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25일 토요일
[부활 제2주간 토요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요한6,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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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을 뽑았다.> (사도6,1-7)
1 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2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아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3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4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5 이 말에 온 공동체가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스테파노, 그리고 필리포스, 프로코로스, 니카노르, 티몬, 파르메나스, 또 유다교로 개종한 안티오키아 출신 니콜라오스를 뽑아,
6 사도들 앞에 세웠다.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7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
* 화답송 : 시편 33(32),1-2.4-5.18-19(◎ 22 참조)
◎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당신 자애를 저희에게 베푸소서.
○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환호하여라. 올곧은 이에게는 찬양이 어울린다. 비파 타며 주님을 찬송하고, 열 줄 수금으로 찬미 노래 불러라. ◎
○ 주님의 말씀은 바르고, 그 하신 일 모두 진실하다. 주님은 정의와 공정을 좋아하시네. 그분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 ◎
○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죽음에서 그들의 목숨 건지시고, 굶주릴 때 살리려 하심이네. ◎
복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았다.> (요한6,15-21)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16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의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18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
19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2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21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부활 제2주간 토요일 제1독서 (사도6,1~7)
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아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1~4)
본문에서 '불평'으로 번역된 '공귀스모스'(gongysmos)는 '투덜댐' 또는 '원망'이라는 의미의 명사이다.
이것은 특히 70인역(lxx; 구약의 히브리서를 희랍어로 번역한 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도자 모세와 주 하느님을 향해 원망한 것을 묘사할 때 쓰인 단어가 본문의 단어와 동일한 명사와 그 동사형이라는 점(탈출16,7; 민수14,27)을 감안할 때, 그리스계 유다인들의 불평이 하느님의 교회에 심각한 피해를 주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사탄은 교회조직 내에 있는 구성원들의 투덜거림과 불평을 통해 교회를 위기에 몰아넣으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 히브리계 유다인들은 팔레스티나에서 살면서 유대의 풍습을 따르고 아람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들은 디아스포라 유다인들(그리스계 유다인들)에 비해 자긍심이 강했지만,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계 유대인들에 대한 구제(사도2,45)를 소홀히 한 이유는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초대교회는 온 신도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유무상통하는 아름다운 공동체였지, 사람을 차별하는 집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사도4,32).
다만 그리스계 유다인들의 과부들이 구제에서 빠지게 된 것은 아마도 그것을 관장하던 히브리계 유다인들의 행정 착오 때문이었을 것이다.
초대 교회는 비교적 넉넉한 사람들의 봉헌금(사도4,34~37)으로 상대적으로 가난한 신도들의 필요를 채워 주었으며, 특히 생계유지가 힘든 과부들 (사도4,31~37)은 매일 구제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서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로 번역된 '엔 테 디아코니아 테 카테메리네' (en te diakonia te kathemerine)는 초대 교회 당시 매일 행해지던 구제를 일컫는다.
이것은 의지할 데 없는 과부들을 돌아보라는 하느님의 명령(탈출22,20; 신명10,18) 에 따라 유다인들이 지켜온 아름다운 전통을 계속 이어가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리스계 과부들은 언제부턴가 그 매일의 구제에서 조금씩 제외되기 시작했다.
'홀대를 받았기'의 의미로 번역된 단어 '파레테오룬토'(paretheorunto)의 원형 '파라테오레오'(paratheoreo)는 '간과하다'(overlook), '소홀히하다' (neglect)라는 의미의 동사이다.
본문에서는 어떤 일의 반복이나 계속됨을 나타내는 미완료 과거 수동태로 쓰였다.
이것은 그리스계 과부들이 그 매일의 구제에서 단 하루 제외되어서 원망했던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제외되어 온 데에 대한 불만을 참지 못해서 원망했던 것이다.
그래서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이 불평을, 사탄은 교회를 위기에 몰아넣는 기회로 사용하여 히브리계 유다인들과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일치를 이루는데 어려움이 생기게 한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는 유념해야 할 중요한 단어가 있다. 이는 '배급'(구제)으로 번역된 '디아코니아'(diakonia)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섬김'(1코린16,15), '직무'(2티모4,5). '봉사'(사도21,19)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리고 '구제'(자선, 희사)를 가리키는 단어는 '엘레에모쉬네'(eleemosine)라고 따로 있다(마태6,2; 루카11,41; 사도10,4).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의 저자가 '구제'를 표현하면서 굳이 '직무', '섬김', '봉사'를 의미하는 단어 '디아코니아'를 사용한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이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이 단어를 사도행전 6장 1절과 4절에 함께 사용함으로써 중요한 원리를 말하고자 한다. 사도행전 6장 4절에 '말씀 봉사'(말씀 전하는 것; te diakonia tu logu; 테 디아코니아 투 로구; the ministry of the word)에서 '봉사'(전하는 것)로 번역된 단어도 '디아코니아'인데,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보여준다.
