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3주간 목요일]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 (루카19,41-44)

2022. 11. 17. 오전 5:3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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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17일 목요일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 (루카19,41-44)

   


1독서<어린양은 살해되시고 자신의 피로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속량하셨습니다.>(묵시5,1-10)

나 요한은 1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손에, 안팎으로 글이 적힌 두루마리 하나가 들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두루마리는 일곱 번 봉인된 것이었습니다.

2 나는 또 큰 능력을 지닌 천사 하나가 큰 소리로, “이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펴기에 합당한 자 누구인가?” 하고 외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3 그러나 하늘에도 땅 위에도 땅 아래에도 두루마리를 펴거나 그것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4 두루마리를 펴거나 그것을 들여다보기에 합당하다고 인정된 이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슬피 울었습니다.

5 그런데 원로 가운데 하나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울지 마라. 보라,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여 일곱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펼 수 있게 되었다.”

6 나는 또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이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양은 뿔이 일곱이고 눈이 일곱이셨습니다. 그 일곱 눈은 온 땅에 파견된 하느님의 일곱 영이십니다.

7 그 어린양이 나오시어,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받으셨습니다.

8 어린양이 두루마리를 받으시자, 네 생물과 스물네 원로가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수금과, 또 향이 가득 담긴 금 대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향이 가득 담긴 금 대접들은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님께서는 두루마리를 받아 봉인을 뜯기에 합당하십니다. 주님께서 살해되시고 또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속량하시어 하느님께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10 주님께서는 그들이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한 나라를 이루고 사제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들이 땅을 다스릴 것입니다.”

 

화답송시편 149,1ㄴㄷ-2.3-4.5-69(묵시 5,10 참조) 주님은 우리가 하느님을 위하여 한 나라를 이루고 사제들이 되게 하셨네.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충실한 이들의 모임에서 찬양 노래 불러라.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분을 모시고 기뻐하고, 시온의 아들들은 임금님을 모시고 즐거워하여라.

춤추며 그분 이름을 찬양하고, 손북 치고 비파 타며 찬미 노래 드려라. 주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시고,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여 높이신다.

충실한 이들은 영광 속에 기뻐 뛰며, 그 자리에서 환호하여라. 그들은 목청껏 하느님을 찬송하리라. 그분께 충실한 모든 이에게 영광이어라.

 

복음<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루카19,41-44)

4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42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43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44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제1독서(묵시5,1~10)

 

그런데 원로 가운데 하나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울지 마라. 보라,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여  일곱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또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이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양은 뿔이 일곱이고 눈이 일곱이셨습니다. 그 일곱 눈은 온 땅에 파견된 하느님의 일곱 영이십니다. 그 어린양이 나오시어, 어좌에 앉아계신 분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받으셨습니다.(5-7)

 

여기서 원로는 묵시록 4장 4절과 10절에 언급된 '24원로'를 뜻한다.

'24원로'는 역대기 1권 24장 1~19절에 열거된 사제들의 24반열에 근거하여 나온 표현이며, 12와 12를 더한 수로서 묵시록 21장 12~14절에 나오는 '열두 성문'과  '열두 초석'으로 상징되는 '열두 지파' 와 '열두 사도'에 직접적으로 대응한다.

 

'24원로'는 '하느님 백성 전체'를 상징하면서, 지상 교회(묵시록 2장과 3장)와 천상 교회(묵시록 4장과 5장)의 대응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원로 가운데 하나가 사도 요한에게 울지 마라고 명령한 뒤에 사도 요한이 울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것은 곧 '유다지파에서 난 사자,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여 일곱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에 해당하는 '호 레온 호 에크 테스 필레스 이우다'(ho leon ho ek tes phylles Iuda; the Lion of the tribe of Judah)라는 어구는 분명히 창세기 49장 9절에 언급된 야곱의 축복과 관련된다.

왜냐하면 거기서 야곱은 유다를 향해 '유다는 어린 사자, 내 아들아, 너는 네가 잡은 짐승을 먹고 컸다. 유다가 사자처럼, 암사자처럼 엎드리니 누가 감히 그를 건드리랴?'하고 축복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의 임금이 유다 지파에서 탄생할 것임을 예언한 것으로서, 실제로 에제키엘 예언서 19장 2절, 3절, 5절, 6절은 남부 유다의 왕실을 '사자'로 표현한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이것은 메시야에 대한 상징이다.

