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1주간 수요일]회칠한 무덤 (마태23,27-32)
바오로 사도는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복음을 선포했다고 한다. (1테살2,9-13)
9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10 우리가 신자 여러분에게 얼마나 경건하고 의롭게 또 흠 잡힐 데 없이 처신하였는지, 여러분이 증인이고 하느님께서도 증인이십니다.
11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아버지가 자녀들을 대하듯 여러분 하나하나를 대하면서,
12 당신의 나라와 영광으로 여러분을 부르시는 하느님께 합당하게 살아가라고 여러분에게 권고하고 격려하며 역설하였습니다.
13 우리는 또한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겉은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찬 회칠한 무덤 같다고 하신다. (마태23,27-32)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7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28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29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30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31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32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제1독서(1테살2,9~13)
"우리는 또한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13)
복음에 대한 테살로니카 신자들의 진실한 자세를 회고하며, 이에 대해 감사하는 내용에서
'끊임없이'라는 의미의 '아디알레입토스'(adialleiptos; without ceasing)와
'감사를 드립니다'라는 뜻의 '유카리스투멘'
(eucharisteo)의 직설법 현재 동사>은 테살로니카 신자들로 인한 사도 바오로와
그의 동역자들의 감사가 잠시라도 끊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해 준다.
복음 전파자들에게 근심과 염려가 되었던 코린토 신자들(1코린4,18~21)과 달리
복음 전파자들에게 감사의 제목이 되었던 테살로니카 신자들은 모든 시대의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요소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1테살1,3).
히브리서 13장 17절에는 '지도자들의 말을 따르고 그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들은 하느님께 셈을 해 드려야 하는 이들로서 여러분의 영혼을 돌보아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탄식하는 일 없이 기쁘게 이 직무를 수행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들의 탄식은 여러분에게 손해가 됩니다.'라는 말씀이 있는데, 테살로니카 신자들은
복음 전파자들로 하여금 기쁜 마음으로 일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날마다 감사가
끊어지지 않게 했으니, 그들의 영혼은 영적으로 많은 유익을 덧입었던 것이다.
테살로니카 1서 2장 13절의 두번째 구절은 이유 접속사 '호티'(hoti)로 연결되는데,
사도 바오로와 그 동역자들이 테살로니카 신자들에 대해 하느님께 끊임없이
감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하느님의 봉사자들로부터 선포되고 가르쳐지는 말씀의 권위는 사람의 권위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권위이다.
하느님 대전에 겸손한 자들이라면, 이러한 하느님의 봉사자들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의당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게 마련이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봉사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원래 그대로, 때로는
상세히 해설하여 전하는 중개자들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들 자신도 자신이 전하는 말씀이 자기 것인 양 주장할 수 없고, 그 말씀을
받는 자들도 당연히 그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느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에 그 말씀의 권위에 복종하여 하느님 나라와 영광에 참여할 수 있으며
(1테살2,12), 그 말씀이 자신 안에서 역사(役事)하시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한편, 여기서 '말씀'('로고스'; logos; the word)을 '받다'라는 의미로 번역된 단어가
두 개이다.
첫째는 '들을 때에'로 번역된 '파랄라본테스'(parallabontes; when you received)라는
부정 과거 분사이고, 둘째는 '받아들이지'로 번역된 '에덱사스테'(edeksasthe;
you accepted it)라는 직설법 부정 과거 동사이다.
전자는 객관적이고 외부적인 수용을 뜻하고, 후자는 환영과 찬성을 동반하는 주관적이고
내적인 수용을 뜻한다.
즉 전자는 귀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듣는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서
사람의 입에서부터 흘러 나온 말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들린다는 사실과
관련되며, 후자는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이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것으로서
사람에 따라 그 반응의 형태가 달라진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테살로니카 신자들은 사도 바오로 일행의 입에서 나온 복음을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반드시 순종하고 지켜 행해야 할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사도 바오로가 전한 복음을 테살로니카 신자들이 사람의 말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이유가 사도 바오로의 언변이 탁월하고 좌중을
압도하는 능력이 있어서였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코린토 2서 10장 10절에는 '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차지만, 직접 대하면
그는 몸이 약하고 말도 보잘것 없다.'라고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보더라도 테살로니카 신자들이 사도 바오로가 전한 복음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것은 감동시키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었기 때문이며, 사도 바오로가 개인적
사상이 아닌 하느님의 진리를 전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사실 그대로'로 번역된 '카토스 에스틴 알레토스'(kathos estin allethos;
as it is in truth; as it actually is)는 직역하면 '그것은 진실로 그와 같다'이다.
