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함과 믿음에 대한 논쟁은 참 오래되었습니다. 분명히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이것에 대한 이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본문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진정한 믿음*인 것이지요. 말로만의 믿음,순종이 없는 믿음을 질타한 것입니다.
본문 중 18절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그대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실천이 있소.” 나에게 실천 없는 그대의 믿음을 보여 주십시오. 나는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 주겠습니다. (18절)
본문을 깊이 묵상해 보면 믿음은 분명한 실상과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상과 증거가 없는 믿음은 헛것이요,거짓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실상과 증거를 간직하지 않으면 14절에 있는 것처럼 구원의 확실함을 보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심각한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믿음의 실상과 증거는 이론이 아닙니다. 배고프고 헐벗은 사람에게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돈을 나눠주고,먹을 것을 나눠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로만의 위로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실상과 증거는 돈 문제를 넘어서야 하고 자존심을 넘어서야 하며 걸림돌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처럼 진정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실상과 증거가 있습니까? 사극을 보면 신하들이 왕 앞에서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죽여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장면이 종종 나옵니다. 이것을 볼 때마다 우리가 하느님께 회개하는 장면과 오버랩되어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
죄의식은 신앙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죄의식에만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회개한 신앙인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주님의 말씀에 어떻게 순종할 수 있을 것인가를 깊이 고민하고 행하지 않으면 왕 앞에서 그저 죽여주십시오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결코 만홀이 여김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진정한 믿음이 아닌 것에 움직이지 않습니다. 기뻐하시지도 않습니다. 유사 신앙이나 거짓 신앙으로 그분에게 믿음이 있는 것처럼 속일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진정한 신앙은 말씀을 말씀으로 인정합니다. 현실을 핑계 삼지 않습니다. 나의 무능함을 핑계 삼지도 않습니다. 말씀의 일점 일획도 만홀이 여기지 않습니다.
오늘의 기도
하느님! 진정한 믿음으로 믿음의 실상과 증거를 간직하게 하옵시고, 이것에 어떤 핑계나 도피가 없게 하옵소서. 말씀이 언제나 말씀대로 이루어짐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14절)
~~~~~~~~~~~~~~~~~
묵상 14~18절(1): 14~17절의 말씀으로 묵상하고자 한다. 17절의 말씀은 14절의 말씀에 대한 단정적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공동체에 관한 책 중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른다”는 주장이 종교개혁 이후에 즉 루터나 칼빈 이후에 회복됨을 매우 다행으로 여긴다는 글을 보았다.
전체적인 문맥에서 풍기는 의미는 중세 교회가 행함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주장을 하였고, 그로 인한 병폐와 문제가 심각했으나 믿음으로 인해 구원에 이른다는 주장이 대두됨으로서 그러한 병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다시 나의 생각이 그릇되었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내가 알기로는 아마도 루터는 야고보서를 매우 부정적으로 취급했던 것 같다. 아마도 그런 균형을 잃은 주장의 영향이 오늘날 교회의 또 다른 병폐를 낳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수 많은 이단들이 성경 말씀의 제한 된 몇 구절만을 가지고 자신들의 주장을 전개하다가 본질을 놓치는 우를 범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오늘 아침에 조화와 균형, 바른 지식과 바른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번 새겨본다. 더불어서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 보다 많은 노력이 중요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를 부인하고 주님의 의로 성경을 보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다시 한번 더 깊이 새겨본다.