'우리의 주님께서 유다 지파에서 나오신 것은 명확합니다'(히브7,15).

 

또한 본문에서 '다윗의 뿌리'로 번역된 '헤 리자 다위드'(he riza Dayid; the Root of David)라는 표현이 구약 성경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명확히 이사야 예언서 11장 1절과 10절에 나오는 '이사이의 뿌리'라는 언급과 상관이 된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이사야11,1).

'그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이사이의 뿌리가 민족들의 깃발로 세워져  겨레들이 그에게 찾아들고 그의 거처는 영광스럽게 되리라'(이사야11,10).

 

그래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1,1)라는 언급으로 자신의 서술을 시작하고, 사도 바오로는 '그분께서는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로마1,3) 라고 분명하게 언급함으로써 로마서의 서두를 열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묵시록의 결론 부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이 다윗의 뿌리임을 분명하게 밝히신다.

'나 예수가 나의 천사를 보내어 교회들에 관한 이 일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다.  나는 다윗의 뿌리이며 그의 자손이고 빛나는 샛별이다'(묵시22,16).

 

한편, 본문에서 '승리하여'로 번역된 '에니케센'(enikesen) '이기다','정복하다', '지우다', '격파하다'라는 뜻을 지닌 원형 '니카오'(nikao)의 부정 과거형으로서 과거에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 승리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원문에서는 '승리하여'라는 술어가 문두에 등장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분명하게 밝힌다.  따라서 이 승리는 과거 십자가 상에서 이루신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이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묵시록 1장 18절에서 '살아있는 자다.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 나는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있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역사적 실재로서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 대해 승리하였음 밝혔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울음을 멈추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를 이기신 분으로서 하느님의 비밀스런 목적을 따라 세상에 그분의 통치를 세우는 것과 관련된 그 책을 펴며, 그 봉인을 떼기에 합당하시기 때문이다.

 

'일곱 봉인을 뜯고 두루마기를 펼 수 있게 되었다'

 

이미 묵시록 5장 1절에서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손에, 안팎으로 글이 적힌 두루마리 하나가 들려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두루마리는 일곱 번 봉인된 것이었습니다'라고 나온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이신 성부 하느님의 오른손 위에 들려 있는 것이 '두루마리'(책)이며, 또한 이 책이 안팎으로 쓰여졌고, 일곱 인으로 봉해졌음을 밝힌다.

 

여기서 '두루마리'로 번역된 '비블리온'(bibbllion)은 본래 '양피지나 파피루스(papyrus)로 만든 두루마리 책'(이사34,4; 예레36,2; 히브10,7)이란 뜻을 지닌 '비블로스'(bibllos)의 축소형이다.

이 책은 '안팎으로 글이 적힌'이라고 되어 있다.

동일한 표현이 에제키엘서 2장 10절에도 나오는데, '그분께서 그것을 내 앞에 펴 보이시는데, 앞뒤로 글이 적혀 있었다. 거기에는 비탄과 탄식과 한숨이 적혀 있었다'고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안팍으로 쓰여진 것은 그 책의 내용에 어떤 것을 더하거나 뺄 수 없게 그 자체로 이미 완전함을 상징한다.

또한 이 책은 일곱 인으로 봉해졌다.

 

묵시록 5장 1절에서 '봉인'(인)으로 번역된 '스프라기신'(sphragisin)은 '증표 확증, 증거'(1코린9,2; 로마4,11),'인장'(묵시7,2),'인장, 날인, 봉인' (묵시9,4; 2티모2,19), '책 쓴 후에 찍는 봉인'(묵시5,1.2.5.9; 6,1.3.5.7.9.12; 8,1)이란 의미를 지닌 원형 '스프라기스'(sphragis) 여격이다.

또한 '일곱'을 뜻하는 '헵타'(hepta)는 묵시록 전체에서 '신적 완전함'을 뜻하는 상징수이다.

 

알다시피 일곱은 창조, 안식일, 안식년, 희년 등과 관련된 '완성' 숫자이다. 

참고로 사도 요한은 '완성'의 숫자 '일곱'을 제시함으로써, 묵시록이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넘어 당시의 모든 교회, 심지어는 모든 세대의 모든 교회들에게 적용될 수 있도록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저술한 것이다.

