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의 동식물

2006. 7. 21. 오후 7:12:33

글자

1. 평화와 축복의 상징인 포도

예수가 흘리신 피, 포도주로

저주를 받아라! 그리고 형제들의 종으로 살아라!

 성경의 인물 중에서 의인이며 흠 없는 사람이었던 노아가 술에서 깨어 노발대발하며 작은 아들 후손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노아에게는 세 아들 즉 셈과 함 야벳이 있었다.

 어느 날 함은 장막 안에서 아버지 노아가 술에 흠뻑 취해 벌거벗고 있는 것을 보았다. 밖으로 나와 함은 셈과 야벳에게 아버지 흉을 보았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추한 모습을 보지 않으려 뒷걸음쳐 들어가 옷을 입혔다. 노아는 자신의 추태를 떠벌린 함의 후손에게 저주를 내렸다(창세 9 18-27 참조).

 노아는 성경에서 포도를 처음으로 재배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노아가 마셨던 술도 포도주로 기록돼 있다.

 포도는 세계에서 가장 생산량이 많은 과일 중 하나이다. 포도는 유럽이 주산지이지만 원산지는 본래 아시아 서부 카스피해 지역 코카사스 등지로 알려져 있다.

 포도 재배와 포도주의 역사적 기원을 살펴보면 그리스 북쪽에서 기원전 4500년경 것으로 추정되는 포도씨가 발견됐다. 또 기원전 2500년대 고대 이집트 왕조 벽화에서 포도주 제조기록도 발견됐다.

 이처럼 인류가 포도를 재배해 사용한 것은 아주 오래 전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는 포도가 귀한 약재로 뼈와 근육을 튼튼하게 하고 자양강장과 허기나 감기에 효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는 조선조 초기에 비로소 재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성경에는 포도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포도는 포도나무 포도원 포도주 건포도 포도즙 등 다양한 표현으로 등장하는 귀중한 식물이다.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은 포도를 평화와 축복 그리고 풍요와 다산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구약 성경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가나안)을 포도에 비유하기도 했다. 또한 포도는 가나안 땅에서 밀과 보리 무화과와 석류 올리브 나무와 대추야자와 함께 축복받은 7가지 식물 중 하나였다(신명 8 7-10 참조).

 재미있는 것은 모세가 가나안 땅에 정탐꾼들을 보냈을 때 에스골 골짜기에서 포도 한송이가 달린 가지를 막대 사이에 꿰어서 두 사람이 어깨에 메고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민수 13 23 참조). 그만큼 포도가 크다는 것을 과장한 것인데 당시 포도는 자두만한 크기로 열렸다고 하니 허무맹랑한 소리만은 아니다. 사실 오늘날 팔레스티나 지역 포도송이는 대단히 크게 열린다.

 또한 포도는 하느님 자비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포도를 수확할 때 남김없이 따지 않고 포도밭에 떨어진 포도도 줍지 못하도록 했다. 가지에 남은 포도와 땅에 떨어진 포도는 가난한 사람들과 몸 붙여 사는 외국인 몫이 되도록 했다(레위 19 10 참조).

 신약 성경에서 하느님은 포도원의 주인 이라 하고 예수님은 포도원의 참 포도나무 라고 표현한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포도나무와 가지에 비유하기도 했다(요한 15 1-3 참조).

 예수님 시대에는 신 포도주에 물을 타서 노동자의 음료수로 만들어 먹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로마병사가 드린 신 포도주가 바로 당시 노동자들이 마시던 음료였다. 그리스도교인으로서 첫 로마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 대제(A. D 280~337년)는 포도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했다.

 그러나 포도의 가장 큰 상징은 우리 죄를 속죄하시려고 예수님이 흘리신 피가 포도주로 표현됐다는 것이다 .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행한 최후 만찬에서 포도주는 언약의 피로 상징됐다(마태 26 26-28 참조).

 오늘날에도 미사주는 포도주로 사용되고 있으니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포도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과일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포도는 그리스도교의 문장처럼 성화나 교회 건축물 제의 등에도 많이 쓰이고 있다.

 

2. 승리와 평화의 상징인 올리브 나무

제대를 밝히는 올리브 기름


▲ 올리브는 이스라엘의 대표적 나무로 성경에서는 평화, 승리, 자유, 질서, 희망의 상징으로 표현된다. 사진은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 서임 기념 식수로 지난 3월29일 로마 한국신학원에 심은 500년생 올리브 나무.
몇년전 한 방송국에서 올림픽 특집으로 퀴즈를 냈다.

