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은 과연 원망을 하지 않은자인가?
우리는 얼마나 착각을 많이 하고 있는지 모른다. 욥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사람도 착각을 하는데,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이나 받고 있는 오늘날의 신앙인들은 얼마나 착각을 많이 하고 있을까! 욥기를 펴들면,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 1"1)고 하나님의 칭찬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흔히들 인내의 화신으로 알고 있는 욥의 삶은 우리에게 자신의 죄를 용서함 받은 사람이 그렇게 밖에 살 수 없는 참 모습을 보여 준다. 42장이나 되는 짧지 않은 욥기는 거의 대부분이 욥의 원망과 불평을 기록하고 있다. 욥기를 유의하여 읽어보면, 욥은 결코 자신의 환난을 참은 사람도 아니고 더더구나 하나님을 섬기고 믿은 사람 같지도 않아 보일 정도다. 욥이 하나님 앞에서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았던 것은 겨우 욥기 42장 가운데 1장에 불과하다. 1장 동안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바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않는다(욥 1:22).
그러나 3장부터 나오는 욥의 언행은 참으로 듣기에 민망할 정도로 하나님께 대한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차 있다. 잠깐 욥의 사설에 귀를 기울여 보자.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욥이 말을 내어 가로되 나의 난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 유암과 사망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였었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면, 낮을 캄캄하게 하는 것이 그 날을 두렵게 하였었더라면, 그 밤에 심한 어두움에 잡혔었더라면, 해의 날 수 가운데 기쁨이 되지 말았었더라면, 달의 수에 들지 말았었더라면, 그 밤이 적막하였었더라면, 그 가운데서 즐거운 소리가 일어나지 말았었더라면, 날을 저주하는 자 곧 큰 악어를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가 그 밤을 저주하였었더라면, 그 밤에 새벽별들이 어두웠었더라면, 그 밤이 광명을 바랄지라도 얻지 못하며 동틈을 보지 못하였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였고 내 눈으로 환난을 보지 않도록 하지 아니하였음이로구나.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유방이 나로 빨게 하였던가.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욥 3:1-13)
이 교묘한 욥의 불평과 원망을 보자. 그래도 하나님 앞에 맞대어 놓고 원망할 수는 없었던지 빙빙 돌려가며 비아냥거리고 있다. 자식들 건강하고 돈 좀 있을 때에는 그리도 순전하고 그리도 아름다운 신앙을 소유하였던 욥이 자기 몸에 고난이 닥쳐오니 어찌하여 자기가 죽어 나오지 않았던고 하며 빈정거리듯이 말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들 신앙의 적나라한 모습이 아닌가? 아무리 훌륭한 신앙이라는 것도 집 있고 돈 있고 자식 건강하고 일취월장 잘 될 때의 얘기다. 이럴 때 하나님 못 믿을 사람 있겠는가! 집이 없어지고 돈이 날아갈 때까지만 해도 참을 만했지만 자식까지 죽어버리고 제 몸마저 병들어 눕고, 아내마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고 하면 이러한 불평을 늘어 놓는다.
‘아, 그 동안 내가 하나님 믿어 남은 게 무엇인가? 억울하고 원통한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 욥(우리)은 그래도 하나님인지라 맞대 놓고 덤벼들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이런 궁리 끝에 나온 말이 바로 3장의 비아냥거림인 셈이다. 쉽게 말하면, ‘왜 믿었던고. 이 더러운 꼴 보려고 우리 어머니는 날 낳고 미역국 드셨던가’이다. 욥기는 이러한 욥의 원망과 변명과 함께 그의 세 친구들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욥보다 더욱 가관인 것은 욥의 세 친구들이다. 그들은 욥에게 임한 모든 재앙을 듣고 욥을 조문하고 위로하기 위하여 찾아왔지만 욥의 형편이 너무나 기막힌 것을 보고는 입을 벙긋하지 못한다(욥 2:13).
그러나 그들이 욥이 3장에서 털어놓는 비아냥거림을 들은 즉시로 욥을 ‘위문?’하기 시작한다. 이 친구들의 ‘위로의 말’도 어디 한 번 들어 보자.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교훈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면 강하게 하였고, 넘어져 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이제 이 일이 네게 임하매 네가 답답하여 하고 이 일이 네게 당하매 네가 놀라는구나. 네 의뢰가 경외함에 있지 아니하냐. 네 소망이 네 행위를 완전히 함에 있지 아니하냐.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 콧김에 사라지느니라.”(욥 4:3-9)
도대체 무슨 얘긴가. 욥을 위로하고 있는가 아니면 욥이 당한 일이 재미있어 죽을 지경인가. ‘네가 지금 요 모양 요 꼴이 된 것은 모두다 너의 죄 때문이다. 네가 악으로 밭을 갈았고 독으로 지었으니까 사업도 망하고 자식도 죽고 거기다 병까지 얻었지, 그렇지 않았으면 어찌하여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그동안 욥이 잘되는 것이 눈꼴이 시었는데 얼씨구나, 지화자 좋을시고 이게 웬 즐거움이냐! 그렇다고 겉으로 드러내서 즐거워할 수는 없는 법, 이 기회에 그동안 욥의 권위에 눌려 다 못한 말로 실컷 골려나주자 해서 나오는 말이 아닌가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이다. 과연 그런가. 욥도 욥이지만 이 친구들의 논리는 옳은 것인가. 욥이 지금 이 친구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런 ‘죄 때문에’ 이 모양이 되었는가. 오늘날 교회에서도 이러한 논리는 비일비재하다. 사업이 잘 안되면 ‘시험 들었다’ 하고, 집안에 누가 아프면 ‘아이쿠, 신앙생활 잘못해서 받는 벌인가’ 한다. 이런 생각들의 원조가 바로 욥의 세 친구들의 신앙에서 나온 것이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니, 권선징악(勸善懲惡)이니 하는 것들도 모두 이런 정도의 논리 수준이다.
