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부활 대축일]빈 무덤 (요한 20,1-9)

2019. 4. 21. 오전 6:5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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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부활 대축일]빈 무덤 (요한 20,1-9)

베드로는 입을 열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고 말한다. (사도10,34ㄱ.37ㄴ-43)
그 무렵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여러분은 37 요한이 세례를 선포한 이래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온 유다 지방에 걸쳐 일어난 일과,
38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을 알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39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서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40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41 그러나 모든 백성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증인으로 선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42 그분께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관으로 임명하셨다는 것을  백성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우리에게 분부하셨습니다.
43 이 예수님을 두고 모든 예언자가 증언합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라고 한다. (콜로 3,1-4)
형제 여러분, 1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2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3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4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부속가
파스카 희생제물 우리모두 찬미하세.
그리스도 죄인들을 아버지께 화해시켜
 무죄하신 어린양이 양떼들을 구하셨네
 죽음생명 싸움에서 참혹하게 돌아가신
 불사불멸 용사께서 다시살아 다스리네.
마리아 말하여라 무엇을 보았는지.
살아나신 주님무덤 부활하신 주님영광
 목격자 천사들과 수의염포 난보았네.
그리스도 나의희망 죽음에서 부활했네.
너희보다 먼저앞서 갈릴래아 가시리라.
그리스도 부활하심 저희굳게 믿사오니
 승리하신 임금님 자비를 베푸소서.

마리아 막달레나의 말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간 베드로와 다른 제자도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믿는다. (요한 20,1-9)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9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 부활 대축일 제1독서 (사도10,34ㄱ.37ㄴ-43)


"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39ㄴ-40)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본문은 베드로가 이방인 백인 대장 코르넬리우스 집에서 예수님에 관하여 증언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예수님의 구속 사업의 절정인 십자가 죽음을 묘사하고 있다.


갈라디아 3장 1절에서 바오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한 묘사에 있어서 신명기 21장 23절을 인용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저주받은 몸이 되시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성경에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모두 저주받은 자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0장 39절의 '나무에 매달아'에 해당하는 '크레마산테스 에피 크쉴루' (kremasantes epi chsylu;hanged on a tree)도 신명기 21장 23절의 문장 형태와 유사하다.

"죽을 죄를 지어서 처형된 사람을 나무에 매달 경우, 그 주검을 밤새도록 나무에 매달아 두어서는 안된다. 반드시 그날로 묻어야 한다.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상속 재산으로 주시는 땅을 부정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신명21,22-23)


베드로는 바오로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나무에 매달리심을 신명기 21장 23절과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신명기에 따르면, 사람이 범죄하여 처형당할 경우에 그의 시체를 나무에 매달아 경계의 표본으로 삼았는데, 시체가 나무에 매달린 것은 그가 저주를 받았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죽음을 말하면서 '십자가'라는 표현이 아닌 '나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저주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가 받은 저주 장차 인간들이 당할 모든 저주에서 인간들을 건지는 대속적 저주였다.

베드로는 '나무'라는 단어를 통해 바로 이러한 의미를 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2장 24절,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에서도 예수님의 죽음을 '(십자)나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한편 '매달아'로 번역된 '크레마산테스'(kremasantes)는 '걸다', '~에 달려있다'를 의미하는 '크레만뉘미'(kremannymi)의 부정(不定) 과거 분사로서 '매단후에' 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무에 매단 이후에 죽였다는 사실이 이 부정 과거 분사형 단어에 나타나 있다.


유대인들은 범죄자를 처형할 때 돌로 쳐서 죽였다. 때로 그들은 형을 집행하여 이미 죽은 시체를 나무에 매달아 수치스러움과 저주 받았음을 나타내고,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범죄자를 산 채로 십자가에 매달아 형을 집행하였으며, 본문의 시제는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본문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로마인들에게 십자가 처형을 요구했고,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였음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40)

사도행전 10장 40절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결코 실패가 아니었음을 보여 주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대한 언급이다.

원문의 뉘앙스를 가지고 번역하면, '하느님께서는 일으키셨다. 그리고 그분은 공공연히 보이도록 그를 내주셨다' 가 된다.


'일으키시어'에 해당하는 '에게이렌'(egeiren; raised up)은 '에게이로'(egeiro)의 

부정(不定) 과거 3인칭 단수이다.

