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내리는 비
1.
중앙선 철로를 따라 경기도가 끝나고 강원도가 시작되는 도경계지대, 양평역과 원주의 중간쯤 되는 지점에
구둔역이 있다. 기차에서 내려 둑으로 된 언덕길을 내려가면 개울도 있고, 들녘도 있고, 초등학교도 있고,
느티나무들도 있는 분지 형의 마을이 전개돼 있다.
전국이 현대화의 물결을 타고 있는 지금도 이 마을만큼은 개발의 손톱자국이 나지 않은 70년 전 그대로다.
그래서 이 마을은 2006년 '대한민국 근대유형문화재'로 등록되었고, 2008년에는 '영화체험마을'로 지정
돼 있다.
마을의 동쪽 산세를 따라 반달 같이 굽어간 높은 언덕에는 중앙선 철도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칙칙
폭폭....칙칙폭폭....뻐~엉~.... 북쪽 굴에서 나온 검은 기차는 남쪽 굴로 사라질 때까지, 내리막길에서는 흰 연
기를, 오르막길에서는 검은 연기를 힘겹게 뿜어냈다. 서쪽 고래산 기슭에는 해맑은 냇물이 흰 속살을 내보이
며 남북으로 흘렀다.
내가 살던 집은 서쪽산 밑자락에 지어진 외딴집으로,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시냇물이었다. 높은 집에서 바라보는 시냇물은 언제나 깨끗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냇가를 따
라 늘어선 미루나무, 버드나무, 찔레꽃 그리고 숲 사이로 간간이 모습을 드러낸 하얀 조약돌 밭, 이렇게 조화
된 풍경은 어린 나에게 한 없는 아늑함과 꿈을 뿜어내 주는 고향의 젖무덤 같은 것이었다.
특히 장마철 굵은 빗줄기가 사정없이 내리 꽃힐 때가 가장 좋았다. 굵은 빗줄기가 세찬 바람에 이리 저리
흘러 다니면서 자아내는 희뿌연 기운과 내리 꽃히는 빗줄기에서 나는 알 수 없는 쾌감을 느끼곤 했다. 화로
불에 묻어둔 감자 한 개에 설렘을 간직한 채, 처마 밑에서 강하게 부서지는 물방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가 스스르 잠이 들 때가 많았다.
동네 어디를 가나 개울은 명경지수, 두 손을 짚고 엎드려 입을 물위에 대고 쭉쭉 빨아 마시는 것이 바로 당
시의 물먹는 방법이었다. 투명한 물을 봇둑으로 가둬놓은 깊은 물, 귀족형의 피라미와 불거지들이 아름다운
비늘을 반짝이면서 떼를 지어 다녔다. 나는 한 없이 고개를 달아매고 쪼그려 앉아 그 아름다움에 매로되곤
했다. 단 한 마리라도 어항에 길러봤으면! 얼마나 동경했는지 모른다.
분지 한가운데에는 어린이 키 정도로 깊은 작은 보가 하나 있었다. y자 형의 분지를 따라 두 개의 계곡에서
흘러 온 물이 이 보에서 합쳐지면서 수량이 두 배로 늘어났다. 더운 여름이면 이 보는 몇 명 안 되는 동네
꼬마들의 유일한 수영장이었고 놀이터였다.
신작로 가장자리에서 미리 옷을 벗어 책보와 함께 겨드랑이에 끼고 보를 향해 냅다 달리면서 책보와 옷을
백사장에 내던지고 물속으로 다이빙을 했다. 물속으로 들어간 나는 눈을 뜨고 거북이 몸짓을 하면서 바닥에
코가 스칠 정도로 밀착한 채, 한동안 하얀 모래 위를 달렸다.
그 동네 한 가운데에 당시 '일신국민학교'가 있었다. 나보다 일곱 살 더 많은 넷째 형은 형제들 중에서 막내
만은 학교에 보내야 한다며 어리광이 질질 흐르는 나를 등에 업고 개울을 건너 그 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리
고 나는 그 학교를 졸업했다.
나는 경기도 양평군의 면사무소 소재지인 지평에 있는 지제중학교로 진학했고, 여름에는 걸어서, 겨울에는
기차를 타고 다녔다. 당시에는 서울로 통근하는 사람들을 위해 원주에서 청량리까지 통근열차가 운행되었고
이 통근열차가 구둔역을 통과하는 시각이 새벽 5시였다.
시계도 없는 새벽에 첫닭이 울면 나보다 47세나 많으신 환갑의 어머니는 나를 깨워 새로 지은 밥에 계란을
넣어 비벼주셨다.
"에구 딱한 것, 추워서 어떻게 하나!"
