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4주간 화요일] “젊은이야, 일어나라” (루카7,11-17)

2022. 9. 12. 오후 6:3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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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13일 화요일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젊은이야, 일어나라 (루카7,11-17)


 

1독서<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1코린12,12-14.27-31)

12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13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14 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27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28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이들은, 첫째가 사도들이고 둘째가 예언자들이며 셋째가 교사들입니다. 그다음은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 그다음은 병을 고치는 은사, 도와주는 은사, 지도하는 은사,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29 모두 사도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예언자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교사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기적을 일으킬 수야 없지 않습니까?

30 모두 병을 고치는 은사를 가질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신령한 언어로 말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신령한 언어를 해석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31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화답송시편 100(99),1-2.3.4.5(3참조) 우리는 주님의 백성, 그분 목장의 양 떼라네.

온 세상아, 주님께 환성 올려라. 기뻐하며 주님을 섬겨라. 환호하며 그분 앞에 나아가라.

너희는 알아라, 주님은 하느님이시다. 그분이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분의 것, 그분의 백성, 그분 목장의 양 떼라네.

감사하며 그분 문으로 들어가라. 찬양하며 그분 앞뜰로 들어가라. 그분을 찬송하며 그 이름 찬미하여라.

주님은 참으로 좋으시고, 그분 자애는 영원하시며, 그분 진실은 대대에 이르신다.

 

복음<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7,11-17)

그 무렵 11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12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13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14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15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16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17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1코린12,12-14.27-31ㄱ)


"하느님께서  세우신 이들은,  첫째가 사도들이고 둘째가 예언자들이며 셋째가 교사들입니다.  그 다음은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  그 다음은 병을 고치는 은사,  도와주는 은사, 지도하는 은사,  여러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28)


코린토 전서 12장 12-27절에서 몸과 지체의 비유를 통한 교회의 유기체적 일치성과 다양성에 대해 교훈한 바오로는, 이제 28절-31절까지는 다양한 은사에 따른 교회의 공적, 봉사적 직무들을 소개하고, 더욱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라는 권면을 준다.(에페4,11)

 

한편 새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원문에는 본절 서두에 등위절을 이끄는 접속사 '카이'(kai)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더욱이' 란 말을 첨가해 번역하는 것이 문맥의 흐름에 부합한다. 그럴 경우 본절 28절이 27절과의 관련성 속에서 다양한 은사에 따른 교회의 공적 직무들을 소개한다는 점이 보다 잘 드러나게 된다.

 

바오로는 27절에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라고 언급하며, 성도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각 성도는 몸의 지체임을 은유적으로 설명했는데,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이들' 이라고 언급하며, 앞에 서술한 '그리스도의 몸' 이 바로 '교회'(ekklesia ;에클레시아)를 의미함을 직접적으로 밝힌다.

 

이제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공적인 직무 몇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① 사도들 ; '사도'로 번역된 '아포스톨루스'(apostolus)는 본래 '보내다' 라는 뜻을 지닌 동사   '아포스텔로'(apostello)에서 파생한 명사로, 예수님의 공생활 활동에 동참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복음의 위임을 맡은 사람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목격 증인들을 말한다.(사도1,21-22)  초대 교회 당시 이 칭호는 주로 12제자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 직분을 직접 위임받았기 때문이다.(루카6,13) 

그러나 본서 저자인 바오로 역시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께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은 사도였다. 따라서 바오로는 복음을 전파하고 변호하는 자신의 사도권의 정통성을 의심하고  공박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사도권의 정당성을 주장했다.(갈라1,1.11-24)


② 예언자들 '예언자'로 번역된 '프로페타스'(prophetas)는 '대변자', '대리자'를 뜻하는 말로,  사람들 앞에 나아가 하느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자들 이란 뜻이다. 이들은 하느님께로부터 위임받은 말씀을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정해진 곳,  정해진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예'자는 '미리 예'(豫) 가 아니라 '맡길 예'(預) 이며,  전하는 내용은 과거, 현재, 미래를 총망라한 것들이다. 이들은 각 지역 교회에서 사도들에 의해 권위를 위임받아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듣는 이들로 하여금 신앙의 자리로 이끌던 사람들이다.(1코린14,24.25) 코린토 전서 12장 8,9절에 제시된 은사 목록 가운데서 이들은 예언의 은사를 지닌 이들을 지칭한다.


