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4주간 월요일] 과부의 렙톤 두 닢 (루카21,1-4)

2022. 11. 21. 오전 5:3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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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21일 월요일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이나 오늘은 저는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다해 복음과 독서묵상으로 가름합니다.


20221121일 월요일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과부의 렙톤 두 닢 (루카21,1-4)




1독서<그들의 이마에는 그리스도와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묵시14,1-3.4-5)

나 요한이 1 보니 어린양이 시온산 위에 서 계셨습니다.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2 그리고 큰 물소리 같기도 하고 요란한 천둥소리 같기도 한 목소리가 하늘에서 울려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가 들은 그 목소리는 또 수금을 타며 노래하는 이들의 목소리 같았습니다.

3 그들은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노래는 땅으로부터 속량된 십사만 사천 명 말고는 아무도 배울 수 없었습니다.

4 그들은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어린양을 위한 맏물로 사람들 가운데에서 속량되었습니다.

5 그들의 입에서는 거짓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흠 없는 사람들입니다.

 

화답송 시편 24(23),1-2.3-4ㄱㄴ.5-6(6 참조) 주님, 이들이 당신 얼굴을 찾는 세대이옵니다.

주님의 것이라네, 온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 온 누리와 그 안에 사는 것들. 그분이 물 위에 세우시고, 강 위에 굳히셨네.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헛된 것에 정신을 팔지 않는 이라네.

그는 주님께 복을 받으리라. 구원의 하느님께 의로움을 얻으리라. 이들이 야곱이라네. 그분을 찾는 세대, 그분 얼굴을 찾는 세대라네.

 

복음<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루카21,1-4)

1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2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제1독서 (묵시록14,1~3.4ㄴ~5)

  

"어린양이 시온 산 위에 서 계셨습니다.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1)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있을 7년 대환난을 다룬 전술한 내용(묵시록 12장과 13장)과 부조화를 이루는 듯한 내용들이 묵시록 14장의 초두에 등장한다. 묵시록 14장에서는 구속받은 십사만 사천 명의 영광을 노래하는 내용이 제일 먼저 등장한다(묵시록14,1-5).

 

그러나 이와같은 의외의 도입은 묵시록 6장 17절에서 "그분들의 진노가 드러나는 중대한 날이 닥쳐왔는데, 누가 견디어 낼 수 있겠느냐?" 라고 물은 후, 묵시록 7장 1-17절에서 인장을 받은 십사만 사천 명을 묘사하고, 그들의 영광을 노래하는 패턴의 반복이다.

 

즉 사도 요한은 이와 동일한 패턴으로 묵시록 12장, 13장에서 사탄을 상징하는 붉은 용과 두 짐승의 교회에 대한 핍박을 묘사한 후, 14장에서 그토록 철저한 사탄의 핍박 가운데 하느님께서 어떻게 당신의 교회를 보호하시는지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묵시록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사도 요한의 관심은 환난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영원히 승리한다는 것이다.

 

묵시록 14장은 하느님의 인장으로 구속받은 십사만 사천 명이 시온산에서 부르는 노래를 다룬 1~5절,  세 천사 전하는 대바빌론의 멸망 및 우상 숭배자들에 대한 진노의 심판 경고를 다룬 6~13절,  또 다른 세 천사가 보여주는 그리스도와 천사에 의한 마지막 수확(추수)과 심판을 다룬 14~20절로 구분한다.

 

본문에서 '어린양'으로 번역된 '토 아르니온'(to arnion ; the Lamb)은 묵시록 13장 11절에서

'어린양'으로 번역된 '아르니오'(arnio)즉 '땅에서 나온 뿔이 둘인 짐승'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본문에 언급된 어린양은 명백히 묵시록 5장 6절에서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어린양 즉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써 사탄에 대한 승리를 쟁취하신 바로 그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점은 '아르니온'(arnion) 앞에 정관사 '토'(to)가 선행하고 있다는 점 뿐 아니라, 그가 서있는(헤스토스; hestos; stood) 곳이 바닷가 모래 위가 아닌(묵시록12,18), 시온산이라는 점에서 더욱 분명하게 입증된다.

 

시온산(토 오로스 시온 ; to oros Sion)은  본래 예루살렘 동남쪽 산등성이 즉 키드론과 티로페이온(tyropeion) 골짜기 사이에 솟아 있는 봉우리를 가리키지만, 솔로몬이 거기에 성전을 세우고 예루살렘 성을 지배해 온 후로는 예루살렘 도성이 있는 곳을 지칭하는 명칭이 되었으며, 상징적으로는 하느님께서 계신 곳을 나타낸다(시편2,6; 50,2).

