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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미사]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장례미사(2004.04.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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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유언장
1979년 3월 6일자 유언장
“저는 온전히 임의 것입니다.”(Totus Tuus ego sum)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아멘.
“너희의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라”(마태 24,42 참조). 저는 이 말씀에서 주님께서 바라시는 순간에 듣게 될 주님의 마지막 부르심을 떠올리게 됩니다. 저는 그분을 따르고자 합니다. 제가 지상 생활에서 이룬 모든 것을 통해 이 순간을 대비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순간이 언제 다가올지 모르지만 다른 모든 경우처럼, 저는 저의 주인이신 분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이 순간을 맡깁니다. 모두 임의 것입니다(Totus Tuus). 또한 제 삶과 소명을 통해 저와 유대를 맺은 모든 사람과 모든 것, 특히 교회와 제 조국과 온 인류를 성모님의 손에 맡깁니다. 모든 분께 감사 드리며 모든 분께 용서를 청합니다. 또한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저를 하느님의 자비로 감싸주시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제가 영성 수련 중에 읽고 또 읽은 교황 바오로 6세의 유언에 고무되어 이 유언장을 쓰게 되었습니다.
제게는 처분할 만한 재산이 전혀 없으며, 제가 날마다 쓰던 일용품들은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곳에 나누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제 개인적인 기록들은 불살라 주십시오. 오랫동안 곁에서 저를 깊이 이해하며 도와주고 협조해 준 나의 고마운 스타니스와프 신부가 참석하여 직접 이 일을 해 주기를 바랍니다. 이루 다 표현할 길이 없는 다른 모든 감사는 제 마음속에 담아 하느님 앞에 가져가겠습니다.
장례에 관해서는, 교황 바오로 6세께서 남겨 주신 것과 같은 장례 절차를 밟고자 합니다.〔여백에 “석관(sarcophagus)이 아닌 맨 땅에 안장, 1992년 3월 13일”이라고 쓰여 있다.〕
주님께는 자비가 있사옵고 풍요로운 구속이 있나이다(apud Dominum misericordia et copiosa apud Eum redempt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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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바오로 2세
로마 1979년 3월 6일 제가 죽으면, 미사와 기도를 바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1990년 3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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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가 기록되지 않은 문서
저는 확고하게 믿습니다. 너무도 나약한 저이지만 주님께서는 지상 생활 동안 당신 종에게 요청하신 그 모든 임무와 시련과 고난도 당신 뜻에 따라 헤쳐 나가는 데에 필요한 모든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심을 확고히 믿습니다. 저는 또한 제가 말과 행위와 태만으로 이 거룩한 베드로좌의 의무를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주님께서 저를 지켜 주실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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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2월 24일 - 3월 1일
이번 영성 수련 기간에도 저는, 우리들 각자 맞을 죽음의 순간인 ‘옮아감’(Transit)의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사제직의 참뜻에 대하여 성찰해 보았습니다. 저희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세상을 떠나, 다음 세상에서 태어난다는 명확한(이 말 위에 ‘결정적인’이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음) 징표입니다.
따라서 저는 지난해에 역시 영성 수련 기간에 작성한 제 유언장 사본을 읽어보며,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자 교황으로서 맞이하는 죽음에 대하여 숭고하게 증언해 놓은 저의 위대한 선임자 교황 바오로 6세의 유언장과 비교해 보면서, 1979년 3월 6일자 유언장 사본에서 제가 (다소 잠정적으로) 언급해 놓은 문제들을 제 안에서 새롭게 인식하였습니다.
오늘 저는 다음의 부분만을 덧붙이고자 합니다. 우리는 각자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리라는 것을 명심하고, 심판관이신 주님 앞에 나아갈 채비를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구세주이신 동시에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이를 명심하면서 저는 또한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며 교회의 어머니이고, 제 희망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그 결정적인 때를 맡겨드립니다.
우리는 매우 어렵고 혼란스러운 시기를 살고 있습니다. 교회 또한, 신자들이나 목자들 모두, 시대적 시련 때문에 힘들고 절박한 길을 걸어 왔습니다. 어떤 나라들에서(예를 들어, 제가 영성 수련 동안 책에서 접한 나라들에서), 교회는 초세기 교회 때보다 결코 덜하지 않은 그러한 박해의 시기를 겪고 있으며, 실제로 그 잔인함과 증오의 정도는 초세기 교회보다 더 심합니다.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교의 씨앗입니다.” 이와 별도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에서조차 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죽어가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저는 주님의 은총에 제 모든 것을 의탁하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만 제가 이 지상 생활과 사목 직무를 마감해야 할 때와 방법을 결정하실 것입니다. 삶과 죽음을 통하여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님께 모든 것을 맡깁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이 순간조차도 저는 그리스도께서 제 마지막 가는 길에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다시 말해 제게 부활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저는 주님께서 (제 죽음이) 제가 이바지하고자 하는 더욱 중요한 목적, 곧 인류 구원, 인류 가족과 모든 국가와 민족(특히 지상의 제 조국)의 수호, 주님께서 특별히 제게 맡기신 백성, 교회와 하느님의 영광에 도움이 되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일 년 전에 작성한 유언장에 어떠한 것도 첨부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이번 영성 수련으로 제가 다시 깨달은 제 뜻과 확신을 표현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저는 온전히 임의 것입니다”(Totus Tuus ego sum) 1982년 3월 5일
올해의 영성 수련 과정에서 저는 1979년 3월 6일에 작성한 유언장을 (여러 번)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저는 이 유언장을 (최종이 아닌) 잠정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지금 있는 그대로 두기로 합니다. 이 유언장에 담긴 뜻과 관련해서 (현재로서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겠으며, 어떤 것도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1981년 5월 13일에 일어났던 저에 대한 암살 시도는 어떤 면에서 1980년 영성 수련 기간에 적은 내용을 더욱 확고하게 해 주었습니다(2월 24일 - 3월 1일).
저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깊이 하느님 손 안에 온전히 내맡겨져 있음을 느낍니다. 그리고 저는 언제까지나 주님 뜻 안에 머물 것이며, 원죄 없으신 성모님 안에서 온전히 임의 것입니다(Totus Tu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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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바오로 2세
1982년 3월 5일
1979년 3월 6일에 작성한 유언의 마지막 문장(“장소, 곧 장례 장소는 추기경단과 동료들이 결정하게 한다.”)과 관련해서, 저는 크라쿠프 대교구나 폴란드 주교회의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자 합니다. 한편 저는 추기경단에게 앞서 요구한 것들을 가능한 한 모두 들어줄 것을 요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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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3월 1일 (영성 수련 기간 중에)
다시 한 번, “추기경단과 동료들”이라는 표현과 관련하여, “추기경단”은 이 문제에 관해서 “동료들”과 상의할 의무가 없지만, 어떤 이유로 적절하다고 생각되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2000년 대희년 영신 수련(3월 12~18일)(제 유언장을 위해)
1. 1978년 10월 16일 추기경들이 교황 선거를 통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선출했을 때 폴란드 가톨릭 교회의 수석 대주교인 스테판 비신스키 추기경이 제게 다음과 같이 말을 했습니다. “새 교황님의 임무는 교회를 제삼천년기로 이끄는 것입니다.” 비신스키 추기경이 한 말을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당시 저는 그런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제삼천년기의 대주교로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는 위대한 대주교였습니다. 저는 그의 사명과 완전한 헌신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의 투쟁과 승리도 목격했습니다. “때가 되면 성모님을 통하여 승리가 올 것입니다.” 전임자였던 아우구스트 흐원트 추기경이 하던 이 말을 비신스키 추기경도 되풀이하고는 하였습니다.
