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1월 14일 토요일
[연중 제1주간 토요일] “나를 따라라.” (마르2,13-17)
제1독서<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히브4,12-16)
12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13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14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15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16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화답송시편 19(18),8.9.10.15(◎ 요한 6,63ㄷ 참조) ◎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 돋우고, 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음 깨우치네. ◎
○ 주님의 규정 올바르니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 밝으니 눈을 맑게 하네. ◎
○ 주님을 경외함 순수하니 영원히 이어지고, 주님의 법규들 진실하니 모두 의롭네. ◎
○ 저의 반석, 저의 구원자이신 주님, 제 입으로 드리는 말씀, 제 마음속 생각,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
복음<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2,13-17)
13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14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5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16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연중 제1주간 토요일 제1독서 (히브4,12-16)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14-15)
히브리서 전반부인 1장 1절에서 10장 18절까지는,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시고 완성시키신 예수님께서 구약에 나오는 여러 신분들에 대한 우월성을 지니고 계심을 증거한다.
히브리서 1장 1절에서 4장 13절까지는 특히 예수님의 신분과 구원자로서의 우월성을 증거한다. 구체적으로 당시 유대출신 성도들이 능력의 존재로 섬기기까지 했던 천사들 보다 우월함을 증거한다.
또한 하느님의 율법을 수여받았으며, 가장 탁월한 민족의 영도자로 여김을 받았던 모세보다 더 뛰어난 그리스도의 우월성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이어지는 히브리서 4장 14절에서 10장 18절까지는, 예수님의 대사제로서의 지위와 사명과 일의 우월성에 대하여 증거한다. 그 가운데서 히브리서 4장 14절에서 7장 28절은 예수님께서 레위계통 사제들보다 더 뛰어나신 대사제되심을 밝힌다.
히브리서 4장 14절에서 16절은 이러한 새로운 주제를 시작하는 서론 부분으로서 예수님께서는 위대한 대사제임을 밝힘과 동시에, 본 서간의 수신자들에게 성도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대사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권면하는 부분이다.
히브리서 4장 14절에서 '우리에게는 ~ 계십니다'로 번역된 '에콘테스'(echontes)는 '가지다'(have),'취하다'(take)등을 뜻하는 동사 '에코'(echo)의 현재 분사 1인칭 복수이며, 문장 서두에 나와 특별히 강조되고 있다.
우리가 대사제 예수님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대사제되신 예수님이 우리 신앙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며, 우리가 그분의 완전한 제사로 하느님께 나아 갈 수 있음을 나타낸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미 3장 1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대사제로 지칭한 바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서 전체에서 예수님의 사제직을 비중있게 다룬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는 단 한번에 영원한 효력을 나타낸 완전한 제사이기 때문에 더 이상 속죄를 위해 제사드릴 필요가 없음을 히브리서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강조가 불가피했던 것은 히브리서의 일차 독자인 당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적 제사, 즉 율법 중심의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려는 유혹을 크게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서 저자는 예수님을 지칭하는 '대사제'라는 단어 앞에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여기서 '위대한'에 해당하는 '메간'(megan)의 원형 '메가스'(megas)는 지위 및 품위과 관련하여 인격적인 존재에 대해서 쓰일 때에 '높은', '위대한', '큰'등을 뜻한다.
저자는 본서에서 그리스도의 대사제직이 구약의 레위 계통의 대사제보다 훨씬 우월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 단어를 쓴 것이다. '대사제'로 번역된 '아르키에레아'(archierea)의 원형 '아르케이류스'(archiereus)는 '첫째', '시작', '우두머리' 를 뜻하는 '아르케'(arche)와 '사제'를 뜻하는 '히에류스'(hierues)의 합성어로서 '대사제'(우두머리 제사장)라는 의미이다.