  우리나라 첫번째 금메달을 받은 선수의 머리에 씌워진 관은 무슨 나무로 만든 관일까요?

 방송국에서는 월계수 나무 가 정답이라고 발표했다. 방송이 나가자마자 올림픽 우승자의 머리에 씌워 주는 관이 월계수가 아닌 올리브 나무 가지로 만든 것이라고 지적하는 전화가 쇄도했다.

 고대 그리스는 올림픽 경기 우승자에게 올리브 나무관을 수여했다. 이에 관한 그리스 신화가 있다. 한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바다의 신 포세이돈 과 여신 아테네 가 싸웠다. 포세이돈은 평화와 다산의 상징인 군마를 만들었고 아테네는 힘 용기를 상징하는 올리브를 만들었다. 마침내 제우스는 여신 아테네에게 승리를 선언했다.

 그래서 올리브는 평화 승리 자유 질서 희망의 상징이 됐다. 일반적으로 아테네의 경제력은 올리브 재배로 좌우했다. 그래서 외적이 공격해오면 우선 올리브 농장부터 짓밟았다고 한다. 이것도 올리브가 평화와 결부돼 있는 원인이 된다. 지금도 이탈리아에서는 문에 올리브 나뭇가지를 걸어놓는 풍속이 있다. 그러면 악마가 침범하지 않고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전의 개신교 성경은 노아 홍수가 끝난 후 비둘기가 감람나무 이파리를 물고 왔다 고 기록했다(창세 8 11). 그러나 이것은 옳은 번역은 아니다. 한문 성경이 올리브를 감람으로 오역한 것을 그대로 감람나무로 국어로 번역해서 생긴 오류였다. 사실 올리브와 감람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니고 식물학상으로 엄연히 다른 나무이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는 감람나무를 올리브 나무 로 고쳤다.

 올리브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재배했다. 근래에는 1만년 전에도 올리브 나무가 지구에 있었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입증됐다. 올리브는 이스라엘의 중요 농산물인 동시에 교역품이기도 했다. 그래서 모세는 올리브 재배자에게는 병역의 의무를 면제해 주었다. 또 솔로몬왕은 예루살렘 성전을 지을 건축재를 구할 때에 올리브유로 그 대가를 지불했다.

 올리브 나무는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나무로 그 열매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빵과 함께 즐겨 먹는다. 일반적으로 올리브는 생장이 느린 상록수로서 심은 지 10~15년 뒤에야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일단 열매가 달리기 시작하면 나무 수명은 무척 길다. 그래서 올리브는 수백 년씩 수확할 수 있는 경제성이 높은 나무다.

 올리브 나무는 목재 성질이 굳어서 건축재보다 장식용 조각재로 많이 쓰인다. 올리브 나무는 무늬도 곱고 향기가 있어서 솔로몬이 성전 건축 때 지성소의 입구 문짝과 문설주 그리고 언약궤를 지키는 그룹을 조각했다(1열왕 6 23-33). 올리브기름은 식용 의료용 화장품 공업용 등 용도가 다양하게 쓰인다.

 특히 올리브기름은 종교의식에 중요하게 사용했다. 모세가 아론에게 거룩한 옷을 입히고 성별할 때 사용한 것도 올리브기름이었다(탈출 40 13-19). 또한 제단에 불을 밝힐 때에도 올리브기름을 사용했다(출애 27 20). 이슬람교도가 지중해 연안으로 진출하면서 그리스도교 지역으로의 올리브기름 반출을 막자 그리스도교는 올리브 기름대신에 양초를 사용해 제단에 불을 밝히게 됐다.

 올리브는 막대기로 나무를 두들겨서 떨어진 열매를 주워 수확했다. 그런데 올리브를 수확할 때에 한번 지나간 가지는 다시 손대지 말라고 율법에 규정했다(신명 24 20). 남은 것은 가난한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의 몫이라고 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다음 해 감을 수확할 때까지 까치 몫으로 나무 꼭대기에 달린 감 몇개를 남겨 놓은 정겨운 모습이 떠오른다. 올리브가 사랑과 평화의 대명사로 불린 만한 대목이다

 

3. 해방과 강함의 상징 독수리

이스라엘 백성을 날개에 태워


▲ 서울 혜화동성당 전면에 있는 '최후의 심판도'(1961, 화강석 부조, 김세중ㆍ장기은). 이 작품에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성경말씀과 함께 4명의 복음사가가 좌우에 자리잡고 있다. 사자는 마르코, 독수리는 솟구치는 영감을 글로 담은 사도 요한, 날개달린 남자는 마태오, 황소는 루카를 상징한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실장)