 

따라서 구약의 묵시 문학의 전통 속에서 이것을 새 예루살렘의 상징으로 이해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요엘3,5 ; 이사24,23; 미카4,7). 여기서도 사도 요한은 승리하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하늘과 새 땅, 곧 새 예루살렘에 서 있는 종말론적인 모습을 목격했던 것이다(히브12,22).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는데'

 

본문에 언급된 십사만 사천 명은 묵시록 7장 4절에서 하느님께 속해 있음을 보증하는 인장받은 자들의 수효이다. 이들은 결코 실수 차원에서 언급된 144,000 명이 아니다. 묵시록 7장 5~8절에 의하면, 이 수는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12,000명씩 뽑혀 12,000 × 12 = 144,000 이 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로부터 산출된 144,000이란 수는 민수기 1장 19~46절에서 전투를 위해 시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계수한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도합  603,550 명으로,본문에 언급된 144,000 명과는 현격한 차이를 이룬다.

아울러 묵시록 7장 5~8절에 언급된 열두 지파에서 뽑힌 각각의 수는 12,000 명으로 모두 통일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도 요한이 특별히 정한 의미를 전달해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상징적인 수라는 점을 분명하게 드런내다.

 

실제로 144,000 은 12 × 12 ×1000 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구약의 백성(12)과 그 성취로서의 신약의 백성(12)의 수를 곱하고,  거기에 완전성과 무한성을 나타내는 수(1000)를 곱한 것으로서, 전체 하느님의 백성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묵시록 7장 9절의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 와 분리되지 않는다.

 

사도 요한은 144,000이라는 '무제한의 제한'의 수를 통해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내포한 동일한 개념, 즉 전체로서의 하느님의 교회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묵시록 14장 1절에서 이들은 승리한 천상 교회의 상징  곧 구원받은 하느님의 백성을 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묵시록 14장 1절에 언급된 144,000은 사탄을 상징하는 붉은 용과 각각 세말에 맹위를 떨칠 적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를 상징하는 두 짐승의 악랄하고도 흉포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종국적으로 하느님의 교회가 승리함을 분명하게 천명한다. 하느님의 교회는 종국적으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에 서고야 마는 것이다.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본문과 관련된 묵시록 7장 3절, 4절 "우리가 우리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장을 찍을 때까지 땅도 바다도 나무도 해치지 마라. 나는 인장을 받은 이들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들었습니다" 라고 언급한다. 따라서 거기에 언급된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찍힌 인장은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 이다.

 

히브리 관념에 의하면, 본문에서 '이름'으로 번역한 '오노마'(onoma)는 존재와 인격이란 의미를 창출한다. 따라서 본문에 언급된 십사만 사천명은 창조주 하느님과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인격에 동참한 자들, 곧 그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자들이다(묵시록14,3).

 

'적혀' 로 번역된 '게그람메논'(gegrammenon ; written)은 '기록하다' 라는 뜻을 지닌 '그라포'(grapho)의 수동태 완료 분사이다. 여기서 수동태는 하느님의 백성이 자력으로 스스로 인을 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느님께서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을 보증으로 해서, 그들에게 인을 치셨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완료 시제가 사용된 것은 과거에 이루어진 이와같은 인장 받음의 효력이 소멸되지 않고 계속 유지될 것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묵시록 7장 2절을 보면, 직접적으로 하느님의 인장을 가진 주체가 천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천사가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권위에 순명하고, 그분의 권위를 대행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십사만 사천명 곧 천상의 승리한 교회는 궁극적으로 하느님에 의해 인장을 받은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본절에서 '있었습니다' 로 번역된 '에쿠사이'(echusai)는 '소유하다' 라는 뜻을 지닌 '에코'(echo; have)의 현재 분사형이란 점 역시, 천상의 승리한 교회가 어린양과 하느님의 이름을 현재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어린양의 이름과 하느님의 이름을 받은 십사만 사천명과 짐승의 표를 받고 그에게 경배하는 땅에 거하는 자들의 운명은 완전히 상반되게 갈라진다(묵시13,16.17).

즉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는 십사만 사천명은 창조주 하느님과 구속주 어린양의 소유로서 시온 산위에 서 있지만, 오른손이나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은 거룩한 천사들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통을 받는다(묵시14.10).

 



   

20221121일 월요일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어떤 빈곤한 과부가 자신의 생활비 전부인 렙톤 두 닢을 헌금함에 넣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지켜보십니다.

물론 부자들이 넣는 돈과 비교해서 보잘것없는 금액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칭찬을 단순한 금액의 비율로 평가하는 것은 복음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빈곤한 과부가 놓인 현실을 외면해 온 공동체의 책임에 대한 비판이 숨겨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고아나 떠돌이와 함께 공동체의 보호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의 대표로 과부가 자주 언급됩니다.

