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15일 금요일
[대림 제2주간 금요일] 먹보요 술꾼,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 (마태11,16-19)
제1독서<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이사48,17-19)
17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너의 구원자이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
18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19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화답송>시편1,1-2.3.4와 6(◎요한8,12) ◎ 주님, 당신을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이다.
○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
○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복음<그들은 요한의 말도 사람의 아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마태11,16-19)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6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17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18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19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대림제2주간 금요일 제1독서(이사48,17-19)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18)
이사야서 48장 18절과 19절은 주님을 떠나 징계를 받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안타까운 심정이 토로된다.
하느님께서는 궁극적으로 당신 백성이 번성하고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명령과 규정을 주심으로서 옳은 길을 걷도록 인도하셨지만, 그들은 오히려 하느님의 명령 듣기를 싫어하였다.
본문의 서두에 나오는 '루'(lu)는 가정법을 이끄는 접속사로서 '~했더라면' 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에 대한 하느님의 안타까운 심경을 반영한다(민수20,3; 22,29; 여호7,7; 판관8,29).
새 성경은 이러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하여 '아~'로 시작하였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축복의 근원이신 하느님, 그들의 삶을 복되게 하시는 하느님의 명령(신명10,13)을 경청했더라면, 그들의 삶은 이러한 고통이 없었을 것이고, 평화롭고 복된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으므로, 축복이 아닌 스스로가 자초한 고통스러운 징계를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는 풍성한 평화를 경험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그 심령과 삶에 놓인 무거운 짐을 대신 지고서(시편68,20) 자유를 누리며 살도록 이끄시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너의 평화'에 해당하는 '셸로메카'(shellomeka)의 원형 '샬롬'(shallom)은 단순히 전쟁이나 불화, 분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어떤 측면에서도 부족함이 없는 온전한 상태(well-being)를 나타낸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인생 최대의 축복으로 여긴 것이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이 평화를 강물에 비유한다.
이것은 생명을 공급하는 풍성한 소출을 맺게하는 물이 풍성한 강처럼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넘치는 삶, 풍족하고 풍성한 삶을 살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함으로 인해 얻어지는 축복은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린다는 것이다.
여기서 제시되는 '의로움'은 앞에 제시된 '평화'와 더불어 주님의 통치의 성격과 관련된다(이사32,17). 사실 의로움은 평화를 초래하는 원천이다.
여기서 '의로움'(정의)에 해당하는 '체다카'(tsedakah)는 하느님의 백성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올바른 삶의 태도, 의롭고 정직한 행위를 의미한다.
이것은 단지 법적으로 의로움을 구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의로움을 누릴 수 없는 약한 자들을 돌보며, 그들에게 자비와 연민을 베푸는 삶으로까지 확대된 표현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다 물결 같다는 표현은 그러한 삶이 끊임없이 계속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비유이다.
바다 물결은 그 흐름이 끊이지 않고, 한 파장이 다른 파장으로 연결되면서 계속된다.
하느님의 백성이 그의 명령을 겸손한 마음으로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삶을 산다면, 그들의 삶에서는 마치 바다 물결같이 의로운 행위, 자비로운 행위가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은 그와 그가 속한 공동체로 하여금 하느님의 자비와 연민을 힘입게 하며, 그야말로 '샬롬'(shallom), 즉 완전한 평화를 누리는 형통한 삶, 부족함이 없는 삶의 자리로 이끌어 세울 것이다.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19)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이란 표현은 주님의 명령을 듣고 순종하는 삶은 창세기 15장 5절과 22장 19절에 있는 아브라함이 받은 언약의 축복을 성취하는 첩경이 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러나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는 이와 정반대의 결과 즉 저주스러운 일이 이루어졌을 뿐이다.
즉 북부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서 멸망당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흩어졌으며, 남부 유다가 바빌로니아에 정복당하면서도 동일한 결과가 일어났던 것이다.
또한 하느님의 언약을 받은 다윗 왕가는 무너졌으며, 왕의 자손들 역시 포로로 끌려가고 말았다.
민족 자체가 멸절된 것은 아니었지만, 민족의 수효는 급감하고 말았다.
고대 세계에서는 자손이 번성하는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큰 축복으로 여겨졌었다.
