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1월 21일 토요일
[연중 제2주간 토요일] 소문(所聞)을 듣고 (마르3,20-21)
제1독서<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피를 가지고 단 한 번 성소로 들어가셨습니다.>(히브9,2-3.11-14)
2 첫째 성막이 세워져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제사 빵이 놓여 있었는데, 그곳을 ‘성소’라고 합니다.
3 둘째 휘장 뒤에는 ‘지성소’라고 하는 성막이 있었습니다.
11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이루어진 좋은 것들을 주관하시는 대사제로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사람 손으로 만들지 않은, 곧 이 피조물에 속하지 않는 더 훌륭하고 더 완전한 성막으로 들어가셨습니다.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당신의 피를 가지고 단 한 번 성소로 들어가시어 영원한 해방을 얻으셨습니다.
13 염소와 황소의 피, 그리고 더러워진 사람들에게 뿌리는 암송아지의 재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그 몸을 깨끗하게 한다면,
14 하물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화답송시편 47(46),2-3.6-7.8-9(◎6) ◎환호 소리 가운데 하느님이 오르신다. 나팔 소리 가운데 주님이 오르신다.
○ 모든 민족들아, 손뼉을 쳐라. 기뻐 소리치며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주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 경외로우신 분, 온 세상의 위대하신 임금이시다. ◎
○ 환호 소리 가운데 하느님이 오르신다. 나팔 소리 가운데 주님이 오르신다. 노래하여라, 하느님께 노래하여라. 노래하여라, 우리 임금님께 노래하여라. ◎
○ 하느님이 온 누리의 임금이시니, 찬미의 노래 불러 드려라. 하느님이 민족들을 다스리신다. 하느님이 거룩한 어좌에 앉으신다. ◎
복음<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다.>(마르3,20-21)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20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21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연중 제2주간 토요일 제1독서 (히브9,2-3.11-14)
"첫째 성막이 세워져 그 안에 등잔대와 제사 빵이 놓여 있었는데, 그곳을 '성소'라고 합니다. 둘째 휘장 뒤에는 '지성소'라고 하는 성막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이루어진 좋은 것들을 주관하시는 대사제로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사람 손으로 만들지 않은, 곧 피조물에 속하지 않는 더 훌륭하고 더 완전한 성막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당신의 피를 가지고 단 한번 성소로 들어가시어 영원한 해방을 얻으셨습니다." (2~3.11~12)
구약은 신약의 예표요 암시이며 약속이고, 신약은 구약의 완성이요 성취이며 실현이다.
탈출기 26장에 나오는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이 들어 있는 '계약 궤'를 모시는 '성막' 혹은 '만남의 천막'에 대한 계시는 바로 신약의 교회의 모습을 미리 보여준다.
성막의 울타리의 문은 동쪽에 있는데, 그것을 열고 들어가면 (번)제단 (탈출27,1~8; 38,1~7)이 있다. 그것은 하느님께 바쳐지는 여러 가지 제사 (화목의 친교제사, 속죄제사 등등)에 바쳐지는 동물을 살라 바쳐지는 곳으로, 신약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갈바리아를 예표한다.
그리고 만남의 천막에 들어가기 전 물두멍(탈출30,17~21; 38,8)이 있는데, 만남의
천막 안에 들어가 봉사할 레위 족속들이 손과 발을 씻는 곳인데, 수족(手足)을 정화하지
않고 만남의 천막 안에 들어오면 그들은 죽게 된다.
말하자면, 번제단과 물두멍은 가톨릭 교회의 예수님의 십자가상 구속 성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죄사함이 은총을 얻어입는 세례성사를 상징한다.
그리고 이제 만남의 천막 안에 들어가면, 휘장을 사이에 두고 지성소와 성소로 나뉘어진다.