고대 그리스 시인 Herodotus가 이집트의 주요한 사제를 나타낼 때, 그 사제는 왕 다음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유대 철학자 Philo는 유대 사회의 대사제란 백성을 대표하며, 속죄시에는 백성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고,또한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의미들이 히브리서 저자에게 대사제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대사제는 자신의 직무를 온전히 수행하려고 하면, 하느님과 인간을 완전하게 아는 자여야 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에게 전하고, 하느님의 임재하심을 인간에게 보이며, 인간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자이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로서의 이 역할을 완전하게 할 수 있는 위대한 대사제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음을 저자는 본서에서 밝히고 있다.
이 위대한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레위 계층의 사제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점이 히브리서 4장 14절에서 두 가지가 나온다.
하나는 그분이 '하늘 위로 올라가신'(승천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디엘렐뤼토타 투스 우라누스'(eielelythota tus uranus)를 직역하면, '하늘들을 통과하여 지나간'(who has gone through the heavens)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들을 지나가신, 즉 통과하신 위대한 대사제이시다.
저자가 '하늘'(uranus)을 복수형으로 표현한 것은, 하늘이 3층 혹은 7층으로 되어 있고, 그 하늘들의 정상에 하느님의 옥좌가 있다는 유대 사상과 관련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는데,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옥좌가 있는 곳으로 믿는 하늘들의 정상에 올라가신 것이다(마르16,19; 사도1,10).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행했던 일이요, 동시에 레위 계통의 사제들과 확실히 구별되는 놀라운 일이다.
두번째로 레위 계통의 사제들과 구별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곧 하느님과 동일한 신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을 말한다(요한14,9.10).
특히 본서의 저자는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쓰지 않고 역사적 인물인 예수님의 이름만을 기록함으로써, 그분이 우리를 위한 대사제의 직무를 수행하실 수 있는 완전한 인간임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신성을 지닌 하느님의 아들임과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이다. 말씀으로 존재하시던 하느님께서 완전한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이다(요한1,14).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으로서(요한1,3), 그 어떤 피조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느님이시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본문에서 '고백하는 신앙'으로 번역된 '호몰로기아스'(homollogias)의 원형 '호몰로기아'(homollogia)는 '신앙 고백'을 뜻한다. 이것은 내적으로는 마음에 품어지고, 외적으로는 사람들 앞에서 고백되는 신앙, 즉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 대해서 믿는다고 공언하는 그 신앙을 말한다(로마10,9.10).
'우리가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로 번역된 '크라토멘'(kratomen)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굳게 붙들다'를 뜻하는 '크라테오'(krateo)의 현재 가정법이며 권유를 나타낸다.
이 동사 '크라테오'(krateo)는 '힘', '권능' 등을 의미하는 '크라토스'(kratos)에서 유래했으며, '강하다', '힘을 소유하다', '승리하다' 라는 의미외에도 우위를 점함으로써 붙잡는 행위를 나타내는 단어로서, 꽉 잡는 것, 간직하는 것 등의 다양한 의미로 쓰였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고 고수했는데, 이러한 습관을 잘 아는 저자가 히브리 그리스도인(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교 교회의 전승으로 신앙 고백을 하도록 권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여기서 '연약함'으로 번역된 '아스테네이아이스'(astheneiais)의 원형 '아스테네이아'(astheneia)는 '약함'(weak), '허약한'(infirm), '연약한'(feeble)을 의미하는 형용사 '아스테네스'(asthenes)에서 유래한 명사로서,신체와 영혼과 심령의 연약함을 나타내는 의학 및 종교적 용어이다(루카13,12; 요한11,4).
본문에서는 복수형으로 쓰였는데, 목마름 등을 느낀다든지 또 다른 육체적이나 정신적인 고통을 느끼는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께서도 경험하셨음을 나타낸다.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이중 부정문('우 ~메'; u ~ me)을 사용해서 저자는 예수님께 대해 동정심이 많은 분임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동정하지'로 번역된 '쉼파테사이'(sympathesai)의 원형 '쉼파테오' (sympatheo)는 '같은', '동일한'을 뜻하는 전치사 '쉰'(syn)과 '겪다', '고난을 당하다'를 뜻하는 동사 '파스코'(pascho)에서 유래한 합성어로서, '다른 이와 동일한 느낌을 받다' '공감하다', '동정하다' 라는 뜻이다.