이스라엘은 범죄함으로써 아브라함에게 언약된 번성의 약속을 누리지 못하고 불순종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쇠퇴와 멸망의 길을 걷고 만다.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본문은 완료 시제가 아닌 미완료 시제로 되어 있다.
이것은 이사야서 48장 18절과 19절 상반절이 완료 시제로 되어 있는 것과 다르다.
따라서 본문은 이스라엘 자손의 이름이 이미 끊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해서 주님의 계명과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그렇게 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하느님의 명칭 정도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 이름을 지닌 대상의 존재와 성품, 사명과 활동 등을 함축한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이름이 하느님 대전에서 끊어진다는 것은 그들에 대해 하느님께서 더 이상 어떤 기대도 하지 않으시며,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과, 사제들의 나라(탈출19,5.6)로 삼으시고 축복의 통로로 삼으신 거룩한 직책을 박탈하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이 하느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이같은 영예로운 이름, 그 안에 함축된 복된 직책과 임무들을 잃지 않았을 것이며 더 나아가 하느님의 축복을 누리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명령을 업신여김으로써 그 모든 축복에서 멀어지고, 심지어 바빌론에 의해 패망을 당하여 결국 그들이 지닌 거룩한 이름과 정체성까지 포기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다.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사제의 묵상}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지만,
유다인들은 도무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해도 마음을 열지 않는 완고한 이 세대를 비난하십니다.
당시 사람들은 혼례를 거행한 뒤 시장에 모여 춤을 추었고,
장례 뒤에는 죽음을 슬퍼하며 곡을 하였다고 합니다.
어른들의 이러한 생활 양식을 모방하여,
어린이들은 피리를 불며 춤을 추거나 가슴을 치며 곡을 서로 주고받으며 놀았나 봅니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즐거운 가락을 연주하고 춤을 추는데,
다른 무리의 아이들은 함께 흥을 내고 어울려 춤을 추기는커녕
팔짱을 끼고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우울한 곡을 연주하거나 장송곡을 불러 보아도 함께 슬퍼해 주지 않습니다.
피리를 불고 춤을 추거나 곡을 하는 아이들에게
장단을 맞추지 않는 다른 아이들의 모습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상 종말이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외칩니다.
그러면서 그는 광야에서 낙타털 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고행자의 삶을 삽니다.
그러자 유다인들은 세례자 요한을 ‘마귀 들린 자’로 취급하면서 배척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구원의 기쁜 소식인 복음을 선포하시고 죄인들과 어울리시자,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비난하면서,
단식을 하고 죄인들과 어울리지 말라며 배척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합니다.
그것이 조작된 것인지 참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기 욕심을 채워 주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이는 자기 자신을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을 열어 예수님의 상처(십자가)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보고, 이웃과 형제의 상처에 눈을 떠야 합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내생각과 다른것, 그것이 아무리 옳다하여도
나와 같지 않으면 배척하려 하지는 않는지요.~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마태11,16-19)
16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17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나의 수고, 예물을 드리고 하느님의 복을 받겠다는, 그 거래하는 장터의 신앙을 살기에~ 하느님의 말씀을 기쁜 소식으로 주어도 기뻐할 줄 모르고 자신들의 잘못을 알려줘도 아파할 줄 모르는 그 철부지 같은 신앙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그 아이와 같은 신앙이 하느님의 뜻(지혜)을 거스르는 잘못, 죄임을 모른다. 자신들의 뜻(지혜)으로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8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 율법을 진리로 먹고, 마시지 않으니, 받지 않으니 마귀 들렸다 하는 것이고~
19ㄱ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 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 율법을 진리로 죄인들의 생명의 양식으로 그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니, ‘술 꾼이며 먹보’라 한다.
19ㄴ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 그렇게 죄인들과 친구가 되시는 분, 그 예수님께서 올바름으로 드러난 것이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의 양식으로 오셨으니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셨기 때문이다.
그 예수님을 죄인들은 먹을 수 없다는 인간의 지혜로는 깨달을 수 없는 하느님의 지혜시다.
(요한6,51)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 빵, 살 모두 예수님의 죽음인 당신의 생명이다. 그 생명이 죄인들의 양식이다.
(1코린11,26-27. 29-30) 26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27 그러므로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 됩니다.
