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6주간 수요일] “나를 따라라.” (루카9,57-62)

2023. 10. 4. 오전 6:3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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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4일 수요일

[연중 제26주간 수요일] 나를 따라라.” (루카9,57-62)

   


1독서<제 조상들의 도성을 다시 세우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느헤미2,1-8)

1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임금 제이십년 니산 달, 내가 술 시중 담당이었을 때, 나는 술을 가져다가 임금님께 올렸다. 그런데 내가 이제까지 임금님 앞에서 슬퍼한 적이 없기 때문에,

2 임금님께서 나에게 물으셨다. “어째서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느냐? 네가 아픈 것 같지는 않으니, 마음의 슬픔일 수밖에 없겠구나.”

3 나는 크게 두려워하면서, 임금님께 아뢰었다. “임금님께서 만수무강하시기를 빕니다. 제 조상들의 묘지가 있는 도성은 폐허가 되고 성문들은 불에 타 버렸는데, 제가 어찌 슬픈 얼굴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4 그러자 임금님께서 나에게,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기에, 나는 하늘의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고, 5 임금님께 아뢰었다. “임금님께서 좋으시다면, 그리고 이 종을 곱게 보아 주신다면, 저를 유다로, 제 조상들의 묘지가 있는 도성으로 보내 주셔서, 그 도성을 다시 세우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6 그때에 왕비께서도 옆에 계셨는데, 임금님께서는 얼마 동안 가 있어야 하느냐? 언제면 돌아올 수 있겠느냐?” 하고 나에게 물으셨다. 임금님께서 이렇게 나를 보내시는 것을 좋게 여기셨으므로, 나는 임금님께 기간을 말씀드렸다.

7 나는 또 임금님께 아뢰었다. “임금님께서 좋으시다면, 유프라테스 서부 지방관들에게 가는 서신 몇 통을 저에게 내리게 하시어, 제가 유다에 다다를 때까지 그들이 저를 통과시키도록 해 주십시오.

8 또 왕실 숲지기 아삽에게도 서신을 내리시어, 하느님의 집 곁 성채의 문과 도성의 벽, 그리고 제가 들어가 살 집에 필요한 목재를 대게 해 주십시오.”

내 하느님의 너그러우신 손길이 나를 보살펴 주셨으므로, 임금님께서는 내 청을 들어주셨다.

 

화답송 시편137(136),1-2.3.4-5.6(6ㄴㄹ) 내가 너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으리라.

바빌론 강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그리며 눈물짓노라. 그 언덕 버드나무 가지에, 우리의 비파를 걸었노라.

우리를 포로로 잡아간 자들이, 노래를 부르라 하는구나. 압제자들이 흥을 돋우라 을러대는구나. “시온의 노래를 불러라. 우리에게 한가락 불러 보아라.”

우리 어찌 남의 나라 낯선 땅에서, 주님의 노래 부를 수 있으랴? 예루살렘아,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굳어 버리리라.

내가 만일 예루살렘 너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너를 가장 큰 기쁨으로 삼지 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으리라.

 

복음<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루카9,57-62)

예수님과 제자들이 57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5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59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0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61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2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또는, 기념일 독서(갈라 6,14-18)와 복음(마태 11,25-30)을 봉독할 수 있다.>






2023년 10월 4일 수요일  제1독서 (느헤2,1-8)


'느헤미야'의 히브리어 이름 뜻은 '주님께서 위로하셨다'이다.

 

느헤미야기는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 1-7장은 느헤미야의 회고록에

속하는데, 예루살렘 도성의 재건을 다루고 있다. 후반부 8-13장은 계약의 쇄신을

다룬다. 왜냐하면, 아무리 주님의 집인 성전이 세워지고 주님의 도성 예루살렘이

복구되어도, 사람들이 쇄신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으므로, 토라(모세오경)

에 바탕을 둔, 남은 자들의 영적 쇄신이 필요한 것이다.

 

페르시아의 임금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기원전 464-424년)의 고위 관리인 헌작

시종 느헤미야는 바빌론 포로살이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남은 자들이 큰 불행과

수치속에 살고 있으며, 예루살렘의 성벽이 무너지고 성문들이 불에 탔다는 소식을

듣고는 주저앉아 울면서 여러 날을 보낸다.