성소는 지성소를 모신 휘장을 앞에 두고, 왼쪽에는 등잔대(탈출25,31~40; 37,17~24), 오른쪽에는 제사상(탈출25,23~30; 37,10~16)이 있으며, 휘장 앞에는 분향제단 (탈출30,1~10; 37,25~28)이 놓여 있다.
왼쪽에 금으로 된 일곱 촛대로 만들어진 등잔대는 시편119장 105절의 '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라는 말씀대로 영혼의 양식이며 하느님의 뜻이 들어있는 계명을 상징하는 신,구약의 '말씀'을 의미한다.
성막을 비추는 등불은 올리브 기름에 의해 유지되므로, 이스라엘의 주요 농산물인 올리브 나무의 열매는 이스라엘의 생계를 어느 정도 책임져 주므로, 그들의 생사대권이 하느님께 있다는 것을 가리키며,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고 계명의 실천으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할 때, 현세적이고 육신적인 생명도 계속 축복받음을 상징한다.
오른쪽에 있는 제사상에는 이스라엘의 12지파 수대로 광야 생활에서 아침에 해뜨기 전에 수거한 만나로 만든 빵을 제일 먼저 만들어 하느님께 봉헌하여 제사상 위에 6개씩 두 줄로 올려 놓으면 일주일에 한번 씩 갈아 놓는데, 이것은 신약의 '성체성사'를 상징한다.
그리고 지성소가 모셔진 휘장 앞의 분향 제단(탈출30,1~10; 37,25~28)은 제사상보다 높은 데, 대사제가 바치는 '기도'가 피어오르는 '향'으로 상징된다.
바로 이것은 영원한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치는 기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부 하느님께 바쳐지는 기도를 의미하는데, 성막 밖의 번제단과 물두멍이 가리켜 주듯이 대죄의 사함을 온전히 받아 은총의 지위에서 바쳐지는 기도와 예배만이 무죄하시고 거룩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부 하느님께 올려짐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휘장에 대해서는 탈출기 26장 31~37절(탈출36,35~38)에 나온다.
1년에 한 번 속죄의 날에 대사제가 자신과 자신의 가족,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잘못을 벗기 위해서 속죄 예식을 거행한다.
이것은 레위기 16장 1~34절에 나온다.
대사제는 자신과 자기 집안을 위한 속죄 예식을 거행하기 위해 휘장 안으로 들어가 황소의 피를 얼마쯤 가져다가 속죄판 동쪽 위로, 그 피를 손가락에 찍어 속죄판 앞에 일곱 번 뿌린다(레위16,14).
그리고 백성을 위한 속죄 제물이 될 숫염소를 잡아 그 피를 휘장 안으로 가져와 황소 피를 뿌릴 때와 마찬가지로 속죄판 앞과 위에 뿌린다(레위16,15~16).
이것은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이 상징하는 율법이 계약의 궤 안에 들어 있는데, 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왔고, 이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느님 대전에 나아갈 수가 없다.
그래서 십계명이 들어 있는 계약의 궤의 두껑(증언판 혹은 증거판) 위에 또 하나의 두껑인 속죄판을 씌웠는데, 속죄의 날에 대사제가 번제단에서 잡은 황소와 숫염소의 피가 바로 그 속죄판 위에 떨어져 율법으로 말미암아 지은 죄를 씻어 준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속죄판과 그 속죄판 위에 뿌려지는 피는 신약의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속죄판 위로 양 옆에 만들어진 케루빔(한글 새 성경에는 커룹) 천사들이 그 피가 뿌려지는 속죄판을 바라보며 경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바로 그 속죄판 위의 케루빔 천사들 사이에서 당신의 현존과 임재를 드러내시며, 모세와 대사제와 대화하시고 기도를 들어주시는데, 이 하느님 현존과 임재의 자리를 '셰키나'(shekinah)라고 한다.
바로 이 '셰키나'로 부터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성막 천정을 뚫고 하늘로 올라가며 나타나는 것이다.