 독수리는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 예리한 시력과 힘을 가진 육식성 새이다. 강하고 용맹스러운 이미지 때문에 많은 나라의 문장에 독수리가 등장한다. 미국은 국가와 대통령 문장에 독수리 그림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독수리 문장 사용은 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 제국은 창공을 힘차게 나는 독수리를 제국과 황제의 상징으로 정했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힘 있는 나라나 왕들은 독수리를 지배자의 상징으로 삼았다. 아마도 자신들도 로마 황제와 같은 권위를 누리고 싶다는 원의가 작용했을 것이다. 러시아 제국이나 나폴레옹과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새들의 왕자인 독수리는 창공을 가장 높이 날고 가장 오래 비행하는 맹금류다. 맹금류란 다른 동물을 포식하는 조류(鳥類)를 말한다. 모든 맹금류는 갈고리 모양으로 굽은 부리와 날카롭게 휜 발톱을 가지고 있다.

 독수리는 창공을 최고 5㎞까지 날 수 있으며 날개를 거의 움직이지 않고 원을 그리며 나는 것이 특징이다. 아주 눈이 밝은 사람의 시력은 2.0 정도인데 독수리의 시력은 대략 6.0 정도 된다고 한다. 이 정도 시력을 사람이 갖게 되면 1㎞밖에 있는 글자도 거뜬히 읽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여의도 면적의 3~4배 범위 안에 있는 먹이들은 모두 독수리 한 마리의 포위망 속에 들어가게 되는 셈이다. 독수리는 한 짝과 평생을 보내며 높은 나무 위나 바닷가 바위 언덕 꼭대기에 둥지를 틀고 새끼들을 돌본다.

 독수리는 특히 강인한 훈련으로 자신의 새끼를 기른다. 어미 독수리는 새끼가 날개 깃이 나기 시작하면 등에 업고 높은 창공에서 떨어뜨린다. 그러면 새끼 독수리는 작은 날개 깃으로 사력을 다해 파닥거리면서 땅에 떨어진다. 새끼가 지면에 닫는 순간 어미 독수리는 날쌔게 새끼를 업고 다시 창공에서 비상해서 그 새끼를 다시 떨어뜨린다. 이와 같은 강인한 훈련을 통해 독수리는 창공을 가장 오래, 가장 높이 날 수 있는, 새 중에 왕자가 되는 것이다.

 독수리는 날카로운 눈과 억세고 예리한 발톱으로 땅위 토끼나 들쥐를 잡아채며 절벽이나 높은 나무에서 먹이를 먹는다. 자연보호의 상징처럼 된 이들 맹금류는 숲의 먹이사슬에서 맨 꼭대기에 있기 때문에 건전한 생태계를 유지하고 보전하는데 반드시 필요하다.

 성경에는 독수리가 자주 등장한다. 성경에 독수리는 이스라엘을 구한 상징적 동물로 표현되고 있다. "너희는 내가 이집트인들에게 무엇을 하고 어떻게 너희를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나에게 데려왔는지 보았다.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나의 것이다"(탈출 19,4-5). 하느님은 그의 소유가 된 백성 이스라엘을 향해 "내가 너희를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내게로 데려왔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독수리 상징을 통해 하느님의 부성적 사랑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독수리는 약한 짐승이나 새, 살아있는 뱀을 먹이로 삼고 특히 썩은 시체를 즐겨 먹는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인다고 하셨다(마태 24,28). 이것은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한 말씀으로 유명하다. 즉, 독수리가 먹이를 찾아내듯 유다인들을 찾아내서 파멸시킨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다.

 또한 독수리는 하느님 의지, 하느님의 뜻을 이룰 사람 또는 군대로서 하느님을 대리한 심판자로 비유된다. 그리고 독수리는 성경에서 강함과 신속함의 이미지(2사무 1,23)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먹이를 사냥하는 능력과 갑자기 공격하는 독수리의 습성 때문이다.

 독수리는 악조건을 극복하는 높은 안목과 넓은 시야를 지닌 용맹스러운 새다. 독수리가 창공을 힘차게 높이 날듯이 우리 신앙의 날개도 높이 솟구쳐야 하겠다. 이제 우리의 날개로 다른 이들을 구원의 땅으로 데려와야 할 것이다.
 