③ 교사들 ;  '교사' 로 번역된 '디다스칼루스'(didaskalus)는 구약 성경이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교적인 의미를 설명하고, 신앙 공동체 안에서 전승된 그리스도교의 교훈을 가르치던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을 뜻한다.


이렇게 제시된 사도와 예언자, 그리고 교사들은 주로 말씀의 봉사를 담당하던 자들로서 교회를 세우고 성장시키는 일에 관계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다음에 제시되는 봉사는 은사 자체가 부각되는 일들이다.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은 <기적의 은사>, 병을 고치는 은사는 <치유의 은사>, 여러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는 <기도의 은사>에 관한 <피앗 사랑> 카페 화면에 공지된 <성령께서 주시는 9가지 봉사> 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이어 나오는 '도와주는 은사'로 번역된 '안틸렘프세이스'(antillempseis)는 높은 권력자로부터 받는 보호나 원조를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었으며, 일반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행하는 모든 종류의 도움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마도 초대 교회의 주요한 임무, 즉 교회의 보조로 궁핍한 자를 돌보는 청지기(집사)들의 역할을 지칭하는 것일 수 있다.


또한 '지도하는 은사'로 번역된 '퀴베르네세이스'(kyberneseis)는 '배를  조정하는 조타수' 라는 의미로서 배가 항해하기에 위험한 모래톱 해안을 통과할 수 있도록 조종해주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는 공적으로 교회 일을 관장하는 본당 신부와 그의 사목을 협력하는 사목 협의회의 임무를 지시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로마12,8), 그 당시 젊은 사람들 및 여자들도 이 은사를 소유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본절의 기술 순서 및 뉘앙스로는 ④ 기적의 은사, ⑤ 치유의 은사, ⑥ 도와주는 은사, ⑦ 지도하는 은사, ⑧ 여러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기도의 은사는 사도들이나 예언자들, 교사들이 행하는 말씀의 봉사와 비교해 볼때 이차적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물론 은사 자체가 중심적 주제를 형성하고 있는 로마서 12장 6절-8절까지의 은사 목록을 감안할 경우, 이 또한 교회 내에서 상당한 역할을 수행하는 귀중한 은사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의가 제기될 수 없다.


그렇다면, 바오로는 어떤 의도로 이러한 세 가지 은사와 다섯 가지 은사를 구별하고 있는것일까? 그것은 코린토 교회가 가장 우월시했던 여러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가 은사 목록 중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을 통해서 암시받을 수 있다.

여기서 바오로는 교회의 건설과 성장에 유용한 것이 황홀경이나 무아경에 빠져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것이나 기타 외적으로 두드러지는 능력이 아님을 천명한 것이다. 오히려 사도들이나 예언자들, 그리고 교사들이 행하는 하느님의 말씀의 선포가 교회를 든든하게 세워간다는 사실을 암시하고자 한 것이다.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31)


새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원문에는 '그러나'(but)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접속사 '데'(de)로 시작하는 문장임을 알아야 한다. 본절에서 '더 큰 은사'로 번역된 '타 카리스마타 타 메이조나'(ta charismata ta meizona ; the greater gift)는 문자적으로 번역하자면, '더욱 탁월한 은사' 이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은사에도 서열이 있고, 우월과 열등감이 있다는 듯한 뉘앙스를 전달한다. 그렇다면 본절은 모든 은사들이 교회에 필수적인 요소들이며, 하느님께서 교회의 선의를 위해 봉사하라고 주신 최상의 은혜라는 바오로의 주장과 모순을 이루고 있는 내용인가?