이 동사의 어원이 나타내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동일한 감정을 가지셨으며, 우리에 대해 동료 의식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분께서 우리와 동일한 감정을 지니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동일하게 느끼셨음을 나타낸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느님께서 인간의 감정을 공유하신 분이라고 증거한다.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동일한 완전한 인간이었음을 다시 한번 더 강조해주는 내용이다. '유혹을 받으신'으로 번역된 '페페이라스메논'(pepeirasmenon)는 어떤 것을 입증하기 위해 '시험하다', 혹은 넘어뜨리기 위해 '유혹하다' 는 뜻을 가진 '페이라조'(peirazo)의 수동태 완료 분사이다.
저자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유혹과 똑같은 방식으로 예수님께서도 유혹을 당하셨음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유혹은 그분으로 하여금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불순종하게 하기 위한 사탄의 철저히 계산된 술책에서 나온 것이었다.
성도로서 우리가 당하는 것은 대부분 유혹(temptation)의 경향을 띠고 있어서(야고1,14), 아담처럼 단지 인간의 연약한 의지와 감정으로서 이에 대응한다면 실패할 수 밖에 없다.
모든 유혹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의탁함으로써 사탄의 세력에 대응하는 사람들만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유혹을 이기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죄는 짓지 않으신'
예수님의 무죄성과 흠이 없음을 보여주는 경험적인 구절이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가셔서 세례를 받고자 하셨을 떄, 세례자 요한이 말린 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성을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마태3,11-14).
세례자 요한이 베푼 세례는 회개의 세례였기 때문에 죄인들만 그 대상이 되었는데,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의 완전한 일치를 위해서, 그리고 인간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베풀도록 요청하셨던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받으신 격렬한 유혹들은 내적 욕망에서 비롯되지 않고, 단지 밖에서 온 것들일 뿐이다. 이 점이 인간이 당하는 유혹(야고1,14)과 다르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어떤 경험을 하셨다 해도, 그것은 우리 인간이 자신의 욕심에 끌려 유혹을 받는 것과 달리 단지 밖에서 즉 사탄에게서 오는 것일 뿐이므로 그분께서는 죄를 범하는 일이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유혹을 받으면 촉발되는 잠재적인 본성도, 반드시 극복하지 않으면 안될 죄의 습성도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2023년 01월 14일 토요일
[연중 제1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허규 베네딕토 신부)
유다인들은 율법을 지키며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계명과 율법을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문자로 기록해 주신 하느님의 뜻이라고 여겼고,
실제로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에 걸맞게 거룩함을 유지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생활이나 음식이나 모든 일에서 부정해지는 것을 피하려고 애썼습니다.
특별히 복음서에 자주 언급되는 바리사이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이런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에 몰두하였던 이들입니다.
유다인들의 의도는 좋은 것이었지만 거기에서 부정적이거나 배타적인 여러 모습이 생겨났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부정한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는 것도 포함되는데 그 대표적인 이들이 죄인과 세리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의문을 가집니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이들의 생활 방식을 생각하면 이런 질문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바리사이들의 모습을 염두에 둔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죄인으로 여기는 이들을 부르러 왔다.’고 이해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바리사이들 또한 예수님의 구원에서 배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잘못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되어 스스로 의인과 죄인을 구분하는 그릇된 결과를 가져옵니다.
어느 누구도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연중 제1주간 토요일]
자신이 어둠(죄인)임을 모를 때 빛(용서)은 보이지 않는다.
(마르2,13-17)
13 예수님께서 *다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 앞 절에서 중풍병자에게 생명, 곧 구원을 주시고 다시 가신 것이다.
(영성체송)요한 10,10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14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 당신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 따라라 하셨던 것이다. 그 하늘의 생명을 받기 위해 전제되어야할 것이 있다.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 따르는 것이다. 곧 옛 자이, 죄와 욕망의 자신을 버리는, 부인하는 것이다.
병행복음(루가5,28) 28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5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과 같아지려 하는 것이다.