4. 이방인을 상징한 돼지

'복'이 아닌 '불결함'의 상징


▲ 성경에서 돼지는 불결한 짐승이다. 모세의 율법은 돼지를 부정하게 여기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먹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유다인에게 돼지는 이방인의 상징이었다.
허 영 엽 신부 (서울대교구 홍보실장)


 초등학교 시절, 집에서 학교를 가려면 시장을 지나가야 했다. 시장에는 돼지머리를 진열해 놓고 파는 가게들이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그 앞을 지날때면 웃는 모습의 돼지머리를 구경하는 것이 큰 재미(?)였다.

 그런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웃는 표정을 지을 수 있는 동물은 사람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니까 웃는 돼지는 사람이 일부러 웃는 모습을 연출한 것이다. 요즘도 개업식이나 중요한 일을 시작할 때 돼지머리를 앞에 두고 고사를 지내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이처럼 돼지가 일반적 제물로 정해진 이유는 무엇보다 경제적 이유에 있다고 한다. 비싸고 귀한 소보다 싸고 구하기 쉬운 돼지머리를 자주 사용한 것이다. 또한 돼지의 입에 지폐를 물리는 모습은 돈을 중요하게 여기는 현대인의 가치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예로부터 복의 상징인 돼지는 인간에게 매우 유익한 동물이다. 엄청난 번식력 덕분에 돼지는 오래 전부터 인간과 무척 가까운 가축이다. 돼지는 많은 양의 고기를 제공할 뿐 아니라 영양가도 무척 높다. 그래서인지 돼지에 관한 속설도 비교적 많다. 사람들은 꿈에서 돼지를 보면 큰 재물이 들어올 길조로 생각했다. 돼지가 한번에 십여 마리씩 새끼를 낳기 때문에 이런 속설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성경에서 돼지는 불결한 짐승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근동지방에서는 지금도 돼지를 식용으로 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레위기와 신명기에도 돼지고기를 금하는 규정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다. 모세의 율법은 돼지를 '부정하게' 여기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먹지 못하도록 규정한다(레위 11, 7; 신명 14, 8).

 이처럼 돼지는 유다인들에게 먹으면 안되는 동물로 구분됐다. 그 이유는 고대 이방인 세계의 여러 곳에서는 돼지를 길짐승으로 길렀으며 양식으로 중요하게 취급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돼지의 지저분한 습성과 먹는 음식물이 매우 불결하다는 점 때문에 식용을 금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중동처럼 덥고 건조한 지역의 경우 돼지고기가 부패하기 쉽고 이것을 잘못 먹으면 식중독에 걸릴 확률이 높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또한 정착하지 않고 이곳저곳으로 이동해야 하는 유목민 생활에서 돼지는 적합하지 않다.

 성경에서는 돼지고기를 먹는 것을 불결한 이방인 풍습의 대표적 예로 제시한다. 성경시대 후기에는 유다인들에게 돼지고기를 금하는 것이 이방인들과 구분하는 중요한 요소가 됐다. 유다 종교의 정체성을 말살하려고 했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핍박 아래서 열심한 유다인들은 돼지고기를 삼가는 것을 하느님 율법에 대한 순종으로 삼았다. 즉 돼지고기를 금하는 것이 신앙의 차원이 된 것이다. 마카베오의 순교자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을 당했다(2마카 6, 18-31). 또한 돼지를 제물로 바치는 것이 성전에 대한 신성 모독 중 하나였다(1마카 1, 47).

 이처럼 유다인들은 돼지와 이방인의 불결함을 상징적으로 연관시켰다. 따라서 돼지는 개와 함께 후대에 가서 이방인들을 상징하는 경멸적 용어들이 됐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 6). 여기서 개나 돼지는 이방인을 의미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돼지도 깨끗한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돼지를 대량 사육하는 곳에 가면 깨끗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돼지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돼지는 지저분하다는 인식은 편견이라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돼지는 땀샘이 거의 없어서 스스로 체온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래서 돼지가 진흙탕을 뒹구는 광경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땀을 흘리지 못하는 돼지가 체온을 식히려고 하는 동작이라고 한다.

5. 평화와 안정의 무화과 나무

시원한 그늘 주는 '안식처'


▲ 무화과나무는 잎이 커서 큰 그늘을 만들어 주는 특징 때문에 평화와 번영을 상징한다. 사진 출처 =산림청 국립수목원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실장)



 에수님은 어느 날 베싸이다 출신인 필립보를 만나 제자로 부르신다.

 "나를 따라 오너라."

 필립보는 예수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 후 친구 나타나엘을 찾아간다. "나타나엘, 나는 우리가 기다리던 구세주를 만났네. 나자렛 출신 예수라는 사람이야."