이는 하느님 백성으로서 부름 받은 모든 이의

어느 지체도 그분의 사랑과 자비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와 주권을 잃고, 이민족의 지배를 받으면서 율법의 기본 정신은 사라졌고,

세속적 욕망이 이웃 사랑에 대한 원칙을 넘어서면서

경제적 양극화가 일어나고 빈곤한 이들에 대한 연대감이 사라진 것입니다.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이유는

자신이 얻은 수익이 자신의 노력만이 아닌 하느님의 돌보심과

이웃의 희생에 따른 것임을 고백하는 순수한 종교적 행위입니다.

물론 그 헌금이 성전을 관리하고 교회의 사제들의 삶을 위하여 쓰인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원칙은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에 넣은 과부는 어쩌면 세상에 대한 미련이 없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얻은 것은 모두 하느님의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수도 있고,

하느님께서 채워 주실 것이라는 강한 믿음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약자 보호의 원칙을 지키지 않는 유다 사회에 대한 강한 질책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오늘날 돈과 권력이 갖는 속성을 꿰뚫어 보시고

제자들에게 교회가 가야 할 길을 새로 보여 주신 것은 아닐까요?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11월 23일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도시는 사람들이 높이 세운 건물 때문에 아침에 떠오르는 빛과 저녁에 지는 노을빛의 아름다움을 볼 수가 없다. 그 빛의 의미를 못 보고 깨닫지 못하게하는 세상이다.


(묵시14,1-3.4ㄴ-5)

1 요한이 보니 어린양이 시온산 위에 서 계셨습니다.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 어린양 예수님의 12사도와 하느님 아버지의 12지파 12☓12=144 그리고 하늘의 충만의 숫자1,000☓는 144,000

하느님의 구원의 뜻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이루어지는 그 완전한 자비와 사랑을 입은 구원받은 사람들을 뜻하는 숫자이다.

 

2 그리고 큰 물소리 같기도 하고 요란한 천둥소리 같기도 한 목소리가 하늘에서 울려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가 들은 그 목소리는 또 수금을 타며 노래하는 이들의 목소리 같았습니다.

= 하느님의 크시고 위대한 빛의 말씀, 그 소리를 들은 이들은 하느님께 감사의 기쁜 노래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3 그들은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노래는 땅으로부터 속량된 십사만 사천 명 말고는 아무도 배울 수 없었습니다.

= 새 노래는 땅의 오래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 땅에서 해방된 이들만 부를 수 있는 하늘의 노래인 것이다.

감사해서, 기뻐서, 행복해서 나오는 것이 노래다. 땅에서는 나올 수 없는 노래라는 것이다. 사람의 욕망과 시기와 미움, 그 죄악 때문이다. 그 모든 죄악들이 그리스도의 대속, 속량으로 다 씻기어 새 생명을 얻어 기뻐하는, 그 성도만이 부를 수 있는 새 노래라는 것이다.

 

(시편40, 3-4) 3 나를 멸망의 구덩이에서, 오물 진창에서 들어 올리셨네. 반석 위에 내 발을 세우시고 내 발걸음을 든든하게 하셨네. 4 내 입에 새로운 노래를, 우리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을 담아 주셨네. 많은 이들은 보고 두려워하며 주님을 신뢰하여라.

= 흙, 그 죽음의 존재가 반석이신 그리스도(빛)의 속량으로, 그분 위에 세워져 하늘의 존재가 되어 감사와 기쁨의 새 노래를 부를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4ㄱ 그들은 동정을 지킨 사람들로서 *여자와 더불어 몸을 더럽힌 일이 없습니다.

= 여자와 더불어~ 곧 세상의 가르침을 진리로 사는 음녀(묵시17,2~), 그리고 그 세상을 받아들인 교회와 더불어 자신을 더럽히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타락한 예루살렘(타락한 교회)을, 그리고 시온을 여자라 하시는 이유다.(예레30,17)

(앞12,1~6의 여자 또한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승천 후 사탄의 핍박을 피해 하느님의 보호하심을 받아야할 교회인 것이다.)

 

4ㄴ 또한 깨끗함을 지킨 그들은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어린양을 위한 맏물로 사람들 가운데에서 속량되었습니다. 5 그들의 입에서는 거짓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흠 없는 사람들입니다.

= 사람들의 말, 가르침을 믿고 따랐던 구원의 헛된, 그 거짓된 것이 없다는 것, 그래서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 졌음을 지켰다는 것이다. 그러니 흙, 사람들의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깨닫는 그 자기부인, 버림으로 사람들의 말, 욕망과 헛된 희망을 주는 그 거짓 수렁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마태6,23) 23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

 

오늘복음에서 자신을 깨닫고 보고 버리라 하신다.

(루카21,1-4)

1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2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 궁핍한 과부가 생활비를 다 넣었다고 좋아하실 주님이실까? 肉의 부모도 가난한 자식이 생활비를 다 털어 용돈을 준다면 마음이 아파, 받을 부모 없다. 그렇듯 가난한 당신의 자녀가 생활비를 헌금으로 다 넣었다고 칭찬하시는 주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본문 1절을 다시보면,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 이 부분에서 ‘눈을 들어’~를 빼고 ‘예수님께서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로 하셔도 어색하지 않다.