(히브2,14-15.17) 14 이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15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7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 그들의 죄(죽음)의 음식을 먹고, 대신 죽으시고 당신의 생명을 주시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함께 밥을 먹는 것을 꺼려할 때, 누군가가 함께 해 줄 때, 같이 밥을 먹어줄 때 얼마나 힘이 나겠는가, 생명(자존감), 그 힘으로 오신 예수님이다. 그래서 예수님 곁에 죄인들이 많이 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의롭다하는 이들은 죄인들을 기피했다. 죄인(부정한)들과 함께 하는 것이 율법을 어기는 것으로 같은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16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으니,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사람들은 문제가 없다. 치료자, 구원의 빛이신 주님을 만났으니까. 앞에서 보았듯이 그들은 빠른 응답으로 예수님을 따랐다.
문제는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제사와 윤리로 충실하며 ‘의롭다’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다. 죄인들은 용서받을 길이 있지만 스스로 의롭다하는 그들은 용서받을 길이 없다.
(루가18,9-14) 9 예수님께서는 또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참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가?)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죄인임을 인정하며 자비를 청하는 세리다. 이 죄인을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 그 착하고 의롭다는 자들이 예수님을 죽이지 않았는가? - 그래서 사람의 의로움은 위선이요 개짐(똥 걸레)이라고 하신 것이다.(이사64,5) 모든 인간은 십자가의 대속, 그 ‘예수 그리스도’로만 구원에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먼저 죄(하마트리아 - 과녁을 벗어난), 하느님의 뜻에서 벗어난 것이 죄다.
(요한3,16)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속죄 제물)을 내 주시어,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 예수님의 대속으로 얻는 생명이다.
(요한6,40) 40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요한14,6)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그 하느님의 뜻을 믿지 않고, 의지하지 않는 것, 하느님의 뜻에서 벗어난 죄다. 곧 하느님의 말씀, 지혜, 계명, 그 하느님의 뜻인 구원의 길, 진리를 사람의 뜻을 위한 계명, 길로 만드는 것이 죄다.
관련된, 참조할 성경의 말씀이다.~
(이사29,13) 13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에게 다가오고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고 나에 대한 그들의 경외심은 사람들에게서 배운 계명일 뿐이다.
(마르7,7) 7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티토1,14) 14 유다인(사람)들의 신화, 그리고 진리를 저버리는 인간들의 계명에 정신을 팔지 않게 하십시오.
= 하느님의 뜻, 그 과녁을 벗어난 죄다. 하늘의 진리를 깨닫는, 곧 하느님의 약속을 믿기 위한 열심이 아닌 자기 열심, 의로움의 종교 행위로 하는 것, 과녁을 벗어난 죄다. (참조 이사1,11-14 마태7,21-23 루가10,38-42)
그래서 죄인들의 속죄 제물로 죽으신 그 예수님의 의로움이 아닌, 제사와 윤리로 지킨 그 사람의 자기 의로움으로 구원에 이르려 하는 것, 죄다.(로마10,1-4 티토3,5 참조) 예수님의 대속, 그 죽음을 헛되게, 거짓되 게 하는 큰 죄다.
(마태5,20) 2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 인간들의 의로움이 아닌 하늘(예수님)의 의로움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마태6,33)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 어떻게? 오늘 세리처럼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살았던 죄인임을 고백하고, 그 자신의 죄로 십자가에 대신 죽으신 그 예수님의 의로움을 구원의 진리로 믿는 것, 받아들이는 것, 구원이다.
세리나 바리사이나 다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서 살았다. 그러나 세리는 자신의 잘못, 죄를 알았던 것이고, 바리사이는 몰라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 교회(성도, 신자) 안에는 그 두 부류가 있다. 그것은 자기 의로움을 위한 가르침이 있고, 본 모습을 보게 하는 가르침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속셈, 죄의 모습을 드러내러 오셨다.
오늘 독서에서~
(히브4,12) 12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 왜? 심판 하시려고? -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속셈, 위선, 그 죄로 대신 죽으시고 당신의 생명으로 살리시려고....