 

여기서 '두루마리'(책)는 에제키엘서 2장 10절의 전통 묵시 문학 특유의 상징으로 기술된 책이므로, '하느님의 비밀스런 목적을 따라 세상에 하느님의 통치를 세우는데, 어린 양의 승리가 어떻게 효력을 발휘하게 되는가를 드러내는 책'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완전수' '일곱'이란 숫자와 '봉인'(인) 계시 완전성과 비밀성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그 내용이 하느님께서 보여주시기 전에는, 인간으로서는 절대로 알 수 없도록 철저하게 감추어져 있음을 나타낸다.

 묵시록에 나타난 신비한 계시를 인간이 자의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나는 또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이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양은 뿔이 일곱이고 눈이 일곱이셨습니다. 그 일곱 눈은 온 땅에 파견된 하느님의 일곱 영이십니다'(6).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가 어떤 방식을 통해 이루어졌는지 드러낸다.

묵시록 5장 5절에서 사도 요한은 '사자'의 모습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면모를 그린 반면에, 여기서는 '어린양'을 제시함으로써 그의 승리가 매우 역설적인 방식, 곧 '죽음'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여기 '어좌'와 '네 생물', 그리고 '원로들'에 대해서는 묵시록 4장 2절과 6절 이미 나왔다.

'어좌' 성부 하느님의 보좌(the throne)를 말하며, '네 생물'(four living creatures)은 피조물의 대표를 상징하고, '원로들'(elders)은 '하느님의 백성 전체'를 상징한다고 이미 말했다.

그리고 여기서 '어린양'이 '아르니온'(arnion)으로 표기되는데, 묵시록에서는 한결같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여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어린양' '살해된 것처럼'보인다고 묘사되어 있다.

여기서 '살해된 것'으로 번역된  '에스파그메논'(esphagmenon)은 '도살하다', '살육하다','죽이다'라는 뜻을 지닌 '스파조'(sphazo)의 현재 완료 수동형으로서, 신약 성경에서는 묵시록 5장 9절과 12절, 6장 4절과 9절, 13장 3절, 18장 24절과 요한1서 3장 12절에서만 사용되었다.

그리고 '~처럼 보이는'으로 번역된 '호스'(hos)는 많은 경우 추측의 의미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문장 속에 언급된 사람, 사물, 행위 등 특징적인 면을 소개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로마3,7; 1베드1,19).

 

본문에서는 어린양의 모습 속에 과거 십자가 희생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의미가 된다.

아마 이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영원토록 주님의 십자가상 구속 사업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한편, 동사가 수동태라는 점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 관원들의 협잡에 의한 것이란 점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것이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성부 하느님에 의해 집행된 속죄(대속)행위임을 암시한다.

따라서 본문에 언급된 어린양의 죽음은 유월절(빠스카절, 과월절, 해방절)의 희생 제사와 쉽게 결부된다(이사53,7).

 

'뿔이 일곱이고 눈이 일곱이셨습니다. 그 일곱 눈은  온 땅에 파견된 하느님의 일곱 영이십니다'

 

사도 요한의 환시에 따르면, 어린 양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었다.

여기서 '뿔'에 해당하는 '케라타'(kerata)는 구약 성경에서 '능력' '권세'를 의미한다(민수23,22; 신명33,17; 1사무2,10; 1열왕22,11; 시편112,9; 다니엘7,7.20).

 

이것은 구약의 위경 에녹1서 90장 9절에 언급된 '뿔달린 양'의 면모를 상기시키는 동시에, '완전성', '충족성'을 상징하는 상징수 '일곱'과 더불어 사용되어 선택된 하느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기에 충분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의 완전함과 충족성을 상징한다.

또한 '눈'에 해당하는 '옵탈무스'(ophthalmus) 즈카리야서 4장 10절에 언급된 '이 일곱 눈은 바로 온 세상을 두루 살피시는 주님의 눈이시다'는 말씀 및  역대기 하권 16장 9절의 '주님께서는 당신께 한결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에게 슬기를 주시려고, 온 세상을 두루 살펴보고 계십니다'라는 말씀과 연결되어 있다.

 

'눈'의 수 역시 '일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통찰력' 및 그의 '전지'를 상징한다.

