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1주간 화요일]위선자 (마태 23,23-26)

2019. 8. 27. 오전 4:4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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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1주간 화요일]위선자 (마태 23,23-26)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인정하여 맡기신 복음을 그대로 전한다고 한다. (1테살 2,1-8)
1 형제 여러분,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간 일이 헛되지 않았음을  여러분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2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전에 필리피에서 고난을 겪고 모욕을 당하였지만, 오히려 우리 하느님 안에서 용기를 얻어  격렬히 투쟁하면서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3 우리의 설교는 그릇된 생각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불순한 동기에서 나온 것도 아니며, 속임수로 한 것도 아닙니다.
4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인정하여 맡기신 복음을 그대로 전합니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시험하시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것입니다.
5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한 번도 아첨하는 말을 하지 않았고  구실을 붙여 탐욕을 부리지도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그 증인이십니다.
6 우리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에게서도 찾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찾지 않았습니다.
7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위엄 있게 처신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에서, 자녀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처럼 온화하게 처신하였습니다.
8 우리는 이처럼 여러분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과 함께 나눌 뿐만 아니라  여러분을 위하여 우리 자신까지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그토록 우리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정작 더 중요한 것은 무시하는 위선자들이라고 책망하신다. (마태 23,23-26)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3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24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26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제1독서(1테살2,1~8)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인정하여 맡기신 복음을 그대로 전합니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시험하시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것입니다."  (4)



사도 바오로와 그 일행이 테살로니카에서 복음을 전하는 데에는 하느님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이런 사실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인정하여'이란 표현에서 잘 드러난다.



여기서 '우리를 인정하여'로 번역된 '데도키마스메타'(dedokimasmetha; we are allowed; approved)의 원형 '도키마조'(dokimazo)는 원래 금속의 순도를 불로써 시험하는 것나타내는 동사이다.


그러나 여기서 '단련하다'(1베드1,7), '확인하다'(2코린8,8), '시험하다'(1요한4,1), '시험하여 옳다고 여기다'(로마14,22)라는 보다 폭넓은 의미로 발전하게 되었다.


사도 바오로는 이 단어를 여기서 현재 완료 수동태로 씀으로써, 하느님의 시험에 통과해서 자격있고 옳은 사람으로 인정된 상태가 과거로부터 지금 이 서간을 쓰고 있는 현재까지 계속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로 번역된 '휘포 투 테우'(hypo tu theu; by God)에서 전치사 '휘포'(hypo)는 이 시험이 '하느님에 의해서' 그리고 '하느님의 감독 아래에서' 수행되었다는 뉘앙스를 준다.


전치사 '휘포'(hypo)인격체의 소유격과 함께 쓰일 경우움직이는 원인(동인; 動因)과 권세 아래에 있음의 의미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사도 바오로와 그 일행이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는 시험에 합격해서 복음을 전할 사명을 위탁받은 것이기 때문에, 사도 바오로의 복음은 테살로니카 1서 1장 3절에서처럼 불순한 동기나 속임수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난 것이다.


한편, '맡기신'으로 번역된 '피스튜테나이'(pisteuthenai; to be entrusted with)'믿다'라는 뜻을 지닌 '피스튜오'(pisteuo)의 수동태 부정사로서 '하느님께로부터 믿어졌다', 즉 '하느님께서 신임하고 맡기셨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사도 바오로와 그 일행이 하느님께로부터 그 진가를 인정받아 복음을 전할 부탁을 받았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확인이 되는가?


그것은 바로 이들이 전하는 복음을 전해 듣는 자들이 하느님의 역사(役事)하심을 체험하고, 마음이 새롭게 되어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오로와 그 일행을 본받는 자가 되었으며, 또한 주님을 본받은 자가 되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1테살1,5.6).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시험하시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오로와 그 일행은 자신들이 무엇을 목적으로 복음을 전해야 할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예나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들을 시험하여 옳다고 인정하시고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맡기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복음을 전하였다.


사도 바오로는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내 서간에서도 '내가 아직도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것이라면, 나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종이 아닐 것입니다'(갈라1,10)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복음 전파 사명이 오로지 하느님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처럼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복음 전파에 대해 사람들의 평가에 좌지우지 되지 않았다.


만약 그런 것에 좌우되다면, 그가 전하는 복음은 본질에서부터 변질될 것이 틀림없다. 사람의 눈치를 보고, 사람들의 인기에 영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시는'(1티모2,4) 하느님의 마음을 따라 복음을 순수하게 온전히 전하려고 몰두했다.


여기서 테살로니카 1서 2장 4절의 '기쁘게 하다'라는 의미로 번역된 '아레스콘테스' (areskontes; pleasing)의 원형 '아레스코'(aresko)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한 봉사의미가 담긴 단어인데, 당시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는 공공의 복지를 위해 공을 세웠던 자들의 묘비에 새겨지기도 한 단어였다.


이처럼 사도 바오로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익숙했던 단어를 사용하여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만을 의식하는 하느님의 종임을 밝혔던 것이다.