어떤 면에서 저는 이렇게 1978년 10월 16일 제게 부여된 임무에 대한 준비를 한 것입니다. 제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2000년 대희년은 이미 현실이 되었습니다. 1999년 12월 24일 밤에 성 베드로 대성전의 상징적인 대희년 성문이 열렸습니다. 이어서 2000년 새해 첫날에는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과 성모 대성전의 성문이, 그리고 1월 19일에 성벽 밖의 성 바오로 대성전의 성문이 차례로 열렸습니다. 이 성벽 밖의 성 바오로 대성전의 성문이 열린 일은 교회일치의 의미를 가진 것으로 저의 기억 속에 인상 깊게 남아있습니다.
2. 대희년이 하루하루 지나가면서 20세기가 저물고 21세기가 열리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섭리의 계획에 따라, 저는 이제는 과거 속으로 사라져가는 고난의 세기를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제 나이 팔십이 되었으니(‘octogesima adveniens') 성서의 시므온처럼 “이제는 ……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nunc dimittis)라고 한 말을 따라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1981년 5월 13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일반 알현 도중 저격을 당하던 날, 하느님의 섭리가 저를 기적적으로 죽음에서 구해주셨습니다. 삶과 죽음을 다스리시는 한분이신 주님께서 저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어느 면에서는 주님께서 제게 생명을 다시 주신 것입니다. 이때부터 저의 생명은 더욱더 그분 손에 맡겨졌습니다. 저는 그분께서 제가 1978년 10월 16일에 부여받은 임무를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시기를 희망합니다. 저는 그분께서 원하실 때 저를 데려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 살고 죽더라도 주님을 위해서 죽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참조). 저는 또한 교회 안에서 베드로 직무를 수행하는 동안에는 하느님의 자비로 이 일에 필요한 힘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해마다 하는 영신 수련 기간에 저는 1979년 3월 6일에 작성된 저의 유언장을 읽어보았습니다. 저는 이 유언장에 담긴 뜻을 계속 그대로 유지하려 합니다. 이때 쓴 내용과 이후의 영신 수련 기간에 첨부된 내용에는 1980년대의 어렵고 긴박했던 전반적인 상황들에 대한 생각이 담겨있습니다. 1989년 가을부터 그러한 상황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20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에는 그 이전에 있었던 긴박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문제나 어려움이 없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전 시기에 세계를 무겁게 짓누르던 극단적인 핵전쟁 없이 이른바 ‘냉전’ 시대가 종결되었으니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 특별한 찬양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4. “교회의 중심에서”(in medio Ecclesia) 제삼천년기의 문턱에 들어서면서 저는 성령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베풀어주신 놀라운 은총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전체 교회, 무엇보다도 전 주교단과 더불어 저는 이 공의회에 큰 신세를 졌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앞으로 오랜 동안 새 세대들이 20세기에 있었던 이 공의회의 풍부한 유산의 덕을 볼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주교로서 이 공의회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했던 저는 이 위대한 유산을 실현시키도록 부름 받았고 또 장차 부름 받게 될 모든 사람에게 이 유산을 맡기고 싶습니다. 한편 제가 교황으로 재임하는 동안 이 위대한 사명을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영원하신 목자께 감사를 드립니다.
“교회의 중심에서” 주교직을 수행하던 첫 해부터 바로 이 공의회 덕분에 저는 주교단의 형제적 친교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크라쿠프 대교구의 사제로서 사제간의 형제적 친교를 이미 경험한 제게 공의회는 새로운 체험의 차원을 열어준 것입니다.
5.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해야 할까요? 주 하느님께서 그들 대부분을 이미 당신 곁으로 데려가셨을 것입니다.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 있던지 이 유언장을 통해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중심에서” 베드로 직무를 수행해 온 지난 20여 년 동안 저는 교황청과 로마 대목구, 그리고 그 외의 곳에서 많은 추기경과 대주교, 주교, 사제, 봉헌생활자 그리고 너무도 많은 평신도들의 은혜와 풍부한 협력을 체험했습니다.
“사도좌 정기방문” 때 만난 세계 여러 나라의 주교들과의 좋은 기억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가톨릭 교회에 속하지 않은 그리스도교 형제들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로마의 랍비와 많은 다른 종교의 대표자들도 잊지 못합니다. 그리고 문화계, 학계, 정치계, 그리고 사회 커뮤니케이션 분야의 많은 대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6. 제 생애의 끝이 가까워 오니 유년기의 기억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부모님과 형, 그리고 제가 태어나기 전에 죽은 누나, 사랑하는 도시 바도비체에 있는 제가 세례 받은 성당, 제 친구들, 특히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 노동자로 일하던 시절의 친구들이 생각납니다. 또한 니에고비츠 성당, 크라쿠프의 성 플로리안 성당, 신학교, 크라쿠프와 로마, 그리고 주님께서 제게 특별히 맡기신 모든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납니다.
이 모든 사람들에게 저는 단지 이 말만을 하고 싶습니다. “하느님, 이들에게 복을 내리소서.”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2000년 3월 17일
출처: 요한 바오로 2세의 유언장, 바티칸 통신 2005년 4월 7일자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특집화보(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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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1. 1989년 10월8일 여의도 광장. 두번째로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00만명의 신자들이 운집한 가운데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를 주재했다. 2. 평화의 순례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84년 5월3일 김포 국제공항에 도착,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굳건히 신앙을 키워온 순교자의 땅에 입맞춤, 사랑과 존경을 표하고 있다. 3. 84년 4박5일간 방한기간 중 5월4일 소록도 나환우촌을 찾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소외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위로했다. 4. 103위 시성미사 예물봉헌 중 봉헌된 어린아기.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어린 아기는 103위 성인 탄생을 축하하며 새로운 신앙을 다짐하는 의미로 봉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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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의 청년 시절

밀레니엄의 문을 통과하는 교황요한 바오로 2세

아이에게 축복을

사랑

교황의 기도


교황 요한 바오로의 어린시절

교황과 마더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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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사랑없이 살 수가 없다. 사람에게 사랑이 계시되지 않을 때, 사람이 사랑을 만나지 못할 때, 사랑을 체험하고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할 때, 사랑에 깊이 참여하지 못할 때, 사람은 자기에게도 이해되지 않는 존재로 머물게 되고 그 삶도 무의미해진다 . (1979)
용서는 세상에 죄보다 강한 사랑이 현존한다는 증거다. 용서가 없는 세상은 사람들이 정의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과 맞서서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냉혹한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 (1980 )
가정은 미덕과 가치를 보호하고 전수함으로써, 인생을 진정 인간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세계 건설에 창조적인 기여를 한다. (19 81)
어린이의 기도는 어른들에게 모범이 된다. 어린이처럼 기도한다는 것은 천진하고 완벽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 (1994)
위대한 사랑의 실습장인 가정은 첫번째 학교다. 가정이야말로 사람들이 사랑을 쓸모없는 이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생한 경험을 배우는 영구적인 학교다. (1994)
진정한 사랑은 막연한 감상이나 맹목적인 열정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부를 포괄하는 내면의 태도다. 사랑은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더불어 고통을 받는 능력이다 . (1994)
인간의 노동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작은 몫’을 짊어지는 일이다. 그러하기에 노동 자체를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1995 )
휴일이 가진 가치중 하나는 바로 이기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을 만나서 우정의 즐거움을 맛보고 함께 조용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1997)
교회는 가정들이 모인 커다란 가정이다. (1998)
화해는 나약함이나 비겁함이 아니다. 이와 반대로 화해는 용기와 때로는 영웅적인 행위도 요구한다. 화해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승리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승리다. (1998)
기도야말로 우리 존재의 가장 심오한 차원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해주는 독특한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이다. (1999)
권력은 특권이 아니라 책임이고 봉사다. 모든 사람들의 선익을 위해서 권력이 사용될 때, 가난한 이들과 무방비 상태에 있는 이들의 요구에 부응할 때 권력의 행사는 윤리적으로 정당하다. (19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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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퀴엠 - 모짜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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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요한 바오로 2세(84)가 지난 3월 27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릴 부활절 미사를 집전하지 못하고 자신의 연구실 창문에서 광장에 모인 순례자와 관광객 수천명에게 침묵의 축복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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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6일 워싱턴의 백악관에서 지미 카터 대통령과 부인 로잘린 여사 그리고 딸 에이미가 요한 바오로 2세를 환영하고 있다. (AP Photo/File) - 2005/04/02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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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6일 워싱턴의 백악관에서 지미 카터 대통령과 요한 바오로 2세가 이야기 나누며 걷고 있다. (AP Photo/White House, file) - 2005/04/02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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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병세가 악화되고 있는 가운데 시드니 성모마리아 대성당에서 한 신도가 교황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AP