 "나자렛? 나자렛에서 뭐 신통한 게 나올 수 있겠어?"

 예수님은 나타나엘이 가까이오자 거침없이 말씀하셨다. "이 사람이야말로 진짜 이스라엘 사람이다."

 나타나엘은 놀라며 말했다."저를 아십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나는 필립보가 당신을 찾아가기 전에 당신이 무화과 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나타나엘은 깜작 놀라며 말했다."선생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요한 1,43-51).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방과 같이 사용하는 장소였다. 이스라엘 무화과 나무는 위보다 옆으로 퍼지는 나무로 가지가 많다. 우리나라 느티나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늘이 많은 무화과 나무 아래서 조용히 앉아 명상하고 기도하곤 했다. 나타나엘은 예수님을 만나기전에 나무 아래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하셨던 것이다.  

 꽃이 없다고 해 무화과라고 부르지만 실제로 무화과 나무에도 꽃은 핀다. 무화과 나무 원산지는 서남아시아, 지중해 연안이다. 무화과는 주로 꺾꽂이로 번식된다. 쉽게 번식되지만 추위에 약해 재배지가 한정돼 있다.

 옛날부터 무화과 나무는 이집트, 팔레스티나, 시리아 등지에서 널리 재배됐다. 특히 잎이 커서 큰 그늘을 만들어 준다. 이런 특징 때문에 무화과 나무는 평화와 번영을 상징한다. 더운 지방에서 서늘한 그늘을 만들어주는 무화과 나무와 같은 안식처는 또 없을 것이다.

 열매를 먹어 보면 모래알 같은 것이 씹히는데, 이것이 진짜 열매다. 봄에 새잎이 퍼지면 녹색의 작은 열매가 생긴다. 그후 열매가 커져서 8~9월에는 연하고 껍질이 잘 벗겨지며 맛이 매우 단 과일이 된다. 늦가을까지 가지끝에 열매가 계속 달려서 덜 익은 상태로 겨울을 날 수도 있다. 그래서 다음해 봄에 다시 커지는 것도 있기에 먹을 만하다.

 이런 무화과 열매는 가난한 사람들의 양식이 됐다. 무화과는 날것으로 먹을 뿐만 아니라 건조시켜서 보존식량으로 더 귀중하게 사용했다. 무화과 열매는 소화를 촉진하고 변비에는 특효라고 해서 약으로도 요긴하게 쓰인다.

 무화과 열매는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중요한 식량의 하나였다. 특히 다리의 힘을 증가시켜준다고 해서 운동경기를 하는 선수는 무화과 외에는 다른 것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스에서 생산되는 양질의 무화과는 수출하는 것을 법으로 금했다. 그래도 밀수출이 끊이지 않자 밀고자 제도까지 만들어 단속을 했다고 한다. 이처럼 유럽에서는 무화과가 산업과수의 하나로 중요하게 생각했다.

 성경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눈이 밝아져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서 치부를 가리는 것으로 등장한다(창세기 3, 6-7). 무화과 나무는 성경시대에는 집에서 가장 많이 키우는 나무로서 팔레스타인 지역에 널리 유포돼 있었다.

 무화과 나무는, 열매를 맺고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특성으로 포도나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 관계에 있는 하느님을 상징하기도 한다. 예수께서는 무화과 나무를 이용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위험성을 경고하셨다 (루카 13,6-9). 이것은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이 생활 중에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을 비유하신 것이다.

 무화과 나무는 안전한 생활과 훌륭한 삶을 상징한다. 즉 사람이 무화과 나무 아래 산다는 것은 안정, 기쁨, 평화 그리고 번영의 생활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무화과나무를 키우려면 수년간 시간과 힘든 노동을 투자해야 하기 때문이다.

6. 사랑과 평화의 상징 비둘기

하느님의 영, 비둘기 모습으로


▲ 성경에서 비둘기는 하느님의 영, 아름다운 연인의 모습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허 영 엽 신부 (서울대교구 홍보실장)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 가슴에 금이 갔다. …(중략)…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 날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김광섭 시인 '성북동 비둘기')

 학창시절에 읽었던 '성북동 비둘기'때문이었던가. 나는 한동안 비둘기가 슬퍼 보였다. 보금자리를 잃고 이리 저리 떠도는 비둘기 삶에서 현대 물질 문명에서 점점 소외돼 가는 우리 모습을 보는 것은 지나친 생각일까. 어쨌든 신학생 때 대학로의 비둘기를 보면 '성북동 비둘기'를 항상 머리에 떠올리곤 했다.