그렇지 않고, 당시 코린토 교인들이 잘못된 기준을 가지고, 은사를 탁월한 은사와 열등한 은사로 나누었기 때문에, 바오로는 여기서 '탁월한 은사' 라는 그들의 표현을 사용하여 그들의 왜곡된 생각을 수정하고자 했던 것 뿐이다.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라는 바오로의 충고가 합당한 것은, 바오로가 교회의 유익(선익)적 차원에서, 개인적 차원의 은사요,  비교적 낮은 차원의 은사인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를 코린토 교인들은 가장 높이 평가하고 좋아했기 때문이다.(1코린13,1)


즉 코린토 교인들이 더욱 열렬히 구하고 좋아해야 할 것은외적으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신령한 언어의 은사' 보다, 교회의 영신적 선익과 덕을 세우는  '사도들'과 '예언자들'과 '교사들'로 드러나는 '말씀의 은사'라는 것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라는 바오로의 명령은 나열된 은사의 가치를 '교회의 건설과 성장과 유익'이라는 차원에서 판단하고, 또한 그러한 기준 하에서 더욱 큰 은사를 좋아하고 구하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신령한 언어의 기도 은사'가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 공동체의 영신적 선익의 차원에서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가?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우쳐 주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말씀은 가톨릭 교회안의 성령 운동이나 성령 기도회에서 은사를 다룰 때, 참고해야 할 말씀이다.




9월 18일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 양승국 신부님


 

20220913일 화요일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강수원 베드로 신부)

 

구약 시대에도 죽었다가 살아난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엘리야가 되살린 사렙타 과부의 아들(1열왕 17,17-24 참조),

엘리사가 되살린 수넴 여자의 아들(2열왕 4,18-37 참조),

엘리사의 유해에 닿아 되살아난 주검(2열왕 13,20-21 참조) 등이 있는데,

이들은 잠시 소생하였다가 때가 되면 다시 죽을 이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소생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견줄 바 못 되지만,

분명 죽은 이를 다시 살린 이 행적은 하느님의 권능과 영광을 드러내는 강력한 표징이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남편이나 장성한 아들 같은 법적 보호자가 없는 과부는

으레 고아나 이방인처럼 절대 빈곤 계층으로 전락하기 일쑤였습니다.

나인에서 예수님께서는

삶의 유일한 의미인 외아들을 잃고 상여를 따르며 슬피 우는 과부를 가엾이 여기셨고,

아들을 되살려 어머니에게 돌려주셨습니다.

다른 기적들과 달리 당신께 신앙 고백이나 간절한 청원을 드리는 이도 없었고,

더구나 관에 손을 대실 때에는 주검과 접촉하는 것을

심각한 부정으로 여기는 율법마저(민수 19,11-19 참조) 거스르셔야 하였는데도 말입니다.

이 기적은 주님께서,

죽음이 삼켜 버린 지독한 고통 속에 주님, 살려 주십시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칠 기력조차 없는 이를

그 누구보다 가엾이 여기시는 분이심을,

서둘러 다가가 그를 생명과 구원으로 채워 주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심을 여실히 보여 줍니다.

 

한 분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을 이루는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소중한 지체입니다(1독서 참조).

어쩌다 삶에서 생기를 잃고 잠시 어둠을 겪고 있다면,

젊은이야, 일어나라!” 하고 명하시는 그분의 손을 잡고 힘차게 일어나 다시 생명의 길을 걸어갑시다.

 

(강수원 베드로 신부)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복음 (루카7,11-17)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13~14)


루카 복음사가가 자신의 복음서에서 직접 예수님께 대해 '주님', 곧 '퀴리오스'(kyrios)를 사용한 것은 이곳이 처음이다. 그 전에 사용된 '퀴리오스'(kyrios)는 다른 이들의 고백이나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 사용한(루카6,5) 것들이다.