'하느님의 일곱 영'은 묵시록 1장 4절과 5절에 나오는대로 즈카르야서 4장 1절에서 14절에 근거한 '성령'에 대한 상징적 묘사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일곱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통찰력 및 전지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 어린양이 나오시어, 어좌에 앉아계신 분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받으셨습니다'(7).

 

'받으셨습니다'로 번역된 '에일레펜'(eilephen)은 '손에 들다', '쥐다', '잡다' 라는 뜻을 지닌 '람바노'(lambano)의 미완료 능동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능동적으로 책을 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묵시록 10장 8절에서 사도 요한이 천사의 명령을 듣고 수동적으로 책을 받아든 것과 확연히 대조된다. 아울러 미완료 시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책을 잡고 계시는 행위를 눈에 보이듯 회화적으로 드러낸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오른손 위에 있는 책을 집어드는 행위는 다니엘서 7장 13절과 14절에 나오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온 우주에 대한 권세를 부여받았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하느님 나라의 종말론적 도래가 이미 하늘 어좌에서부터 실현되고 있음을 예시한다.

 


  


20221117일 목요일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는 장면을 소개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마치 사람처럼 여기시며 의인화하여 말씀하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여기서 의인화된 것은 예루살렘이라는 도시 자체입니다.

그 안에는 그곳의 주민들, 곧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한 예루살렘의 유다인들이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슬퍼하시는 이유가 다음 구절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이는 기원후 70년에 일어난 예루살렘 파괴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로마 제국 군인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하여 유다교 신앙의 구심점이던 예루살렘 성전을 함락시킵니다.

그래서 루카 복음사가는 이 사건을 생각하며 예수님께서 한탄하시는 장면을 서술합니다.

셋째, 예루살렘 멸망의 이유를 언급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메시아 구세주로 오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그분을 배척합니다. 임금의 모습으로 오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거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탄식하시며 안타까워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1코린 3,16-17; 2코린 6,16)이며, 우리의 몸은 성령께서 머무르시는 성전입니다(1코린 6,19 참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가

이기심, 믿음의 부족, 이웃에 대한 무관심과 혐오에 사로잡혀 자신을 스스로 파괴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루카19,41-44)

그때에 4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 하느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하느님의 평화를 누려야할 예루살렘이, 제사와 윤리 그 율법으로 사람의 뜻을 위한 도성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우신다~

 

42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는 평화다. 그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그리스도이시니 예수님이 우리의 평화이시다.

 

(에페2,14)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속죄제물)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요한14,27) 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대속으로 죽으시고)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 예수님의 십자가로 얻는 죄의 용서, 자유, 구원의 진리로 쉼, 안식(7), 하늘의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규정과 교리에 의한 사람의 희생과 노력, 그 열심히 찾으려는 이들에게는 그 하늘의 평화가 감추어져 있다.

 

43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 그것은 세상의 모든 인간은 하느님을 계속 거부한다는 의미다.

 

(예레 6,6-16) 6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무를 베어 내고 예루살렘을 칠 공격 축대를 쌓아 올려라. 예루살렘이야말로 벌을 받아야 할 도성으로 그 안에 온통 *억압이 자리 잡고 있다.

= 하느님의 진리가 주는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는 곳이다.

 8 예루살렘아, 교훈(진리)을 받아들여라. 그러지 않으면 내가 너와 갈라서고 내가 너를 폐허로 만들어 인적 없는 땅이 되게 하리라.” 10ㄱ 누구에게 말을 해야 합니까? 누구에게 알아듣도록 경고해야 합니까? 그들의 귀는 *할례(육의죽음)를 받지 않아서 들을 수가 없습니다.

= 사람의 지혜, 뜻으로 듣는 그 귀를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10ㄷ이제 주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비웃음 거리가 되고 그들은 그 말씀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13 정녕 낮은 자부터 높은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부정한 이득만 챙긴다. 예언자부터 사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거짓을 행하고 있다.

= 사람의 계명을 하느님의 계명인냥 가르치는 그 거짓이다.(마르7,7~!9참조)

 14 그들은 내 백성의 상처(죄의식)를 대수롭지 않게 다루면서 평화가 없는데도 “평화롭다, 평화롭다!” 하고 말한다.