 요즘 고궁이나 공원에서 볼 수 있는 비둘기떼는 사람이 먹이를 주면 가까이 다가와 친근감을 갖게 한다. 도시의 비둘기는 여간해서 사람을 피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비둘기는 생각보다 상당한 대식가로 배설물도 많아 주변을 지저분하게 만든다. 또한 산성이 강한 비둘기 배설물로 건물이나 조형물이 훼손되기도 한다. 사랑과 평화의 상징으로 불리는 비둘기가 요즘 도시에서는 환경오염의 주범이라 불릴 만하다. 먹이가 흔한 도시 비둘기는 잘 날지도 못해서 심각한 비만으로 사람처럼 고혈압, 심장병 등 위험에 처해 있다고 한다.

 비둘기는 다른 애완 조류와는 달리 멀리서도 집을 찾아가는 귀소 본능이 있다. 그래서 제1차 세계대전 때 비둘기는 프랑스군의 위기를 알리는 데 맹활약을 했다고 한다. 또 비둘기는 몸을 숨기는 능력이 뛰어나고 외딴 지역에 둥지를 트는 습성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비둘기를 평화의 상징으로 여기게 되었을까? 고대 사람들은 비둘기에게는 담낭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담즙에 미움이나 분노가 깃든다고 생각해, 비둘기를 증오나 분노와는 무관한 평화로운 새라고 생각했다. 또 부리를 부딪히며 애정 표현을 하고, 다산을 하는 비둘기는 사랑의 여신으로도 여겼다.

 지난번에 언급한대로 올리브는 풍요와 생명의 상징이다. '비둘기와 올리브'를 '평화'라는 이미지와 연관시킨 것은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서 볼 수 있다.

 "저녁때가 되어 비둘기가 그에게 돌아왔는데, 싱싱한 올리브 잎을 부리에 물고 있었다"(창세 8,11).

 이처럼 올리브 나무 가지를 물고 있는 비둘기의 이미지는 평화의 상징이 됐다. 사실 이 이야기의 원형을 이루는 수메르인의 홍수 설화에서는 큰 까마귀가 비둘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죽은 고기를 먹는 까마귀는 유다인에게 더러운 새로 간주되었기에 비둘기로 대체한 것으로 생각된다.

 성경에서는 집비둘기와 산비둘기가 함께 언급된다. 성경에서 비둘기는 희생제물을 위한 새이다.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을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로 바치라고 한다(레위 1,14). 비둘기와 비둘기 새끼는 양이나 염소를 제물로 바칠 수 없는 가난한 자들 제물이었다(레위 5,7). 비둘기 울음소리는 슬프게 들리기에 인간의 슬픔을 비둘기의 소리에 비유하기도 했다(이사 38,14). 또한 아가서는 아름다운 연인의 모습을 비둘기에 비유하고 있다(아가 1,15; 2,14; 4,1).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박하라고 당부하신다 (마태 10,16). 이처럼 비둘기는 순결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 영의 모습으로 비유되기도 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같이 내렸다고 표현한다(마태 3,16: 마르 1,10: 루카 3,22: 요한 1,32). 성령을 비둘기 모습으로 표현한 것은 예수께서 새로운 창조의 임무를 수행하실 분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성경에서 비둘기는 시, 예언, 비유, 노래 등 여러 방면에서 인용했다. 그런데 평화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비둘기는 의외로 폭력적 습성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모든 존재는 양면성을 지닌다는 진리가 확인되는 대목이다.


7. 정의로 심판하는 하느님을 상징하는 사자

포효엔 강함이, 당당함엔 의로움이


▲ 피터 파울 루벤스의 '사자 굴에 갇힌 다니엘'. 사자는 정의로 심판하시는 하느님을 표상하기도 하고, 재앙을 가져오는 암흑 세력으로 비유되기도 했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백수의 왕' 사자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소름끼치는 포효와 함께 머리를 둘러싸고 있는 갈기가 아닐까. 암수를 구별하는 뚜렷한 표지가 되는 사자 갈기는 숫사자에게만 있다. 암사자는 먹이감을 사냥하고 숫사자는 침입자로부터 무리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사냥을 하는 암사자에게 갈기는 눈에 띄기도 쉽고 빨리 달리는 데도 오히려 방해물이 된다. 반대로 숫사자의 갈기는 적의 이빨로부터 목을 보호하는 방어 수단이 되는데, 싸움에서 갈기는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고 머리나 목이 받는 충격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와 인도에 분포하는 사자는 아시아 호랑이와 함께 고양이족 가운데 최대 맹수다. 사자는 수컷이 암컷보다 훨씬 크고 몸무게는 종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보통 100∼250kg정도가 나간다. 털 빛깔은 일반적으로 황갈색 또는 회갈색을 띠며 털 길이는 짧다.