= 성찬례, 자신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서 먹는다면, 또 자신의 뜻을 위해 먹는다면, 그는 주님의 몸과 피를 모독하는 죄를 짓는 것이다. 주님은 그 자격이 없는, 곧 죄인들의 구원의 양식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자신이 죄인이기에 먹어야 한다고, 구원의 진리 그 양식이니 먹어야 한다고 감사로 먹는다면~ 그 대속의 피, 그 새 계약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먹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대속, 그 의로움을 드러내는 것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그러니 그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 그러니 그 분별없이 먹는 것, 죄다.
29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30 그래서 여러분 가운데에 몸이 약한 사람과 병든 사람이 많고, 또 이미 죽은 이들도 적지 않은 것입니다.
그 지혜의 양식이 십자가에서~
(요한19,30) 30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 예수님을 죄인들의 양식으로 보내시어 그 죄인들을 살리시는 하느님의 지혜, 그 지혜가 하신 일이 올바르게 드러난 것이 십자가이다.
우리(내)가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어 그분의 사랑(십자가)으로 거룩해 진다는 것과, 그 예수님의 십자가로 내 모든 죄를 용서 받아 죄인인 내가 하늘의 백성,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그리고 그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늘의 신비, 곧 나의 구원의 신비(비밀)였음을 알아, 우리의 창조 목적인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게 되었음을, 그래서 그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늘의 존재로 완성됨을 믿는 것이다.
(에페1,4-10) 4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5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지혜)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6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8 하느님께서는 이 은총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베푸셨습니다. 당신의 *지혜와 통찰력을 다하시어, 9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당신 선의(지혜)에 따라 우리에게 당신 뜻의 신비(비밀)를 알려 주셨습니다. 10 그것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
= 그 지혜, 예수님 이시다.
(잠언8,12. 22-32) 12 “나 지혜는 영리함과 함께 살며 지식과 현명함을 얻었다. 22 “주님(야훼)께서는 그 옛날 모든 일을 하시기 전에 당신의 첫 작품으로 나를 지으셨다. 23 나는 한 처음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영원에서부터 모습이 갖추어졌다.
= 구약에도 인간의 지혜에도 감추어져 계시다는 말씀이시다.
24 심연이 생기기 전에, 물 많은 샘들이 생기기 전에 나는 태어났다. 25 산들이 자리 잡기 전에,언덕들이 생기기 전에 나는 태어났다. 26 그분께서 땅과 들을, 누리의 첫 흙을 만드시기 전이다. 27 그분께서 하늘을 세우실 때, 심연 위에 테두리를 정하실 때 나 거기 있었다. 28 그분께서 위의 구름을 굳히시고 심연의 샘들을 솟구치게 하실 때, 29 물이 그분의 명령을 어기지 않도록 바다에 경계를 두실 때, 그분께서 땅의 기초를 놓으실 때 30 나는 그분 곁에서 사랑받는 아이였다. 나는 날마다 그분께 즐거움이었고 언제나 그분 앞에서 뛰놀았다. 31 나는 그분께서 지으신 땅 위에서 뛰놀며 사람들을 내 기쁨으로 삼았다.”
= 지혜(예수)를 입으면 하느님과 예수님의 기쁨이 된다.
32 “그러니 이제, 아들들아, 내 말을 들어라. 행복하여라, 내 길을 따르는 이들!
=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구원의 진리로 믿고 의탁하는 일이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사도17,28) ~아멘.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마태11,16 -19 /루카7,24-35)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16-17)
원문은 결과 접속사 '운'(un; then)으로 시작되어 '그러므로(그렇다면) 무엇에 비유할까?'라는 뜻을 가진다.
이것은 결과 접속사 '운'(un)이 루카 복음 7장 31절이 29절과 30절에 이어 계속되는 것임을 보여 주고 있는 것으로써, 7장 29절과 30절이 예수님의 직접적인 말씀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세례자 요한의 회개의 메시지와 세례를 통해 나타난 하느님의 구원의 경륜을 거절하고 저버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염두에 두고, 31절부터 34절까지 장터에 노는 아이들의 비유를 통해 그들의 완고함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비기랴?'로 번역된 '호모이오소'(homoioso; I can compare)의 원형 '호모이오오'(homoioo)는 형태나 성질 면에서 유사한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 동사이다.