 

그러다가 단식하며 하늘의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바친 다음, 임금에게

예루살렘을 복구하게 해 달라고 간청한다. 임금은 그 간청을 받아들여 느헤미야를

유다의 지방 장관으로 임명하고,예루살렘으로 파견한다.

 

오늘 독서 느헤미야 2장 1-8절이 바로 그 내용이다. 

 

<임금님께서 나에게 물으셨다. " 어째서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느냐?

~제 조상들의 묘지가 있는 도성은 폐허가 되고 성문들은 불에 타 버렸는데,

 제가 어찌 슬픈 얼굴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임금님께서 나에게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기에,

나는 하늘의 하느님게 기도를 올리고, 임금님께 아뢰었다.

 

"임금님께서 좋으시다면, 그리고 이 종을 곱게 보아 주신다면, 저를 유다로,

제 조상들의 묘지가 있는 도성으로 보내 주셔서, 그 도성을 다시 세우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내 하느님의 너그러우신 손길이 나를 보살펴 주셨으므로, 임금님께서는 내 청을

들어 주셨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이 당신 뜻에 합당하면, 적장을 통해서도,

원수를 통해서도, 악을 통해서도 당신은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왜냐하면,

우리 구원과 성화를 위해서는. 나의 원수도, 약점도, 죄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손안에

두고 도구로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불편해하고 불평하고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나 일이나 사건이

하느님의 섭리안에서 우리 구원과 성화의 재료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알고, 

감사하며 시간을 기다려야한다.

 

 

영원한 행복을 위한 선택과 몰입 

- 기 프란치스코 신부 -

 

인생은 길입니다. 하루 일과를 시작하며 집을 나서 귀가할 때까지 길을 걷지요. 그렇게 우리는 늘 길 위에 있습니다. 길은 의미와 정서를 발생시키고 만남과 소통을 가능케 하는 무대이기도 하지요. 우리는 살기 위해, 버리기 위해, 나를 찾기 위해, 누군가와 함께 하기 위해 길을 걷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가고 계십니다.

길 위의 예수님께서는 여러 사람을 만나십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부르심에 응답하여 함께 걷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 길이 어떤 길이며 왜 가는지 알아차리지 못한 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께서 부르시기 전에 자발적으로 따르겠다고 했으나 어떤 길인지 잘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9,57-58).

예수님께서 길을 걷다가 만난 사람 중에는 그분께서 부르시자 자기 일을 더 중요시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미루는 사람도 있었습니다(9,59-60). 또 따를 의지도 있고, 따르기 위해 애착을 두는 것들에서 떠날 의지도 확고하지만 하느님 나라를 선택하고 거기에 몰입하는 것이 얼마나 긴박한 일인지 알아차리고 못한 채 안일한 태도를 보인 사람도 만나셨습니다(9,61).

나는 어떤 길을 걷고 있을까요? 행복을 원하면서도 행복하지 않고 기쁨을 느끼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뭔가 잘못된 길이나 공연히 헛수고를 하며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행복의 길이 무엇인지 알고 그 중요성을 인식하면서도 자꾸만 미루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떻게 행복하게 길을 걸어야 할까요?

진정 행복을 원한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만난 사람들과는 달라야하지 않을까요? 눈에 보이는 것, 나만을 위한 만족을 찾는 자세를 버리고 마음의 눈으로 보이는 가치 있는 것들에 눈을 떠야 합니다.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가치와 소중한 것들을 추구하며,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하느님의 손길을 읽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행복으로 가는 길은 가난의 길이요, 비움의 길입니다.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9,58) 예수님의 길, 곧 운명과 처지를 받아들여 그분과 함께 걸을 때 비로소 우리는 행복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행복은 낭만적인 풍경도 아니요 일시적인 감각의 자극으로 맛보는 감상적 충족감도 아닙니다. 행복은 고통과 어둠을 겪어냄으로써 만나는 선물입니다.

행복으로 가는 길은 버리고 떠나는 길입니다.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하느님의 미래를 향해 과감히 자신을 던질 줄 알아야 합니다. 애착이 많아 버리지 못하고 생각과 행동이 묶여있다면 나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상태에서는 자유롭게 행복 자체이신 예수님을 따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소유와 애착이 있는 길은 폐쇄되고 말 것입니다. 영(靈)의 숨결이 막혀버리지요.

