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2주간 월요일] 죄를 용서하는 권한 (루카5,17-26)

2022. 12. 6. 오전 8: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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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5 월요일

 

[대림 제2주간 월요일죄를 용서하는 권한 (루카5,17-26)


   


1독서<하느님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이사35,1-10)

1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2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 레바논의 영광과, 카르멜과 사론의 영화가 그곳에 내려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3 너희는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4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복수가 들이닥친다, 하느님의 보복이!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5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6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7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은 샘터가 되며 승냥이들이 살던 곳에는 풀 대신 갈대와 왕골이 자라리라.

8 그곳에 큰길이 생겨 거룩한 길이라 불리리니 부정한 자는 그곳을 지나지 못하리라. 그분께서 그들을 위해 앞장서 가시니 바보들도 길을 잃지 않으리라.

9 거기에는 사자도 없고 맹수도 들어서지 못하리라. 그런 것들을 볼 수 없으리라. 구원받은 이들만 그곳을 걸어가고

10 주님께서 해방시키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화답송시편 85(84),9ㄱㄴㄷ10.11-12.13-14(이사 35,4ㄷㅂ 참조) 보라, 우리 하느님이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시리라.

하느님 말씀을 나는 듣고자 하노라. 당신 백성, 당신께 충실한 이에게, 주님은 진정 평화를 말씀하신다.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 구원이 가까우니, 영광은 우리 땅에 머물리라.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주님이 복을 베푸시어, 우리 땅이 열매를 내리라. 정의가 그분 앞을 걸어가고, 그분은 그 길로 나아가시리라.

 

복음<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루카5,17-26)

17 하루는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갈릴래아와 유다의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도 앉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힘으로 병을 고쳐 주기도 하셨다.

18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19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 보냈다.

20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21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22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23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24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25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26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차서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다.

 



 

 

  

 대림 제2주간 월요일 제1독서(이사35,1-10)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5~6ㄱ)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5)

본절부터 7절까지는, 종말에 선민 이스라엘의 땅에 넘칠 환희과 기쁨을 예고하는 35장 1-2절에 이어, 다시 하느님께서 가져오실 당신 백성들과 그들의 땅의 역동적 회복을 예언하는 부분이다. 이러한 역동적 구원은 부분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활에서 성취되었다.

 

특히 5절과 6절은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 갇힌 후, 예수께서 자신이 메시아되심을 입증하면서 답하신 말씀과 동일한 것이다(마르7,37 ; 루카7,22 ; 마태11,2-6). 즉 이것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본문 서두에 제시된 '그때에' 에 해당하는 '아즈'(az ; then)는 일차적으로는 메시아 시대 나타낸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이것은 주님께서 도래케 하시는, 온전한 회복의 나라,영원한 나라  즉 새 하늘과 새 땅을 통해 이루어질 그 나라로 귀결된다.

 

한편, 하느님께서 회복케 하시는 역사(役事)가 이루어질 날에 일어나게 될 사건으로  먼저 제시되는 것은 맹인의 눈이 밝아지는 것이다.

여기서 '열리고'에 해당하는 '티파카흐나'(thiphaqahna) '열다' 의미를 지닌 '파카흐'(phaqah)의 수동형으로서, '열릴 것이다'는 의미가 된다.

 

이처럼 이 단어가 수동형으로 사용된 것 그것이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나타낸것이다.

즉 맹인의 눈이 열리는 역사가 전적으로 주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아울러 이것은 문자 그대로 맹인이 눈을 뜨고 보게 된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으며, 영적 어두움 속에서 멸망의 길을 걷던 자들이 진리의 빛을 보고, 생명의 길을 가게 된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또한 이것은 하느님을 거역하던 백성에게 내려졌던 책벌이 풀리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이사6,10; 29,18). 그들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보게 될 것이며,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참된 가치관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더 이상 무익한 이방의 강대국이나  헛된 이방의 우상이 아닌, 완전한 구원이신 주 하느님만을 의지하게 될 것이다.

 

한편, 이어지는 본절 후반부는 '눈먼 이의 눈' 에서 '귀먹은 이의 귀'로 바뀌었을 뿐, 앞 부분과 동일한 의미를 전달하는 평행 대구 문장으로 풀이된다. 여기서는 청각기관인 '귀'란 표현이 사용되어,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도 않고 깨닫지도 못했던 자들이, 복음의 말씀을 통해 그 귀가 열리고 진리를 깨닫게 되는 역사가 이루어 진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떠뜨리리라.' (6ㄱ)

예수님은 벳자타 못 가에서 서른 여덟 해나 누워있던 병자 치유하셔서 그로 하여금 걷게 하셨으며(요한 5,2-9),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의 '아름다운 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유해 그로 하여금 사슴처럼 뛰게 하였다.(사도 3,1-9) 이처럼 메시아 시대가 되면, 절름발이도 건강한 다리를 갖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영적으로 해석하면, 불완전한 신앙을 가졌던 자들이 신앙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고, 죄의 굴레에 얽매여 바르게 사는 데 있어 제한을 받던 자들이, 그 굴레를 떨쳐버림으로 인해, 진리의 길을 마음껏 활보한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란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활 중 갈릴리 지방에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치유하셔서,  그로 하여금 말을 분명하게 하신 사건(마르코 복음 7,31-37)을 연상케 한다.

 

이것 역시도 영적인 의미를 지니는데, 과거에는 하느님을 찬양하지 못했던 자들이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며, 하느님의 진리를 침묵하던 자들이 입을 벌려 담대히 그 진리를 증거하는 자들이 된다는 것으로 알아 들을 수 있다.

 

한편, 앞의 5절의 경우는, 메시아의 활동으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 표현이 모두 수동형으로 사용되어,하느님의 주도적인 역사가 강조되었다. 

