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09월 17일 토요일
[연중 제24주간 토요일] 씨 뿌리는 사람 (루카8,4-15)
제1독서<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1코린15,35-37.42-49)
35 “죽은 이들이 어떻게 되살아나는가? 그들이 어떤 몸으로 되돌아오는가?” 하고 묻는 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36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37 그리고 그대가 뿌리는 것은 장차 생겨날 몸체가 아니라 밀이든 다른 종류든 씨앗일 따름입니다.
42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43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44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45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인간 아담이 생명체가 되었다.”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46 그러나 먼저 있었던 것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이었습니다. 영적인 것은 그다음입니다.
47 첫 인간은 땅에서 나와 흙으로 된 사람입니다.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48 흙으로 된 그 사람이 그러하면 흙으로 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에 속한 그분께서 그러하시면 하늘에 속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49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
화답송시편 56(55),10.11-12.13-14(◎ 14ㄷㄹ 참조) ◎ 하느님 앞에서, 생명의 빛 속에서 걸어가리라.
○ 제가 부르짖는 그날, 그때 원수들은 뒤로 물러가리이다. 하느님이 제 편이심을 저는 아나이다. ◎
○ 하느님 안에서 나는 말씀을 찬양하네. 주님 안에서 나는 말씀을 찬양하네. 하느님께 의지하여 두려움 없으니,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
○ 하느님, 제가 당신께 드린 서원, 감사의 제사로 채우리이다. 제 목숨 죽음에서 건져 주시어, 제 발걸음 넘어지지 않게 하셨나이다. 하느님 앞에서 걸어가라, 생명의 빛 속에서 걸어가라 하셨나이다. ◎
복음<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루카8,4-15)
4 많은 군중이 모이고 또 각 고을에서 온 사람들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5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발에 짓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들이 먹어 버리기도 하였다.
6 어떤 것은 바위에 떨어져, 싹이 자라기는 하였지만 물기가 없어 말라 버렸다.
7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한가운데로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함께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8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자라나서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외치셨다.
9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비유의 뜻을 묻자, 10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유로만 말하였으니,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11 그 비유의 뜻은 이러하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12 길에 떨어진 것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악마가 와서 그 말씀을 마음에서 앗아 가 버리기 때문에 믿지 못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13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
14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15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연중 제24주간 토요일 (1코린15,35-37.42-49)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 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42-44)
코린토 전서 15장 42-44절은 36-38절에 나오는 씨의 사례를 염두에 두면서 이 땅에 사는 인간은 썩어 없어질 것에 매여 있으나, 부활을 통해 마침내 썩지 않는 것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을 논증한다.(2코린5,1-5)
여기서 '썩지 않는 것'으로 번역된 '압타르시아'(aptharsia)는 부정 접두어 '아'(a)와 '썩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프테이로'(ptheiro)의 합성어이다. 특히 '프테이로'(ptheiro)는 시신이 부패하는 것을 뜻한다.
일부 코린토 교인들을 포함한 당대 그리스인들이 일체의 부활 교리를 부정한 것 역시 현실에서 드러나는 육체의 죽음과 그로 인한 시신의 부패를 관찰한 데서 기인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육체는 본질상 썩어 소멸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이런 점을 보아서도 영혼이 육체보다 고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스인들은 죽음의 과정을 통해 영혼이 자신의 감옥을 탈출하는 것이니, 사후에 다시 영혼이 자신의 감옥인 육체와 결합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바오로는 육신이 죽음의 과정을 거쳐 부패한다는 사실 그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는 죽어 이 지상에서 틀림없이 부패한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의 철학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상을 갖고 있다. 그는 육체가 죽음을 거쳐 새로운 부활의 몫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소망하고 믿는다.
바오로는 그리스의 영육이원론 철학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스 철학에서의 영육 이원론과 바오로의 신학 사상은 그 출발점부터가 다르다. 특히 몸과 관련하여 그리스인들이 몸을 영혼에 비해 비천한 것으로 간주한 반면, 바오로는 여기서 그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할 새로운 몸을 입는 것으로 언급함으로써, 그리스 철학자들의 사상과 자신의 사상을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다. 몸을 하느님의 창조물이며, 새 창조의 대상으로 분명하게 인식하였던 것이다.
