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수난 성지주일]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루카 23,1-49)

2019. 4. 14. 오전 6:2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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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수난 성지주일]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루카 23,1-49)

주님수난성지주일 미사


성주간의 첫째 날인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교회는 오늘 성지(聖枝) 축복과 행렬을 거행하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영광스럽게 기념하는 한편, ‘주님의 수난기’를 통하여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장엄하게 선포한다. 성지를 들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것은 4세기 무렵부터 거행되어 10세기 이후에 널리 전파되었다.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종은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는다고 한다. (이사 50,4-7)
4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5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6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7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은 모습이 되셨다고 한다. (필리 2,6-11)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6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11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루카가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이다. (루카 23,1-49)
○ 그때에 백성의 원로단, 곧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 1 일어나 예수님을  빌라도 앞으로 끌고 갔다.
2 그리고 예수님을 고소하기 시작하였다. ▣ “우리는 이자가 우리 민족을 선동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지 못하게 막고 자신을 메시아 곧 임금이라고 말합니다.”
3 ○ 빌라도가 예수님께 물었다. ●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4 ○ 빌라도가 수석 사제들과 군중에게 말하였다. ●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목도 찾지 못하겠소.”
5 ○ 그러나 그들은 완강히 주장하였다. ◎ “이자는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이곳에 이르기까지, 온 유다 곳곳에서 백성을 가르치며 선동하고 있습니다.”
6 ○ 이 말을 들은 빌라도는 이 사람이 갈릴래아 사람이냐고 묻더니,
7 예수님께서 헤로데의 관할에 속한 것을 알고 그분을 헤로데에게 보냈다. 그 무렵 헤로데도 예루살렘에 있었다.
8 헤로데는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오래전부터 그분을 보고 싶어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일으키시는 어떤 표징이라도 보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9 그래서 헤로데가 이것저것 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10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그 곁에 서서 예수님을 신랄하게 고소하였다.
11 헤로데도 자기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
12 전에는 서로 원수로 지내던 헤로데와 빌라도가 바로 그날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
13 빌라도는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과 백성을 불러 모아 14 그들에게 말하였다. ● “여러분은 이 사람이 백성을 선동한다고 나에게 끌고 왔는데, 보다시피 내가 여러분 앞에서 신문해 보았지만, 이 사람에게서 여러분이 고소한 죄목을 하나도 찾지 못하였소.
15 헤로데가 이 사람을 우리에게 돌려보낸 것을 보면 그도 찾지 못한 것이오. 보다시피 이 사람은 사형을 받아 마땅한 짓을 하나도 저지르지 않았소.
16 그러니 이 사람에게 매질이나 하고 풀어 주겠소.” (17)
18 ○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과 백성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 “그자는 없애고 바라빠를 풀어 주시오.”
19 ○ 바라빠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반란과 살인으로 감옥에 갇혀 있던 자였다.
20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 주고 싶어서 그들에게 다시 이야기하였지만,
21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과 백성은 외쳤다. ◎ “그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22 ○ 빌라도가 세 번째로 그들에게 말하였다. ●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사형을 받아 마땅한 죄목을 하나도 찾지 못하였소. 그래서 이 사람에게 매질이나 하고 풀어 주겠소.”
○ 그러자 23 백성이 큰 소리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다그치며 요구하는데, 그 소리가 점점 거세졌다.
24 마침내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결정하였다.
25 그리하여 그는 반란과 살인으로 감옥에 갇혀 있던 자를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풀어 주고, 예수님은 그들의 뜻대로 하라고 넘겨주었다.
26 그들은 예수님을 끌고 가다가, 시골에서 오고 있던 시몬이라는  어떤 키레네 사람을 붙잡아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님을 뒤따르게 하였다.
27 백성의 큰 무리도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 가운데에는 예수님 때문에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28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
29 보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 아이를 배어 보지 못하고 젖을 먹여 보지 못한 여자는 행복하여라!’ 하고 말할 날이 올 것이다.
30 그때에 사람들은 ‘산들에게 ′우리 위로 무너져 내려라.′하고  언덕들에게 ′우리를 덮어 다오.′할’것이다.
31 푸른 나무가 이러한 일을 당하거든 마른 나무야 어떻게 되겠느냐?”
32 ○ 그들은 다른 두 죄수도 처형하려고 예수님과 함께 끌고 갔다.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두 죄수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하나는 그분의 오른쪽에 다른 하나는 왼쪽에 못 박았다.
34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제비를 뽑아  예수님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다.
35 백성들은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빈정거렸다. ▣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36 ○ 군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말하였다.
37 ▣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38 ○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
39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그분을 모독하였다. ●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40 ○ 그러나 다른 죄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41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42 ○ 그러고 나서 그 죄수가 예수님께 간청하였다. ●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43 ○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44 ○ 낮 열두 시쯤 되자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45 해가 어두워진 것이다. 그때에 성전 휘장 한가운데가 두 갈래로 찢어졌다.
46 그리고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무릎을 꿇고 잠깐 묵상한다.>
47 ○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백인대장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
48 ○ 구경하러 몰려들었던 군중도 모두 그 광경을 바라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
49 예수님의 모든 친지와 갈릴래아에서부터 그분을 함께 따라온 여자들은  멀찍이 서서 그 모든 일을 지켜보았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제1독서(이사50,4-7)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6)