Photo/Mark Baker) - 2005/04/02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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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교황의 병세가 악화되고 있는 가운데 시드니 성모마리아 대성당에서 한 여인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위해 촛불을 밝히고 있다. (AP Photo/Mark Baker) - 2005/04/02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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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의 병세가 악화되고 있는 가운데 시드니 성모마리아 대성당에서 신도들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AP Photo/Mark Baker)- 2005/04/02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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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의 병세가 악화되고 있는 가운데 과테말라시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동상 주위에 신도들이 모여들고 있다. (AP Photo/Rodrigo Abd) - 2005/04/02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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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의 브라질리아의 한 성당에 모인 가톨릭 신자들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쾌유를 빌며 촛불을 들고 기도하고 있다. (AP Photo/Eraldo Peres) - 2005/04/02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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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의 성베드로 광장에 어린 소녀 2명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쾌유를 비는 기도를 하면서 촛불어 꺼지지 않도록 손으로 바람을 막고 있다. (AP Photo/Gregorio Borgia) - 2005/04/02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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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의 성베드로 광장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쾌유를 빌기위해 수천명의 신도들이 모여들고 있다. (AP PHOTO/Frank Gunn, CP) - 2005/04/02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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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성스테이니스로우 교회에 있는 요한 바오로 2세의 초상화. (AP Photo/Corrado Giambalvo) - 2005/04/02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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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로스엔젤레스 누에스트라 세노라 성당에서 여성들이 교황을 위해 십자성호를 긋고있다.(AP Photo/Nick Ut) - 2005/04/02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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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바오로 2세(Pope John Paul II)가 지난 1988년 4월3일 일요일 바티칸 성피터 광장의 발코니에서 군중들에게 축복을 기원하고 있다. (AP Photo/Vatican, Arturo Mari, File) - 2005/04/02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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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1일 수만명의 군중들이 불을 환하게 밝힌 바티칸의 성피터 광장에 모여 기도하고 있다. (AP Photo / Gregorio Borgia) - 2005/04/02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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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1일 파라과이 아순시온의 어린아이들이 교황의 쾌유를 기원하고 있다. (AFP) - 2005/04/02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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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명의 군중들이 2001년 5월7일 다마스커스의 로마가톨릭광장에서 요한 바오로2세의 도착을 환영하고 있다.(AP) - 2005/04/02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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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바오로 2세가 지난 1월5일 바티칸 성당 Pope Paul VI 홀에서 동남아시아 대지진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침묵기도를 하고 있다. (AP) - 2005/04/02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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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바오로 2세가 지난 1998년 1월21일 쿠바의 조세 마티공항에서 피델 카스트로 쿠바 대통령의 영접을 받고있다. (로이터)- 2005/04/02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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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바오로 2세가 지난 2002년 9월14일 브라티스라바에서 공개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로이터) - 2005/04/02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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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바오로 2세와 조지 부시 대통령이 지난 2004년 6월1일 바티칸에서 악수를 나누고있다. (로이터) - 2005/04/02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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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의 성(聖) 베드로 광장에서 신자들이 담요를 두른채 기도하고 있다. (AP=연합뉴스) - 2005/04/01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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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새벽 바티칸의 성(聖) 베드로 광장에서 한 여인이 로사리오와 예수 그리스도 초상화를 들고 기도하고 있다. (AP=연합뉴스) - 2005/04/01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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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 바티칸의 성(聖) 베드로 바실리카 성당 앞에서 신자들이 서로 끌어안고 울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31일 갑자기 병세가 악화돼 병자성사(病者聖事)를 받았다. (로이터=연합뉴스) - 2005/04/01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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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병세를 걱정하는 신자들이 31일 바티칸 베드로 성당 광장 앞에 모여 있다. 교황은 31일 갑자기 병세가 악화돼 병자성사(病者聖事)를 받았다. 병자성사는 가톨릭 7성사중 하나로 중병에 걸린 신자의 고통을 덜어주고 구원해 주도록 기도하는 성사다.(AFP=연합뉴스) - 2005/04/01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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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병세를 걱정하는 가톨릭 신도들이 31일 바티칸의 성(聖) 베드로 바실리카 성당 앞에 모여 있다. 교황은 31일 갑자기 병세가 악화돼 병자성사(病者聖事)를 받았다. 병자성사는 가톨릭 7성사중 하나로 중병에 걸린 신자의 고통을 덜어주고 구원해 주도록 기도하는 성사다. (로이터=연합뉴스) - 2005/04/01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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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교황이 30일 바티칸의 개인아파트 창문곁에 나타나 바깥 성베드로성당 광장의 순례자들을 향해 강복하고있다. (AFP=연합뉴스) - 2005/04/01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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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성베드로광장에서 신도들이 요한 바오로교황이 교황청 아파트 창문곁으로 나타나 강복해주기를 학수고대하고있다.(로이터=연합뉴스) - 2005/04/01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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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성베드로광장에서 베풀어진 부활절미사에서 요한 바오로교황이 순례자들을 향해 강복하고있다. (AFP=연합뉴스) - 2005/04/01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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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성베드로광장을 내려다보는 교황청 스튜디오 창문을 통해 요한 바오로교황이 부활절 미사 강복을 내리고있다.(AP=연합뉴스) - 2005/04/01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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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바티칸의 성베드로광장에서 열린 부활절미사에서 요한 바오로교황이 순례자들에게 강복을 하고있다.(AFP=연합뉴스) - 2005/04/01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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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약한 요한 바오로교황이 바티칸의 교황 아파트 창문을 통해 그의 완쾌를 비는 1천여 순례객들을 향해 강복을 하면서 감격해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 2005/04/01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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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바티칸의 베드로광장이 내려다 보이는 자신의 아파트 창문에서 신도들에게 축복을 내리고 있다.(로이터=연합뉴스) - 2005/04/01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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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특집화보(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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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가장 위대했던 이유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남긴 업적은 역대 교황들 중 가장 위대했다고 믿는 것으로 나타났다. 어제, 4월 3일, CNN/USA Today의 여론조사에 약 69%의 여론참가자들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황이라고 답한게 이를 증명해 준다.