믿음과 행함이 어떠한 함수 관계를 가지고 있을까? 이는 정말 잘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이에 대한 결론을 야고보서는 이렇게 내리고 있다. “그대도 보다시피, 믿음이 그의 실천과 함께 작용하였고, 실천으로 그의 믿음이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 (22절)” 믿음 만으로서는 완전히 의롭다 할 수 없는 것이 오늘날의 믿음을 강조하는 대부분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성도들의 믿음의 형태를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행함만으로도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야고보서의 믿음과 행함에 대한 결론을 잘 새겨야 할 것이다. 진정한 믿음은 믿는 대로 행하는 것이다. 즉 참 믿음은 행위를 동반하게 되어 있으며, 행함으로 드러났을 때에라야 그 믿음은 믿음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즉 행함은 믿음의 외적 표현이고, 믿음은 행함의 내적 상태를 반영한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는 것이다. 또한 믿음 없는 행함이란 근본적으로 외식이거나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한다고 하고 있다. 참으로 재치 있는 그런 표현이다. 또한 믿음이 행함으로 이어졌을 때만이 그 믿음은 완성된다고 결론 짓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결론이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이것이 오늘날 야고보서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내가 주장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오늘날 믿음만을 강조하는 점의 병폐는 무엇인가? 입술로만 믿음을 예기하고 실제로는 어떠한 변화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쉬운 입술의 고백만이 믿음인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부인 없는 믿음의 고백은 믿음이 아니다. 주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주님을 주님이라 부르는 것은 자기 기만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바로 주인은 바꾸지 않은 채 입술로만 주님을 부르는 것 같다. 따라서 나는 그런 열망을 갖게 된다. 전도와 선교의 중요성은 백 번 말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의 울타리 안에 있는 소위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는 수 많은 사람들을 진짜 크리스천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더욱 중요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더 강하다.
그래서 요즈음은 그런 분야 즉 크리스천들의 크리스천다운 변화를 할 수 있는 진정한 크리스천 교육과 그들이 함께 하나되는 공동체의 형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아니 열망을 갖고 기도하고 있다. 나름 시간이 나는 대로 기도하고 준비하고 있다. 이것이 주님 보시기에 합당하면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고 믿는다. 그날을 기대하며 오늘도 나의 삶 전체를 주님께 의탁한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을 말하지 않게 하옵소서. 믿음만을 강조하며 행함을 무시하는 불구자 신앙인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믿는 대로 행하는, 믿음과 행함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크리스천, 즉 주님을 믿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런 무리들을 모아주시고, 그런 무리들이 하나되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주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묵상 14~18절(2): 오늘은 18절의 말씀으로 묵상하고자 한다. 이 말씀은 강력한 도전의 말씀이다. 오늘날 나에게, 우리에게,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강력하게 도전하시는 말씀이다.
어제의 묵상 내용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한 말씀이었다. 따라서 “행함은 믿음의 외적 표현이고, 믿음은 행함의 내적 상태를 반영한다고 할 것이다.” 라고 묵상하면서 “그대도 보다시피, 믿음이 그의 실천과 함께 작용하였고, 실천으로 그의 믿음이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 (22절)” 라는 말씀으로 결론을 삼았다.
그런데 오늘은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라고 도전하신다. 이 도전의 말씀은 아마도 당시의 일부 성도들의 믿음의 상태를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말만 앞세우고 행함이 없는 덜 성숙한 믿음, 오히려 말만 많아서 문제만 일으키는 문제아적 믿음, 자신은 믿음이 좋은 척, 거룩한 척 하면서 자신의 몸은 움직이지 않거나 궂은 일은 하지 않으려 하거나. 자신에게 손해가 나는 일은 어떤 일도 하지 않으려는 그런 사람들이 당시 교회에 분명히 있었던 것 같다.
그러기에 행함이 없는 너의 믿음이 도대체 어떤 믿음이냐? 라고 강력하게 반문하면서 도전하신다. 과연 그것을 믿음이라 할 수 있느냐? 왜 믿는다고 하면서 그 믿은 바 그대로 행하지 않느냐? 하는 질책의 말씀이다. 만약 네가 행하지 않으면서 믿는다고 하는 그 믿음을 온전한 믿음이라고 증거할 수 있다면 나에게 한번 보여봐라. 하는 그런 도전이다. 네가 그리한다면 나도 내가 믿는 바를 너에게 보이겠다.라는 결단의 말씀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또다시 강력하게 표현한 것이라 여겨진다. 오늘 아침에 다시 한번 어제 내렸던 결론을 깊이 묵상하며 새겨본다. “그대도 보다시피, 믿음이 그의 실천과 함께 작용하였고, 실천으로 그의 믿음이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 (22절)” “행함은 믿음의 외적 표현이고, 믿음은 행함의 내적 상태를 반영한다고 할 것이다.”