한편 바오로는 육신의 죽음과 부패를 씨를 뿌리는(심는) 과정과 비교하고, 부패를 넘어선 새로운 변형의 부활할 몸을, 씨가 죽어 성장할 나무에 비교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자연스럽게 썩어질 육체에 '묻히고'(뿌리고; 심고)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라고 언급된 36절의 내용과 관련시키는 것이다.
즉 바오로는 '뿌리고'(심고)로 번역된 '스페이레타이'(speiretai)를 36절에서는 씨가 땅 속에 심겨지는 것에 대해 사용한 반면, 42-44절에서는 인간의 죽은 몸이 땅 속에 묻히는 것에 대해 사용한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죽은 몸이 땅 속에 뿌려진다는(심겨진다는) 것은 죽은 몸이 묻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바오로는 여기서 씨앗이 땅 속에 심겨지는 하나의 그림과 시신이 무덤속에 묻히는 하나의 그림을 의도적으로 오버랩(overlap)시키고 있다.
이것을 통해 바오로는 새로운 영적 몸을 입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죽음의 과정을 거쳐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43)
바오로는 본절에서 '비천한 것'과 '영광스러운 것', '그리고 '약한 것'과 '강한 것'을 대비시킨다. 여기서 '비천한 것'이나 '약한 것'이란 표현은, 죄로 말미암은 인간의 타락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서(로마3,23) 본질적으로 질병이나 고난, 그리고 환난에 빠질 수 밖에 없고, 선한 것은 행할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한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다.(로마7,19)
그런데 바오로는 42절에 이어 여기서도 '묻히고'(뿌리고, 심고) 라는 뜻을 지닌 '스페이레타이'(speiretai)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인간의 죽음과 부패를 여전히 식물의 씨앗이 땅에 뿌려지는 것과의 유비 속에서 이해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비천한 것으로 묻힌다는 것은 도대체 식물의 씨앗이 땅에 뿌려지는 것과 어떤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가?
제아무리 죽은 자를 위해 좋은 옷을 입히고, 그 관을 아름답게 치장한다고 하더라도, 그 시신 자체는 산 자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 땅 속에 묻히게 된다.
이것은 마치 씨앗이 뿌려질 때 그 알갱이가 어두운 땅 속으로 감추어지는 것과 같기에 시신이 비천하게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영광스러운 것'과 '강한 것' 이란, 지금의 육체와 다른 면모로서의 부활할 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리신 하느님의 강력한 힘이(로마1,4) 부활할 몸을 통해서도 구현됨을 뜻한다.
이것은 지금의 우리 육체가 갖는 '비천한 것'과 '약한 것'에 반대되는 것이란 점에서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먼저 이것은 더 이상 죄악과 관계 없으며, 하느님의 모상을 온전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영광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죄에 오염됨으로 인해 육체적 허약함에 시달릴 뿐 아니라 마귀와의 싸움에서 패할 가능성이 많은 이 세상에서의 육체와 달리, 허약함이 없을 뿐 아니라 더 이상 마귀의 꾀임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점에서 '강한 것' 이다.
이러한 '영광스럽고', '강한', 부활할 몸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의 살아있는 몸 안에 있는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현재의 우리의 지력과 능력을 초월한 하느님의 능력에 의해 덧입게 된다. 현세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지력으로는 이것을 결코 완전하게 이해할 수가 없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44)
바오로는 본절에서 몸의 두 가지 형태를 대조하고 있는데, '물질적인 몸'과 '영적인 몸'이 바로 그것이다. 바오로의 인간관에서 독특한 것은 인간을 물질적인 부분과 비물질적인 부분으로 구분하고, 비물질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프쉬케'(psche; 영혼 혹은 혼)와 '프뉴마'(pneuma;심령 혹은 영)를 번갈아 사용해서 나타낸다는 점이다.