 (역대 최고의 민중 인기와 가장 큰 업적을 남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어떻게 요한 바오로 2세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황으로 기억될 수 있었을까? 여기에 대한 답은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의 4가지 사항이 교황의 업적으로 볼 수 있다.
(1) 공산주의를 몰락시키는 데 제일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 (2) 129개국을 순방하며 지구 30번 정도를 돌 수 있는 거리를 다니며 그리스도 복음을 몸소 실천한 것. (3) 암살 총탄을 맞고도 기적적으로 살아났고, 그를 죽이려 한 암살범도 용서하여 참 신앙인의 진면모를 보여준 것. (4) 지난 2천년을 통하여 교황청이 잘못했던 일들에 대해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한 것.
위의 4가지 이유 외 다른 이유도 많다. 하지만 가장 핵심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위에 열거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 중 제일 뚜렷하다고 볼 수 있는 그의 업적은 공산주의를 몰락시키는데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교황이 공산주의 몰락에 가장 큰 영향력 행사? 일부는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레건 전 대통령의 광기 어렸던 (당시엔 다 그렇게 생각했다) 군사력 증강정책으로 소련의 경제력을 파산까지 몰고 가게한 전 미국대통령 레건의 업적은 없냐고 따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맞다. 레건의 업적도 엄청 크다. 하지만 공산주의 멸망의 뒷면엔 "외"적인 것과 "내"적인 요소가 함께 어울러져 작용하여 공산주의의 멸망을 가져올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본다.
 (공산주의 붕괴에 일조한 미국 대통령 레건, 구소련 지도자 고르바초프)
외적인 공산주의 멸망 요인은 분명 경제력 파산으로 인한 군사력 붕괴였고, 또 그 여파로 인하여 공산주의 체제의 해체가 가능했었다. 그러나 이런 외적인 요소보다 더 중요한 했던 것은 그리스도 가르침에 대한 복음 전파로 인하여 공산주의 체제에 와해 요소로 작용했던 면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면을 간과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교황의 모국 폴란드에서 노조 자유화 운동을 실세 기반을 닦아 놓은 데서 공산주의의 뿌리가 흔들어지기 시작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공산주의가 멸망할 때의 소련 지도자는 마카일 고르바초프였다. 교황이 폴란드를 통해 몰고 온 자유의 물결을 막아내지 못하고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로스트로이카(개혁)를 통한 정책 전환으로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자본주의 도입으로 국가 재건을 노렸지만 무의로 그치고 말았다. 이에 고르바초프는 나중에 공산주의의 몰락과 소련연방이 붕괴에 대해서 이렇게 말을 한다: "교황 바오로 2세가 폴란드에 들어가 자유화와 신앙의 물결을 일으킬 수 있도록 방치한 것이 공산주의 몰락의 시초가 됐다."
실로 당시 공산 동구권의 자유화 물결은 폴란드의 연대자유노조(solidarity)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폴란드 공산정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솔리데리티 지도자는 "바웬사"였는데 그는 폴란드 연대자유노조의 외적인 지도자였을 뿐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실제 그런 운동이 급진적으로 일어날 수 있었던 장본인은 폴란드 국민에 자긍심을 심어주고 공산정권의 억압에서 깨어날 수 있도록 깨우침을 일깨워준 교황의 순방이 이뤄지면서 공산정권 체제에 대한 반기 운동에 열기가 동부권 전역에 번지기 시작했다.
 (교황은 80년대 자유노조 "바웬사"를 움직여 공산주의의 몰락을 재촉했다 左. 2002년 폴란드 방문 右)
"교황" 자리는 세계 최고의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미국 대통령 권한과 위세보다 더 높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숫자에 있어서 교황을 세계적으로 따르는 카톨릭 신자 수는 현재 약 11억 정도가 되는 데 그 어떤 종교도 이 숫자에 가깝게 접근하지 못한다.
세계를 주름잡는다는 미국 대통령의 영향력도 교황의 영향력에 견주면 별 것 아닌 생각도 들게한다. 미국 인구 약 2억8천만, 이에 민주와 공화 양당으로 갈려져 있어 대통령은 정당노선정책 때문에 2억8천만명의 절반인 1억4천만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것도 당내의 의견일치가 있을 때나 이런 가정이 가능하다. 그렇지 않은 때가 대부분이니 그 영향력은 교항에 비해 더더욱 축소되어 보인다.
이런 이유 외 여러 이유로 교황은 살아있는 神과 같은 존재로 보일 때가 많다. 때문에 본인이 원한다면 편안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그러나 교황 바오로 2세는 그런 편안한 삶을 택하지 않았다. 그의 모국 폴란드에서 태어나 살며 공산정권의 억압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신앙에 있어서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뼛속 깊이 깨닫고 있어서다. 때문에 정치체제로 인한 억압과 탄압을 받는 많은 국가 국민들의 애로를 누구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교황은 역사상 최고의 능동적 자유쟁취의 파수꾼으로 변하여 세계 수많은 국가를 순방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며 참 신앙인의 자세가 무엇인가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 같다.
 (고뇌하는 교황. 맡은 바 사명을 다하고 저 세상으로 뜨는 교황 )
교황의 행보에 대해서 눈여겨볼 일은 그렇게 많은 국가를 순방하면서도 교황은 그 나라의 국민과 신자들을 더더욱 감동시키기 위하여 엄청난 노력과 시간을 할애한 일이다. 방문국의 언어, 문화, 역사를 배우고 그 나라의 언어로 인사까지 하는 배려와 열정으로 만인의 감동을 살 수 있도록 한 교황은 그래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교황으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도 1984년과 1989년 방문하면서 한국말로 인사를 했고, 비행기서 내리자마자 땅에 입맞춤을 하여 한국에 대한 사랑을 표시했으며, 더 나아가 또 한국의 순교사적 역사에 중요함을 인식하면서 순교인들에 대한 성인 반열식에 기적의 뒤받침 없이 행할 수 있도록 한 배려는 영원히 한국인들의 가슴에 남는 일이었다.
이외 1998년도 공산주의 국가 쿠바를 방문하여 카스트로를 감화시켜 세계의 주목을 받았고, 아프리카는 물론 대부분의 과거 동부 공산주의의 국가도 방문했다. 방문하지 못한 국가는 러시아, 중국, 북한이 있다. 하지만 러시아 대통령 푸틴은 교황을 알현한 일이 있다. 이들 국가가 교황 방문을 거절한 것은 교황의 카리스마적 영향력으로 체제 전복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를 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국가 쿠바 대통령 카스트로까지 감화시킨 교황)
이런 행동은 당신이 권위적 교황으로써 허수아비같이 추앙 받는 영적 지도자가 아니라, 몸소 어려운 일도 마다하지 않고 실천해 보여야 한다는 믿음에 대한 신념이 남달랐기 때문인데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 과거 교황으로부터 찾아볼 수 없는 면면인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인성과 신앙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가를 가늠해볼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대목이라 말할 수 있다.
아무리 신앙이 깊다해도 자신의 생명을 앗으려했던 사람을 쉽게 용서할 수 있는 일은 쉽지 않다. 독실한 신앙인도 유명한 정치인도 그렇게 못한다. 대부분 미국 대통령은 국정 연설이나 특별한 모임에서의 연설을 끝내고 나면 국민이나 국가에 대해서 "하나님의 은총을 기원합니다" (God bless you. 혹은 God bless America.) 라는 말로 자리를 뜬다. 특히 로널드 레건 전 미국 대통령이 이런 말을 매우 잘했다. 그러나 그도 자신을 암살하여 했던 "힝클리"를 교황이 교황 자신을 암살하려했던 암살범을 용서했던 것 같은 그런 용서를 하지 못했다.