한편,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을 '우리 마음을 시험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시험하시는'으로 번역된 '도키마존티'(dokimazonti; tests)는 상반절에 나오는 '데도키마스메타'(dedokimasmetha)와 그 원형이 '도키마조'(dokimazo)로 똑같다.


여기서는 '시험하여 그 진위 여부를 판별하고 그 진가를 인정하시는'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레미야서 17장 10절'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는 말씀대로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살피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드러난 외적 행위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마음의 내적 동기로 판단하신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16,7).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복음 전파자의 복음을 전하는 목적과 동기를 정확히 아신다.


사도 바오로와 그 일행은 이러한 사실을 알기에,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여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을 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복음(마태23,23~26)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23)


마태오 복음 23장 23절과 24절네번째 저주 선언이다.

이것은 세번째 저주 선언(마태23,16-22)과 더불어 가치 전도의 어리석음을 책망하면서 특히 사소한 것은 취하면서도 참으로 취해야 할 율법의 근본 정신은 헌신짝처럼 버리는 영적인 사악함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십일조의 대상으로 삼은 것들 중에서 '박하'로 번역된 '헤뒤오스몬'(hedyosmon; mint)'향기롭고 달콤한 냄새가 나는' 이라는 뜻을 지닌 단어이며, 조그맣고 향내나는 일종의 향료 식물을 가리킨다.

유대인들은 이 식물의 가루나 즙을 집이나 회당의 바닥에 뿌려 향기를 나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시라'로 번역된 '아네톤'(anethon; anise, dill)미나리과에 속하는 식물로서 양념의 향료로 사용되었다.


또한 '소회향'으로 번역된 '퀴미논'(kyminon; cummin) 역시 미나리과에 속하는 향기가 짙은 식물로서 양념이나 약용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십일조로 낸 것으로 나오는 이같은 식물들은 십일조를 규정하고 있는 율법(신명14,22.23)의 기록에도 나오지 않는 것들이다.


즉 율법은 밭에서 나는 소출 중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분의 일을 규정하고 있는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런 기본적인 것 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크게 신경쓰지도 않는 사소한 부분에까지 십분의 일을 엄격하게 떼어 하느님께 드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종교적 열심을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것에는 열심을 보이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간과해버리는 그들의 영적 무지와 남에게 보이는 데만 치중하는 그들의 위선을 책망하시는 것이다.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들'에 해당하는 '바뤼테라'(barytera; more important matters)'무게가 무거운'을 의미하는 형용사 '바뤼스'(barys)의 비교급 목적격 복수이다.


여기에 나오는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는 준수해야 할 모든 율법 조항과 비교해서도 더 우위에 있는 것으로서, 개개의 모든 율법 조항들이 추구하고 담고 있어야 할 근본 정신인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인들은 정말 지키고 간직해야 할 율법의 근본 정신은 버리고, 그것을 포장하는 겉껍데기만을 열심히 보존한 사람들이었다.


먼저, '의로움'으로 번역된 '크리신'(krisin; justice)의 원형 '크리시스'(krisis)법정적 용어로서 '나눔', '분리', '논쟁'등의 의미와 더불어 '판결', '심판', '의', '공의'등의 의미가 있는 단어이다.


문맥을 고려할 때, 여기서는 '심판'(judgment)보다는 '공의'(justice)라는 의미가 더 적합하다.


그리고 '자비'로 번역된 '엘레오스'(eleos; mercy)'불쌍한 자와 고통받는 자를 보고서 그들에게 베푸는 친절이나 호의'를 의미하는 명사이다.


'엘레오스'(eleos)는 구약 성경 칠십인역(LXX)에서 히브리어 '헤쎄드'(hesed)의 역어로서 사용되었는데, 계약의 관계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신실한 사랑의 행동으로서 우월한 자가 열등한 자에게 베푸는 은혜와 자비를 포함한다.


여기서는 죄에 빠져서 하느님의 길을 떠나버린 사람들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하심도 담겨 있다.


끝으로 '신의'로 번역된 '피스틴'(pistin; faith)의 원형 '피스티스'(pistis)'믿음', '신앙'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명사로서,  특히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확신이나 믿음을 가리킨다.


위의 세 가지 덕목인간의 사회 생활과 신앙 생활에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덕목들이다.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미카 예언자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진정으로 무엇인지를 밝히신 적이 있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 (미카6,8)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경건한 신앙심 없이 형식적이고 위선적으로 바치는 종교적, 제의적 행위를 기뻐하지 않으시고, 정의와 공의, 자비, 그리고 서로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기뻐하신다고 하셨다.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폐기론자가 아니셨다(마태5,17). 사도 바오로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무효가 되게 하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우자는 것입니다.'(로마3,31) 라고 단언한 적이 있다.


주님께서는 율법의 외적 준수 뿐만 아니라 그 정신의 이행까지도 강조하셨다. 여기서 '~해야만 했다'로 번역된 '에데이'(edei)'당연히~해야 한다', '마땅히 ~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데이'(dei)의 미완료 과거로서, 위와 같은 것들을 '당연히'(ought to) 그리고 '지속적으로'(continually) 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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