보통 '비유하다'는 의미로 쓰이는 '파라발로'(paraballo) 동사는 '어떤 것을 다른 것의 곁에 놓다'라는 뜻으로서, 하나와 다른 하나를 견주어 비교하여 어떤 현상을 쉽게 설명해 주는데, '호모이오오'(homoioo)는 '파라발로'(paraballo)에 비해 매우 직설적 표현이다.
'호모이오오'(homoioo) 역시 어떤 두 대상을 놓고 비교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비유'라는 말보다는 '~와 같다'라는 직설적인 표현에 더 가깝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춤추어야 할 자리에 춤추지 않고, 애곡해야 할 자리에서 애곡하지 않는, 상황에 맞지 않게 행동하는 아이들과 같았던 것이다.
또한, '이 세대 사람들'은 다름 아닌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가리키며, 더 넓게는 세례자 요한의 회개의 세례를 저버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은 그 당시의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한편, 루카 복음 7장 32절은 아이들이 어른들의 결혼식이나 장례식을 흉내내어 노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피리와 애곡으로 상징된 결혼식과 장례식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며, 기쁨과 슬픔을 대표하는 날이다.
이것은 당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말씀에 연관지어져 있다.
즉 세례자 요한이 죄사함의 세례를 베풀어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향한 하느님의 정의의 심판을 외치는 것은, 그의 금욕적인 생활과 더불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비난과 무시를 받는 것이었다.
마땅히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듣고 슬퍼하며 죄사함의 세례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외면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로부터 천국 복음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비난과 냉담의 태도로 예수님을 배척하였다.
그들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될 회개와 천국의 복음을 듣고도 무관심한 그들의 태도를 보시고, 예수님께서 장터에서 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을 비유로 들어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마태오 복음 10장의 파견 설교 이후, 11-12장에서는 메시아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부정적 반응과 함께 예수님과 적대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논쟁이 다루어집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그분의 활동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평가(11,2-6 참조)와 그에 대한 예수님의 긍정적 평가(11,7-15 참조)에 이어지는 부분으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의 부정적 반응을 비유적 표현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를 장터에서 놀이를 하는 아이들과 견주십니다.
여기서 “세대”는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적대자를 부정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1장 17절의 비유는 두 가지 상황을 떠오르게 합니다. 하나는 혼인 예식이고, 다른 하나는 장례 예식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보여 준 금욕주의적 삶은 그를 장례 놀이와 연결시킵니다.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반대자들은 세례자 요한의 설교에 대한 응답으로 회개하기보다 그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였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비금욕주의적 삶은 혼인 놀이로 확인됩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다.”
예수님의 반대편에서 적대자들은 죄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잔치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기보다 날 선 시선으로 예수님을 비판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을 거부한 반대자들이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이 시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진심으로 회개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정진만 안젤로 신부)
[대림 제2주간 금요일]
감사가 병든 나를 변화, 구원으로 이끈다.
복음(마태11,15-19)
15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 ‘성령의 귀로 들어라’로 공부했다.
16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17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마르1,15)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속량(贖良)의 때가 왔다는 기쁜 소식이다. 평화의 하늘나라가 왔다는 기쁜 소식이다. 그런데 기쁜 소식(복음)으로 기뻐할 줄 몰랐고, 자신의 뜻을 위해 열심히 지켰던 율법신앙(律法信仰)이 헛된 것이니 '버리고 돌아오라'고 해도 가슴을 칠 줄(否認) 모른다는 말씀이다, 성경(聖經)을 인간의 지혜(知慧), 도덕(道德)과 윤리(倫理)로 보면 절대 기뻐할 수도 가슴을 칠 수도 없다.
18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19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人間)의 뜻을 위한 율법(律法)으로 살지(먹지) 않았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인 율법(律法)의 완성(完成)을 위해 죄인(罪人)들과 함께 살았다는 말씀이다.
(마태9,12-13) 1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죄(罪)의 용서(容恕)를 위한 제사(祭祀)가 아닌 하늘의 대속(代贖)으로 주시는 용서, 자유, 생명, 그 자비(慈悲)의 말씀을 주라는 말씀이다. 곧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말씀, 지혜)으로 오셔서 십자가(十字架)에서 용서(容恕), 구원(救援)이 “다 이루어 졌다” 하신 일이다.