(요한12,46-47) 46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47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로마3,23-24)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아멘 -*^ㅇ^*-
연중 제1주간 토요일 복음(마르2,13~17)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17)
마르코 복음 2장 17절은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이 제기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이 땅에서 하실 일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말씀이다.
여기서 '건강한 이들'에 해당하는 '호이 이스퀴온테스'(hoi ischyontes; the healthy)라는 표현은 은유적 표현인데, 자기식의 의(義)를 추구함으로써 스스로 의롭다고 자부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가리킨다.
또한 '의사'에 해당하는 '이아트루'(iatrou; a doctor)도 은유적 표현으로서 죄에 빠진 영혼을 치유하고 구원하시는 예수님 당신 자신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러한 표현 속에는 예수님께서 왜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셔야 했는가에 대한 해답이 주어져 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외적 조항을 가지고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단죄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이야말로 이 세상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못 알아보고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이것은 그들이 얼마나 교만과 위선에 사로잡혀 있었는가를 명백히 보여 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건강한 척하면서 당신을 외면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위해 오시지 않고, 자신의 영적 건강을 걱정하던 죄인들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의사이셨다.
특히 마르코 복음 2장 17절의 전반부는 예수님 당시 팔레스티나에서 유행하던 속담으로 알려졌는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잘 알고 있던 속담을 이용해서 바리사이들의 교만과 위선을 지적했던 것이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여기서 '부르러'에 해당하는 '칼레사이'(kalesai; to call)의 원형 '칼레오' (kaleo)는 구원에로의 초대나 제자로의 부름(마태4,21; 1베드2,9)을 의미한다.
이 문장은 동사 하나에 두 개의 목적어 '의인'과 '죄인'이 동시에 사용되어서 서로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의인은 진정한 의미의 의인이 아니고, 본인이 자신을 생각하는 관점에서의 자칭 의인이다.
왜냐하면 로마서 3장 10~23절에서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의인이 한 사람도 없으며 모두가 죄인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또한 '죄인'이라는 개념 역시 꼭 어떤 죄를 지은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해 겸손한 자세로 응답할 수 있는, 스스로 죄인이라는 의식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루카5,8).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초대를 받을 자격은 겸손하게 자신이 죄인이라는 정확한 자기 의식이 있어야 함을 가르쳐 준다.
복음: 마르 2,13-17: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께서는 돈벌이에 대한 탐욕으로 가득 찬 레위가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셨다. 그가 받은 새 이름은 마태오였다. ‘마태오’라는 이름은 ‘선물 받은 사람’이란 뜻으로 거룩한 은총의 위대한 선물을 받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는 탐욕에 젖은 세리 생활에서 떠나 주님을 따른 사람이다.
“나를 따라라.”(14절) 이 말씀은 당신을 닮으라는 말씀이다.
발걸음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생활방식을 따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머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1요한 2,6)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14절) 주님의 명령 한 마디에 마태오가 모든 것을 버리고 빈털터리이신 주님을 따랐다. 말씀을 통하여 그를 외적으로 부르시고 주님께서는 내적으로도 보이지 않는 선물을 주시어 당신을 따라다닐 수 있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를 부르시고 그와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난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어울리시는 것은 그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17절)하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의로운 이들을 건강하다 하시고, 죄인들을 병들었다 하셨다. 그러기에 병든 사람들은 자기 힘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 제 힘이 아무리 세다 하여도 스스로 구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건강하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여, 의사를 찾지도 않을 뿐 아니라 성가시게 여기며 때리기까지 한다. 자기 병을 제대로 알고 고치기 위해서는 그만한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우리는 누구도 완벽하게 의로운 사람은 없다.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 구원을 베푸소서. 의로운 이는 사라져 버렸습니다.”(시편 12,2)라고 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의인이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간절히 바라고 그렇게 노력하면 그렇게 되어 갈 것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성령의 은총이다. 성령의 은총으로 치유되고 도움을 받지 않으면 그러한 일이 이루어지기는 힘들 것이다.