기도 주님! 믿는 바 대로 행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임을 오늘 아침에 다시 일깨워 주심을 감사 드립니다. 행하지 않으면서 믿음을 논하지 않게 하옵소서. 믿는다면 그대로 행하는 결단력을 주옵소서. 때로는 그 행함의 결단이 작은 물질적 희생이나, 시간적 헌신일 수도 있을 것이고, 어떤 경우에는 나와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나의 육체적 죽음을 결단해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 어떤 경우라도 믿는 대로 행함으로 믿음을 증거하게 하옵소서. 오직 주님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나의 육체를 형상으로, 도구로 삼아 나의 거룩하신 주님만이 드러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성경...해석?...이냐시오 성인은 | ||||||||||||||||||
|
||||||||||||||||||
| 지록위마... 그거 아주 위험한 겁니다. | |||||||||||||||||
|
|||||||||||||||||
지록위마指鹿爲馬 - 네이버국어사전
指 : 가리킬 지
鹿 : 사슴 록
爲 : 할 위
馬 : 말 마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전한다.
조고(趙高)가 모반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이 따라주지 않을 것이 두려웠다. 이들을 시험하기 위해, 사슴을 2세 황제에게 바치면서 말하였다. “이것은 말입니다.” 2세 황제가 웃으며, “승상이 잘못 본 것이오. 사슴을 일러 말이라 하오?” 하였다[趙高欲爲亂 恐群臣不聽 乃先設驗 持鹿獻於二世曰馬也 二世笑曰 丞相誤邪 謂鹿爲馬]. 진나라 시황제가 죽자, 환관 조고는 거짓 조서를 꾸며 태자 부소(扶蘇)를 죽이고 어린 호해(胡亥)로 2세 황제를 삼았다. 호해는 “천하의 모든 쾌락을 마음껏 즐기며 살겠다.”고 말했을 정도로 어리석었기 때문이다. 조고는 이 호해를 이용하여 경쟁 관계에 있던 승상 이사(李斯)를 비롯한 많은 신하들을 죽이고 승상의 자리에 올라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러자 역심이 생긴 조고가 자기를 반대하는 중신들을 가려내기 위해 이와 같은 행동을 하였던 것이다. 호해가 말을 마치고 좌우의 신하들을 둘러보자, 잠자코 있는 사람보다 “그렇다.”고 긍정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아니다.”고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조고는 부정하는 사람들을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죄를 씌워 죽였다. 그 후 궁중에는 조고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후로 윗사람을 농락하여 권세를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는 것을 비유할 때 이 고사가 흔히 인용되었다. 이것이 요즘에 와서는 그 뜻이 확대되어 모순된 것을 끝까지 우겨 남을 속인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 바오로의 사상을 잘못 이해한 반응 | |||||||||||||||||
|
|||||||||||||||||
14) 신앙의 실천이 야고보의 가장 큰 관심사이다. 그는 이미 신앙(1.3,6; 2,1)과 실천(1,22-25)에 관해 언급했다. 이제 14-26절에서는 신앙과 실천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다룬다. 야고보의 입장은 바울로의 입장과 분명히 다르다. 바울로는 인간이 신앙의로만 의롭게 된다고 주장했는데(로마 3,28; 갈라 2,16),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신앙은 사람을 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14.17.26절). 그렇지만 야고보가 강조하는 행동은 바울로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비판한 “율법의 행업이 아니라, 바울로가 신앙과 성령의 ”열매“(1데살 1.3; 2데살 1,11; 갈라 5,6.22; 로마 2,6-7.15; 에페 2,10; 골로1,10)라고 한 덕행이다. 야고보는 행동으로 구현되고 입증되는 신앙을 요구한다. 그 행동은 특히 이웃 사랑과 기도다. 이와 같이 행동을 강조하는 것은 마태오 복음에 반영된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입장과 비슷하다.(마태 5,16.20; 7,12-27; 12,50; 18,23-35; 25,31-46). 바울로는 율법의 행업으로 구원된다는 설을 강력히 내세웠다. 그 결과 그는 신앙과 행동을 엄격히 구별하게 되었다.