 갈기와 더불어 사자의 두드러진 특징은 암수가 모두 꼬리 끝에 술 모양으로 된 흑갈색 털송이가 있는 점이다. 암갈색 얼룩점은 어린 새끼 다리에서 비교적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이 얼룩점은 성장과 더불어 없어지지만 때로 늦게까지 남아 있다. 사자는 단거리를 시속 60km 정도로 달린다. 빠를 때는 시속 80km까지 달릴 수 있다. 사자의 힘이 강하다는 것은 수컷이 갖고 있는 특유한 갈기로도 짐작할 수 있다. 이 갈기의 크기나 색채는 지역에 따라, 또 나이에 따라 다르다.

 사자는 보통 10∼20마리가 일정한 영역에서 무리를 지어 산다. 사자들은 공동으로 무리 일부가 사냥감을 추적하고, 나머지는 잠복하고 대기했다가 덤벼들어 잡는 경우가 많다. 낮에는 나무그늘에서 쉬고 야간에 활동하면서 먹이를 찾지만, 종종 낮에 사냥하는 경우도 눈에 띈다. 사냥감으로는 얼룩말, 영양, 기린, 물소, 멧돼지와 같은 것들이다. 사자는 한번에 평균 2∼3마리 새끼를 낳는다. 사자의 수명은 야생상태에서는 10~15년이지만 동물원에서는 25년까지 사는 것도 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사자를 태양신을 드러내는 표지로 생각했다. 또한 불가사의 한 힘으로 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동물로 생각했다. 따라서 신전 문과 보좌를 지키는 파수꾼이 됐다. 앗시리아나 그리스 사람들은 여신 옆에 사자를 그려넣기도 했다.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도 예수님이나 성인을 나타낼 때 사자가 함께 등장한다. 아프리카는 물론 유럽, 서아시아, 인도 등 넓은 지역에 분포하고 있던 사자는 오늘날 초식동물과 서식지 감소 등 문명의 발달로 점차 사라져가고 있는 추세다.

 성경 시대 팔레스티나 지역에서는 사자가 흔했지만 현재는 멸종해 볼 수 없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자가 가축을 빼앗아가는 아주 잔인하고 거친 맹수라고 생각했다. 특히 멀리서도 들리는 사자의 울부짖음은 공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사자를 둘러싼 신화들이 많이 생겨났다. 재미있는 것은 성경에 나타나는 사자는 정의로 심판하시는 하느님 자신을 표상하기도 하지만(욥 10,16)  재앙을 가져오는 암흑 세력으로 비유되기도 했다는 점이다(1베드 5,8). 또한 사악한 자를 덤불 속의 사자(시편 10,9)로 묘사하고 임금의 분노는 사자의 으르렁거림(잠언 19,12) 같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유다 지파를 사자 새끼(창세 49,9)에 비유하기도 했고 사자들을 심판의 수단으로 표현하기도 했다(1열왕 13,26). 사자의 이빨, 발톱에 대한 언급은 온갖 종류의 공포감을 조성한다(1사무 17,37).

 구약에 나오는 사자는 당당한 활보와 압도적 힘 때문에 적과 당당하게 싸우는 의인으로 묘사되기도 한다(잠언 28,1). 사자는 때로 용감하고 강하고 무자비하다고 묘사된다. 또 힘이 세지만 야만적인 면도 갖고 있다고 표현된다. 그래서 사자의 특징을 이용해서 한 나라의 흥망성쇠, 선과 악, 전능함과 약함을 비유했다.

 또한 삼손(판관 14,5-8), 다윗과 다니엘(다니 6,11-29) 같은 유명한 인물들이 모두 사자와 관계되는 것도 흥미롭다.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울부짖는 사자는 그리스도에 의해 죽은 자의 부활을 상징하기도 했다.

8. 사랑의 묘약인 합환채

부부들에겐 생명, 행복의 상징


▲ 아름다운 꽃을 피운 자귀나무. 공동번역 성서는 합환채를 부부의 행복과 관계가 깊은 자귀나무로 잘못 번역했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실장)




 창세기에 유명한 자매, 레아와 라헬 이야기가 나온다. 성격이 전혀 다른 언니 레아와 동생 라헬은 모두 한 남자 야곱을 남편으로 섬겼다.