영원한 행복을 원한다면 내 인생에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명확히 인식하고 그 소중한 것을 위해 '즉각적으로' 찾아나서고 '뒤를 돌아봄 없이' 몰입하며 항구히 투신해야겠지요. 주님께서 먼저 부르셨든, 주님께서 나에게 영감을 주시어 내가 자발적으로 따라나섰든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사랑의 길, 영원한 생명의 길을 선택하고 망설임없이 걸어갔으면 합니다. 거기에 참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연중 제26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강수원 베드로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따라나서려던 세 사람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들이 예수님과 나눈 대화마다(루카 9,57.59.61 참조)

‘주님을 추종하여 따름’을 표현하는 특별한 그리스어 동사 ‘아콜루테오’(따르다)가 사용되는데,

이 단어는 앞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마태오가 그분을 따라나선 대목에서도 사용됩니다(루카 5,11.27.28 참조).

이를 통하여 루카 복음사가는,

이 세 사람의 어정쩡한 태도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제자들의 모습과 병행시켜 대조적으로 드러냅니다.

첫 번째 사람은 “어디로 가시든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장담하지만,

이는 마땅한 거처도 없이

공생활 내내 떠돌아다니시던 예수님과 일행의 삶을 알지 못한 채 드린 공허한 다짐일 뿐입니다.

또 두 번째와 세 번째 사람은 각각 아버지의 장례와 가족들과의 작별 인사를 더 우선시합니다.

물론 유다인들에게 장례는 자식의 마땅한 도리고(토빗 4,3-4; 14,11-13 참조) 가족들과의 작별 인사 또한 인지상정이지만,

그 어떤 관행이나 기본적인 도리도 결코 주님을 따르는 일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제1독서에서 욥은 “그분께서 잡아채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누가 그분께 ‘왜 그러십니까?’ 할 수 있겠나?”라며,

하느님께 순명하는 데는 그 어떤 조건이나 타협도 있을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차마 세상의 방식대로 할 수 없어 무엇인가를 포기해야만 하고 신앙 때문에 불편을 겪을 때마다,

‘그래, 내가 지금 주님을 올바로 따르고 있구나!’라고 확신하며 기뻐해야 합니다.

사람의 일이 결코 하느님의 일보다 먼저일 수 없다는 소신을 품고서,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지 말고 단호히 구원 여정을 이어 갑시다.

 

(강수원 베드로 신부)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루카9,57-62)

예수님과 제자들이 57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 예수님께서 하늘로 가실 때가 되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었다. 곧 죄인들의 죗값으로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확실한 진리의 길이다,

그러나 오를 이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길을 모르고 따르겠단다. 그저 기적과 능력의 예수님을 따르면 자신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것라 생각한 것이다. 신앙의 목적에서 벗어났다.

그렇게 많은 신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구원의 진리임을 모르는 신앙생활을 한다.

 

(1베드1,9) 9 여러분의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 죄를 대속하신 내 십자가임을 모르면서 성당에 다닌다. 예수님의 대속으로 받는 용서를 모르고 그 십자가의 의로움으로 구원, 하늘의 생명을 받는 것을 모르고, 그러니 자기 열심, 자기 의로움으로 복을 얻기 위해 열심을 부린다.

 

58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 가난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자 그 예수님을 우리의 머리로 구원의 진리로 믿는이가 없다는 것이다.

 

(콜로1,18) 18 그분은 또한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이십니다. 그리하여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십니다.

 

(1코린6,15) 15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모릅니까? 그런데 그리스도의 지체를 떼어다가 탕녀의 지체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신앙의 올바른 목적지부터 ‘찾으라’ 하신다. 헛된 신앙생활를 ‘버리라’ 하시는 것이다.

과녁을 벗어나다- 하마트리아-죄(罪)

 

59ㄱ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 앞절, 그 신앙의 목적지, 과녁을 벗어난 그 사람과 다른 사람이다.