예술가가 투박한 돌을 아름답게 조각하여 멋진 예술작품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그 돌을 귀하게 다룬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까닭은 우리가 죄인인 채로 그냥 남아있게 하시려고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 조각가이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투박한 돌을 보시듯 하신다. 투박한 돌이 아니라, 앞으로 만드실 작품을 생각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온전히 그분의 말씀을 따르도록 하여야 한다.
[연중 제1주간 토요일]
구약(舊約)의 실체(實體)가 신약(新約)이다.
구약은 모든 인간은 죄인인 것이고, 그 죄를 대속하시고 용서, 구원의 의(義)를 주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신약이다. 구약과 신약이 짝하여 구원이 이루어진다.
복음 (마르2,13-17)
13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14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적대자(敵對者, 로마)의 세금을 걷었던 세리(稅吏) 죄인(罪人)을 부르신 것이다. 그 죄의 자리에서 일어나, 버리고 따른 것이다. 우리 곁은 매일 매순간 지나가시는 주님이시다.
15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 자리다. 곧 하느님의 적대자(敵對者)인 죄인들을 당신의 목숨 값으로 구(求)하신 뒤, 이루어지는 하늘나라 혼인(婚姻)잔치의 모형(模型)이다.
16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 자기 의로움의 자신들이 구원받을 수 없는 진짜 죄인임을 모르고,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생명의 양식(말씀)을 먹는, 그 구원받은 이들을 무시(無視)하고 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꼴이다.
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예수님은 분명히 “의인(義人)이 아니라 죄인(罪人)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우리는 의인(義人)이 되어서 예수님을 만나려하는지 모르겠다.
성경(聖經)을 도덕(道德)과 윤리(倫理), 그 법의 책으로 보고, 가르침을 받아, 율법(律法, 제사와 윤리) 신앙을 살기 때문이다. 그 율법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신 새 계명, 새 계약의 성령의 법(로마8,1~)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새 계약은 이미 구약(舊約)에서부터 주어졌다. 곧 십계명(十誡命), 율법(律法)과 다른 차원의 새 법, 그 새 계약을 우리 마음에 넣어 없애시고, 우리의 죄(罪)를 기억(記憶)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이다.(예레31,31~참조)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그 피의 새 계약이다.(루가22,20~) 우리는 그 새 계약의 일꾼이다.(2코린3,6~) 사람의 법, 곧 율법의 제사(祭祀)와 윤리(倫理), 계명(誡命)으로 전(傳)하면 안 된다. 율법우ㅢ 계약, 그 옛 계명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히브8,13~)
우리가 가는 하늘나라는 그 새 계약의 피(血)가 있는 곳이다.(히브12,12~) 곧 그 새 계약이 법(法)인 나라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피로 영원한 용서, 생명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로 영광을 드리는 평화(平和)의 나라다.
*율법은 율법자 들에게 그 사람의 열성(熱誠), 의로움을 요구한다. 그래서 세상(타(宗敎까지)은 죄로 드러난다.(로마3,19~)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야고2,10)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그 십자가의 새 계약을 진리로 믿는 이들만이 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죄가 다 씻겨 없어졌기에 그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욕망(慾望)을 위한 불의(不義, 불법)에 자신을 넘기지 말아야 하는 것(로마6,6-14) 구약, 율법은 믿음을 위한 감시자(監視者)일 뿐이다.(갈라3,23-27)
하느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감시자(監視者)와 후견인(後見人), 율법과 세상 종살이 아래서 믿음을 위한 교육(敎育), 훈련(訓練)을 시키신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의 삶이 중요(重要)한 것이다. 새 계약(契約)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 까지, 깨달을 때까지(갈라4,1-5).........