= 사람의 계명과 종교행위, 예식으로는 죄로 인한 상처, 곧 계속되는 미움, 죄의식 등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하늘의 안식,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는 말씀이시다.

 15 그들은 역겨운 짓을 저질렀으니 부끄러워해야 하는데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얼굴을 붉힐 줄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들은 쓰러지는 자들 가운데에서 쓰러지고 내가 그들을 징벌할 때 넘어지리라. 주님이 말한다. 16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갈림길에 서서 살펴보고 *옛길을 물어보아라. 좋은 길이 어디냐고 물어 그 길을 걷고 너희 영혼이 *쉴 곳을 찾아라. 그러나 그들은‘그 길을 가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44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 찾아오신 때, 이미 찾아 오셨었다는 말씀이다. 언제?- 아담이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뜻을 적대하는 그 죄를 범했을 때이다.‘아담이 죄를 짓고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스스로 만들어 입은 그 옷은 죄를 덮을 수가 *없다~

 

(창세3,21) 21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 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다.

= 가죽 옷, 아담의 죄를 덮어, 용서 하시려고 찾아오셔서 어린 숫양을 죽이시고 그 죽음이 남긴 가죽 옷으로 만들어 입히셨다. 그 후에, 세상의 화려함과 큰 힘을 가진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했던 그의 민족을 찾아가셨다.

 

(탈출3,7-8) 7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세상)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8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그 땅에서 저 좋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족과 히타이트족과 아모리족과 프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곳으로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

= 그러나 이집트에서 구출되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그 이민족의 풍습이 하느님의 말씀보다 더 좋아 보여 받아들이고 따랐다. 그래서 하느님의 진노(震怒)를 산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시련을 겪게 하시어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그래서 그들이 잘못을 깨닫고 부르짖으면 하느님께서 찾아 가셔서 판관들을 세워 그들을 그 시련에서 해방시켜 주신다.

그러나 살만하면 또 이민족의 풍습을 따라 살며,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는다. 하느님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또 시련을 겪게 되고, 하느님은 또 그들을 찾아 가시고~ 판관기는 전부 인간의 끝없는 욕망의 죄와 하느님의 무한하신 용서, 그 반복의 이야기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간들은 끝까지 오늘날까지 자신들의 욕망을 고집하며 하느님의 말씀(뜻)을 따르지 않고 버린다. 그래서 아담을 구했던 어린 숫양,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구출을 도왔던 모세, 그리고 가나안의 판관들, 그 구원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 당신의 아들을, 그들의 끝없는 죄의 속죄 제물로 보내신다.

하늘의 쉼, 안식(7),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그래서 세상 모든 죄인(짐승)들의 구원(생명)의 양식으로 보내신 것이다.

 

(루가2,12) 2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려 오신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당신의 몸으로 지키시려 오신 것이다. 곧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살지 않는 그 하느님의 뜻을 버리는, 대적하는 죄, 그래서 죽을 수 밖에 없는 그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해 그들의 죄로 죽으시러 오신 것이다.

그것이 창조 이전 하느님의 구원의 계약(약속)이셨고 뜻이였다.(에페1,4~) 그 뜻에 순명하신 어린양 예수님이시다. 그래서 그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의 길이 구원, 생명의 진리인 것이다.

 

(요한14,6)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오늘 독서에서 두루마리(성경)속에 일곱 번 봉인된, 곧 감추어진 일곱, 그 안식을 주는 진리를 깨닫고, 알 수 있도록, 열고 들여다 볼 수 있으신 분이 예수님뿐이시라는 것이다.

 

(묵시5,1-9) 1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손(진리)에, 안팎으로 글이 적힌 두루마리 하나(성경)가 들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두루마리는 일곱(안식) 번 봉인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4 두루마리를 펴거나 그것을 들여다보기에 합당하다고 인정된 이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슬피 울었습니다. 5 그런데 원로 가운데 하나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울지 마라. 보라,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예수)가 승리하여 일곱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펼 수 있게 되었다.” 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님께서는 두루마리를 받아 봉인을 뜯기에 합당하십니다. 주님께서 살해되시고 또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에서 사람들을*속량하시어 하느님께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 인간들은 그 진리의 쉼, 안식이신 예수님을 모르기에 그분의 길이 어리석어 보인다.