세리(稅吏), 죄인(罪人)들의 죄로 죽으시고 그 죄인들을 살리신 일이다. 십자가(十字架)의 대속(代贖), 그 일이 옳은 일, 하느님의 정의(正義). 공의(公義)인 것이다.
병든 이들을 의사(醫師)가 고쳐주듯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해 그들의 죄로 죽으심, 곧 흙(땅)의 존재들이 어떻게 스스로 하늘의 존재가 되겠는가? 하늘이 내려 오셔서 들어와 한 몸이 되어 주셨듯, 그 일이 하느님의 지혜(智慧)요 옳은 공의(公義), 정의(正義)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필리1,10-11) 10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고, 1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 사람의 착한 행실(行實), 그 의로움과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얻는 의로움을 분별(分別)해야 한다. 사람의 의로움은 땅의 한시적인 것이나,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거저 받는 의로움은 하늘의 생명(生命)이다.
착하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더 착하게 열심히 살아야 한다. 아니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죄의 용서를 받았음을 믿는 이들은. 하느님께 감사(感謝)와 영광(榮光)을 드리는 착한 삶을 살게 된다. 그것이 어울리는 합당(合當)한 삶이다. ( 가끔. 아니 자주 넘어지기는 하지만) 그럴 때 마다(어제 주셨던) ‘내 손을 잡고~’ 하느님을 기억해야 한다.
(이사41,13-14) 13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14 두려워하지 마라,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 너의 구원자이다.
= 그런데 오른 손을 붙잡고 계신단다. 사람의 의로움과 예수님의 십자가(十字架)의 대속(代贖), 그 의로움을 분별(分別)해서 예수 그리스도께 전가(傳家)받은 의로움을 생명의 진리(眞理)로 붙들고 있는 옳은, 오른 손이다.
그리스도의 대속, 그 하느님의 용서는 오늘도 내일도 영원한 것이다.(히브10장 참조) 그러니 어찌 감사가 나오지 않겠는가? 하느님께 영광 드림이 어찌 나오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 감사기 병든 나를 치유로, 변화로, 구원으로 이끌고 간다.
(로마7,18-25. 8,1-3) 18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19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20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21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22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23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24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나 자신이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으로는 죄의 법을 섬깁니다.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2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3 율법이 육으로 말미암아 나약해져 이룰 수 없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루셨습니다. 곧 당신의 친 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을 지닌 속죄 제물로 보내시어 그 육 안에서 죄를 처단하셨습니다.
=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은 세상의 육적(肉的)인 내가 죽고(否認) 머리(주인)이신 그분의 지체(肢體)로 그분을 붙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오로 자신에게 이롭던 것을 해로운 쓰레기로~
(필리3,6-9) 6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고,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7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8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 저희 죄인을 위해 간구해 주소서. 지혜가 이루신 옳은 일을 위해 율법의 나를 부수고 율법을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게 하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대림 제2주간 금요일 (마태11,16-19)
진정 하느님의 수행자는 선인善人입니다. 진인眞人입니다. 현인賢人입니다. 착하고 참되고 슬기로운 하느님의 사람이 수행자 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믿는 이들의 유일한 삶의 목표입니다.
수행자의 본연의 자세는 무엇일까요?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단지 귀로 듣는 것 뿐 아니라 수용受容하고 이해理解하여 실행實行함으로 말씀과 동화同化되어야 비로소 진짜 수행자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전 말씀입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11,15).
들어야 소통입니다. 부단히 들어야 자신을 압니다. 듣지 않아 듣지 못해 불통입니다. 소통은 생명이요 불통은 죽음입니다. 불통에서 파생되는 온갖 문제들입니다. 분도 규칙도 ‘아들아, 들어라.’로 시작됩니다. 잘 듣기 위한 침묵이요 잘 들어야 순종이요 겸손입니다.
진정 '마음의 귀'로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는 이가 진인이요 선인이요 현인입니다. 막연한 수행자가 아니라 ‘말씀의 수행자’가 진정한 수행자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예수님이말로 참 수행자의 모델입니다. 오늘 복음은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세대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는다.”