추운 겨울 새벽 5시20분 경에 지평역에 내리면 수업이 시작되는 8시까지 어디에서든 추위를 참으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역무원 사무실에는 무연탄을 때는 난로가 있었지만 늘 신세를 지는 것도 눈치가 보였다. 아마
도 지제중학교 1학년 중에서 선생님들이 가장 이뻐한 학생은 나였을 것이다. 그 중에 나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준 선생님은 음악과 영어를 가르치는 미남선생님으로 평양에서 피난 내려온 남자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나의 등을 두드려 주면서 새벽에 기차에서 내리면 곧장 선생님 집으로 오라고 했다. 눈 내린 새벽
에 길을 뚫으며 선생님 셋방에 도착하면 문 밖에도 문 안에도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추위를 못이겨 달려
오기는 했지만 막상 문 앞에 도착하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한동안 서성거렸다.
"저... 선생님 주무세요?"
"그래, 어서 들어 오너라, 어서."
문을 열고 들어서면 선생님은 두꺼운 이불을 제치고 석유 등잔에 불을 붙이셨다. 돌도 지나지 않은 아기를
가운데 눕히고 사모님과 주무시다가 일어나시는 것이다. 그리고 책장에서 여러가지 영어책을 내 주셨는데
2학년 3학년 책도 있었다.
"이거 출판사들이 선생님한테 교과서로 골라 달라고 보내 온 거야. 다 가지고 가서 공부 해"
나는 교실에 가기 전까지 이렇게 신혼 중인 선생님 셋방에 가서 영어책을 읽고 외웠다. 수업이 끝나면 교실
에서 시간을 보내며 기다리다가 밤 9시쯤에 지평역을 통과하는 통근열차를 탔다. 사람들이 많아 앉을 자리
가 없어 군인들과 교복 입은 형들이 무릎에 앉혀 주면서 영어책을 읽고 해석하라 시키기도 하고, 자기가 공
부하던 수학책들도 주었다. 그 책들은 밑줄이 한없이 많이 그어져 있었고 여백에는 이해하기 쉽게 방법들이
빼곡하게 쓰여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이렇게 얻은 많은 영어책과 수학책을 싸들고 청량리중학교에 다니는 동네 형들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지금의 장안평에서 독방을 얻어 노동일을 하는 큰 형 집에 머물며 신문도 배달하고, 철판
을 두드려 시발자동차를 만드는 이른바 서비스공장도 다니고, 건설현장에 가서 여러 가지 일을 거들면서 일
당도 받았다.
서비스 공장은 지금의 종로5가에서 대학로로 향하는 길목에 철조망으로 둘러쳐 있는 노천부지였고, 철판을
아세칠렌 가스불로 달궈 햄머로 두들겨 지프차 형의 차체를 만드는 곳이었다. 긴긴 여름에도 점심을 굶었고
얼굴은 검은 흙과 땀으로 얼룩졌다. 그러나 나를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철조망 밖 인도에 책가방을 들
고 다니는 여학생들 모습이었다.
당시 숭인동 근처 청계천 둑방 밑에는 고흥중학교가 있었다. 지금은 어엿한 동대문 상고가 되었지만 당시는
3류 학교였다. 나는 그렇게 학비를 마련하여 그 학교 교무실을 찾아 갔다. 땅땅하고 얼굴이 잘 생긴 선생님
이 교무실 문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나를 불렀다.
"너 누구냐? 이리 와 봐. 너 여기 왜 왔어?"
"학교를 다니고 싶어서요."
"야 이놈아, 무작정 무슨 학교를 다니겠다는 거야?"
"저는 양평군 지제중학교를 다니다 왔는데요, 2학년으로 입학하고 싶어서요."
"전학 증명서 가지고 왔어?"
"아니요, 없는데요."
"야, 이 맹랑한 놈 봐라, 너 눈이 참 이쁘구나, 이리 와 봐."
그 선생님은 책상 위 책꽂이에서 영어책을 꺼냈다.
"너 임마, 여기를 크게 읽고 해석해 봐."
나는 시키는대로 큰 소리로 읽고 해석을 했다.
"야, 이놈 봐라, 시골뜨기 치고는 제법인 걸, 수학선생님, 여기 이놈에게 수학문제 좀 풀어보라고 하세요."
수학선생님은 인수분해, 2차 연립방정식, 응용문제들을 풀라고 했고, 나는 빠른 속도로 풀었다.
"어 이놈 봐라, 영어선생님, 이 애 수학도 잘 하네요."
"그래요?"
담임선생님이 나타나시더니 "너 이리 와" 하고는 내 손목을 잡고 2학년 반에 데려다 자리에 앉혀 주셨다.
"앞으로 네 자리는 여기다. 알았어?"