그러나 본절의 경우, 발로 걷고 입으로 말하는 역사가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는 강조 능동형과 능동형 동사 사용되었다.

 

이것은 메시아 시대의 회복의 양상이 하느님의 주도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한 자들의 적극적인 순종과 증거를 통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날 것임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가 들어있는 것이다.

 

 

 

  

  

[대림 제2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하루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시는데, 

그곳에는 갈릴래아와 유다의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도 앉아 있습니다. 

그때 남자 몇 명이 

중풍에 걸린 사람을 평상에 누여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보냅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당시, 

개인의 고통이나 중풍과 같은 병은 그가 지은 죄의 결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와 고통의 인과 관계를 따지지 않으시고 

그들을 고쳐 주시고 해방시켜 주십니다.

 

죄는 하느님처럼 되고자 하느님을 거슬러 행동하는 것이기에, 

죄인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악마의 지배 아래에 놓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죄인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그분의 치유 은혜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치유 선언 대신 사죄를 선언하심으로써 

바로 당신만이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참된 메시아이심을 알려 주십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특별히 

우리를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는 죄악들을 더 깊이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바리사이들은 사두가이들로부터 ‘분리된 사람들’로서 

주로 정결례 규정을 지키는 데 열성적인 평신도들이었습니다. 

그 법들을 더 잘 지키도록 강요하며, 

이를 잘 지키지 못하는 유다인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유배 이후 이스라엘에서 율법 해설에 전념한 상류 계층의 율법 전문가들로, 

성경의 가르침을 새로운 상황에 적용할 수 있도록 성경 밖의 전통을 발전시켰고, 

소송 문제에서 재판관으로도 활동하였습니다. 

이들 안에서 ‘하느님처럼 되고자’ 하는 교만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하느님을 가르치시는데 

사람들은 자기 욕망을 채우려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하느님이 아니라 세상 것을, 돈을 섬기는 우상 숭배를 봅니다. 

 

사람들이 지붕을 뚫고 예수님께 나아간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가로막는 모든 장애를 뚫고 

하느님께 더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오늘의 묵상 

중풍 병자의 치유에 관한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사가가 알려 주는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기(루카 4,14─9,50 참조)에 속합니다. 

나병 환자의 치유 기적(5,12-16 참조)에 이어 소개되는 이 중풍 병자의 치유 기적은, 루카 복음에서 적대자들과의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첫 번째 사건입니다.
논쟁은 평상에 누워 있는 중풍 병자의 죄를 예수님께서 용서하신 일로 시작됩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이 말씀에는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예수님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중풍 병자의 죄를 용서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부여받으신 권한으로 죄를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중풍 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시는 예수님을 지켜본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께만 유보된 권한을 침범하셨다고 이해하였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느님께서만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율법 규정에 따르면,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행위는 사형을 받는 중대한 범죄입니다(레위 24,10-16 참조). 

적대자들의 눈에 예수님께서는 유일하시고 전능하신 하느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사형을 받아 마땅한 범죄자였던 것입니다(마태 26,65; 마르 14,64 참조).
대림 시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그분께서는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구원자이십니다. 

믿음을 가지고 회개하며 간절히 기다린다면, 그분께서는 우리를 찾아오시어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정진만 안젤로 신부)




 

대림 제2주간 월요일(루카 5,17-26,) (마태9,1-8 해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4~5)

 

마태오 복음 9장 4절의 '아시고'에 해당하는 '이돈'(idon; knewing)의 원형은 '호라오'(horao)로 추정되는데, '보다', '주목하다', '관찰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의 마음속까지도 정확하게 꿰뚫어 관찰하셨음을 나타내기 위해 여기서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시편 7장 10절에서는 하느님께서 사람의 심장, 즉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분으로 계시된다.

천주 성자이신 예수님께서도 전지전능하신 신적(神的) 속성을 가지고 계셨기에 즉시 율법 학자들의 마음을 간파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는 내용은 마르코 복음이나 루카 복음에는 없고, 마태오 복음사가가 첨가한 부분이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율법 학자들의 생각이 하느님의 영광과 그 이름을 보호하려는 율법의 근본정신과는 동떨어져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제2위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대적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율법 학자들의 마음속에서 시작된 주님을 대적하는 마음은 결국 주님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고 가는 출발점이 되었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었다.

 

예수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병고침의 기적을 통해 보이지 않는 죄사함의 기적이 사람들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당신 자신이 바로 그 권세를 지니신 유일하신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드러내기를 원하셨음을 마태오 복음사가가 부각시키고 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자신의 일차적인 독자인 유대계 크리스챤들에게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정확하게 알리기를 원했던 것이다.

한편, '어느 쪽이 더 쉬우냐?'에서 '쉽다'는 의미로 번역된 '유코포테론'(eukopoteron; easier) 은 '좋다'는 뜻의 부사 '유'(eu)와 '일하다', '노력하다'는 뜻을 지니는 '코포스'(kopos)의 합성어로서 '일하기 좋은'이라는 뜻을 가진다.

그러나 그 의미가 확대되어 '보다 쉽다' 혹은 '보다 알맞다'는 비교급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사실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은 가시적인 결과가 요구되는 선언이지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말은 그 선언의 결과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율법 학자들은 유다인들의 인과응보(因果應報) 사상에 입각해서 죄로 말미암아 병이 생겼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논리를 가지고 병을 먼저 치유하면, 그 병의 원인인 죄가 자동적으로 없어진 것이니, 예수님께서 마태오 복음 9장 2절에서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말씀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언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고, 그 선포는 하느님만이 할 수 있고,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어려운 선포라는 사실을 명백히 하시면서 당신 자신이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드러내시고자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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