이 만남의 천막(성막)의 '계약의 궤'를 모신 지성소가 있는 곳이 서쪽인데, 여기 '계약의 궤'위의 '셰키나'로 부터 나오는 구름기둥(불기둥)을 보고 하느님께서 자신의 진영에 함께 머물고 계심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알아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만남의 천막(성막)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가 동서남북으로 세 지파씩 천막을 치고 초막(장막) 생활을 하다가, 구름기둥이 움직이면, 만남의 천막과 자신들의 천막들을 거두어 구름이 인도하는 방향으로 '계약의 궤'를 모시고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바로 요르단강(죽음을 상징)을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천국을 상징)을 향해 행진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지상의 순례 생활을 상징하는 광야의 초막 생활은 무조건 제멋대로 사는 생활이 아니라, 구름 기둥(불기둥)의 안내로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는' (Go & Stop) 철저히 하느님 중심의 순종 생활이었던 것이다.
바로 오늘 히브리서 독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못박혀 운명하셨을 때에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것처럼, 무죄하신 예수님의 단 한번의 인류 구원을 위한 대속의 희생 제사로 말미암아, 인류가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하느님 아버지의 옥좌가 계시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렸음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고 있다.
참고로, 번제단의 짐승이 태워지는 속불판과 만나가 놓여진 제사상과 계약의 궤의 속죄판의 높이가 같다는 것은 엄청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희생과 사랑의 신비를 계시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계약의 궤'(The Ark of Covenant)에는 '영원으로부터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십계명이 세겨진 돌판', 그리고 '성체성사'를 상징하는 '만나가 들어있는 금항아리', 그리고 '사제직과 성사 은총'을 상징하는 '싹이 트고 꽃이 피며 열매를 맺은 아론의 지팡이'가 들어있다.
이것은 이 땅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를 체험하는 세 가지 방법인 '말씀'과 '성체성사', '사제직과 성사은총'를 계시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상징하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는 '성체'가 모셔진 '감실'(Tabernacle)을 예표하는 것이다.
따라서 '계약의 궤'는 우리가 몸담고 사는 신약의 '감실'을 의미하고 있다.
2023년 01월 21일 토요일
[연중 제2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허규 베네딕토 신부)
오늘 복음은 군중과 예수님의 친척들을 비교합니다.
집으로 돌아간 예수님과 제자들은 몰려드는 군중 때문에 제대로 쉴 수 없었습니다.
맥락을 보면 군중은 예수님을 보려고, 그분의 자비를 구하고 그분의 업적을 보려고 모여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병을 고치시고 악령을 쫓아내시며 기쁜 소식을 선포하십니다.
마르코 복음은 시작 부분부터 이러한 업적을 다양하게 보여 줍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친척들은 군중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미치셨다고 생각하여 그분을 잡으러 옵니다.
같은 한 분이시지만 예수님에 대한 평가는 사뭇 다릅니다.
예수님의 업적을 보고 그분을 믿는 이들이 있는 반면에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판단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자 먼 곳에서 찾아오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을 비난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자신들의 희망을 예수님께 두는 이들과는 다르게 친척들은 그분께서 미치셨다고 생각합니다.
집을 떠나 제자들과 함께 죄인과 세리들과 어울리며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갈등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한편으로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이와 비슷할지 모릅니다.
같은 예수님을 믿지만 믿음의 모습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믿음은 삶의 기준과도 같습니다.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복음을 삶의 중심으로 삼는 것입니다.
어떤 일에 대한 판단과 해석의 기준은 다양할 것입니다.
그 기준이 어떤 이들에게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재물이나 명예를 추구하는 것일 수 있지만,
신앙인에게는 일상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1년 1월 23일 [연중 제2주간 토요일]
예수님이 미쳤다고.