이것은 '너희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은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은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이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테살로니카 신자들은 사도들로부터 전파된 하느님의 말씀이 갖는 본질적 가치를 알고
있었으며, 또한 복음에 대해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 당연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신자 여러분 안에서'라는 표현은 '믿음의 형제들'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사도들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는 여러분들'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말씀이 아무리 객관적으로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그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도대체 역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활동(역사)하고 있습니다'로 번역된 '에네르게이타이'(energeitai; is at work;
effectually works)는 현재 직설법 동사인데, 여기서 현재 시제는 두 가지 의미를 나타낸다.
첫째로, 그리스어에서 직설법 현재형은 진리나 격언 및 변함없는 진리를 나타내는
'격언적 현재'(Proverbal Present)로 쓰인다는 점에서 이것은 변함없는 진리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즉 증거되는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 믿는 자들에게는 언제 어디서나
그 말씀이 역사하는 것은 불변의 진리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영적 원리로 정해 놓으신 일이기 때문에, 이러한 조건만 충족되면
이 역사는 언제나 어디서나 일어나는 것이다.
둘째로, 그리스어에서 직설법 현재형은 과거에 시작되어 현재까지 계속되는 동작을
나타내는 '지속적 현재'(Durative Present) 용법으로 쓰인다는 점에서 테살로니카
신자들의 당시 영적인 삶에 그 역사가 나타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사도 바오로가 말씀을 전하던 때 뿐만 아니라, 본 서간을 쓰고 있는 현재에도
그와같은 역사가 믿는 이들 안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활동(역사)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원형 '에네르게오'(energeo)는 죽은 자의 영이 다른 사람 안에서 되살아나 '운동하다'
(마태14,2) 또는 무법의 신비가 '작용하다'(2테살2,7)라는 의미로 사용된 동사이다.
즉 운동력있게 활동함으로써 능력을 발휘한다는 의미이다.
본절에서 이러한 활동의 주체는 '하느님의 말씀'인데, 이것은 즉각적으로
히브리서 4장 12절을 연상시킨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즉 하느님의 말씀이 믿는 이들 안에서 운동력있게 활동함으로써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생명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에제키엘 예언자도 체험한 바가 있다(에제37,1~14).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은 그것을 그분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의 심령에 역사하여
자신의 죄악된 실체와 직면하게 하며, 그로 인해 그 죄스런 생각과 본성을 변화시키고,
자신에게만 이기적으로 집중하던 관심을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열게 하며, 그들의 삶
전체를 하느님께로 향하도록 바꾸어 놓는 것이다.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복음(마태23,2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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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고 “경건하고 의롭게 또 흠 잡힐 데 없이” 살면서 복음을 전한 자신의 삶을 들려줍니다.
그는 공동체 앞에서 설교하거나 대화를 나누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아버지가 자녀들을 대하듯 신자들이 참으로 성숙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격려하며, 하느님께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강조합니다.
또 신자들이 복음을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으로 받아들인 사실에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을 주제로, 외적으로 깨끗한 행실과는 대조적으로 내적으로 타락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지적하며 비난하십니다.
무덤에 회를 칠하는 팔레스티나 관습은, 무덤을 쉽게 알아보게 하여 지나가는 사람들이 무덤을 피하고 법적으로 더럽히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무덤의 아름다운 겉모습은 더러움으로 가득 찬 그 내부의 실재도 숨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을 두고, 겉은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 대부분이 보여 준 엄격한 율법 준수는, 하느님의 법과 모순되는 삶을 감추려는 가림막일 따름입니다. 그들은 과거의 예언자들과 의인들의 묘를 꾸미고 기념비를 세우면서, 이스라엘 역사의 큰 인물들이 보여 준 충실함을 자신들의 영광으로 돌립니다. 그러나 실제로 참고 견뎌 내는 유일한 예언자들은 무덤에 묻힌 죽은 이들입니다.그들의 쓸모없는 과거 회상은 그들 조상이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이었음을 분명하게 해 줍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사도들과 선교사들을 박해하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이루고야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바리사이들의 자기만족 대신 회개의 결실을 묻고 계십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8월 28일 수요일[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354년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의 타가스테(오늘의 알제리의 수크아라스)에서 모니카 성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즐기는 가운데 마니교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 모니카 성녀의 끊임없는 기도와 이탈리아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영향으로 회개하고 입교하였다. 391년에 사제가 된 그는 5년 뒤 히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아우구스티노 주교는 이단을 물리치며 교회를 수호하는 데 일생을 바치는 가운데 참회의 자서전 「고백록」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430년에 선종한 그는 중세 초기부터 ‘교회 학자’로 존경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