그러나 야고보가 직면한 현실은 아주 달랐다. 그는 바울로의 가르침을 일방적으로 왜곡하여 행동의 가치를 무시한 사람들을 바로잡기 위해 신앙과 행동의 일치를 강조하게 되었다.
15) 15-16절은 훈계가 아니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소용이 없다는 것을 실감나게 설명하는 비유다.
16) 18-19절의 뜻을 밝히기는 매우 어렵다. 해석자들의 의견이 달라서, 디벨리우스는 18절을 신약성서의 가장 어려운 구절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문제는 “어떤이”가 누구냐 하는 점이다. 문학 유형상으로로만 본다면 필자와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는 사람이지만 내용상 18절의 경우에는 야고보와 같은 입장을 취하는 사람이다. 이 “옹호자”의 말은 23절까지 계속된다. 18절에서 23절까지는 상대가 “너”이고 24절부터는 상대가 다시 “여러분”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17)19절. 야고보가 반대하는 것은 믿음과 행함의 분리다. 여기 반대편에서 말하는 믿음은 그리스도교에서 인정할 수 없는 순전히 관념적인 믿음이다. 유일한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귀신들의 믿음은 신학적으로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런 사이비 신앙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18) 21절>바울로처럼 야고보는 자기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본보기로 끌어낸다.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같은 아브라함을 두고 바울로와(로마 4장; 갈라3,6-9) 반대의 결론을 내린 점이다(24절). 야고보는 유다교의 고전적 인물인 아브라함을 “아버지”(마태 3,3; 루가 16,24,27,30; 요한 8,39.53; 로마 4,16-18,)그리고 “하느님의 친구”(2역대 20,7; LXX 이사41,8; 51,2; 다니 3,35)라는 전통적 명칭으로 부른다. 야고보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이사악 재헌은 그의 신앙을 보여주는 실천이었다. 그는 창세 15,6과 22장을 결부시킨다.
반면에 바울로는 창세 15,6에 의거하여 아브라함의 신앙이 할례나 율법 따위의 행업을 앞서고 있었다는 것인데. 이런 해석은 유다고 전통에서 흔히 볼 수 있다(집회44,29; 1마카 2,52 히브 11,17 참조). 22절은 믿음과 행함의 일치와 그 상호보완성을 분명히 밝히는 명언이다.
19) 24절은 바울로의 가르침(로마 3,28; 갈라2,16)과 정반대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바울로 사도는 할례 · 안식일 · 금식 같은 유다교 율법의 특수한 행동을 비판했지 실천없는 믿음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믿음만으로”라는 표현을 보면 앞의 “행함“에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조리있게 밝힌 야고보의 말을 참작하면 바울로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를 피힐 수 있을 것이다.
20)25절> 히브 11,31에서는 라합의 믿음을 칭찬한다. 그러나 야고보는 그를 행함의 모범으로 끌어낸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믿고(여호2,9-11) 이스라엘의 정탐원들을 대접한 이방인 창녀 라합은 유다 전승에서 자주 언급 된다. 그가 유다교로 개종하여 여호수아의 아내가 되었다는 전설도 있지만, 예수의 족보에서는 그를 살몬의 아내라 한다.(마태 1,5) 그가 의롭게 되었다는 것은 예리고가 함락될 때 그 자신과 그의 집안이 구제되었다는 뜻이다.(여호 6,2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