 그런데 남편 사랑은 늘 예쁜 외모를 지녔던 라헬 차지였다. 당시 사람들 관점에서 보면 아들을 더 많이 낳은 레아가 행복한 여성이었겠지만 레아는 남편 사랑을 얻지 못해 한 여자로서는 불행했을 것이다.

 그래서 레아는 아들을 더 많이 낳아 남편 사랑을 얻으려고 눈물겨운 노력을 했다. 보리 추수 때에 레아의 큰 아들이 임신 촉진제인 합환채를 밭에서 따왔다. 그 소식을 들은 동생 라헬이 언니 레아에게 달려왔다.

 "언니! 그 합환채를 나에게 줘요. 나도 아들을 낳고 싶어요." 그러자 레아는 라헬에게 화를 버럭냈다. "네가 남편 마음도 독차지하고 무엇이 또 부족해서 합환채마저 달라고 떼를 쓰는거냐?" 그동안 꾹꾹 참아왔던 레아의 분노가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라헬은 언니 레아의 역정에 눈도 깜짝 않고 거래를 했다. "언니, 합환채를 주면 오늘 밤 그이가 언니와 함께 자게 해주지요."

 결국 레아는 라헬에게 합환채를 주었다. 그날 밤 남편이 들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자 레아는 그를 맞으며 말했다. "저에게 오셔야 해요. 내 아들 합환채를 주고 당신을 빌렸거든요"(창세기 30, 14~16 참조).

 합환채란 어떤 식물인가? 합환채를 영어 성경은 '사랑의 사과'(Love Apple), 일본 성경은 '연애가지'라고 번역했다. 또 아랍인들은 정욕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다고 믿어 '악마의 사과'(Devil's Apple)라고 불렀다.

 그런데 공동번역 성서는 합환채를 자귀나무로 잘못 번역했다. 지난해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출간한 성경은 합환채로 바르게 번역했는데, 자귀나무는 지중해 연안에는 없는, 합환채와 전혀 다른 식물이다.

 그렇다면 합환채를 왜 자귀나무로 번역했을까? 합환채와 자귀나무는 비슷한 점이 많다. 자귀나무 꽃은 6~7월 초여름에 피는데,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자귀나무가 첫번째 꽃을 피울 때 팥을 파종했다고 해서 이 이름으로 불렀다.

 자귀나무는 예로부터 부부 금실을 상징하는 나무로 안마당에 심어 놓으면 부부 금실이 좋아진다고 생각했다. 특히 자귀나무는 밤이 되면 잎을 접고 깊이 잠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자귀나무를 합환목(기쁨으로 만나는 나무), 합혼수(혼인으로 만나는 나무), 유정수(정이 많은 나무), 야합수(밤에 만나는 나무) 등으로 달리 부르지만 모두 비슷한 뜻을 지니고 있다. 하나같이 부부간 만남과 즐거움을 상징하는 뜻을 갖고 있는 이유로 공동번역 성서는 합환채를 자귀나무로 번역했던 것 같다.

 서구사회에서 합환채는 가장 미신적이고 공포를 주는 식물 중 하나였다. 합환채 뿌리는 독성이 강해 다량 섭취하면 뇌신경이 손상된다. 유독성분이 규명되지 못했던 옛날에 합환채를 먹고 흥분이 지나쳐서 미쳐버리는 것을 악마의 장난이라고 믿었다. 합환채 과실은 향기롭지만(아가 7 ,14) 열매 속에는 약하기는 해도 유독성분이 있어서 많이 섭취하면 구토와 설사를 일으킨다. 그러나 중동지역에서는 유독성의 위험을 무릅쓰고 수태력 증진 효과와 약간의 마약 성분으로 부부들이 즐겨 먹었다.

 고대 사회에서는 극소량을 술에 담가 외과수술용 마취약으로 사용했다. 유효성분이 열매에 들어 있어 이것을 말려 예로부터 약품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특히 마취, 최면, 진정, 최음의 효과도 있으며 적당량을 사용하면 치통, 두통 등을 경감시켜 주고 사람 마음을 상쾌하게 해준다. 따라서 서양에서 합환채처럼 영적, 의학적, 미신적으로 크게 영향을 끼친 식물도 흔하지 않다.

 합환채를 자귀나무로 오역했지만 자귀나무 역시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부부의 행복과 관계가 깊은 나무이다. 신학교에서는 자귀나무 꽃이 필 즈음이면 여름 방학을 한다고 해서 '방학나무'로 부르니 합환채처럼 자귀나무도 기쁨을 주는 나무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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