'프쉬케'(psche)는 '프뉴마'(pneuma)와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구분되어 쓰일 때에는 사람의 육체적 생명(육신)과 관계된 비물질적 부분(영혼)을 가리킬 때 주로 쓰이고, '프뉴마'(pneuma)는 하느님의 생명(하느님의 초자연적 사랑인 성령)의 영향을 받은 영적 생명과 관계된 비물질적 부분(심령;영혼의 핵으로서,세례와 견진때 받은 성령을 담는 그릇)을 가리킬 때 주로 쓰인다.
따라서 '물질적인 몸'으로 번역된 '소마 프쉬키콘'(soma psychikon ; a natural body)은 '인간이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덧입은 육체적 생명력을 갖는 몸'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프튜마티콘'(pneumatikon)이 본래 '하느님의 영'(성령)을 주로 뜻하는 '프뉴마'(pneuma)에서 파생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경우, '소마 프뉴마티콘'(soma pneumatikon ; a spiritual body)는 '영적인 몸' 이라기 보다는 '하느님의 영에 의해 되살아난 새 몸', '부활을 통해 장차 오는 세대에 덧입게 될 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2코린5,1)
'영적인 몸'은 마치 어리석은 코린토 교인들이 가정했을 법한 논리, 즉 죽은 자들이 '부패한 시신의 재조직'을 통해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신령한 몸' 즉 '다른 몸'을 입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부활할 몸의 근본적 변화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몸은 '자기 정체성'에 있어서는 연속성을 지니고 있으나, '몸의 존재 양식'에 있어서는 불연속성을 지니고 있는 매우 독특한 몸이다.
우리는 이 '영적인 몸'에 대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과 육신이 무덤의 부패에 썩지 않고 영혼과 함께 몽소승천(피승천)한 성모님의 몸을 생각하면 된다. 죽은 육신과 부활한 육신은 겉 모습으로는 똑같은 육신이다. 그러나 죽기 전의 육신과는 차원과 상태가 다른 육신이다.
예수님은 천주 성자 위격을 가지신 분으로서, 그 영혼과 천주성은 죽을 수 없는 분이시지만, 육신은 죽으신지 사흘만에 부활하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육신은, 자연적으로는 영혼의 요소를 지닌 육신, 곧 사기지은(四奇之恩)을 입으셔서, 몸이 빛나고, 무손상, 신속, 투철하시다.
여기 H2O물(액체)이 있는데, 물을 끓이면 기체(수증기)가 되고, 얼리면 고체(얼음)가 되지만, 다같이 실체와 본질은 H2O이고, 다만 새로운 조건하에 새로운 특성을 지니고 있을 뿐인 것과 같다.
우리의 '영적인 몸'도 자연적으로는 영혼의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처럼 사기지은(四奇之恩)을 입어서 몸이 빛나고, 더 이상 손상(고통)이 없는 무손상, 가고자 하는 곳에 이미 가 있는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는 신속함, 문을 닫고 있는데도 뚫고 들어가는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 투철함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 새로운 존재 양식인 것이다.
2022년 09월 17일 토요일
[연중 제24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강수원 베드로 신부)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파견하시면서
“너는 저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그 귀를 어둡게 하며 그 눈을 들어붙게 하여라.”(이사 6,10)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을 멸망시키라는 명령이 아니라,
완고한 백성이 이사야의 말을 듣지 않고
스스로 멸망의 길을 고집스럽게 가리라는 것을 하느님께서 이미 다 알고 계셨다는 뜻의 수사학적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다음에 바로 이 구절을 인용하신 것도(마르 4,12; 루카 8,10 참조),
당신께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있는 그대로 알려 주신다 해도 군중이 당장 알아듣고 실행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였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만은 이 비유를 풀이해 주셨고,
그렇게 우리 신앙인들을 모두 하느님 나라의 신비로 초대하셨습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지만,
오늘 주님의 말씀처럼 때로 우리는 그것을 전해 들었으면서도 마치 한 번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면, 하느님의 말씀과 신앙 체험들로 뜨겁게 달구어졌던 마음이 자꾸만 유혹과 죄(“길”),
조바심이나 시련(“바위”), 걱정과 탐욕(“가시덤불”)에 갇혀 식어 버리기도 합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세상의 썩어 없어질 가치들이 자신 안에서 죽고 묻혀야만 영광과 생명을 피워 낼 수 있다고 증언합니다.