요점은 헌금을 하는 사람의 눈이 아닌, 주님의 눈으로 하느님의 관점으로 보셨다는 것이다. 헌금은 내 죄를 대속하시고 죽으셔서 나를 살리신 그 예수님의 죽음, 그 사랑이 감사해서 내 목숨과 같은 돈을 드리는 것이 헌금이다. 죄의 나(목숨)는 죽었습니다, 버립니다. 라는 신앙 고백인 것이다.

과부의 생활비, 곧 자신의 목숨을 다 버린 것을 칭찬하신 것이다. 부지들은? 자신의 목숨, 돈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곧 감사의 헌금이 아닌 자신들의 의로움을 위한 예물로 드렸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속, 십자가로 죄의 용서, 의로움을 위한 예물이 이제는 필요 없게 되었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히브10,18) 18 이러한 것들이 용서된 곳에는 더 이상 죄 때문에 바치는 예물이 필요 없습니다.

= 그들은 제사와 윤리의 그 자기 의로움이 컸기에 그리스도의 대속, 그분의 의로움으로 받는 구원의 의미, 필요성, 간절함이 없기에 자신들의 의로움, 자신의 목숨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들의 그 빛이 어둠인 것을 모르기 때문에~ 헌금을 감사의 새 노래로 드릴줄 모르는 형식과 의무로만 했던 것이다.

그들의 예물이 그들 자신을 위한, 그 자신을 더 믿는, 그래서 버리지 못하는 그들의 속셈, 위선을 주님의 눈이 보신 것이다.

 

(루가9,23)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태16,25) 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아멘!





 

 

2021년 11월 22일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헌금(獻金)은 나를 드리는 것.

 

복음(루카21,1-4)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 주님은 헌금을 준비하는 속마음을 아신다. 어떤 마음, 어떤 정성으로 준비하는가를...

 

(요한2,25) 25 그분께는 사람에 관하여 누가 증언해 드릴 필요가 없었다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셨다.

= 렙톤 두 닢- 당시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 렙톤은 한 데나리온의 144분의 1의 작은 돈으로 오늘날로 계산하면 하루품삯을 10만원이라 할 때 렙톤 한 닢은 700원정도로 과부가 헌금함(獻金函)에 넣은 돈은 겨우 1,400원정도이다.

 

3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 생활비(生活費)를 다 넣었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 자신의 생명(生命)을 바쳤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소문으로 들은 예수님이 아닌 말씀 안에 머물며 예수님이 구원(救援)의 진리(眞理)이심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죄인(罪人)이며 과부(寡婦)인 자신을 구(求)해주실, 곧 새 생명이 되어주실 참 빛이신 분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다른 헌금함 곁에서 하신말씀으로~

(요한8,12.15.20) 12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15 너희는 사람의 기준(,)으로 심판하지만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 20 이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곁에서 하신 말씀이다.

 

오늘 본문 앞 절로 가보면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 하시면서~

(루가20,47) 47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이러한 자들은 더욱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 율법(律法)을 열심히 지키며 기도했던 자기 의로움으로 자신의 뜻을 이루려는, 자신의 이름을 높이려는 그 자신(自信)을 버려야(힘을 빼야) 생명의 빛이신 분으로부터 새 생명을 받는다. 오늘 과부(寡婦)처럼...

율법(제사와 윤리)의 의로움, 선과 악, 도덕과 윤리의 가르침에 흔들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주는 하늘의 용서, 의로움, 생명, 그 복음을 구원의 진리로 믿었을 때, 믿음을 빼앗기지 않고 지켰을 때다. 그렇게 오늘 과부는 새 창조로 새 생명을 얻었다.

 

(갈라6,15) 15 사실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2코린5,17)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옛것은 지나갔습니다보십시오새것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 다른여자~

(마르14,3-5) 3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에 있는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의 일이다마침 식탁에 앉아 계시는데어떤 여자가 *값비싼 순 나르드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그 옥합을 깨뜨려 그분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 4 몇 사람이 불쾌해하며 저희끼리 말하였다. “왜 저렇게 향유를 허투루 쓰는가? 5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그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을 터인데.” 그러면서 그 여자를 나무랐다.

= 남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마태20,2) 이었으니까, 여자가 ‘300 데나리온’어치의 향유(香油)를 모았다는 것은 분명 여자의 전 재산(財産) 이었다는 것이다.

 

(마르14,6.8) 6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가만 두어라왜 괴롭히느냐이 여자는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다. 8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내 *장례를 위하여 미리 내 몸에 향유를 바른 것이다.

= 죄인인 자신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 자신의 죄를 대속(代贖)하실 그 예수님께(그것도 미리) 향유(香油), 곧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린(버린) 것이 죄인(罪人)인 여자가 할 수 있었던 ‘좋은 일’인 것이다.