  



본절은 주님의 종이 당할 극심한 고난과 더불어 그 고난 가운데서도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다 이겨낸다는 사실을 예언한다.

 


그가 이런 극심한 고통을 인내로 견뎌낸 것은 그 고통이 죄인들을 대신해서 받는 고통이요

그 고통을 통해서 죄인들을 위한 속죄를 이루고 그들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주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순종함으로써 주님의 의(義)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종의 고난에 대한 예언은 주님의 종의 노래 가운데

마지막 노래인 52장 13절~53장 12절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예언되며

그 고난이 죄인들을 대신해서 받는 고난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드러낸다.

 


그 고난은 단순히 육체적 아픔만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굴욕과 치욕감을 깊이 느끼게 하는 고난이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옷을 벗긴 상태에서 채찍으로 과격을 당하고

수염을 뽑히고 얼굴에 침뱉음을 당하는 것은 인격을 철저히 무시하는

너무나도 크나큰 굴욕감을 일으키는 행위였다

(신명25,9; 2사무10,4; 느헤 13,25; 예례7,29; 마태26,67; 요한18,22).

 


그러나 주님의 종은 그 고난을 하느님의 구원의 경륜을 성취하는 통로로 여기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이를 묵묵히 그리고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본문에서 '나를 매질하는 자들에게' 해당하는 '레막킴'(lemakim)

원형 '나카'(nakah)채찍으로 때리는 것을 의미한다.

 

53장 4절에서는 그가 맞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느님께 맞는 것으로 오해한다고 예언된다.

그러나 그는 무죄하면서 무시무시한 채찍질을 감내해야 했으며

그런 가운데서도 전혀 저항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등을 그들에게 맡기신 것이다.

실로 주님의 종이신 예수님은 로마 병정들의 모진 채찍질을 묵묵히 참음으로써

이 예언을 성취하였다(마태26,27; 27,26; 요한19,1).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다윗이 통치하던 시대에 암몬 임금 하눈은

그의 죽은 아버지께 조의를 표하고자 온 다윗의 신하들을 욕보이며

턱수염을 절반씩 깎아 버린 일이 있었다(2사무10,4).

이것은 극심한 모욕감을 일으키는 행위였다.

그래서 그 신하들은 다윗의 지시에 따라 턱수염이 다 자랄 때까지

예리코에 머물러 있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고대 사회에서 수염은 멋으로 기르는 것 즉 장식용이 아니라

남성의 인격을 상징하였다.

따라서 그것을 깎는다든지 뽑아 버리는 것은

그 사람을 인격적으로 완전히 깔아 뭉개버린다는 뜻이었다.

아울러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일종의 형벌(느헤13,25)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의 종은 이런 치욕적인 일,이처럼 무고한 모독과 형벌까지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즉 자기 턱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피하지 않고 도리어 그 뺨을 그들에게 맡기신 것이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오른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는 가르침(마태5,39)을

그대로 실행에 옮기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모욕'으로 번역된 '켈림무트'(kelimmuth)주먹과 손바닥으로 얼굴을 맞는 것을 통해

주님의 종이 느끼는 인격적 상처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마태26,67).

 


또한 '수모' 번역된 '로크'(loq)는 구약에서 본문과 욥기 30장 10절 두 곳에서만 사용된 매우 희소한 단어인데,

얼굴에 침을 뱉는 행위, 침뱉음 뜻하고, 얼굴에 침뱉음을 당한다는 것은

턱수염이 뽑히는 것보다 더 드문 일이고 더 굴욕적인 일임을 암시한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주님의 종은 그 굴욕을 피하기 위해 저항하거나 얼굴을 가리우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무기력해서가 아니라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이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일임을 잘 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을 안다."(7)

 



앞의 50장 4~6절에서는 주님의 인도하심에 의지한 주님의 종의 고난과

고난을 받는 중에도 전적으로 참고 순종한다는 사실을 노래하였다.