일상 속 욕심과 집착, 불필요한 걱정과 불안에 굴복하지 않고,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하느님께 기도와 선행의 열매를 맺어 드리는 좋은 땅으로 살아갑시다.
(강수원 베드로 신부)
[연중 제24주간 토요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설명
성경의 의문은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하느님은 말씀을 그렇게 짝하여 주셨다. 깨달음은 그 성경 말씀에 근거해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 인간들의 감동적 스토리를 예화로 들어 말하는 것을 조심해야한다. 그러면 하느님의 뜻에서 떨어져 나간다.
성경은 하느님과 그분의 뜻에 죽기까지 순명하신 예수의 감동적 스토리, 그 구원의 말씀이다.
(루카8,8ㄴ-15)
8ㄴ예수님께서는 이(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하시고,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외치셨다.
= 성령을 청하여 성령의 귀로 , 이끄심으로 들어야 하는 것이다.
(2베드1,20-21) 20 무엇보다 먼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어떠한 예언도 임의로(인간의지혜, 뜻)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21 예언은 결코 인간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성령에 이끌려 하느님에게서 받아 전한 것입니다.
= 하느님의 뜻을 깨달아야 하는 것.
(요한16,13) 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9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비유의 뜻을 묻자,
= 비유의 뜻, 성경 말씀의 문자 그대로가 아닌 문자속에 숨겨진 하느님의 뜻을 깨달아야 하는 것, 곧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느님의 지혜로 깨달아야 하는 것(1코린2,6-9),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을 반드시 청해야 하는 것이다.
10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미스테리온-비밀)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유로만 말하였으니,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 하느님의 뜻을 깨닫게 하실 진리의 성령과 함께하는 이들이 아닌, 다른이 곧 인간의 지혜, 뜻으로 들으면 하느님의 구원을 깨닫지 못한다 하시는 것이다.
11 그 비유의 뜻은 이러하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12 길에 떨어진 것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악마가 와서 그 말씀을 마음에서 앗아 가 버리기 때문에 *믿지 못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 하느님의 구원의 길, 그 계약의 말씀을 인간의 길(방법)로 받으면 하느님의 말씀 안에 구원의 약속을 빼앗기는 것이다. 하느님의 진리의 말씀은 보이지 않는 비밀, 신비이기에 깨달아 믿음으로 받는 것, 그러니 나타나는 인간의 보이는 현상은 참 진리가 아니기에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
(로마8,24) 24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13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
= 하느님의 말씀은 사람의 감정을 기쁘게 하시지 않는다.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쪼개어 죄악을 드러내기에 아프다.(히브4,12참조) 영의 수술과 같은 것, 죄라는 암 덩어리를 제거해 살리시려는 것이다. 물론 죄, 그 암 덩어리의 치료의 약은 ‘그리스도의 피’다.(루가22,20 에페1,7 참조)
그 하느님의 뜻을 깨달아 담지 못하면, 갖지 못하면 구원에서 떨어져 나간다.
14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 세상살이, 곧 현세를 위한 신앙을 갖는 사람도 떨어져 나간다. 하느님은 세상의 복이 아닌, 하늘의 복(바라크- 신적 생명력)을 약속 하셨고, 예수님께서도 그 하늘의 생명(福)을 주시기 위해 죽으셨기 때문이다.
세상의 복은 사탄이 약속했고(루가4,6) 그것은 속이는 거짓이다.
15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오늘본문 앞3절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여자(데무트-그릇), 흙으로 빚어진 그 그릇들이, 성경 말씀을 하느님의 바르고 착한 마음(뜻), 그 참 진리 그대로 듣고, 그 말씀을 그릇(마음)에 간직하라 시는 것이다. 그것이 좋은 땅인 것이다. 그런데 ‘인내로 열매를 맺어라’하신다. 인간의 길(계명)이 아닌 하느님의 길(계명) 그 말씀이 진리라 말하면 많은이들이 핍박할 것이기에 인내로 끝까지 지키라는 말씀인 것이다.