고흥중학교는 이렇게 해서 들어갔다. 담임선생님은 이인수 선생님, 키가 큰 미남선생님이었다. 어쩌다 시골
에 가면 과수원에 가 과일을 싸들고 담임선생님 집으로 찾아가 새벽잠을 깨우곤 했다. 이렇게 들어간 학교
를 나는 가끔씩 한동안 나가지 못하곤 했다. 월사금 때문이었다. 돈이 벌리면 나가고 돈이 떨어지면 슬며시
그만 두었다. 그만 둘 때는 슬며시 사라졌고 다시 나가고 싶을 때는 이인수 선생님을 찾아갔다.
"오, 너 왔니? 안 보여서 걱정했잖아. 그래 학교에 다시 나오려고?"
"예, 학비를 좀 마련했거든요."
이인수 선생님은 나를 고1 야간반으로 데리고 가서 책상을 정해 주었다.
"네 반 친구들이 다 여기에 있지?"
나쁜 곳으로 빠지지 않고 공부를 하겠다며 다시 찾아온 것만으로 고마워하신 것이다. 2학년 조금, 3학년도
조금 다니다 보니 졸업장도 없었다. 중학교 졸업장 없이 고1이 된 것이다. 그렇게 가끔씩 다녔지만 그래도
시험을 치면 꼭 2등을 했다. 1등은 똘똘이 김영조라는 학생이 했다. 고1도 몇 달 다니지 못하고 또 한동안
돈을 벌어야 했다. 그리고 나이에 맞게 다시 다니려고 하니 고2로 가야 했다.
용두동 미나리 밭 한 가운데에 검은 판자로 지은 야간반을 위한 분교가 있었다. 한영고등학교였다. 그 학교
에서도 졸업장도 없고 전학증명서도 없는 나를 받아주었다. 어느날, 한영고등학교 3학년 담임 이종선 선생
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 말야, 네 기록을 보니까 중학교 졸업장이 없더라. 내가 한영중학교 졸업장을 만들어 줄께."
이렇게 해서 나는 한영중학교 졸업장과 한영고등학교 졸업장을 쥐게 되었다. 근래에 내가 이런 이야기를 주
위 사람에게 했더니 마치 이상한 나라에서나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매우 신기해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다.
지금 시대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목가적인 옛날사회, 이러한 낭만이 있었기에 나는 오늘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옮긴이 주
경부선과 경인선 철도는 제일 먼저 디젤기관차로 교체했는데 중앙선은 지방이고 간선이라 하여 계속 무연탄
의 증기기관차를 운행하다 맨 나중에 교체했다. 강원도는 산악지대라 오르막 내리막이 많아 기차가 속도를
내기 어렵고 많은 터널을 지날 때마다 매케한 검은 연기가 들어와 코를 막아야 했고 흰 옷을 검게 만들었다.
그리고 작은 면소재지 역도 정차하여 그야말로 완행 중에서도 제일 느린 완행이었다.
나보다 몇 년 선배인 저자가 13~4세 무렵이면 6.25 전쟁이 끝난 직후라 전국민 모두가 무척 어려울 때이다.
당시는 집집마다 자녀들이 주렁주렁하여 초등학교도 못 다닌 이들이 대부분이지만 저자는 막내였기 때문에
다닌 것이다. 1950년 대 후반 수학여행 때 본 4대문 밖은 시골과 다름 없어 온통 논과 밭이었고 안양쪽에서
영등포와 노량진 용산을 거쳐 서울역으로 통하는 대로 주변만 대도시 모습이었다.
동대문 밖 신설동과 미아3거리를 거쳐 의정부로 통하는 대로변도 비슷하여 사방이 낮은 구릉의 들판이었고
우이동 계곡은 문안 학교들의 단골 소풍 장소라고 했다. 그래도 장안평과 용두동 일대는 동대문과 가까워
야간반 학교를 미나리 밭에 지어 학생들을 가르친 듯하다. 당시는 나무 판자로 지은 건물이 썩지 않게 철도
침목처럼 주기적으로 검은 콜타르를 칠했는데 보기에도 칙칙하고 냄새도 좋지 않았다.
그 당시는 모두가 선생님을 존경했으며 선생님들도 대부분 스승의 본분에 철저했다. 그 때문에 단칸방이고
신혼인데도 겨울 새벽에 추위에 떠는 제자를 걱정하여 집으로 오라고 했을 것이다. 그 무렵의 통근열차는
직장과 장사를 위해 대도시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많아 항상 만원이었다. 번거로운 차표 대신 통근패스권
을 구입하여 역무원에게 보여주고 승차했으며 자리가 없어 친구 무릎에 앉아서 가는 일은 흔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