이제 50장 5~9절 까지는 주님의 도우심에 의지하는 종이

승리할 것에 대한 전적인 확신을 노래한다.

 


먼저 본절은 그토록 견디기 힘든 치욕과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의 종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밝힌다.

 

그것은 자기를 종으로 세우신 주 하느님께서 자신을 돕는다는 확신과

그 하느님께서 자신이 옳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하신 것 때문이다.

 


주님의 종은 극심한 수치와 모욕과 고난 가운데서도

자신이 잘못해서 그런 취급을 당한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주님의 종은 자기가 당하는 그 고난이 주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감당해야 할 사명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본절은 원문상 접속사 '와우'(wau; because, for 혹은 but)로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본절의 내용이 앞절과 긴밀하게 관련되는 사실을 말해 준다.

 

주님의 종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고

그 고난을 자기 혼자 당하는 것도 아니며, 그 고난 때문에

자신이 절망에 빠지지도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해 본절을 와우 접속사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진정한 배후에는 자신의 정당성을 지지해 주시는

주 하느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 '도와 주시니' 해당하는 '야아자르'(yaazar)의 원형'아자르'(azar)

4절에서 주님의 종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는 것을 언급할 때 사용된 표현과 동일하다.

주님의 종은 주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자신의 올바른 지식으로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며

하느님을 통해 고난의 때에 도움을 받는다.

여기서 '아자르'는 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미완료형으로 사용되어

주님께서 종의 사명 전반을 지지하며 도와 주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한편 이에 이어지는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구절은

인과 관계를 나타내는 '알 켄'(al ken; therefore)이란 표현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주님께서 종을 도우신 결과, 그가 수치스런 고난 가운데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기서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사명의 의미를 앎으로써

고난과 모욕을 당하는 자신의 처지를 치욕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본문 역시 앞 문장과 같이 인과 관계를 나타내는 '알 켄'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주님께서 종을 도우시는 결과, 주님의 종이

자기 얼굴을 차돌같이 굳게 한다는 것 나타낸다.

 


'만든다'에 해당하는 '사므티'(samthi)'두다','되게 하다' 의미를

지니고 있는 동사'숨'(sum)능동 완료형 1인칭 단수로서

본문의 행동의 주체가 주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즉 그는 자기 스스로 자기 얼굴을 차돌처럼 굳게 하였다는 것이다.

 

'차돌'로 번역된 '할라미쉬'(hallamysh; flint)

'아주 단단한 물건', '단단한 돌','부싯돌','바위' 뜻이 있는데,

여기서는 매우 단단한 돌 말한다(신명8,15; 시편114,8).


따라서 본문은 낯이 매우 두꺼운 것을 의미한다.

 

우리 말에도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낯이 두껍다고 하는데,

이것은 주님의 종이 주님의 도우심을 확신하고,

치욕스런 고난 가운데서도 자신의 처지를 전혀 치욕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것을

이런 직유법을 사용해서 표현한 것이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본문은 이중적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첫째는 주님의 종이 그런 치욕스런 상황 가운데서도

결단코 수치스럽게 느끼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둘째는 그가 비록 죄인들이 당하는 수난을 당하고 있지만

마지막 날에는 결코 심판에 처해지지 않고, 자신이 의로운 존재였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을 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수치를 당하다' 의미로 번역된

'에보쉬'(ebosh; shall be ashamed)의 중의성 때문이다.

이 단어의 원형'뽀쉬'(bosh)는 수치를 느낀다는 의미 뿐만 아니라(창세2,25)

최후 심판에서 단죄되어 치욕스런 상태로 떨어진다는 의미까지 가지고 있다(창세45,16).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신성 모독죄를 저질렀다는

고소를 당해 수난을 겪고 죽임을 당했다(마태26,65).

그러나 그들이 단죄한 그 신성 모독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혀 해당되지 않았다.

 


그들이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진 분이라는 사실(요한1,1-3; 필리2,6)을 깨달았다면,

그들은 그를 신성 모독죄로 고소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를 결코 단죄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는 위치로 끌어 올려 주셨다(필리2,10).

이 사실이 본문에 나오는 주님의 종의 확신이 옳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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