 (자신의 암살하려 했던 살인미수범을 찾아가 용서하는 교황)
교황이 저격을 당하던 그 날, 전 카톨릭 신자들이 경악하고 세계가 놀낸다. 실로 신의 가호가 없었다면 교황은 그 때 세상을 달리했을 것이다. 그가 기적적으로 살았던 것은 더 큰 일을 시키고자 하는 하늘의 뜻이 있었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아마 그래서인지 그는 24년을 더 살며 살아생전 다른 교황이 이루지 못한 역사적 업적을 일궈 그의 선종에 대한 슬픔의 도는 더 깊고 값지게 나타난다.
하지만 아무리 큰 일을 했고 또 한다해도 과거에 대한 잘못을 뉘우칠 줄 모르면 그 일군 선행은 빛을 바라지 못한다. 위선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역사적 사실이 있었기에 구교도에서 신교도가 나왔던 게 아닌가. 중세의 구교도는 하늘을 팔아 재물을 탐했고 지위도 팔았다. 더 나아가 이단심리종교재판(Inquisition)은 산 사람을 물이 끓는 가마에 넣었고, 몸을 틀로 죄어 짜 생사람을 죽이곤 했다.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스쿠도 혹세무민한다는 이유로 생사람을 죽였던 게 바로 교황청이다.
 (이단종교재판으로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역사에 대한 용서를 구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이런 식으로 바티칸 교황청이 지은 죄는 많았다. 그런데도 교황청은 그런 과거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2천년을 그리스도의 이름을 팔아 장사(?)를 했던 것이 교황청의 역사였다는 것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런 과거사에 깊은 생각에 잠겨 깊은 시름을 하다 결코 과거사의 청산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복음 세계 전파에 대한 미래는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하여 바티칸 교황청은 과거를 통해 저질렀던 잘못을 시인하고 사죄를 물었고 만인은 그의 용기에 찬사를 보내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역사상 가장 훌륭한 영적 지도자로 받아들이게 된다.
교황청 과오에 대한 시인 때늦은 감 없지 않다. 하지만 "Better late than never."라는 말이 있듯이 늦게라도 시인한 것은 영원히 시인하지 않은 것 보단 백 배 낫다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요한 바오로 2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역사 속의 숙제로 남았을 것이고, 용서 비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또 과거에 잘못에 대한 청산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과 같은 위대한 모습의 교황으로 볼 수 없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하며 그의 위대한 업적을 찬양하며 그의 후생(後生)에 대한 축복을 빈다.
마지막까지 고귀한 영혼·초인적 의지 보여
대학에서 문학과 철학 공부 나치·공산 치하서 영적 성장
지하 신학교 들어가 사제 수업 공의회 참석 ‘사목헌장’ 다듬기도
인류 역사상 가장 격동의 순간들이었던 지난 반세기 동안 전세계 가톨릭 신자들의 영적 아버지로서 교황직을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분쟁과 갈등으로 가득했던 세상에 그리스도의 참 평화를 선포해온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두 번째 천년기를 마치고 제3의 천년기에 접어든지 이미 5년, 세기와 천년기를 넘나들며 인류의 평화와 생명의 복음을 선포해온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발걸음은 여기서 멈췄지만, 그가 남긴 평화와 사랑의 메시지는 그를 기억하는 인류의 가슴 속에 남아있다.
그리스도의 고통에 동참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나약해진 육체는 오히려 그 안에 감춰진 고귀하고 강건한 영혼을 웅변했고, 고통을 통해서 더욱 깊숙이 그리스도의 고통과 희생의 참된 의미를 세상에 전했다. 마지막 숨을 고를 때까지 지난 몇 달 간, 사람들은 굽어진 어깨와 가늘고 떨리는 목소리, 흰색 제의 밑으로 흔들리는 교황의 손목에서 나약한 인간보다는 고귀한 영혼, 초인적인 의지를 볼 수 있었다. 스키와 하이킹을 즐기는 만능 스포츠맨이었던 교황의 강건한 육체는 교황 재위 동안 숱한 고난을 겪어야 했고 때로는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무릎 관절염에, 허벅지뼈가 부러졌고, 어깨뼈가 빠졌으며, 맹장수술에, 저격으로 인한 후유증이 그를 괴롭혔다. 1996년 요아킨 나바로발스 교황청 대변인은 교황이 파킨슨병의 징후를 나타내고 있다고 알려주었고 사람들은 교황의 왼쪽 팔이 점점 더 심하게 떨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1999년 처음으로 교황은 성 베드로 대성당 제단에 휠체어를 타고 입장했고 이후부터는 휠체어에 의지한 모습이 자주 눈에 띄기 시작했다. 2003년 10월 19일 마더 데레사의 시복식에서 교황은 단 한 마디도 강론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난 2월 1일 독감으로 고열 증세를 보인 교황은 응급차를 타고 제멜리 병원으로 입원했고, 3월 30일 튜브를 통해 영양 공급을 받기 시작한 교황은 마침내 4월 3일 새벽(한국 시간),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부르심
많은 전기작가들은 나치 치하에서의 경험, 공산주의 통치 아래 성장해온 그의 젊은 시절을 정치적인 시각에서 바라본다. 하지만 정작 교황 자신은 당시를 영적 성장의 중요한 시기로 항상 기억하고 있다. 그는 1997년 이탈리아에서 30여만명의 젊은이들이 모인 가운데 자신의 사제 성소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게 가장 중요하고 아름다운 것은 내가 50년 이상 사제로서 살아왔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매일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후일 교황이 된 카롤 보이티와는 1920년 5월 18일, 바도비체에서 태어났다. 그처럼 다양한 인생을 경험한 이들도 드물었다. 크라쿠프의 야겔로니카 대학에서 폴란드 문학과 철학을 공부한 그는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하자 솔베이 화학공장의 근로자로 일했다. 채석장에서 돌을 깨고 운반하며 발파작업을 했고, 수질 정화부로 힘겨운 노동을 하기도 했다. 1941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비로소 성소를 만난다. 아버지의 시신 앞에서 12시간을 꿇어 있던 그는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고 크라코프 대교구장인 아담 스테판 사피에하 추기경이 운영하는 지하 신학교에서 비밀리에 사제 수업을 쌓으며, 유다인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탈출을 돕는 등 저항 운동에 가담해 게쉬타포의 요시찰 명단에도 올라 있었다. 그는 동시에 당시 지하 소극장의 발기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카롤 보이티와는 1946년 11월 1일 사제품을 받고 로마로 유학해 안젤리쿰 대학교에서 윤리신학을 공부했다. 그곳에서 가톨릭노동청년회(JOC)를 지도하는 마르셀 신부를 만나 노동운동을 익히기도 했다. 그 때 폴란드는 전쟁의 폐허 위에서 다시 소련군에 점령되고 공산정권이 세워졌다. 귀국 후 그는 야겔로니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루블린 대학교에서 36세의 젊은 나이에 정교수로 강단에 서기도 했다. 1958년 7월 4일, 크라코프 대교구 보좌 주교로 임명돼 38세에 폴란드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로 주교가 된 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참석, 사목헌장을 다듬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어 교황 바오로 6세는 1964년 1월 그를 크라코프 대교구장으로 임명했고, 불과 3년 뒤인 1967년 6월 26일 추기경에 서임했다.