요점(要點)은 예수님께서 십자가(十字架)에 달리시기 전(前)에 여자는 미리 ‘좋은 일’을 했는데. 우리(나)는 성경(聖經)을 통해 이미 다 이루어졌다 하신 말씀을 듣고, 알면서도 풍족(豊足)한데에서 얼마씩 넣는 헌금(獻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생활비(生活費)를 다 넣자는 말이 아니다. 하느님은 그것 바라시지 않으신다. 어느 아버지가 자식이 생활비를 다 드리는 것을 좋아하시겠는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희생하며 자신을 키워주신 그 사랑을... 그리고 그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자녀답게 감사(感謝)하며 아버지의 뜻에 합당한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다른 형제(이웃)와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갈라5,14) 14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계명입니다.

= 이웃은 나를 힘들게 하는 웬수까지 포함한다. 그러나 그 웬수를 나 자신처럼 사랑할 사랑이 우리에게는 없다.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 곧 당신 아드님을 우리 죄의 속죄제물(贖罪祭物)로 내주신 그 이타의 사랑을 주는, 서로 나누는 그 사랑을 하라는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이나 미워하는 사람이나 차별(差別)없이, 특히 웬수같은 사람에게 자존심을 죽이는, 그 나를 죽이는 그 죽음으로 구원의 진리, 새 계약인 십자가의 복음을 주는 그 사랑을 하라는 말씀이다. 그 모든 것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할 수 있는 좋은 일인 헌금(獻金)이다.

그렇다보면, 곧 하느님께 받은 의무, 직분으로 하다보면(기도와 함께) 진심에서 나오는 시간(생명), 재물 등을 정성된 헌금으로 하느님께 드릴 수 있게 되고 이웃과 나누는 형제 사랑도 하게 된다.

 

(1요한3,16) 16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빠진 부분을 보면~

(다니엘1,7. 19-20) 7 내시장(內侍長)은 그들에게 *다른 이름을 지어 주었다곧 다니엘은 벨트사차르하난야는 사드락미사엘은 메삭아자르야는 아벳 느고라고 지어 주었다.

= 히브리 이름을 바벨론의 이름으로 바꿔준 것이다.

 

19 그런데 (바벨론)임금이 그들과 이야기를 하여 보니(세상모든 젊은이 가운데에서 다니엘하난야미사엘아자르야만 한 사람이 없었다그리하여 그들이 임금을 모시게 되었다.

= 성경은 히브리 이름을 강조(强調)한다.

 

20 그들에게 지혜나 예지에 관하여 어떠한 것을 물어보아도그들이 온 나라의 어느 요술사나 주술사보다 열 배나 더 낫다는 것을 임금은 알게 되었다.

= 궁중(宮中)음식과 술(酒), 곧 우상을 섬기는 이방(세상)의 최고 음식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자신들이 더렵혀지지 않게 해 달라고 감독관(監督官)에게 간청(懇請)했던 것이고, 하느님께서 그 감독관의 마음을 열어 주시어 다니엘과 친구들의 청(請)을 들어주게 하셨다. 곧 사람의 최고의 음식(말)보다, 하느님의 양식(말씀)을 먹었을 때 세상에 그 어떤 이들보다 지혜(智慧)롭게 된다는 것을 성경(聖經)은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까 영혼(靈魂)의 구원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니 그 말씀을 먹기(채우기)위해, 육(肉)의 만족을 위한 사람의 말, 가르침과 행위를 버리는 것, 곧 자기를 비우는 것, 그것이 헌금의 삶이다.

 

보호자 성령님오늘 깨닫게 하신 자신을 버리는(죽이는그 헌금의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주소서천주의 성령님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해 간구해 주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흙인 우리)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복음 (루카21,1-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4)

 

예루살렘 성전은 이방인의 뜰, 여인의 뜰, 이스라엘의 뜰, 사제들의 뜰 이렇게 네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방인의 뜰은 성전의 마당으로 예수님께서 성전 정화를 하실 때 장사치들과 환전상들을 몰아내셨던 곳으로 이방인들도 들어올 수 있었던 곳이고, 여인의 뜰은 성전에 들어가기 전의 홀에 해당하는 곳으로 성전 안에 들어갈 수 없는 여인들의 장소이며, 이스라엘의 뜰은 성전 안의 회중석에 해당하는 이스라엘의 남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며,  사제들의 뜰은 성전 안의 제단에 해당하는 사제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이들 성전의 네 지역에서 헌금함 바로 여인의 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시다가 갑자기 헌금하는 가난한 과부가 당신의 시야에 들어와 보시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님 당시 성전에는 13개의 나팔 모양을 한 헌금함이 있었으며, 각각의  용도와 지향이 그 위에 기록되어 있다.