 

59ㄴ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0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 아버지의 장사(葬事)를 외면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죽은 이를 위한 신앙생활이 아닌 그 죽은 이, 곧 죄인을 살리는 하느님나라를 선포하는 신앙을 살라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늘의 생명(진리)을 갖지 못한 사람을 어둠(죄)으로 죽었다고 한다.(갈라3,22참조) 그 죽은 이를 살리는 것이 하느님나라의 기쁜 소식, 복음이다.

 

(마태4,23) 23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 모두 용서로 살려 주셨다는 것이다.

 

하늘나라의 복음,

(이사53,4-5) 4 그렇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5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루가4,18-19.21)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61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2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 쟁기에 손을 댄 사람~

 

(집회38,25) 25 쟁기를 다루면서 막대기 휘두르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황소를 몰면서 *자기 일에 몰두하며 송아지 이야기밖에 할 줄 모르는 자가 어떻게 지혜로워질 수 있겠느냐?

= 자기일, 자기 의로움을 자랑하는 사람, 곧 제사밖에 할 줄 모르는 자가(황소, 송아지는 제물) 하늘의 구원의 지혜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제사는 십자가에서 단 한번으로 다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돌아보는 자,

(창세19,17.26) 17 그들(천사)은 (화려한 삶의 소돔과 고모라에서) 롯의 가족을 밖으로 데리고 나와 말하였다. “달아나 목숨을 구하시오. 뒤를 돌아다보아서는 안 되오. 이 들판 어디에서도 멈추어 서지 마시오. 휩쓸려 가지 않으려거든 산으로 달아나시오.” 26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다보다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다.

= 하느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은 *자기의 뜻을 이루려는 신앙을~ *그 헛된 죽음의 신앙을~ 그리고 *세상이 주는 편안의 삶을 돌아보면 재앙이다. 곧 하늘의 십자가의 대속, 그 진리의 길, 그 생명의 말씀(물) 신앙에서, 제사 그 피의 신앙으로 돌아가면 재앙이다. 그것이 물이 피로 변한 곧, 생명이 죽음이 된 이집트의 첫째 재앙이다.(탈출7,14~)

 

(갈라3,3) 3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성령(생명)으로 시작하고서는 육(죽음)으로 마칠 셈입니까?

= 그 죽음의 문화, 죽음의 신앙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돌아보면 인된다.

 

(갈라5,1) 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죽으셨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아멘.!!!

 


 


 

 

20231004일 수요일

[연중 제26주간 수요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사제 정진만 안젤로)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의 두 번째 이야기를 전합니다.

957절의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는데라는 표현은,

오늘 복음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일어난 사건으로서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사건임을 확인하여 줍니다.

오늘 복음에 담긴 세 이야기의 주제는 따름입니다.

따르다로 옮길 수 있는 그리스 말 동사 아콜뤼테오가 이야기마다 쓰여(9,57.59.61 참조) 하나의 공통된 주제로 다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행을 시작하시면서 길 위에서 만난 이들에게 제자가 되기 위한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조건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자신에게 주어진 안녕과 평안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편히 쉬실 곳조차 없는 방랑자의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일상적 관습에서(1열왕 19,19-21 참조) 벗어나 하느님 나라를 위한 선택과 헌신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를 뛰어넘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행위에 중심을 두고 살아가는(루카 8,19-21 참조) 관계의 변화,

곧 새로운 가족 관계의 설정을 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발견되는 특이점은 제자가 되고 싶은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어떤 반응을 하였는지 알 수 없다는 점입니다.

루카 복음서 저자는 복음 속 이야기 세계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우리는 그분께서 걸어가신 길을 함께 걸어갈 준비가 되어 있나요?

오늘 교회가 경축하는 프란치스코 성인은 초대에 응답한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정진만 안젤로 신부)

 

 



  

 [연중 제26주간 수요일]

 

빗나간 먼저~, 먼저~.”

 

복음(루카9,57-62)

57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 어떤 사람은, 물론 율법주의(律法主義) 사람이다. 어디로 가시든지? 어제 확인했듯이 예수님께서 죽으러 가시는 길이다. 그 죽음의 길을 따르겠다는 말? - 그러면 사는데, 아니 반드시 그래야 산다.