평화의 메시지
제264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미 교황으로 선출되던 당시부터 『평화의 사도』로서의 소명을 부여받은 듯하다. 1978년 10월 16일 오후 6시 18분, 뭉게뭉게 흰 연기가 시스틴 성당의 굴뚝에서 피어올랐다. 전통적으로 새 교황이 탄생했음을 알리는 이 신호를 본 전세계의 모든 가톨릭 신자들은 뜨거운 환호를 올렸다. 하지만 이어, 사람들은 놀라움과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새 교황으로 선출된 카롤 보이티와, 그는 이탈리아 출신이 아닌, 공산국가 폴란드 출신으로 당시 크라코프 대교구를 이끌던 추기경이었다. 1523년 네덜란드 출신의 하드리아노 6세 교황 이후 무려 455년만에 탄생한 비이탈리아계 교황, 그것도 냉전의 시대에 공산국가 출신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됐다는 것은 교회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세계사 안에서도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잠시 후, 성 베드로 대성당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내고 『예수 그리스도는 찬미받으소서』하고 외친 새 교황의 모습을 본 신자들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것은 둘로 나눠진 인류를 하나로 일치시키려는 하느님의 섭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도덕적 승리
교황은 1993년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나는 (공산주의 몰락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그리스도교 자체, 그 신앙 내용과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메시지였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를 수호하는 교회 본래의 활동입니다. 내가 한 일은 단지 이 사실을 상기시키고, 고집스럽게 되풀이한 것 뿐입니다』
교황청의 외교방식은 조용한 물밑 협상이었다. 요한 바오로 2세도 그런 방식을 지지했지만 이내 공산주의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1984년 그는 리투아니아 순방을 가로막은 소련 정부를 공개적으로 비난했고, 공산주의 정권을 『우리 시대의 수치』라고 지적한 문헌을 승인했다. 동유럽에서 자유를 위한 투쟁에 시금석이 된 것은 교황의 고국 폴란드였다. 수 차례의 고국 순방을 통해 교황은 연대 노조를 지지하고 그다니스크 광장에 모인 수백만을 향해 『미래를 위해 힘을 모으자』고 촉구했다. 2년 뒤 연대노조는 최초의 자유총선을 통해 정권을 장악했고, 유럽의 공산주의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교황이 공산주의와 대면해 의지한 것은 서방 사회가 아니었다. 교황은 1989년 12월 소련 공산당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와의 세기적 만남을 실현시켰고, 이 만남은 반목과 냉전의 시대를 청산하는 디딤돌을 놓았다. 교황은 90년 4월 또 다른 공산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를 방문했고, 당시 하벨 체코 대통령은 교황의 방문을 『기적』이라고 부르며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환영했다. 교황의 공산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한 전략은 이들이 국제적인 인권 협정에 서명하고, 이에 따라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었다. 1998년 역사적인 쿠바 방문에서도 교황의 이러한 전략이 엿보인다. 교황은 국제사회에 쿠바에 대한 금수조치 등 외교적 고립 정책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피델 카스트로 쿠바 대통령에게는 새로운 정치, 종교 개혁을 요구했다. 교황은 결코 이념적 승리를 주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도덕적 승리였다. 그래서 그는 『공산주의의 무덤 위에서 춤을 추기보다는』 통제되지 않는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해서 경고했다.
104회 해외순방 129개 나라 찾아 평화 호소
동서교회 일치·종교간 대화 노력 최빈국 부채 탕감 선진국에 요청
역사상 교회 잘못 용서 청하기도 신앙·윤리·교의 수호에는 양보없어
고령과 건강상의 문제가 다소 장애가 되긴 했지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지구촌 순방을 멈추지 않았다. 1979년 1월 멕시코와 바하마 방문에서 시작된 그의 순방은 지난해 8월 14일과 15일 프랑스 루르드 방문까지 104회의 해외순방으로 129개 국을 다닌 그는 교황의 직무 수행 형태를 아예 바꿔놓았다.
행동하는 교황
그중 21회(1984년 5월 2~12일)와 44회(1989년 10월 6~10일) 해외순방 여정에는 우리나라도 들어있었다. 이탈리아내의 사목방문은 146회, 로마 교구장으로서 333개 로마 교구내 본당을 방문했다. 연평균 4회의 해외순방을 한 교황의 보좌관들은 그를 말렸지만, 교황은 번번이 더 많은 스케줄을 적어놓았다. 개인적으로 가장 감격적인 순방은 아마도 2000년 대희년의 성지순례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에서 시작해 시나이산을 거쳐 요르단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에 이른 여정을 통해 교황은 성서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묵상하고, 세상의 평화를 기원했다. 이듬해에는 이 여정을 더 늘여, 그리스와 시리아를 찾아갔다. 건강이 악화돼 말하는 것조차 힘들었던 지난해에도 교황은 아제르바이잔과 불가리아를 방문했고, 걷지도 못해서 휠체어를 타고 비행기를 오르내리면서도 스위스와 루르드를 방문했다. 처음부터 교황은 바티칸을 떠나 신자들과 어우러지는 것을 좋아했다. 1983년 교황은 왜 그렇게 순방을 다니느냐는 질문에 『나도 내가 너무 많이 다니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때로는 지나친 것도 필요하지요』라고 말했다. 교황의 순례는 세계 정치와 경제의 심장부 뿐만 아니라 사막과 정글의 오지, 포연 가득한 전쟁터의 한가운데까지를 막론한다. 평화의 사도로서 그의 발걸음이 머무는 곳에서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숨겨진 평화의 열망이 기지개를 켠다. 1998년 방문으로 쿠바는 세계에 문을 열었고, 이에 앞서 교황은 1997년에는 레바논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지역을 잇달아 방문했으며, 대희년 성지 방문은 화약고 중동의 평화 정착을 위한 또 하나의 전기를 마련했다. 하지만 평화의 사도로 지구촌 구석구석을 누빈 교황이지만 아직도 미답의 땅은 남아있다. 특히 이 나라들은 교황이 오랫 동안 방문하기를 염원해온 곳들이라서 미완성의 순례가 안타깝다. 그 하나가 바로 중국이다. 중국 순방은 교황의 가장 열렬한 희망이었다. 엄청난 인구와 복음화의 잠재력을 지니고 얼마 남지 않은 공산국가인 중국 순방은 특히 제삼천년기, 아시아 교회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더 절실한 과제였다. 그에 못지 않은 순방 희망지가 러시아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고르바초프, 옐친 등 전 대통령들이 교황의 방문을 여러 차례 요청함으로써 정치적 여건은 마련됐지만, 러시아 정교회측의 반대로 지금까지 성사되지 못했다. 특히 지난 2001년, 러시아에 4개의 교구가 신설된 이래 악화된 정교회와의 관계는 러시아 방문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교회 일치 노력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교회 일치 노력은 『로마의 주교는 모든 교회의 일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는 무엇보다도 일치의 첫 번째 봉사자이다』라고 했던 자신의 말대로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26년이 넘는 재위 기간 동안 교황은 동서방 교회의 일치를 위해 노력했다. 2000년 대희년은 교회 일치에 대한 교황의 의지가 다시 한 번 확인되는 계기였다. 교황이 1995년 발표한 회칙 「하나 되게 하소서」(Ut Unum Sint)은 이후 교회 일치 대화의 주요한 주제가 됐다. 이에 앞서 1999년 교황청은 루터교와 의화에 관한 공동선언에 서명함으로써 교회 일치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역사상 어느 교황보다도 요한 바오로 2세는 비그리스도교 종교들과의 중요한 교류를 기록했다. 유다교와의 관계에서 교황은 회당을 방문하고, 죽음의 수용소에서 기도를 바쳤으며 유다교 박해를 저지하지 못한 교회의 잘못에 대해 사과하는, 홀로코스트에 관한 문헌을 승인했다. 교황은 1986년에는 아시시에서 세계 평화를 위한 종교인들의 기도 모임을 마련해, 모든 종교의 지도자들을 초청, 인류 평화를 위해 함께 기도를 바쳤다. 9.11 테러 이후, 2002년에 또 다른 아시시 기도 모임을 열어 모든 종교인들과 함께 평화를 위해 기도했다. 그 외에도 재위 기간 동안 교황은 수많은 종교 지도자들과 만나 깊은 상호 이해와 존경, 대화를 통해 서로의 믿음과 가치를 교류했다.
