은 내게 에크하르트의 풍부한 신학적 가르침을 이해하는 토대가 되어 주었다.

처음에 나는 에크하르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곤 했다.

“하느님은 말씀이다. 말로 표현되지 않은 말씀이다……. 하느님은 그 자체가 말씀이다……. 하느님은 말씀하시기도 하고 말씀하시지 않기도 하시는 분이다.”

나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도대체 이 말이 무슨 의미이고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마음을 모으는 수행과 관상을 통해 나는 비로소 말로 표현되지 않은 말씀을 ‘듣기’ 시작했다. 타이의 가르침과 깊이 관상하는 수행을 통해 나는 이 말이 우리에게 신비에 관해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신비를 ‘맛보는’ 것에 관한 가르침이다.

에크하르트와 타이는 나의 진정한 친구가 되었다. 그들 모두가 내가 살고 있는 그리스도교 영성과 도미니크회 영성의 관상의 뿌리에 닿도록 도와주었다. 특히 타이는 나의 영적 수행이 어떻게 자유롭고 즐겁고 체험적이 되는지를 발견하도록 이끌어 주었다. 타이는 부처님과 예수님을 형제라고 부른다. 나도 역시 에크하르트와 타이를 형제라고 부르며 그들에게 감사한다. 그들이 나의 존재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음악을 듣도록 내 손을 잡아 주었다. 그들의 발자국을 따라 걸을 때 나는 혼자 걷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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