 

13개의 헌금함 중에 한 개는 자발적인 기부금을 모으는 헌금함이었다. 아마도 빈곤한 과부는 일반인들을 위한 자발적인 기부금을 모으는 헌금함에 렙톤 두 닢을 넣었다고 본다.

 

여기서 '빈곤한'으로 번역한 '페니크란'(penichran; poor)의 원형 '페니크로스'(penichros)는 극도로 가난한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이며, 당시 '과부'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경제적 활동이 극히 제한을 받았던 가장 가난한 계층의 사람으로서 늘 구제의 대상이 된 신분이었다.

 

그리고 '두 렙톤'으로 번역된 '렙타 뒤오'(lepta dyo; two mites)에서 '렙톤'은 유대 화폐의 최소 단위로서 로마 화폐 과드란스의 2분의 1에 해당한다(마르12,42).

한 렙톤은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이었던 데나리온의 128분의 1에 해당된다.

 

그리고 당시의 성전 규정상 한 렙톤을 헌금하는 것은 금지되었기에, 두 렙톤은 당시 헌금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액수의 헌금이었다.

 

이것은 여기에 등장하는 빈곤한 과부가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적 통찰력으로 두 렙톤이  그 과부의 생활비 전부이며,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었음을 아셨다.

 

예수님께서는 루카 복음 21장 4절에서 그 과부가 가장 많은 헌금을 했다고 판정하신 이유에 대해 설명을 해 주신다.

 

예수님께서 판정을 내리는 두 대상의 형편과 관련된 두 단어가 나온다. 

하나는 '풍족한'으로 번역된 '페릿슈온토스'(perisseuontos; abundance; wealth)이고, 다른 하나는 '궁핍한'으로 번역된 '휘스테레마토스'(hysterematos; penuary; poverty)이다.

 

'페릿슈온토스'(perisseuntos)의 원형 '페릿슈오'(perisseuo)는 '양과 수를 초과하다'(exceed)는 뜻으로 어떤 것이 풍부하여 흘러 넘치는 상태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부자들의 경제적인 상태가 흘러 넘칠 정도로 풍부했다는 것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그들은 이렇게 흘러 넘치는 재물 중에 일부를 하느님께 바쳤다.

 

이것과 대조를 이루는 '궁핍한'으로 번역된 '휘스테레마토스'의 원형 '휘스테레마'(hysterema)는 '부족', '모자람'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물질이 부족해 기본적인 필요조차 채우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과부의 철저하게 빈곤한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단어이다. 모든 것이 부족한 과부는 너무나 빈곤한 가운데 헌금을 바쳤는데, 그것은 과부의 생활비 전부였다.

 

여기서 '생활비'로 번역된 '비온'(bion)의 원형 '비오스'(bios)는 '삶', '생명' 자체를 가리키거나, 또는 '생존을 위해 필요한 자원'을 뜻한다.

말하자면 이 과부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물질마저 모두 바쳤고, 이것은 그녀의 생명을 바치는 것과 같음을 가리킨다.

 

이렇게 과부는 양적인 면에서 부자의 헌금에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적은 금액을 하느님께 바쳤지만, 그것의 가치는 절대적 양의 개념에 있어서 흘런 넘치는 부자의 헌금보다 더 귀한 것을 바치는 자들의 마음과 태도로 평가되어야 한다.

 

인간의 겉이 아니라 속 마음을 보시는 예수님께서는 부자한테는 있으나마나한 헌금과, 과부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헌금의 가치를 절대적 양의 개념으로 평가하지 않으시고, 그 바치는 자의 마음을 기준으로 평가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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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21일 월요일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은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가득하였던 그 성령의 감도로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리는 날이다. 성모님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는 성모님께서 세 살 되시던 해에 성전에서 성모님을 하느님께 바쳤다고 전해 온다. 이날은 본디 6세기 중엽 예루살렘에 세워진 성모 성당의 봉헌을 기념하는 날이었으나, 1472년 식스토 4세 교황이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로 선포하였다.



오늘의 묵상 

교회 전통에 따르면,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에 대한 신심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 기념일에 교회는 마태오 복음 12장 46-50절을 봉독합니다.
오늘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실 때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옵니다. 

근동 지방 전통과 성경 전통에서 “형제”는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자식들뿐 아니라 가까운 친족까지 포함합니다. 

이어서 복음서의 저자는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라고 서술합니다. 

이를 직역하면 ‘그러고서는 당신의 제자들 위로 당신의 손을 뻗으시며 또 이르셨다.’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 공동체를 가리키시며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는 제자 공동체가 스승 예수님의 새로운 가정이라는 뜻입니다. 

이 구절에서 ‘하느님’이라고 하지 않고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제자 공동체가 지닌 가정으로서의 특징이 드러납니다. 

혈육으로 이루어진 가정 공동체의 중요성만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새로이 구성된 가정 공동체의 중요성이 강조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친족에게 면박을 주시기보다 새로운 교회 공동체의 중요성을 부각하시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이며 그분의 가정 공동체에 속해 있습니다. 