고전 희랍어에서 '에게이로'(egeiro)는 세가지 기본 개념으로 쓰였다.

첫째는 '깨우다', '자극시키다'이고,  둘째는 '일으켜 세우다'셋째는 '죽은 자를 

다시 살리다' 라는 의미이다.

본절에서는 세번째의 개념인 '죽은 자를 다시 살리다'는 의미로 쓰였다.


한편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로 번역된 '에도켄 아우톤 엠파네 게네스타이'(edoken auton emphane genesthai; caused him to be seen)에서 '엠파네'(emphane)는 '명백한', '보이는'을 뜻하는 형용사 '엠파네스'(emphanes)의 목적격이다.


이 단어는 '나타내다', '전시하다' 를 의미하는 '엠파니조'(emphanizo)와 관련되며 신약에 단 두번 나타난다. 본절은 의심할 바 없이 명백하게 자신을 드러내 보였다는 이다(로마10,20참조).

 

베드로 사도가 이러한 단어를 사용해서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부활 이후 그를 공공연히 나타나게 하셨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코르넬리우스 집안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는 이들이 이방인들이고,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갔다는 유대인들이 퍼뜨린 헛소문(마태28,13)을 들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 부활 대축일 복음 (요한20,1-9)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7)


여기서 '수건'으로 번역된 '수다리온'(sudarion)은 요한 복음11장 44절에서 라자로가 죽음에서 깨어나 무덤에서 나올 때 얼굴에 감싸인 채 있던 수건과 동일한 단어인 것을 볼 때, 장례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수의의 일부분이다.

예수님의 몸을 쌌던 아마포와 얼굴(머리)를 쌌던 수건은 약간 떨어진 동일한 위치에 있었다.


'아마포'(flax)에 해당하는 '오토니아'(othonia)는 '고운 베' 또는 '세마포'(linen)라고도 하는 천으로서 이집트(1열왕10,28)나 시리아(에제27,16)로부터 수입되어 팔레스티나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만남의 천막 재료(탈출26,1)나 사제의 의복 재료(탈출28,5~8)로 사용되었다.


이 아마포는 눈처럼 흰색을 가지고 있어서 장례용 수의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요한 복음 19장 40절에는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예수님의 몸을 감싸는 데 사용한 천으로 나온다.

이것은 비싼 천이었으므로 만일에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면, 이 아마포도 당연히 가져갔을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 부활의 간접적 증거가 된다.


또한 '개켜져'로 번역된 '엔테튈리그메논'(entetylligmenon; wrapped; was folded up)의 원형 '엔튈릿소'(entyllisso)는 우리말 '개키다'가 갖는 '잘 포개접다'의 의미가 아니고, 둥그렇게 말려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즉 수건으로 머리와 턱을 동여맸던 상태 그대로 놓여 있던 것이다.


이런 정황을 근거로 볼 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면서 부활하신 몸이 신비스런 방법을 통해 수의나 머리를 감싼 수건으로부터 저절로 빠져 나온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마치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 수의를 입고 있는 상태에서 몸만 빠져 나간 것과 같은 모양이다.


그러니 만일에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면, 시신에서 아마포와 수건을 일일히 벗겨내거나, 벗겨냈다 할지라도 그것을 가지고 가지 않고 다시 개켜 놓은 뒤에 시신만 훔쳐 갔을리가 만무한 것이다.

교회는 이렇게 빈무덤 사화를 부활의 첫 메세지로 선포함으로써 역사의 예수님을 믿음의 그리스도, 생명의 주님,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로서 받아들이고 믿기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 부활 대축일은 전례주년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축일입니다.

복음은 “주간 첫날” 새벽에 일어난 사건을 들려줍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이른 새벽에 무덤으로 갑니다.

엄격한 율법에 따르면 안식일에 유다인들은 다닐 수 없습니다.