즉 사도들의 말씀 선포의 직무와 평신도들의 구제하는 등의 직무가 우열의 차이없이 모두 하느님 앞에서 동등한 직무라는 사실을 동일한 단어의 사용을 통하여 보여 주고자 한 것이다. 다만 말씀 봉사와 구제 봉사는 직무의 성격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또한 사도들의 말씀 전하는 직무는 신도들에 대해 지시하고 신도들 위에 군림하는 권리를 부여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제의 직무처럼 신도들을 섬기고 교회가 성장하도록 돕는 봉사의 직무라는 것을 사도행전 6장 1절과 4절의 '디아코니아'라는 단어의 사용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에페소서 4장 11절에서처럼 사도와 예언자, 복음 선포자, 목자와 교사의 순으로 말씀을 전하는 직무의 우위성이 드러난다. 그러나 사도행전 6장 1~4절에서는 그 일에 봉사하는 사람들의 정신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부활 제2주간 토요일 복음(요한6,16-21)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 쯤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19-20)
요한복음 6장 19절의 주어는 예수님이 아니라 배 안에 있는 제자들이며,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을'에 해당하는 '톤 이에순~ 기노메논'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그들이 보고 두려워하였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을' 부분에서 그들로 하여금 놀라게 만든 두 개의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둘 다 현재 분사로서 진행중임을 나타내고 있는데, 하나는 '걸어'로 번역된 '페리파툰타'(peropatounta; walking)이고, 또 하나는 '오시는 것을'로 번역된 '기노메논'(ginomenon; drawing)이다.
'페리파툰타'(peripatounta)는 '페리파테오'(peripateo)의 현재 분사이며, 기본적인 의미는 '돌아다니다'(walk around)이다.
예수님께서 땅 위에서 돌아다니셨다면, 도무지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걸어 다니시는 곳이 사람이 흉내낼 수 없는 바다, 즉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물 위였다는 사실이 그들로 하여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마치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서 소리친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기노메논'(ginomenon)은 '기노마이'(ginomai)의 현재 분사인데, '가까운'이라는 뜻을 가진 부사 '엥귀스'(enggys; nigh)와 함께 쓰일 때에 '~에 접근하다'는 의미가 된다.
파도가 높이 일고 있는 바다 위를 마치 육지처럼 걸어서 배에 접근하시는 예수님의 진행중인 모습이 매우 실감나게 묘사된 것이다.
특히 이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복음사가 가운데 사도요한만이 당시 이 일이 일어난 곳이 육지에서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 쯤' 떨어진 곳임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십이리쯤'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데, 오늘날의 거리로 환산하면 4.6~5.6km 정도이다.
당시 제자들이 건너려 했던 코스의 갈릴래아 호수의 폭이 8km쯤이었다고 본다면, 그들이 바다 한가운데 있었던 것이 된다. 바로 이곳으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찾아오신 것이다.
한편, 요한복음 6장 20절의 '나다'로 번역된 '에고 에이미'(ego eimi; i am)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에 대해서 서술하실 때에 사용하신 독특한 문구이다.
특히 요한복음에서는 이 진술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의 절대적 신성(神性)을 직접 나타내는 가장 순수하고도 완전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요한9,26; 6,35.48.51; 8,12.28.58; 13,19; 14,6; 15,1.5; 18,37).
예수님께서는 이 용어를 통해 당신 자신을 하느님의 절대적이고 유일한 대리자로 계시하신다.
또한, 이것은 구약의 '나는 ~이다'(탈출3,14)에서 온 것인데, 이 용어를 통해 당신 자신을 나타내신 분은 주님이시다.
제자들을 두려움으로 떨게 한 그 장본인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그들의 불안감은 소멸되어 없어지고, 또 다른 놀라움에 사로잡히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곤경과 불안에 빠진 제자들의 귀에 들린 예수님의 음성은 잃었던 마음의 평정을 되찾아 주었고, 제자들이 곤경과 맞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었다.
2020년 4월 25일 토요일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영의 구원을 위한용서가 신앙의 목적이다.