 

(1코린1,23-24) 23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24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 그러니 인간의 지혜, 계명으로 똑똑하다, 의롭다하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찾아 가셨듯, 오늘 죄인인 자신들을 찾아오신 구원자를 못 알아본다. 사람의 자기 의로움으로 죄인이 아니라고 자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들이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든다 하신다.(1요한1,10)

인간들이 자신의 힘으로, 자신들의 열심한 그 의로움으로 하늘에 오르려는 그것이 죄임을 모르기에~(창세11,1-9 로마9,30- 10,4참조)

그 죄인들을 찾아오시는 구원의 하느님, 곧 자신의 죄 때문에 찾아오신 구원의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했기에, 예루살렘, 그 안에 들어있는 내가 부서지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때는 전에도, 지금도, 또 앞으로도 계속된다.(묵시1,8참조)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히브4,1) 1 그러므로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약속이 계속 *유효한데도, 여러분 가운데 누가 이미 탈락하였다고 여겨지는 일이 없도록, 우리 모두 *주의를 기울입시다.

 

* 주님! 당신의 일곱영, 진리의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일어나는 시련의 사건들이 하느님께서 찾아오신 때라는 것을 깨닫게 하소서. 그래서 우리의 뜻, 욕망을 위한 신앙에서 돌아서 하느님의 약속(생명)을 얻게하소서 ~아멘!!!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복음(루카19,41~44)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41~42)

 

루카 복음 19장 41~44절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기사 중에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 내용이다.

 

군중들이 예루살렘에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지닌 메시야 왕국이 세워질 것을 기대하며 흥분된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반대로 가까운 장래에 있을 예루살렘 멸망을 바라보고 우시며 애가를 부르신다.

 

루카 복음 19장 41절에는 '에클라우센 에프 아우텐'(eklausen ep auten; and wept over it)이 나온다.

 '~에 대하여'라는 뜻을 지닌 전치사 '에피'(epi)의 축약형인 '에프'(ep)와 '예루살렘 도시'를 가리키는 여성형 지시 대명사 '아우텐'(auten)이 기록되어 있는데, 직역하면 '그를 위하여 우셨다'이다.

즉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 재앙을 정확히 내다보시고 이에 대해 슬퍼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우시며'에 해당하는 '에클라우센'(eklausen)의 원형 '클라이오'(klaio)는 '울다', '곡하다', '애곡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감정을 삭이며 소리 죽여 우는 내적 슬픔이 아니라 자신의 슬픈 감정을 밖으로 표출시키는 격렬한 비통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괴로움을 영혼의 부르짖음 같은 통곡으로 표현하셨다.

 

수많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그리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진리의 길을 걸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이것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마침내 그리스도를 핍박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죽임으로써 멸망하게 될 운명에 처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죄악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인간 본성에 대한 메시아적 슬픔으로도 볼 수 있다.

 

한편, 루카 복음 17장 42절의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란 무엇인가를 알아 보아야 한다.

여기서 '평화'로 번역된 '에이레넨'(eirenen)의 원형 '에이레네'(eirene)는 히브리어 '샬롬'(shalom)과 같은 뜻의 희랍어로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로부터 생기는 '구원' '충만한 은총'  '진정한 기쁨'을  의미한다.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에 해당하는 '타 프로스 에이레넨'(ta pros eirenen; what would bring you peace)에서, 전치사 '프로스'(pros)가 '~에 속한' (belong)이라는 의미가 있어서 문자적으로 '평화에 속해 있는 것들'로 번역이 가능하다.

이것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화해시키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수많은 말씀과 행적을 통해 당신 자신에게만 진정한 구원과 평화가 있음을 보여 주신 것들을 말한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였다면, 그들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고, 그로 말미암아 진정한 구원과 충만한 은총을 만끽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끝으로 42절의 '감추어져 있다'에 해당하는 '에크뤼베'(ekrybe; it is hidden)는 부정과거 수동태인에, 과거 어느 시점에 감추어져 지금과는 관계없는 것이 아니라, 과거 어느 시점에 감추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 효력이 지금까지 남아 있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진리를 계속적으로 알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단어가 수동태로 쓰였는데, 하느님께서 죄악으로 말미암아 완고해진 그들의 지성을 어둡게 해서 예수님께 관한 일을 깨닫지 못하게 하셨음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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