도덕적 지도력
교황은 가톨릭교회의 영적 아버지이자, 인류의 스승으로서 도덕적 권위에 바탕을 둔 리더십을 발휘함으로써 전세계에서 유례없는 지도자였으며 그의 이러한 도덕적 지도력은 인권 수호, 윤리적인 악에 대한 비판, 세계 평화의 호소 등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교황의 지도력은 교회의 종교적 가르침을 보편적 윤리 규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에 적절하게 적용함으로써 교회 밖에서도 발휘됐다. 우선 그는 전쟁을 반대했다. 비록 가시적인 성과는 거두지 못했지만 2003년 이라크 전쟁에 대한 비판은 그 전쟁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내렸다. 교황은 이어 9.11 테러 이후 빈발해진 테러와 폭력에 대한 영적 캠페인을 이끌었다. 생명윤리는 가장 논란이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다. 예컨대, 그는 1994년 낙태와 인구조절 등을 포함한 유엔의 인구 정책을 비판했고 국제개발회의를 생명과 가족 문제에 대한 논의의 장으로 유도했다. 같은 맥락에서 사형폐지와 관련해 교황은 자주 미국내의 사형 집행에 대해 비판했다. 최빈국의 부채 탕감은 경제적인 면에서 교회의 가르침이 적용된 사례이다. 교황은 2000년 대희년을 지내면서 제삼세계의 부채를 탕감해줄 것을 선진국들에게 줄기차게 요구했다. 교황은 순방지를 다닐 때마다, TV 카메라를 의식한 행동을 즐긴다. 이는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직접 만날 때 더욱 그러하다. 교황은 이에 대해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내가 쓰러져가는 움막들을 찾아가는 것은 내가 가면 카메라가 따라올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카메라들은 나와 함께 지구촌의 인간들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함께 비출 것을 나는 압니다』
엄격한 신앙, 윤리적 가르침
교황은 14편의 회칙을 포함한 많은 문헌들을 통해 시대에 요청되는, 나아가 시대를 초월하는 진리들을 가르쳤다. 경제와 사회정의를 다룬 회칙들을 반포했고, 국제 사회의 빈부격차를 비판했으며, 만연한 윤리적 상대주의를 고발하고 그것이 세상과 사회에 큰 도전이 될 것임을 지적했다. 이러한 지침들을 바탕으로, 교황청 각 부서는 외채 문제, 인공 수정, 무기 산업, 대중매체와 인터넷 등등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발표했다. 그리고 이러한 가르침들의 바탕에는 하나의 핵심적인 주제가 있다. 그것은 인간이 하느님 모상에 의해 창조됐음을 망각하면 인간 자유는 파괴적이 된다는 것이다. 교황은 또 교회의 과오에 대해서도 용감하게 인정하고 용서를 청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종교 전쟁, 선교 역사에 이르기까지 교회 구성원들의 과오에 대해 머리를 숙였다. 뿐만 아니라 종교 재판, 십자군 전쟁, 홀로코스트의 와중에서 그리스도교의 잘못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연구를 하도록 했다. 하지만 교황은 신앙과 윤리 문제에 있어서는 확고한, 때로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래서 교의적인 측면에서 양보 없는 태도를 보였다. 교의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신학자들에 대해서는 결연히 단죄했다. 1979년 한스 큉을 시작으로 신앙교리성은 많은 신학자들에게서 교수 자격을 박탈했고 공의회의 개혁을 받아들이지 않는 전통주의자 르페브르 대주교를 파문했다. 피임, 낙태, 동성애 등에 대해서는 변함없는 반대 입장을 견지하면서 1993년 회칙 「진리의 광채」를 통해서 이런 문제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또 1992년 신자들에게 분명하고 확실한 교의를 설명하기 위해서 「가톨릭교회 교리서」를 반포했다. 교황은 또 공의회에서 강조한 평신도의 소명에 대해 지지하면서도 평신도와 서품된 사제직 사이의 소명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인류의 스승
요아킨 나바로발스 교황청 대변인은 한 기자회견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현대인들의 영적 복지에 대해 염려하는 유일한 세계 지도자』라며 『교황은 사람들에게 「원하는 것」, 「사고 싶은 것」을 묻는 대신에 「당신은 누구입니까?」하고 묻는다』고 말했다. 교황의 전기 작가인 조지 비겔은 『교황은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복음의 증거자이며 그리스도교 신앙이 지닌 해방의 힘이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된 인물』이고 바로 그 때문에 『교황은 오늘날 교회 뿐만 아니라 세상과 인류에 엄청난 영향을 미쳐왔다』고 말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 안에서는 신앙의 교사요 최고 목자였을 뿐만 아니라, 세상과 인류에게는 영적인 스승으로서, 복음의 가르침을 선포해왔던, 이 시대의 참된 영웅이었다.
사진설명 ▶교황 유해 운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나약해진 육체는 오히려 그 안에 감춰진 고귀하고 강건한 영혼을 웅변했고, 고통을 통해서 더욱 깊숙이 그리스도의 고통과 희생의 참된 의미를 세상에 전했다.
▶교황과 고르바초프와의 만남 교황은 1989년 12월 소련 공산당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와의 세기적 만남을 실현시켰고, 이 만남은 반목과 냉전의 시대를 청산하는 디딤돌을 놓았다. 가톨릭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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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미사 강론과 교황 영성록 :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 강론 요지]
"영원히 썩지 않을 열매 맺기 위해 그 자신을 온전히 바치셨습니다"
"나를 따라라"(요한 21,19).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비롯해 사도들에게 마지막으로 이같이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고인이 되신 사랑하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하지만 또한 감사와 희망으로도 가득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국가 원수들과 고위 인사들, 여러 나라에서 오신 조문단 대표들, 다른 교회와 타종교에서 오신 분들, 그리고 대주교, 주교들, 사제, 수도자, 각 대륙에서 오신 신자들과,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통해 이 자리에 함께 하는 모든 분들, 특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회 희망이요 미래라고 불렀던 젊은이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나를 따라라." 젊은 학창 시절 카롤 보이티와는 나치 정권 아래 위협과 긴박한 상황 속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들었고 지하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교황은 종종 사제들에게 보내는 서한이나 책에서 우리들에게 1946년 11월1일 당신의 서품과 사제직에 대해 말하면서 다음 세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번째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어라"(요한 15,16). 두번째는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요한 10,11). 세번째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왔다"(요한 15,9)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교황님 마음과 영혼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분은 영원히 썩지 않을 열매를 맺기 위해 어디든지 가려 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도 한 사람의 사제였습니다. 그는 양떼를 위해, 인류 전체를 위해 매일 매순간 하느님께 당신을 바쳤습니다. 특히 그의 마지막 몇달 고통 속에서도 그러했습니다.