듣지 못하는, 반응할 모르고 공감할 줄 모르는 회개를 요하는 불통의 세대를 뜻합니다. 무감각, 무의욕, 무의미의 삶의 늪에 빠져있는 사람들입니다. 제대로 볼 줄도 생각할 줄도 모르는, 참으로 무뎌지고 굳어진 생각이 없는 사람, 관념이 없는 사람, 주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요한이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단정하고, 예수님이 먹고 마시자.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죄인의 친구다.’ 하며 일방적으로 매도합니다. 들을 수 있는 귀는 물론 볼 수 있는 눈도 없습니다. 끊임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때 누구나의 가능성입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물론 무수한 성인들의 삶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참 수행자의 삶이 바로 지혜로운 삶임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주님은 이사야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그 안타까움을 토로하시며 진정 당신의 계명을 듣고 실행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꼭 오늘의 우리 세대에 주는 엄중한 예언 말씀 같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스승이자 인도자이신 주님을 잊었기에 불의不義와 불화不和가 만연된 정의正義와 평화平和가 없는 세상입니다. 혼인율, 출산율의 저하와 이혼율 증가로 후손들이 끊어질 것 같은 예감도 듭니다.
어제 어느 노老 자매의 ‘오늘날 성당에는 젊은이도 아이들도 없고 온통 노인들뿐’이라는 탄식어린 말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정말 이렇게 가다가는 우리들의 이름도, 하느님의 이름과 말씀도 끊어질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도 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수행의 삶을 축복하시어 우리의 평화가 강물처럼, 우리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리게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여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시편1,20). 아멘.
2023년 12월 15일 금요일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사제 정천 사도 요한)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장터의 아이들이 두 편으로 나누어 가장 놀이를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놀이가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는 모양새입니다.
한편에서는 놀이에 적극적인데, 다른 편에서는 반응이 영 시큰둥합니다. 전혀 맞장구를 쳐 주지 않습니다.
피리를 불며 혼례식 놀이를 유도하여도, 곡을 하며 장례식 놀이를 제안하여도, 반대편에 서 있는 아이들은 호응하여 주지 않습니다.
놀이를 적극적으로 제안하는 이들은 하느님에게서 파견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입니다.
장례식 놀이를 연상하게 하는 세례자 요한의 금욕적인 모습(“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을 본 사람들은 회개로 응답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마귀 들린 사람처럼 대합니다.
그리고 혼례식 놀이를 연상하게 하는 예수님의 비금욕적인 모습(“먹고 마시자”)은 하느님 나라 잔치에 대한 초대였으나, 사람들은 그 초대에 응답하기는커녕 사람의 아들을 방종한 사람으로 취급하여 버립니다.
하느님 편에서는 늘 최선을 다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을 비롯하여 그전에도 끊임없이 파견되었던 예언자들의 활동, 그리고 외아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기적과 가르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어떻게 해서든 사람들의 호응을 얻어 내고자 노력하시는 모습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피리를 불면 춤을 추어 주지 않을까? 혹시 곡을 하면 가슴을 쳐 주지는 않을까?’ 그들의 반응을 초조하게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간절한 요청에 얼마나 성심성의껏 응답하고 있습니까?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자세로 일관하고 있지는 않는지, 무관심하거나 외면하는 경우는 없는지 스스로 돌아봅시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의 부주의한 태도를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분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 더 적극적으로 호응하여야 하겠습니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대림 제2주간 금요일]
그리스도와 이웃과 하나 되는 것이 사랑이다.
독서(이사48,17-19)
17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너의 구원자이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
=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시련까지 모두 내게 유익한, 가야 할 구원의 통로(길)다. (히브12,6-8)
18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거저 얻는 의로움은 충만하며 영원하다.
(로마3,24)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19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 하느님의 계명? 도덕(道德)과 윤리(倫理)의 법(法)이 아닌 그리스도의 대속, 그 이타의 사랑, 곧 새 계명이다. 그 사랑으로 누리는 평화이며 존재한다. 그 그리스도의 사랑을 주는 것이 사랑이다.
(갈라5,13-14) 13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 자유를 육을 위하는 구실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14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계명입니다.
(1요한4,9-11.18-19)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8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19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살면서 내 안에 미움이, 판단하는 마음, 두려움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의 안에 없는 것일 수 있다. 육신의 자유를 위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지식으로만 알고 있음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진리로, 믿음으로, 새 계명으로 간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청(請)하고 구(求)하고 두드리는 기도(祈禱)를 해야 한다.