[참조]사필귀정(事必歸正)처음에는 시비 곡직을 가리지 못하여 그릇되더라도 모든 일은 결국에 가서는 반드시 정리로 돌아감
[참조]권선징악(勸善懲惡)착한 행실(行實)을 권장(勸奬)하고 악(惡)한 행실(行實)을 징계(懲戒)함
우리들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은 배 아프고 못되는 것은 재미있어 하는 체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같은 교회 다니는 교인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복을 무더기로 받는 모양’을 보면 겉으로야 ‘그 사람 신앙 좋다’고 말하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왜 내게는 저런 복도 안주시고……’ 서운한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지, 좀 거들먹거리던 장로의 사업이 폭삭 망하면 겉으로야 ‘걱정되시겠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하겠지만 속으로는 ‘것 봐, 겸손한 데라곤 찾아볼 수 없더니 꼴좋다. 내가 저렇게 될 줄 알았지!’ 얼마나 고소해들 하는가.
지금 욥과 욥의 세 친구들의 대화는 이렇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친구들의 논리인즉슨 ‘뭔지는 모르지만 무엇인가 네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모양이다. 회개하라’고. 욥의 논리는 ‘아니,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이다. 욥이 얼마나 당당하고 얼마나 떳떳한지는 참으로 놀랄 정도다. 다시 한 번 욥의 항변을 들어 보자.
“주께서 그 막대기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그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하지 아니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리하시면 내가 두려움 없이 말하리라. 나는 본래 그런 자가 아니니라.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원통함을 발설하고 내 마음의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옵시고 무슨 연고로 나로 더불어 쟁변하시는지 나로 알게 하옵소서.……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주의 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자도 없나이다.”(욥 9:34-10-7)
우선 계엄령을 좀 거두시라는 말이다. 때리지 말고 말로 하자는 뜻이다. 왜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무력으로 대하느냐는 뜻이다. 힘으론 사람인 내가 안 되겠지만, 그래서 이렇게 때리는 대로 맞을 수밖에 없지만, ‘나는 억울합니다. 내가 악한 사람이 아닌 줄 당신은 알지 않느냐’는 항변이다. 맞더라도 이유나 좀 알고 맞읍시다하는 말이다. 힘 좀 세다고 이렇게 힘없이 불쌍한 인간을 두들겨 패기나 하고 일언반구 이유 한마디 알려 주지 않는 하나님! 있으면 나오시오! 나와서 좀 따집시다!
여기서 욥과 그 친구들의 얘기를 계속 늘어놓을 여유가 없다. 다만 욥도 그 세 친구들을 한심하게 생각하지만, 그 세 친구들도 욥의 ‘교만’에 대하여 몸서리를 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렇구나. 욥이 저렇게 망한 것은 그렇게 한심한 욥의 교만 때문이었구나’하고 세 친구들은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욥에게 있어서 그것은 교만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자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을 범한 적이 없는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지은 죄가 없는데 이렇게 망하다니 억울하고 원통하고 분한 일이다. 정말 욥으로서는 복장이 터질 일이다.
욥기 31장은 욥의 이러한 기가 막힌 하소연들이 담겨 있다. 욥의 삶은 인간적으로 볼 때 참으로 ‘훌륭한’ 삶 그 자체였다.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언제 나의 행위가 허탄하였으며 내 발이 궤휼에 빨랐던가.…… 언제 내 걸음이 길에서 떠났던가.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라갔던가. 내 손에 더러운 것이 묻었던가.…… 언제 내 마음이 여인에게 유혹되어 이웃의 문을 엿보아 기다렸던가.……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던가.…… 내가 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고 정금더러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던가.…… 언제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던가.…… 누구든지 나의 변백을 들을지니라.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원하노라. 내 대적의 기록한 소송장이 내게 있으면 내가 어깨에 메기도 하고 면류관처럼 머리에 쓰기도 하리라.”(욥 31장)
다른 글에서 구제라는 선의 양면성을 이야기할 때 구제한 것이 죄라고 얘기한 것은 바로 욥의 이러한 태도를 가리킴이다. 욥의 삶에 있어서 삶의 기준은 선악이었다. 그래서 선은 행하고 악을 행치 않는 삶이 그의 전 생애였다. 욥기 31장을 한 마디로 얘기한다면 ‘내가 언제 선을 행치 않은 적이 있었던가. 그리고 내가 언제 악을 행한 적이 있었던가’이다. 문제는 악을 동반하지 않은 선은 없다는 사실을 욥이 몰랐다는 데 있다. 선은 악의 ‘표면’이며 악은 선의 ‘이면’이라는 사실을 모른 것이 문제다. 인간들의 선과 악은 항상 함께 붙어 다니는 존재다.