*어제묵상- <율법(律法), 그 옛 계약의 심판(審判)으로 죽어야할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해(로마,20 야고2,10 갈라,10) 율법이 요구하는 죗값을 치루고 믿는 이들에게 의로움을 전가(傳家)시켜 주시기 위해(로마,21-24 히브7,18-19) 저주(詛呪)의 십자가(十字架)에 대신(代身) 달리시러, 곧 대속(代贖), 그 희생의 제사의 제물(祭物)이 되시기 위해 율법의 본거지(本據地)인 예루살렘에 가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대속(代贖), 그 십자가(十字架)가 생명(生命), 구원(救援)의 길, 진리(眞理)이니 반드시 따라야한다. 그것이 자기 버림, 부인(否認)의 삶이다. (루가9,23)

 

(갈라2,19) 19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살려고율법과 관련해서는 이미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 율법(律法)이 내 죄(罪)를 드러냈고, 그 죄(罪)를 그리스도께서 대속(代贖)하셨다. 그래서 세상에 대해서 죽었고, 끊어졌고, 이제 그리스도로 사는 것, 그분과 함께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힘이다.

 

(갈라5,24) 24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5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 예수님이 우리 모두의 머리이시다.

 

(1코린12,12.27) 12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27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에페3,5-6) 5 그 신비가 과거의 모든 세대에서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지금은 성령을 통하여 그분의 거룩한 사도들과 예언자들에게 계시되었습니다. 6 곧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 모든 사람이 자신의 뜻, 소원(所願)을 위해 각자의 머리(생각)로 살아가고 있기에 예수님께서 머리로 계실 곳이 없다 하심이다. 곧 예수님(머리)의 명령대로 살지, 움직이지 못하는 중풍병자(中風病者)로, 하늘의 용서, 생명을 상속(相續)받지 못하는 헛된 신앙(信仰)을 살고 있음이다.

 

59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葬事)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0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 숨겨진 뜻은, ‘죽은 이들의 장사(葬事)’는 예수님께서 새 계약(契約)으로 치우신 옛 계약, 그 없음인 ‘율법(律法)의 일’이므로 하지 말라 하심이다. *먼저- 십자가의 대속, 그 새 계약으로 얻는 ‘하늘의 용서, 의(義), 쉼, 안식, 자유, 생명, 평화~’ 그 하느님 나라를 알고 선포(宣布)하라 하심이다.

 

61 또 다른 사람이 주님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2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 하느님 나라의 도구(道具), 곧 하느님의 계약(스타오로스), 그 십자가(스타오로스)의 복음(福音)을 듣고 ‘뒤를 돌아봄’은 옛 것에 대한 미련(未練), 애착(愛着)이 남아있음을 지적(指摘)하심이다.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진리(眞理)로 깨달아 믿고 전(傳)해야,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十字架)의 대속(代贖), 그 피의 새 계약(契約)을 가족들에게 선포(宣布)해야, 가족들이 그리스도(머리)의 지체(肢體)로 하늘의 상속(구원)을 받게 됨이 합당(合當)하다는 말씀이다.

 

(로마4,14) 14 율법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상속자라면믿음은 의미가 없어지고 약속은 무효가 됩니다.

= 율법(律法), 제사(祭祀)와 윤리(倫理), 교리(敎理)의 의(義)로는 구원(救援)받지 못한다. (로마3,20-24 야고2,10) *먼저- 율법(제사, 윤리, 교리)을 잘 지켜 착하게 살아야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성당(聖堂)활동, 전례(典禮)등에 열심하지 않으면 잘못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열심한 행위는 신앙이, 믿음이 아니었다. 믿음이 없기에 본당활동, 전례에 더 열심을 부렸던 것이다.

하느님의 뜻, 구원의 약속, 계약인 십자가의 대속, 그 그리스도의 죽음이 진리임을, 말씀을 통해 깨닫고 나니, 믿음으로 모든 것에서 자유하게 되었다.

 

(갈라3,22-25) 22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어 놓았습니다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믿는 이들이 약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23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갇혀믿음이 계시될 때까지 율법의 감시를 받아 왔습니다. 24 그리하여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 25 그러나 믿음이 온 뒤로 우리는 더 이상 감시자 아래 있지 않습니다.

 

☨ 영원한 보호자진리의 길로 인도하시는 천주의 성령님!

그리스도 안에 구원이진리가 있음을 먼저 깨닫고알고믿음으로 살게 하소서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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