런데 이 새로운 공동체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존재 이유이며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찾고 그 뜻을 삶에서 실천하도록 초대받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0년 11월 21일 토요일[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그리스도인은 그분의 영으로 살아가는 것이지, 세상의 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마태12,43-50)

그때에 46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47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 성경은 ‘밖에 서있음’을 이야기 하려고 ㅃ밖에서 있음을 두 번, 반복해 말씀하심을 기억하면서,~

 

48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 ‘밖에 서 있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 안에서 이루는 하늘의 참 가족의 모습인지 반문하시는 것이다.

 

49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 예수님의 제자란, 내 밖의 예수님으로 찾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시다.

 

(루가9,23)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 예수님과 한 몸, 한 형제가 되기 위해 육의 부모 형제를 떠나 따랐던 제자들이다. 왜? 福 받으려고~ 하늘의 福, 하늘의 생명을 받으려고 따른 것이다.

 

(요한6,40) 40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어떻게, 어떤 것을 믿는 것인지~

 

(요한3,16)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 우리의 모든 죄의 속죄 제물로 오신 예수님, 그 예수님의 죽음, 그 십자가의 길이 구원의 진리임을 믿는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하느님의 뜻이며 일이다.(요한6,29참조)

 

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 실행(實行), - 예수님의 대속, 그분의 십자가로 얻은 하늘의 생명을 거짓 가르침으로부터 지키는 것, 실행이다.

 

본문 앞 절로 가 보면(성경의 뜻은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다)~

43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 진리의 물(말씀)로 쫓겨나간 것이다. 더러운 영, 그 거짓이 쉴 곳,- 물(진리) 없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온 세상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 되었기에 물, 그 진리의 말씀이 없는 곳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 자연은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며 살지만, 사람만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다.

(이사1,3~ 로마3,10~ 등 참조) 사람의 마음, 그 속에만 물(진리)이 없다는 것이다.

 

44 그때에 그는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말한다. 그러고는 가서 그 집이 비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 진리의 말씀으로 쫓겨나온 그 집이, 거짓 가르침으로 그 진리의 말씀이 치워져 있다. 그 거짓으로 말씀(물)을 지키지 못해 비워진 것이다. (나는 어떤지 살펴보자!)

 

45 그러면(더러운 영은)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이 악한 세대도 그렇게 될 것이다.”

= 예수님의 십자가로 받는 구원, 그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도(낳고도) 사람의 길로, 말로, 그 계명으로 헛된 구원의 가르침을 주는 그 거짓으로 구원의 말씀(물)을 잃어버려 구원의 예수님(성전, 집) 밖에 서 있는 나, 그렇게 내 밖의 예수님을 찾는 그 분리의 상태는 하늘의 가족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성경 속에 숨어있는 하느님의 지혜의 말씀을 깨닫는(낳는) 신앙이 아닌 성경의 겉(밖), 곧 사람의 지혜로, 문자 그대로 보는, 그 밖에 서서 읽고 믿어 행한다면, 그리고 그 성경 밖의 세상 肉의 뜻을 위한 자리에 서서~ 그 세상의 말, 이야기를 하느님의 말씀에 비유하여 듣고 行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이사55,8참조) 그 밖의 것으로는 예수님과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곧 그분의 말씀으로 서로 구원의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그 구원의 예수님과 하나 될 수 없다는 것이다.

 

(1요한4,1-2) 1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 영이나 다 믿지 말고 그 영이 하느님께 속한 것인지 시험해 보십시오. 거짓 예언자들이 세상으로 많이 나갔기 때문입니다. 2 여러분은 하느님의 영을 이렇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한 영입니다.

= 하느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당신 외아들을 사람의 몸으로, 우리의 속죄 제물로 보내심을 믿는 것, 그래서 죽음으로 끝나야 할, 그 멸망의 운명인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을 얻어 하느님의 자녀로 영원히 살게 되었다는 것을 믿는 그 사람, 그가 하느님의 영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하느님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로마8,3) 3 율법이 육으로 말미암아 나약해져 이룰 수 없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루셨습니다. 곧 당신의 친 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을 지닌 *속죄 제물로 보내시어 그 육 안에서 *죄를 처단하셨습니다.

* 천주의 성령님! 저희 모두가 말씀안의 삶을 누리도록 늘 이끌어 주소서 ~아멘!




 

2022년 11월 21일 월요일 [마리아의 自獻 기념일]

 

자발적인 신심과 겸손과 육신의 고행이 지혜로운 것처럼 들리지만,

 

복음(마태12,46-50)

46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47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48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49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예수님 밖에 서있는 것이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서 있는 것은 살아있음을 뜻한다그러나 예수님 밖에 서 있음살아 있음은 자신의 힘을 의지하여 살아있는 것으로곧 죽음으로 끝날 살아있음이다예수님 안에 사는 것하느님 품에 영원을 사는참 생명이다.