(티토1,13-14) 13 이 증언은 참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엄하게 꾸짖어 그들의 믿음이 건전해져서, 14 유다인(사람)들의 신화, 그리고 진리를 저버리는 인간들의 계명에 정신을 팔지 않게 하십시오.
(2테살3,5) 5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이끄시어, 하느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이르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천주의 성령님 무두를 의탁합니다. 아멘~♡
연중 제24주간 토요일 복음 (루카8,4-15)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았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4~8)
루가 복음 8장 1~56절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비유'의 말씀이며, 이것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스런 성격을 매우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 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등을 말씀하신 이유 중에 하나는 말씀의 씨를 뿌려도 바리사인들과 같이 완고하고 사악한 무리들의 마음은 말씀을 거부함으로인해 결실을 하지 못하는 밭인 반면에, 말씀을 받아들이며 묵묵히 듣는 제자들과 같은 무리들의 마음은 결실을 맺는 밭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했는데, '비유'로 번역된 '파라볼라이스'(parabolais)의 원형 '파라볼레'(parabole)는 원래 어떤 것을 다른 것의 곁에 놓음으로써 비교한다는 뜻을 지닌 명사이다.
즉 '파라볼레'는 심오한 사상이나 어려운 이야기를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실례에 빗대서 쉽고 명쾌하게 설명하는 이야기 진행 방법이다.
'씨뿌리는 사람'에 해당하는 '호 스페이론'(ho speiron; a sower)에서 '씨뿌리는'으로 번역된 '스페이론'(speiron)은 '씨를 뿌리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스페이로'(speiro)의 현재분사로서 앞에 있는 관사 '호'(ho)와 함께 분사의 독립적 용법으로 쓰였다.
이것은 어떤 특정한 자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씨뿌리는 사람'(파종하는 자) 즉 농부(a farmer)를 가리킨다.
농경사회에서 밭에 파종하는 자의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낯익은 풍경인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는 농경의 모습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복음 전파와 그것의 결실에 관한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농부는 복음을 전하는 자를 가리키고, 씨 뿌리는 네가지 밭은 복음을 전해 받는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
여기서 등장하는 네가지 밭은 별개의 각각의 밭이 아니라 한 밭에 있는 다양한 땅의 상태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원래 팔레스티나에서는 밭을 경작하기 전에 씨 뿌리는 풍습이 있었으며, 씨가 떨어지는 밭은 대부분 돌이나 가시도 섞여 있었고, 잡초도 어느 정도 나 있었기 때문이다.
농부는 자신이 뿌리는 씨가 어떤 땅에 떨어지든 상관하지 않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씨앗을 이곳 저곳에 뿌린다.
그러던 중 씨앗의 일부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버리게 된다.
여기서 '길에'에 해당하는 '파라 텐 호돈'(para ten hodon; along the path)인데, 씨앗의 일부가 밭 사이의 길 내지는 밭을 가로지르는 딱딱한 길을 따라 뿌려진다.
말하자면, 여기서 '길'이란 밭 사이에 나 있는 좁은 길이나 농부들이 밭일을 하기 위해 자주 걸으면서 다져져 길과 같이 된 땅을 말한다.
그래서 밭 사이에 나 있는 다소 딱딱한 좁은 길에 떨어진 씨앗은 땅을 뚫고 쉽게 뿌리를 내릴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농부의 기대와는 달리 결실은 커녕, 뿌리 한 번 제대로 내려보지 못하고, 그 주위에 날아다니고 있는 '새들'('타 페테이나'; ta peteina; the birds)의 눈에 띄게 되고, 결국 그들의 먹이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여기서 이 새들은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가버리는 악한 자를 상징한다(8,12).