(마르 16,14-20)
사람의 마음, 감정은 인간이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창조주께서 씻어내 주셔야 할뿐~~~
14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 유다의 완고한 마음이 예수님을 팔아 넘겼듯이 그분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남은 제자들의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십니다. 그 완고한 마음이 언제든 예수님의 뜻을 죽이는 믿지 못하게 하는 죄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일을 못하게 합니다.
(요한6,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 사람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얻는 구원인 것입니다.
15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 하느님의 나라는 깨끗하고 거룩한, 의로운 이들이 가는 곳입니다.
(레위11,45)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려고,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주님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 그런데 모든 인간은 다 죄인으로 그 누구도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흠도 티도 없으신 예수님을 우리의 속죄 제물로 내 주시어~ 그 십자가의 대속으로 흘리신 그 깨끗한 피로 우리의 죄를 씻기시어 깨끗한 이, 거룩한 이로 만들어 구원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대속, 그 죽음, 그 의로움을 받기 위해서는 인간들이 정해놓은 제사와 윤리의 그 의로움은 구원의 가치가 없음을 인정하는 그 자기부인, 죽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인간의 의로움을 고집하는 그 완고한 마음을 부수는 깨달음을 위한 시련, 사건들이 믿는 이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묵시7,13-14) 13 그때에 원로 가운데 하나가,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저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느냐?” 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14 “원로님, 원로님께서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내가 대답하였더니,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 하느님의 모든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 그래서 그 약속을 꼭 붙들고 가는 곳이 하느님나라입니다.
묶일약(約), 묶일 속(束). 광야의 삶, 그 인생동안 예수님과 꽁꽁 묶이는 것, 신앙생활입니다. 그 예수님과 묶이기 위해, 믿기 위해 세상을 믿었던, 묶였던 그 끈을 풀어내는 것, 끊어버ㅇ리는 것이 洗禮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르8,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17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 마귀, 곧 뱀의 말, 그 거짓들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묵시2,9) 나는 너의 환난과 궁핍을 안다. 그러나 너는 사실 부유하다. 또한 유다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에게서 중상을 받는 것도 나는 안다. 그러나 그들은 유다인이 아니라 사탄의 무리다.
= 선이 악을 덮어 생명을 주시는 그 하느님의 약속의 말씀을 뱀의 유혹으로, 선악의 계명으로 받아 열심히 착하게 의롭게 살았던, 그래서 선이 악을 대속한 그 십자가의 의로움, 그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하고(죽이고)~ 자신들의 의로움으로 하느님나라에 들어가겠다는 그 유대인들이 뱀의 후손, 사탄의 무리인 것입니다.
그 거짓, 위선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쫓겨납니다. 예수=구원자. 그 이름을 진리로 믿는 것이 쫓아내는 것입니다. 빛이 드러나면 어둠이 존재할 수 없듯이~ ,
그러면 선악의 도덕과 윤리의 말이 아닌 선이 악을 덮어 생명을 주시는 그 진리의 말, 새로운 언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악의 말, 그 심판이라는 독을 먹어도 그 심판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심판의 두려움으로 발생하는 모든 질병에서 치유가 되는 것입니다.
심판은 마음의 평화, 안식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잠언17,22) 즐거운 마음은 건강을 좋게 하고 기가 꺾인 정신은 뼈를 말린다.
19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20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 예수님의 모든 표징은 예수님 당신의 대속, 그 죽음으로 주시는 죄인들을 위한 구원의 표징입니다. 표징은 구원을 가리키는 손, 이정표입니다.
누군가 말했듯이 손은 달을 가리키고 있는데 손만 쳐다보느라 정작 달은 못보는~ 그렇듯 손, 그 표징만 바라본다면 헛된 신앙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유를 죄의 용서의 표징으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9,2)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 육의 치유가 아닌 영의 구원을 위한용서가 신앙의 목적입니다.
(에제36,25) 그리고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의 모든 부정과 모든 우상에게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 십자가 위, 예수님 옆구리에서 흘러내린 물과 피입니다.
(히브10,22) 그러니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갑시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악에 물든 양심을 벗고 깨끗해졌으며,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말끔히 씻겨졌습니다.
아멘.
어제 묵상 중 숫자5는 구약의 모세5경 율법을 뜻하고 숫자2는 선악의 사람의 두마음을 뜻하는 것으로 모두 미완성입니다. 그 미완성의 빵을 예수님께서 받으시고 완성된 생명의 빵으로 돌려주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