(1코린15,54) 54 이 썩는 몸이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이 죽지 않는 것을 입으면, 그때에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
(2코린5,4) 4 우리는 이 천막 속에 살면서 무겁게 짓눌려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 천막을 벗어 버리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덧입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죽을 것을 생명이 삼키도록 말입니다.
복음(마태11,16-19)
16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17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 그리스도의 대속, 그 하늘의 사랑, 의(義), 기쁜 소식을 전해 주어도 기뻐하지 않았고, 인간의 제사, 열심, 의(義)가 허무임을 알려주어도 가슴을 치며, 그 모든 것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사랑, 의로움을 찾지도, 구(求)하지도, 돌아오지도 않았다는 말씀이다.
(마태6,33)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18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19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 죄인(罪人)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친구가 되는 것, 구원의 진리(眞理), 지혜(智慧)다. 곧 그리스도의 대속, 그 이타(利他)의 사랑, 의(義)다.
(1코린1,22-24) 22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23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24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집회1,9-10) 9 주님께서는 지혜를 만드시고 알아보며 헤아리실 뿐 아니라 그것을 당신의 모든 일에, 10 모든 피조물에게 후한 마음으로 쏟아 부으셨으며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선물로 주셨다. 주님의 사랑은 영광스러운 지혜이며 그분께서는 당신을 보여 주실 이들에게 지혜를 베푸시어 당신을 알아보게 하신다.
<영성체송>(필리3,21) 21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 주님께서 다 이루시는 일이다. 복종(服從)도 영광스럽게 하심도......
☨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하느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저희 마음 안에서 타오르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대림 제2주간 금요일]
그리스도와 이웃과 하나 되는 것이 사랑이다.
제1독서(이사48,17-19)
17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너의 구원자이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
=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시련까지 모두 내게 유익한, 가야 할 구원의 통로(길)다. (히브12,6-8)
18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거저 얻는 의로움은 충만하며 영원하다.
(로마3,24)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19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 하느님의 계명? 도덕(道德)과 윤리(倫理)의 법(法)이 아닌 그리스도의 대속, 그 이타의 사랑, 곧 새 계명이다. 그 사랑으로 누리는 평화이며 존재한다. 그 그리스도의 사랑을 주는 것이 사랑이다.
(갈라5,13-14) 13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 자유를 육을 위하는 구실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14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계명입니다.
(1요한4,9-11.18-19)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8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19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살면서 내 안에 미움이, 판단하는 마음, 두려움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의 안에 없는 것일 수 있다. 육신의 자유를 위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지식으로만 알고 있음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진리로, 믿음으로, 새 계명으로 간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청(請)하고 구(求)하고 두드리는 기도(祈禱)를 해야 한다.
(1코린15,54) 54 이 썩는 몸이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이 죽지 않는 것을 입으면, 그때에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
(2코린5,4) 4 우리는 이 천막 속에 살면서 무겁게 짓눌려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 천막을 벗어 버리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덧입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죽을 것을 생명이 삼키도록 말입니다.
복음(마태11,16-19)
16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17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 그리스도의 대속, 그 하늘의 사랑, 의(義), 기쁜 소식을 전해 주어도 기뻐하지 않았고, 인간의 제사, 열심, 의(義)가 허무임을 알려주어도 가슴을 치며, 그 모든 것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사랑, 의로움을 찾지도, 구(求)하지도, 돌아오지도 않았다는 말씀이다.
(마태6,33)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18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19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 죄인(罪人)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친구가 되는 것, 구원의 진리(眞理), 지혜(智慧)다. 곧 그리스도의 대속, 그 이타(利他)의 사랑, 의(義)다.
(1코린1,22-24) 22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23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24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집회1,9-10) 9 주님께서는 지혜를 만드시고 알아보며 헤아리실 뿐 아니라 그것을 당신의 모든 일에, 10 모든 피조물에게 후한 마음으로 쏟아 부으셨으며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선물로 주셨다. 주님의 사랑은 영광스러운 지혜이며 그분께서는 당신을 보여 주실 이들에게 지혜를 베푸시어 당신을 알아보게 하신다.
<영성체송>(필리3,21) 21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 주님께서 다 이루시는 일이다. 복종(服從)도 영광스럽게 하심도......
☨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하느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저희 마음 안에서 타오르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