"나를 따라라." 1958년 젊은 카롤 보이티와 신부는 새로운 무대에서 하느님께로 향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그는 하느님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교황님의 삶은 세속적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을 온전히 바치셨습니다.
"나를 따라라." 1978년 10월 보이티와 추기경은 또 다시 주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교황님 삶 전체를 지배하는 힘이었습니다. 교황님이 기도하는 것을 본 사람이라면, 그의 강론이나 연설을 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교황님께서 당신이 그리스도에게 뿌리내리고 있음을 감사하면서, 세계 교회 즉 어린 양떼들의 목자로서 미약한 인간 능력을 초월하는 무거운 짐을 질 수 있었습니다.
"나를 따라라." 재위 초기 아직 젊고 힘이 넘쳤던 교황님은 그리스도가 이끄시는 대로 지구 끝이라도 가셨습니다. 그러나 이후 그분은 점점 그리스도 고통에 참여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말씀의 진리를 이해하셨습니다. 교황님은 말씀(예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이 세상에서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더욱 극진히 사랑해 주셨다. 요한 13,1)을 실천하셨습니다.
교황님은 우리를 위해 거룩한 자비의 신비인 파스카 신비를 이야기하셨습니다. 교황님의 마지막 책 「기억과 정체성: 천년간 대화」에서 저격당했던 순간을 회상하면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스스로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써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고통의 새로운 의미를 가르쳐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황님은 고통을 겪었고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서 사랑하며, 그것이 바로 당신의 고통과 침묵의 메시지가 열매를 맺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지난 부활대축일의 교황님 모습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고통받고 계셨던 교황님은 다시 한번 창가에 모습을 드러내셨고,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부활대축일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교황님이 오늘도 교황 숙소 창가에 서서 우리를 보고 우리에게 축복을 내리실 것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황님, 우리를 축복해 주소서. 우리는 당신 영혼을 하느님의 어머니, 우리 어머니께 의탁하오며, 어머니께서 당신을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영광으로 인도하실 것을 기도합니다. 아멘.
〈바티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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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 주재 한국가톨릭 대사 메시지]
20세기에 깊숙한 발자취를 남긴 교황요한 바오로2세. 한 거인이 지상을 떠났다. 자기가 믿음을 걸었던 피안으로 떠났다. 전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만 하루가 넘는 기나긴 단말마를 신에게 마지막 제물로 바치고서.
불과 한 주일 전 3월 27일 부활절 정오, 필자는 성베드로 광장 오른편 회랑 지붕 위, 교황청이 외교단에 마련한 자리에 서 있었다. 어쩌면 현 교황의 음성을 듣는 마지막 자리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품고서. 이날 교황은 병세가 깊은 모습으로 힘들여 손짓으로 축복을 내렸으나 목소리는 낼 수 없어 국무장관 소다노 추기경이 교황의 부활 메시지를 낭독했다.
메시지는 불과 네 문단으로 된 아주 짧은 내용이었으나 요한 바오로 2세가 25년 간 행해 온 그의 어느 설교보다 웅변적이고 비장하여 인류에게 건네는 마지막 유언처럼 울려 왔다. 교황이 ‘인간의 구원자’라고 즐겨 부르던, 그리스도에게 바치는 기도문으로 지어진 한 대목을 읽어 본다.
“우리와 함께 계셔 주십시오. 그래서 우리한테 평화의 언행을 가르쳐 주십시오. 당신이 피흘려 성별한 지상에 제발 평화를 주십시오 여전히 많고 많은 피가 흐르는 저 중동과 아프리카 나라들에 평화를 주십시오! 골육상잔의 전쟁 위험이 끊임없이 휘몰아치는 온 인류에게 평화를 주십시오! 우리와 함께 계셔 주십시오. 밥상에 함께 앉은 사람들에게 쪼개지고 나누어진 빵이여! 오늘도 비참함과 굶주림으로 시달리다 죽어가는 저 많은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전염병에 몰살당하고 엄청난 자연재해에 휩쓸려가는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연대감을 간직할 힘을 우리에게도 주십시오! ”
역사는 카롤 보이티와를 위대한 휴머니스트로 부를 것이다. 그는 ‘인간에 대한 경탄, 그것을 일컬어 그리스도교라고 한다’는 좌우명을 세우고 무려 105회의 여행으로 전세계를 누비면서 인간이 주리고 짓밟히고 스스로 비하해서는 안 된다고 호소하고 다녔다. 번번이 열강에 짓밟히는 조국 폴란드의 운명, 두 차례의 세계대전, 아우슈비츠와 카친과 공산 치하, 지구상에 총성이 멈추는 날이 단 하루도 없는 20세기를 살아오면서 종교지도자로서 몸부림쳐 왔다.
또, 주이탈리아 아랍연맹 대사는 요한 바오로 2세를 위대한 윤리교사라고 불렀다. 올해만 꼽더라도 새해 평화의 날 메시지에서 교황은 강대국에 무참히 짓밟히면서 테러의 유혹에 빠지는 민족들에게 “악에 지지 말고 선으로 악으로 이기자”고 타일렀다. 쓰나미의 재앙으로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는다. 당신 아들을 사람으로 보내어 인류의 고난을 나누어 지게 했다는 것이 그 증거다”는 말씀으로 위로했다. 필자가 참석한 주교황청 외교단과의 신년 하례식에서는 동식물을 포함해서 지상의 모든 생명을 존중하라고, 자기 밥상의 빵을 나누어 먹으라고, 평화는 오로지 정의가 존중되는 데서만 맺는 열매라고, 인간은 모름지기 진리에 바탕을 둔 자유를 찾아야 한다고 설득했다.
후대인들은 동서 진영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현실사회주의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그 체제를 포기하게 만든 그의 공적, 남반구와 북반구의 빈부간격을 좁히자던 애타는 호소, 두 차례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하면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정면 충돌을 막으려던 안타까운 노력을 기억할 것이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교회 인사들이 저지른 십자군전쟁과 이단 재판과 마녀사냥 같은 수치스러운 죄과를 인류 앞에 용서 빌던 교황의 사죄도 무력하기만 했다. 20세기만 해도 유대인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증오는 600만의 희생자를 내고서도 수그러들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은 한국, 인도차이나, 남미에서 끊임없는 내전과 민간인 학살과 군사독재를 자행하거나 용인하지 않았던가? 공산주의 이름으로 저지른 범죄는 또 어떻게 하고? 레바논,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와 이란으로 이어질 아랍 땅의 끊임없는 전쟁은 무슬림들을 그리스도교도들과 영원한 원수로 만들어가는 중이다. 언젠가 이스마엘의 자손들이 핵무기를 손에 넣는 날은 어떻게 할 것인가?
455년 만에 이탈리아인 아닌 동유럽인으로서 교황직에 오르던 1978년, 카롤 보이티와 추기경의 나이는 불과 58세였다. 혈기에선지 그는 가톨릭신자들과 인류를 향하여 “두려워하지 마시오”라는 그리스도의 인사말을 건넸건만 사반세기가 지난 오늘, 교황은 예수의 절망한 제자들이 엠마오 길의 어느 낯선 나그네에게 “우리와 함께 계셔주십시오”라며 매달리던 하소연을 그리스도에게 남기셨다. 〈바티칸에서〉
- 성염 / 주 교황청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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