욥기 32장 이후에는 ‘엘리후’라는 사람이 나타나 이러한 점을 지적하지만 욥으로서는 엘리후의 메시지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모두 허튼 소리일 뿐 나는 억울하고 나의 억울함을 풀어줄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구나 하는 것이 욥의 심정이었다. 드디어 38장에 오면 하나님이 등장하신다. 그리고 욥을 향하여 질문하기 시작한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광명의 처소는 어느 길로 가며 흑암의 처소는 어디냐.…… 네가 아마 알리라. 네가 그때에 났었나니 너의 연수가 많음이니라. 네가 묘성을 매어 떨기 되게 하겠느냐. 삼성의 띠를 풀겠느냐.……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의지함이냐.”(욥 38-39)
욥의 원함대로 하나님이 나타나기는 했으되 문제는 하나님의 질문에 하나도 대답할 말이 없다는 점이다. 욥이 생각했던 예상 문제는 하나님의 질문에 욥기 31장-즉 내가 언제 이러이러한 일을 했던가-인데 하나님이 들고 나온 문제는 전혀 엉뚱한 것이었다. 도무지 자기 머리로는 비슷한 대답도 내어 놓을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욥이 ‘선악의 문제’로 씨름했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선악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하나님의 선악에 대한 기준은 "네까짓 게 악하다 한들 나하고 무슨 상관이며 또 선하다한들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 모두 너와 같은 인간들 사이의 일일 뿐"(욥 35:6-8)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채찍은 욥이 얼마나 선하고 얼마나 악하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왜 아직도 선악의 문제를 벗어나지 못하느냐에 있었다. 산 염소의 새끼 치는 일이라든지 타조가 즐거이 날개 치는 일들은 욥의 선함과 악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들의 생명 자체로 아름답고 그들의 삶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이다. 들소도, 염소도, 독수리도, 말도, 악어도, 묘성도, 광명도, 구름도, 번개도, 폭우도, 들 나귀도, 우박도, 사자도 모두 그들의 생명 자체로 아름답고 삶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지 선함이나 악함이 문제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로지 인간들만 선하니, 악하니, 잘했느니, 못했느니 떠들 뿐이다. 욥이 지금까지의 신앙을 통하여 알아왔던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 아니었다. 간음을 하지 말기를 원하는 하나님이었고, 가난한 이웃을 도와주길 원하는 하나님이었다. 또한 도둑질해서는 안 되는 하나님이었으며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야 되는 하나님이었다. 욥은 이런 모든 신앙의 행위에 있어 철저했고 완벽했다. 아마 세상 사람이라면 누구도 욥의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기 어려우리라.
그러나 사실 성경의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 아니었다. 우리가 간음을 하거나 말거나, 우리가 도둑질을 하거나 말거나 그런 것하고는 상관이 없는 하나님이었다. 그렇다고 ‘무슨 소리하느냐. 십계명을 보라’고 열을 낼 필요는 없다. 지금 내가 십계명을 몰라서 이런 소리하는 것은 아니다. 십계명을 주신 것은 우리의 완악함 때문이었지(막 10:5) 그것이 창조의 원칙은 아니었다. 나는 지금 창조의 하나님과 에덴동산의 하나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에덴동산에는 도둑질이라는 말도 없고 간음이라는 개념도 없다. 효도할 필요도 없고 예배드릴 필요도 없다. 기도나 예배를 무슨 공로나 되는 줄 아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 모두 욥에게 배울 일이다. 욥이야 말로 그 방면의 일인자가 아닌가!
우리가 욥을 통하여 배우고 교훈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을 깊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은 엘로힘의 하나님을 몰라서 버림을 받았고 신약의 교인들은 구원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몰라서 버림을 당한다. 우리가 지금 깊히 알아야 할 그 분이 예수그리스도이시다. 그 분은 도덕적으로 짓는 죄를 죄로 보시지않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인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것을 알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대신해 주신 것을 알라. 하나님께서 죄라고 인정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지않는 것이다. 아직도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구세주인줄 몰라서 교회만 다니며. 말세가 어떻고, 은사가 어떻고... 교리가 어떻고... 성경이 교주를 위해 쓰였졌다느니 하지말고 예수그리스도가 내죄를 대신해 주신 분인가를 깊히 생각하라! 그래야 예수와 나는 아는 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