하느님께서 피조물인 우리의 죄로 대신 죽으러 오셨으니 우리의 주님께서 미치신 것 맞다. 미치도록 사랑하면 눈에 뵈는 것이 없음을(특히 자녀를 위한 사랑) 아무도 말리지 못함을 벌레만도 못한 우리도 경험하지 않는가~
(마르3,20) 20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 앞 9절 이하에서 예수님께서 군중이 당신을 밀쳐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는데, 예수님께서 타실 그 배는 당신이 담고 오신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그 말씀이 주인인 교회를 준비하라고 하신 것으로 묵상 했었다.
곧 그 말씀이 예수님이며(요한1,14) 그 말씀이 일하시는 것이고(1테살2,13) 그 말씀이 죄인을 거룩하게 하시기 때문에(에페5,26-27), 그래서 그 말씀을 생명, 구원의 진리로 깨닫게 되면 선악의 계명, 그 무력한 신앙에서 벗어나 죄의식에 묶이지 않을 것이며 온갖 환난, 질병 속에서도 하늘의 평화, 안식을 땅에서부터 살 게 될 것이라 묵상했었다.
그러면 그 말씀을 붙들고 매달려 기도하면서 용서, 치유, 구원자, 그 예수님과 하나 되는 길을 찾아야(깨달아야)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그 말씀을 깨달을(찾을) 생각은 하지 않고 여전히 보이는 ‘육의 치유자’를 다시 찾아 온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하신 것이다.
다시 온 그들 때문에 올바른 양식, 곧 하느님의 말씀을 진리의 양식을 먹을 수도, 먹일 수도 없었다는 뜻이다. 우리 역시 말씀을 묵상하고 깨달아 구원의 진리이신 예수님과 한 몸, 하나가 되기 위한 기도가 아닌- 우리의 소원, 내 뜻을 위해 열심한 종교행위로 빈말 기도로 바쁜 신앙을 살며 그것이 참 신앙 인냥 만족해하며 안심하고 산다. 그러나 불법이라 하신다.
(마태7,22-23) 22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23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 구원의 말씀과 한 몸, 하나가 되지 않았다는 말씀이시다.
우리는 독서의 말씀으로 다시 하나가 되자.
(히브9,14) 14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마르3,21) 21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 *그동안 묵상한 말씀을 기억해 보자. - 친척들은 무슨 소문을 들었기에 미쳤다고 생각했을까?
우선 앞절로 가보자.
(마르2,16-17) 16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만나러 왔다’고 하시며 그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다는 소문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죄를 대속하시고 그들을 거저 의롭게 하시러 오셨다(로마3,24) 그리고 바라사이들이 ‘제자들은 왜 단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마르2,19-20)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20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 음식을 끊는, 굶는 그 율법의 단식, 그 사람들의 수고, 희생을 무시하였기 때문이다. 그 율법을 끊고, 단식하고 죄의 대속 그 진리의 복음을 먹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참 단식 - 이사58,6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마르2,27-28) 2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28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 당시 사람들은 깨달음으로 얻는 안식이 아닌, 안식일을 지키는 그 행위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예수님께서는 법, 교리로 지키는 그 안식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안식을 깨닫는, 곧 예수님의 대속, 그분의 십자가를 구원의 진리로 깨달아 그 십자가로 받는 용서, 자유, 쉼, 그 안식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시려하자 ~
(마르3,2) 2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 그들의 속셈을 아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해야 할 좋은 일은, ‘사람을 구하는 일’이라 하시며 그 사람을 말씀으로 고쳐 주셨기 때문이다, 곧 그 말씀은 법으로 지키는 안식일, 그 행위로는 사람을 구하지 못하는 헛된 것이라 하신 것이다. 그래서 ‘미쳤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모든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 그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실 ‘미쳤다’는 말은 ‘어느 경지에 다달았다.’의 그 미쳤다는 뜻이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친척(신자)들은 나쁜 의미로 정신이상자로 생각했던 것이다. 다른 말로 핍박이고 박해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요한15,18.20)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미쳤다고)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20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
= 그래서 복음을 전하면서 사람들의 미움과 박해, 그리고 이상한 소리를 하는 이상한(미친) 사람이라 말을 듣지 못한다면 올바른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의 지혜로 보면 - 어리석음, 곧 미친 것이기 때문이다.