또한 '흙이 많지 않은 돌밭'은 '흙으로 얇게 덮인 바위가 많은 밭'이라는 말인데, 밖으로 싹이 돋지만, 곧바로 무섭게 뜨거운 태양이 솟아올라 그 열기와 빛으로 말미암아 메말라 죽게 된다.
이 비유에서 '솟아오르는 해'는 '환난이나 박해'로 상징되고 있다.(8,13)
우리의 내면이 마치 돌밭과 같이 깨어지지 않는 완고한 자아로 가득 차 있으면, '환난이나 박해'가 신앙을 단련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 자체를 소멸시킬 수도 있다는 말이다.
세번째로 '가시덤불'로 번역된 '아칸타스'(akanthas; thorns)는 '가시'나 '가시덤불'을 뜻하는 명사 '아칸타'(akantha)의 목적격 복수형으로서 '가시들' 내지 '가시덤불'을 의미한다.
이 '가시덤불'위에 떨어진 씨앗은 그보다 먼저 높이 자라버린 가시에 찔리고 그 그늘에 막혀서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고사(枯死)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으로 우리의 내면을 기도와 말씀과 성체로 일구고 돌보지 않으면, 우리 마음의 내면은 이미 선점하고 있는 가시와 같은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으로 무성해질 것이다(8,14)
끝으로, '좋은 땅'에 해당하는 '에피 텐 겐 텐 칼렌'(epi ten gen ten kalen; on good soil; into good ground)에서, '좋은'으로 번역된 '칼렌'(kelen)의 원형 '칼로스'(kalos)는 기타 다른 것보다 더 우수하고 좋은 모든 것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단어이다.
이것은 씨앗이 자라기에 '적합하고'(suitable),'쓸모있는'(useful) 땅을 말한다.(8,15)
이 땅은 위의 세 가지 종류의 땅보다 훨씬 우수하고 좋은 땅으로서 씨앗이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을 수 있을 때까지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식물 경작에 매우 적합한 땅'을 말한다.
여기서 '어떤 것'에 해당하는 '호'(ho; some)는 지시 대명사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호스'(hos)의 주격 중성 단수로서, '어떤 것 하나'라는 뜻이다.
이것은 각각의 씨앗들이 좋은 땅에서 나름대로 열매를 맺었다는 것을 보여 주며, 또한 씨앗들의 조건이 동일한 땅에 떨어져도, 그 결실의 양은 씨앗의 '질'(質)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종합하면,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씨앗이 아무리 부실해도 열매맺지 못하는 경우는 없다는 사실과 결실의 양은 씨앗의 질에 따라 각각 다르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2022년 09월 17일 [연중 제24주간 토요일]
가짜(거짓)는 교회(敎會) 안에 있다.
복음(루카8,4-15)
4 많은 군중이 모이고 또 각 고을에서 온 사람들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11 그 비유의 뜻은 이러하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비유(比喩)의 말씀과 해석(解釋)의 말씀을 함께 보려한다.
5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말씀)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발에 짓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들이 먹어 버리기도 하였다.
= 길을 직역하면 길가, 길옆이다.
12 길에 떨어진 것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악마가 와서 그 말씀을 마음에서 앗아 가 버리기 때문에 믿지 못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 말씀을 하느님의 뜻, 길을 벗어난 인간의 뜻, 길을 위한 선악(善惡)의 행위의 법(法)으로 받아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그 구원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지 못했기에 구원(救援)에 이르지 못함이다. 곧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그 진리(眞理)를 믿지 못한 구원의 믿음과 상관없는 신앙(信仰)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뱀의 지혜, 곧 악마(惡魔)의 계략(計略)이다.
6 어떤 것은 바위에 떨어져, 싹이 자라기는 하였지만 물기가 없어 말라 버렸다.
13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
= 바위이신 그리스도를(창세49,24- 탈출17,6- 1코린10,4), 진리의 물, 곧 생명수(生命水)로 받지 못하고, 마시지 못해 하늘의 생명, 구원의 믿음과 상관없는 신앙을 살았기 때문이다.