*율법의 행위인 육의 아들이 있고, 새 계약, 그 약속의 결과로 난 아들이 있다.(갈라4,21-24) 그러나 육의 아들이 약속의 아들들을 박해(迫害)한다.(갈라4,28)
오늘 육(肉)의 의(義)인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이 구원을 약속받은 이(죄인)들을 무시하듯, 그래서 교화 안에서 자칭 의인(義人)들이 하느님의 약속 말씀을 깨닫기 위한 삶을 사는 이들을 비난(非難)한다. 그 박해, 유혹 등으로 종살이의 ‘멍에’ 곧 자기 의(義)를 위한 도덕과 윤리, 율법의 삶으로 돌아가면, 살면 안 된다. 다시는 메지 말아야 한다.(갈라5,1)
우리는 인간의 의(義),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의 의(義), 성령의 법아래 있는 것을 놓치면 안된다.(갈라5,18)
*헛된 신앙생활(信仰生活)을 보자~
(이사1,11-14) 11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황소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제사, 곧 인간의 열심인 종교행위다)
12 너희가 나의 얼굴을 보러 올 때 내 뜰(법, 뜻)을 짓밟으라고 누가 너희에게 *시키더냐? 13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초하룻날과 안식일과 축제 소집 불의에 찬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14 나의 영은 너희의 초하룻날 행사들과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그것들은 나에게 짐이 되어 짊어지기에 나는 지쳤다.
= 온갖 기념(記念)전례(典禮)행위(行爲)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의 뜻인 새 계약을 깨닫고 믿기 위한 말씀은 뒤로하고 전례(典禮)를 잘 지키고 기념일(記念日), 축제일(祝祭日)에 잘 참석하고 본당활동, 봉사활동, 열심히 잘하고, 인간들의 계명(교리, 규정)을 잘 지켜서, 그렇게 착하게 살아 예수님을 만나려한다.
사람의 말, 사람의 규정과 교리, 그 거짓가르침이 시키기 때문이다.(마르7,7) 하느님께 받는 영광보다 사람에게 받는 높은 평가(評價), 영광(榮光)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요한5,44 루가16,15) 그것이 죄인들의 죄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그 죽음, 피를 헛되게 하는, 곧 하느님의 새 계약을 모독(冒瀆)하는 것이다. 그것이 당신 아드님을 죄인들의 속죄 제물로 내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모독(冒瀆)하는 행위다.
*매일 태양이 붉게 떠오른다. 세상의 어둠(죄. 불의-옛 계약, 율법)을 없애시려고, 하늘의 생명, 용서의 빛인 새 계약, 그 사랑(말씀)이 떠오르는 것이다. 발광체(發光體)인 하늘의 빛 아래서 가짜 빛인 세상(나)의 죗성(불의-자기義)을 보고 ‘영원한 사랑, 생명이신 하느님을 알라’고.......
(요한17,3) 3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 알고-알다. 히브리어 ‘야다’호 하나, 한 몸이 되는 것이다. 내 머리(생각, 뜻)가 잘리고, 주님을 나의 머리(주인)로 그분의 지체가 되어 한 몸이 되는 것이 생명이다. 그것을 깨닫기(되기) 위한 것이 기도(祈禱)다. 세상 사람들처럼 내 뜻, 내 소망, 내 소원을 위한 기도로 신비 안에 들어있는 하느님의 뜻은 깨닫지 못한채 “똑같은 소리를 반복하여 되풀이하는 그 ‘빈말기도’ 하지 마라”고 하셨다.(마태6,7)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곧 하늘의 복(福)인 하늘의 생명, 구원의 약속인 하느님의 말씀에 머물러, 되새기는 그 참된, 올바른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 복(福)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그 하늘의 의로움으로 받는다.
(마태6,33)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 율법(제사와 윤리) 신앙ㅇ에서 돌아와 하늘의 의로움을 찾고 깨달아, 의지하여 사는 것이 회개(悔改)다.
병행복음~
(루가5,31-32) 3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32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1코린2,9-10) 9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 10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것들을 바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
☨보호자이신 진리의 성령님!
오늘도 아침 빛이 불게 타오르듯 저희 안에 모든 어둠을 몰아내는 성령의 빛,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그래서 구원의 말씀을 의탁하며 하느님께 감사, 영광을 드리는 삶을 살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