(1코린1,21) 21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복음 선포의 어리석음(미친짓)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1코린2,14) 14 그러나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미친짓)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만 판단할 수 있기에 그러한 사람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 예수님의 모습이다. 그러나 믿는 우리에게는 어리석음(미친짓)이 구원의 힘입니다. 미치신 예수님을 알아본 우리 또한 미친자(어리석은자)들인 것입니다.
(1코린1,18) 18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미친짓)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아멘.
☨ 천주의 성령님! 늘 당신으로 충만하게 하시어 제대로(올바로) 미치게 하소서~아멘 *^ㅇ^*
연중 제2주간 토요일 복음 (마르3,20~21)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1)
'예수님의 친척들'에 해당하는 '호이 파르 아우투'(hoi par autou; his family)는 '그에게 속한 자들' 또는 '그와 함께 한 자들'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친구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지만, 마르코 복음 3장 31절 이하의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데리러 오는 문맥과의 조화를 생각하면, 이들은 '예수님의 가족들'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붙잡으러'에 해당하는 '크라테사이'(kratesai; to take charge of; to lay hold on)의 원형 '크라테오'(krateo)는 '체포하다'라는 뜻이라서 (마르6,17; 12,12참조), 예수님께 대한 그의 가족들의 태도가 얼마나 무지하고 살벌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예수님께서 당신의 일을 이해하지 못한 그들에 대해 영적인 의미에서 가족이 될 수 없다고까지 말씀하신 반응이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의 친척들이 보인 이런 부정적인 모습은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큰 영적 무지와 어리석음에 빠져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는지에 대한 척도가 된다.
이제 예수님께 대한 평가의 하나인 '그가 미쳤다'에 대해서 알아볼 차례이다.
'예수님께서 미쳤다'에 해당하는 '엑세스테'(ekseste; he is beside himself; he is out of his mind)의 원형 '엑시스테미'(eksistemi)는 '~의 밖으로' 라는 뜻의 전치사 '에크'(ek)와 '어떤 상황이나 관계 속에 있다'는 뜻의 동사 '히스테미'(histemi)의 합성어이다.
말하자면, 이 단어는 예수님께서 현재의 상황이나 현상들에 대하여 정상적인 이해가 불가능한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께 대한 이런 단정적인 소문은 예수님의 가족들로 하여금 그를 집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특히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미쳤다'는 말은 곧 '마귀가 들렸다'는 뜻이었다(마르1,23).
이 구절 이후에도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대해 베엘제불이 들렸고,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하는 내용이 나온다(마르3,22).
특히 마르코 복음 3장 30절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그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마르코 복음 6장 1절 이하를 보면 고향 사람들도 예수님의 일에 대해서 신뢰하지 않았고, 요한 복음 7장 5절에는 예수님의 형제들 역시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마르코 복음 3장 21절과 3장 31~35절의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판단하고 그를 붙들러 온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마르코 복음 3장 22~30절에서 예수님을 향해 베엘제불이 들렸다고 하는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 학자들과 예수님의 논쟁을 앞뒤에서 둘러싸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한편에서는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고 마귀를 내쫓는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의 소유자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소문도 돌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예수님께서 단순히 마귀들려 미쳤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멀리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학자들 뿐만 아니라(마르3,22), 그의 일을 지켜본 갈릴래아의 사람들이나(마르3,21 후반절) 심지어 자신의 친척들과 가족들까지(마르3,21 전반절)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마귀에 들려서 미친 사람 취급을 했다는 사실을 통해 볼 때, 예수님께 대한 비난에 가까운 배척과 오해, 영적 무지와 불신이 더 지배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