자신의 모든 것세상의 재물스팩들자기 의()까지하늘아래 모든 것이 허무요 부질없음을 인정(認定)하는 그 자기 부인(否認), 버림으로(필리3,5-9) 자신을 예수님의 지체(肢體)예수님을 자신의 머리로 앉히고 그분과 한 몸이 되는 것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實行)하는 사람이다곧 자신의 힘을 죽이고 그리스도의 힘으로 사는 것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며 진리(眞理).

온갖 종교행위로 내 밖의 예수님을 섬기는 것실행이 아니다불법(不法)이다.(마태7,22-23)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능과 주권을 대속(代贖), 그 피의 새 계약인 십자가로 무장 해제시키시고 그 위에 서신 그리스도의 힘이다.(골로2,15 에페1,21참조)

 

(에페1,22) 22 또한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시고만물 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에 머리로 주셨습니다.

 

(골로2,16-3,1) 16 그러므로 먹거나 마시는 일로또는 축제나 초하룻날이나 안식일 문제로 아무도 여러분을 심판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교리(敎理)에 의한 열심한 종교(宗敎)행위(行爲).(마태15,9)

17 그런 것들은 앞으로 올 것들의 그림자일 뿐이고 실체는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18 거짓 겸손과 천사 숭배를 즐기는 자는 아무도 여러분을 실격시키지 못하게 하십시오그런 자는 자기가 본 환시에 빠진 나머지 현세적 생각으로 까닭 없이 우쭐거립니다.

인간의 겸손(謙遜), 흉내를 내는 위선(僞善), 거짓이다인간들이 본 환시(幻視)또한 거짓이다.

19 그는 자기의 머리이신 분께 단단히 붙어 있지 않습니다온몸은 이 머리로부터 관절과 인대를 통하여 영양을 공급받고 잘 연결되어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라는 것입니다. 20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이 세상의 정령()들에게서 벗어났으면서도어찌하여 아직도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처럼 규정(교리)에 얽매여, 21 “손대지 마라맛보지 마라만지지 마라.” 합니까? 22 그 모든 것은 쓰고 나면 없어져 버리는 것들에 대한 규정으로인간의 법규와 가르침에 따른 것들일 뿐입니다. 23 그런 것들은 자발적인 신심과 겸손과 육신의 고행을 내세워 지혜로운 것처럼 들리지만육신의 욕망을 다스리는 데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의 욕망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갈라5,17) 말씀 안에 진리를 깨달음으로 육의 욕망이 헛되고 부질없음을 깨닫는 것이다그리스도께서 그 우리의 욕망(慾望)을 품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욕망이 죽은없음이 되는 것이다그리스도의 힘하느님의 말씀의 힘능력을 믿었을 때다.

3,1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를 머리로그분 안에서만 존재가 된다내 밖에 성체(聖體)께 기도하며 섬길 것이 아니라,(그러면 내 밖에 주님으로만 계시니이미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것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진리의 신앙이다.

 

(갈라2,20) 20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힘이 없는 것힘이 드는 것은 그리스도의 힘이 나를 이끌고 가시기 때문이다내 뜻이 아니라 (나를 살리시기 위해하느님의 뜻진리로 끌고 가시기 때문이다.

 

☨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하느님의 사랑이그리스도의 믿음이저희 마음 안에서 타오르게 하소서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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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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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루카21,12-19)22.11.23조회 56[연중 제34주간 화요일]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루카21,5-11)22.11.22조회 82[연중 제34주간 월요일] 과부의 렙톤 두 닢 (루카21,1-4)22.11.21조회 51[연중 제33주간 토요일] 하느님의 자녀 (루카20,27-40)22.11.19조회 57[연중 제33주간 금요일] 나의 집은 기도의 집 (루카19,45-48)22.11.17조회 56[연중 제33주간 목요일]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 (루카19,41-44)22.11.17조회 97[연중 제33주간 수요일] ‘미나’의 비유 (루카19,11ㄴ-28)22.11.16조회 54[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루카19,1-10)22.11.15조회 51[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루카18,35-43)22.11.14조회 53[연중 제32주간 토요일]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루카18,1-8)22.11.12조회 42[연중 제32주간 금요일]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 (루카17,26-37)22.11.11조회 51[연중 제32주간 목요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루카17,20-25)22.11.10조회 98[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요한2,13-22)22.11.09조회 85[연중 제32주간 화요일] 저희는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루카17,7-10)22.11.08조회 45[연중 제32주간 월요일] “회개합니다.”하면 용서해 주어야 (루카17,1-6)22.11.06조회 50[연중 제31주간 토요일] 하느님과 재물 (루카16,9ㄴ-15)22.11.06조회 56[연중 제31주간 금요일] 불의한 집사의 비유 (루카16,1-8)22.11.03조회 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