루카 복음사가는 루카 복음 7장 11~17절에 이르는 이 사건이 예수님께서 그전까지 행하신 기적 가운데 가장 절정에 달한 것이며, 그것은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처음으로 '퀴리오스'(kyrios)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죽음까지도 다스리는 주권자요, 생명의 절대권을 가지신 분임을 선포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여기에 해당하는 '에스플랑크니스테'(esplangchnisthe; he had compassion)의 원형 '스플랑크니조마이'(splangchnizomai)는 '창자까지 뒤틀려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어떤 번역은 '그의 마음이 동정으로 흔들렸다', '가슴앓이를 했다'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한 과부로 인해 가슴앓이를 하는 것은 누구보다도 이 과부가 지금 겪고 있는 아픔을 잘 아셨기 때문이다.


루카 복음 7장 13절은 죽음까지도 다스리시는 권세를 가진 예수님께서 과부로서의 고달픈 삶을 살아온 한 여인이 자신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외아들을 잃은 슬픔을 뼛속 깊이 동감하시고 계시는 장면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리신 사건은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데, 루카 복음사가는 이것을 통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제2위 천주 성자이심과 동시에 불완전하며 연약한 인간의 모든 슬픔과 고통을 친히 겪고 이해하실 분이심을 보여 주면서 예수님의 인성(人性) 부분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회당장 아이로의 딸이나 라자로의 소생 사건에서 볼 수 없었던 예수님의 모습이다. 단 하나의 희망이었던 아들을 잃고 슬픔에 빠진 과부를 보시며, 창자까지 뒤틀려질 정도로 깊게 공감하시며 먼저 다가가신 예수님의 모습은 그의 인간적인 감정, 특히 소외되고 불쌍한 자들에 대한 뜨거운 연민과 인간애를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관에 손을 대시자'


상여를 멘 자들이나 과부가 예수님을 부른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몸소 그들을 보시고 그들에게 가까이 나아가셨다. 그리고 죽은 젊은이의 시체가 들어 있는 관에 손을 대셨다. 하지만 유대인의 정결법에 있어서, 죽은 시체나 무덤 또는 주검에 관계된 것에 접촉하는 것은 부정한 일이다(레위22,4; 민수19,11.16).


유대인의 관념으로는, 죽음은 죄의 결과이기에 죽은 이에게 손을 대는 것 자체만으로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몸소 그 부정한 것에 손을 대시면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보기에 딱하고 안쓰럽게 여기신 것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미 율법에 대하여 초월하셨다는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말의 '관'은 시체가 들어있는 사방이 닫혀 있는 나무 상자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에 해당하는 '소루'(soru; bier; coffin)의 원형 '소로스'(soros)는 시체를 지탱하는 '들것'(bier)이나 작은 버들가지로 만든 뚜껑이 없는 '위가 뚫린 관'(open coffin)을 의미한다. 그래서 15절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을 때 사람이 따로 관 뚜껑을 열 필요가 없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14)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12절에 '죽은 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적이 있는 '테트네코스' (tethnekos)라는 완료 분사로 쓰인 이미 '죽은 이'와 이야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 이미 죽은 시체를 향해 '젊은이야'(네아니스케; neaniske; young man)라는 호칭으로 부르셨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 시체를 향해 '너에게'('소이'; soi; to you), 곧 살아있는 인격체에게 쓰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미 죽은 이에게까지도 생명의 주님의 되신 예수님의 말씀의 신적 능력이 미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2022년 09월 13일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성경은 땅의 말을 하는 사람을 땅에 갇힐 자죽었다한다.

 

복음(루카7,11-17)

11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율법세상적)에 가셨다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12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교회의 모습이다.

 

13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 13이곳에서만 주님으로 칭()한다예수님의 본질(本質)이신 주님의 일을곧 세상에 속해 영원(永遠)한 죽음의 땅에 갇혀야할 죄인(罪人)들을 살리시는 그 하느님의 뜻구원(救援)의 일을 하실 것을 뜻한다.