그녀가 무덤에 도착했을 때 놀란 것은,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면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보다, 누군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다고 생각하고 이를 무덤에 대한 모독 행위라고 여깁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녀에게 부활은 이상하고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마리아가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 이 일을 말하자, 두 제자는 그 이야기를 확인하러 곧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본 것들, 곧 수건과 아마포는 참으로 이상한 사건을 증언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겼기에 부활에 대한 그분의 예고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복음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런 예고도 매우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일어남’, ‘다시 깨어남’에 대하여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여 그분의 부활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 이후에야 제자들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예수님의 예고가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의 생각과 마음을 밝혀 준 사건입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예수 부활 대축일 (요한20, 1-9)

자유로운 삶

반영억라파엘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부활을 축하드리며 우리도 거듭나는 부활의 삶을 충직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을 가로막는 장애에서 매 순간 다시 살아나길 희망하며 부활의 삶을 자유라는 측면에서 묵상하는 가운데 깨우침을 주시길 바랍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사람은 이 자유의지를 사용함으로써 사람의 사람됨을 확인 받게 됩니다. 창세기말씀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었다는 것은 피조물로써의 존재조건을 깨뜨렸다는 데 핵심이 있습니다. 곧 물고기가 뭍으로 뛰어나온 격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유를 왜곡, 남용하여 피조물의 존재성을 거부하고 마침내 하느님으로부터 이탈한 인간은 죄의 노예상태로 살게 되었고 오히려 부자유속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사실 거짓이나 악을 선택하면 일시적으로 자유로울 것 같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죄의 노예가 되고 후회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인간적인 욕심을 선택하면 자유가 아닌 속박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살면 당장은 어렵고 힘들지 모르지만 영원히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1-3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의 삶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진리 안에 머물고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매번 강론을 길게 하시는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강론을 시작하면 아예 눈을 감고 쉬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신부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믿습니까? 하고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깜박 졸고 있던 신자분이 깜짝 놀라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신부님 말씀은 정말 질립니다. 질리고말고요! 진리의 말씀은 질릴 수가 없는 말씀인데......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15,42-44). 하고 말하였습니다. 부활한 몸과 육적인 몸의 차이는 바로 자유에 있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몸은 제한에 묶여있지만 영적인 몸은 경계, 한계, 속박에 더 이상 매이지 않는 자유의 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그야말로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로마7,15)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로마7,19-23). 하고 말합니다. 이만큼 자유를 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자유를 선택해야 하고 또 누려야 합니다. 진리 안에서의 자유야말로 부활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좋고 금실이 좋다고 소문난 부부가 이스라엘로 성지 순례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불행이도 아내가 그곳에서 병이 나서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은총이 많은 성지에 묻기를 적극적으로 권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남편은 꼭 고향으로 옮겨가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장의사에게 귓속말로 살짝 물었습니다. 이곳은 죽은 사람이 살아난 적이 있다던데 맞나요?


사람의 속은 알 수가 없습니다. 겉으로는 좋아보여도 속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고,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인 것 같은데 속은 누구보다도 깊고 넓은 마음을 가진 분도 있습니다. 사실 사람은 어려움을 당해봐야 그 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서도 변함없는 사랑의 관계를 형성하여야 합니다. 삶의 부활은 바로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성인들의 기쁨은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인간의 충만성은 사랑으로 죽는 것입니다. 애덕과 사랑을 거느리는 곳, 그런 곳에 하느님께서 계십니다(까롤로 까레또). 그러므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주님과 하나가 되어야 그분과 함께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증오가 그대를 얽어매는가? 용서하라. 자유로워질 것이다. 이기심이 그대를 속박하는가? 사랑하라. 자유로워질 것이다. 죄가 그대를 괴롭히는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자유로워질 것이다. 재물이 그대를 집착하게 하는가? 나눠라. 자유로워질 것이다. 죽음이 그대를 두려움에 가두는가? 부활을 믿어라. 자유로워질 것이다(차동엽).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가 부활의 희망을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활은 이 세상에 살던 개똥이의 고유성과 인격 전체의 부활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그의 인간성에 대한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부활을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부활을 희망하는 만큼 지금 여기서부터 삶의 부활을 이루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하느님의 뜻대로 쓸 수 있는 기쁨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사랑합니다.

 

@@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왜 여자에게 먼저 나타나셨는지 아십니까? ‘예수님께서도 여자의 입이 가볍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사실 입이 싼 남자도 있습니다. 싸도 너~무 싼 남자 말입니다. 그러니 여자분들 섭섭해 생각하지 마십시오. 할 말 안할 말 구별하시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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