7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한가운데로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함께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 숨,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력(生命力)이다.(창세2,7)
14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아담처럼 인간의 욕망(慾望)을 위한 말씀으로 받아, 하느님처럼의 자리에 앉아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解決)해야 했기 때문이다. 피조물(被造物)인 인간은 창조주(創造主) 하느님만을 의지(依支)하여 살 때 쉼(안식)이다.
그러나 거짓(위선)의 말인 뱀의 유혹을 먹고는 스스로 자유, 쉼(안식)을 만들어 내려하니 숨이 막혀 삶이 근심, 걱정이라는 감옥(지옥)이다. 역시 믿음과는 상관없는 신앙을 살았기 때문이다.
8ㄱ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자라나서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15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 좋은- 말씀으로 창조를 이루신 “보시니 좋았다‘의 하느님의 창조언어(創造言語)다.
⁜사제(司祭)께서
<‘좋았다’고 일반적으로 번역하는 히브리어 ‘토브’는 영어로 ‘good', 혹은 ’in order' 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일들은 말씀으로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따라서 ‘좋았다’라는 것은 말씀에 따라서 이루어진 것들이기에 아름답고 좋은 것들이고 질서가 잡혀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인간의 뜻, 욕망(慾望), 영광(榮光)의 길이 아닌, 사실 그대로 좋은(토브) 하느님의 뜻, 영광, 그 진리(眞理)를 깨달아 믿음으로 마음에 간직하고 하느님의 말씀만을 의지하여 사는 것이, 바르고 착한 마음이며 백배의 열매를 맺는 좋은 땅(사람)이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나라를 바라며, 보이지 않는 하늘의 생명, 영광을 믿으며 사는 것이 신앙이다.
그래서 인내(忍耐)가 필요하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좋은(토브-창조)뜻으로 깨달아 받았을 때, 말씀이 일하신다. 그래서 누군가는 외친다. ‘목자여! 사제들이여! 자신들의 지식(知識)의 말, 생각, 그딴 말 하지 말고, *말씀이 일(창조)하시게 하라!’
(1테살2,13) 13 우리는 또한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8ㄴ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외치셨다.
= 성령의 귀(耳)로, 곧 성령(聖靈)께 의탁(依託)해야 깨닫고 믿을 수 있다. 하심이다.
9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비유의 뜻을 묻자, 10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유로만 말하였으니,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 창조(創造) 이전(以前),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選擇)된, 그 선택받은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말씀이다. (에페1,4-5.11) 그리스도 밖에 사람들은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1코린1,21) 21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복음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우리가 믿겠다고 세례(洗禮) 받은 것아 아니라, 하느님께서 믿음을 위해 세례를 받도록 하신 것이다.(요한1,16) 그리고 세례는 세상(世上)에 대한 욕망(慾望)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것을 채워주는 오해(誤解)된 하느님으로, 십자가의 그리스도로 헛되게 가르치기에, 그 거짓 가르침에 속아 많은 이들이 구원의 믿음과 상관없는 세상의 의(義), 재물(財物), 영광(榮光)을 얻기 위해 무거운 짐으로 수고(愁苦)하며 근심, 걱정의 신앙을 살고 있다.
(마태24,24)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 할 수만 있으면 선택된 이들까지 속이려고 큰 표징과 이적들을 일으킬 것이다.
=세상의 것은 각자의 구원(救援)에 알맞게, 이미 주셨다. 기도(祈禱)해서, 졸라서 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마태6,7-8.31참조) 생각해 보자, 하느님과 우리의 뜻, 목적이 다를 때,(굶어가며 9일기도 열심히 하면) 하느님이 우리의 뜻, 목적을 들어주실까? 아니다.(요한16,24)
하느님은 당신의 목적(目的)을 이루신다. 그것이 영원한 빛, 생명, 구원의 길이기 때문이다. 인본주의(人本主義), 세상의 귀로 어떻게 깨닫고 믿을 수 있겠는가.
☨ 진리의 성령님!
하느님의 은총, 은혜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구원의 복음을 진리로 믿어 뱀의 유혹인 세상 힘의 논리로 구축된 나를 부인하고 믿음으로, 인내로 하늘의 안식을 살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