 

그 주님 앞에 울어야할 죽음은 다시 일어나야할 잠일 뿐이다.~

(루가8,52) 52 사람들이 모두 아이 때문에 울며 가슴을 치는데예수님께서는 울지들 마라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또한 죄()는 주님 앞에 용서(容恕)받아야할 은총(恩寵)일 뿐이다.~

(로마5,20) 20 율법이 들어와 범죄가 많아지게 하였습니다그러나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또한 온갖 시련(試鍊) 주님 앞에 다시 받을 하늘의 생명영광의 재료(材料)일 뿐이다.~

(야고1,12) 12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1베드4,12-13) 12 사랑하는 여러분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에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13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14ㄱ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주검이 주님의 손곧 창조구원의 손이 닫자주검이 정지(停止)된 것이다그리고 새로운 창조(創造)가 시작이 된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被造物), 새 것으로.

 

14ㄴ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내가 너에게 말한다일어나라.” 15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되 살아 난 것에 감격해서 부둥켜안고 기뻐했다가 아니라 말하기 시작했다.’를 성경(聖經)은 먼저 알린다.

어제 앞 절에서 확인했던 백인대장의 믿음인 한 말씀으로 살아났고그 하늘의 말을 한 것을 성경(聖經)은 전()하고 싶으신 것이다오늘그 백인(百人)대장의 믿음을 다시 보게 하심이다.

 

사제(司祭)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일어나라” 그러자 죽었던 아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물론 무슨 말을 하였는지 모르지만>하고 올리셨는데,

성경(聖經)을 앞 뒤 문맥(文脈)을 연결하여 깨닫지 않고 단락(段落)으로 봐버리면 절대 알 수 없다.’ 그러면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깨달을 수도 없고하늘의 말을 할 수도전할 수도 없다.

땅의 말을 하는 사람을 땅에 갇힐 자로 죽었다고 하고하늘의 말을 하는 사람을 하늘에서 영원히 살 자로살았다고 한다.

 

(2코린5,17)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옛것은 지나갔습니다보십시오새것이 되었습니다.

 

16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17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단순히 사람을 살리신 이야기로 들으면 신앙(信仰)이 아니다. ‘다시 죽을 사람이 아니가’~ 오늘 되살아난 이가 외아들이다. *‘외아들,’ ‘모노게네스 하나로 갖은 이라는 뜻이다곧 선악(善惡)의 둘(2)의 법()이 아닌선악을 생명(生命), 그 하나로 가졌다는 뜻이다.

성경(聖經)은 하느님의 외아들곧 선()이 악()품고 죽어 생명을 주시는 십자가(十字架)의 대속(代贖),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고 싶으신 것이다그래서 남자(제라후손아들말씀)가 없어 부끄러움과 고난(苦難)으로 살아가야 할 과부(寡婦)에게 외아들(그리스도)을 돌려주어 과부가 그 외아들로 거저 의로운 이로 다시 살아나일어나(로마3,24) 그리스도의 한 말씀으로 살아있는 새 생명이 되었음을 전하고 싶은 것이다오늘 우리가 꼭 받아야할 멧세지다.

 

(갈라3,22) 22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어 놓았습니다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믿는 이들이 약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시편114,1-2) 1 이스라엘이 이집트(세상)에서 나올 때 야곱 집안이 *이상한 말을 하는 민족을 떠나올 때 유다는 그분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분의 왕국이 되었네.

유다지파의 후손(後孫)으로 오신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로만 죄()의 세상(世上)에서 나올 수 있다.’ 곧 우리의 모든 죄()를 품고 죽으시고 하늘의 생명그 하나를 주시는 십자가(十字架)의 그리스도로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에게 힘의 원리인 세상의 말이 이상하게 들려야한다. ‘주님의 말씀만을 생명의 소리로 알아들을 수 있어야한다.

 

(요한10,27)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보호자(保護者성령(聖靈)께서 도와주신다말씀 안에 머무를 때.............

 

하느님의 지혜진리은혜이신 천주의 성령님!

말씀을 깨닫고 믿을 수 있도록 영원한 보호자로탄식의 기도로 가르치시는또한 생명으로 늘 함께 해 주시는 성령님!

주님의 목소리한 말씀을 알아듣지 못해 과부로 살아가는 저희 안에 충만 하소서오늘 과부가 외아들을 돌려받았듯이 저희도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2017년 9월 19일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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