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강생하신 하느님의 사랑

2011. 4. 10. 오후 8:4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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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강생하신 하느님의 사랑
 

 
12. 지금까지 우리는 주로 구약 성경에 대하여 언급해 왔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의 유일한 경전인 두 성경이 서로 깊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은 이미 명백해졌습니다. 신약 성경의 실질적인 새로움은 새로운 개념에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러한 개념들에 살과 피를 부여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의 모습에 있습니다. 이는 유례없는 사실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성경의 새로움은 단순히 추상적인 개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고 어떤 면에서는 전례 없는 하느님의 활동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활동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몸소 ‘길 잃은 양’, 고통받는 잃어버린 인간을 찾아 나서실 때 극적인 형태를 띠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와 잃어버린 은전을 찾는 여인, 방탕한 아들을 보고 달려 나가 안아 주는 아버지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 이는 단순한 말씀이 아닙니다. 그 비유들은 그분의 존재와 활동 자체를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그분의 십자가 위 죽음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거슬러, 인간을 들어 높이시고 구원해 주시고자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는 행위의 절정입니다. 그것은 가장 철저한 형태의 사랑입니다.

요한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찔린 옆구리(요한 19,37 참조)를 바라볼 때, 우리는 이 회칙의 출발점으로 삼은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8)
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서 우리는 이 진리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서부터 사랑에 대한 우리의 정의는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바라봄으로써 자신이 살아가고 사랑하여야 할 길을 찾아냅니다.


13. 예수님께서는 최후 만찬에서 성체성사를 세우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바치는 이 행위가 영원히 현존하게 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빵과 포도주를 통하여 당신 자신, 곧 새로운 만나(요한 6,31-33 참조)인 당신의 몸과 피를 제자들에게 주심으로써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셨습니다. 고대 세계는 인간의 참된 음식, 곧 참으로 인간을 인간으로 살게 하는 음식은 궁극적으로 영원한 지혜인 로고스임을 어렴풋이나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로고스가 이제 사랑으로 우리를 위한 양식이 되셨습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바치시는 행위에 우리를 끌어들입니다. 우리는 강생하신 로고스를 단지 정적으로 받기만 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분께서 당신 자신을 바치시는 역동적인 행위 안으로 들어갑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혼인에 대한 표상은 이제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방식으로 실현됩니다. 전에 그 혼인은 하느님 앞에 서 있는 것을 의미하였으나, 이제는 예수님의 봉헌에 동참하고 그분의 몸과 피를 나눔으로써 하느님과 결합하게 됩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자기 낮춤에 토대를 둔 성사의 ‘신비’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에서 작용하며, 인간의 모든 신비주의적 고양으로 도달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훨씬 더 높이 우리를 들어 높여 줍니다.

14.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또 다른 차원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곧 이 성사의 신비가 사회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사의 친교, 곧 영성체를 통하여 나는, 성체를 받아 모시는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주님과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성인이 말하듯이,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7). 그리스도와 이루는 일치는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는 모든 사람과 이루는 일치이기도 합니다. 나는 단지 자신을 위해서만 그리스도를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거나 될 모든 사람과 일치를 이룰 때에만 그분께 속할 수 있습니다.

영성체는 내가 자신에게서 벗어나 그분을 지향하도록, 그리하여 모든 그리스도인과 이루는 일치를 지향하도록 해 줍니다. 우리는 한 실존 안에 완전히 결합된 한 몸이 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이제 참으로 하나가 됩니다. 강생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모두 당신께로 이끄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한 어떻게 아가페가 성찬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찬례에서 하느님 자신의 아가페가 몸으로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일을 계속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론적이고 성사적인 토대를 명심할 때에만 우리는 사랑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서로부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넘어가신 것, 또 이 핵심 계명을 신앙생활 전체의 바탕으로 삼으신 것은 단순히 도덕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또 성사 예식을 통한 신앙의 표현과 나란히 별도로 존재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앙과 예배와 관습(ethos)은 서로 얽혀 있는 단일한 실재입니다. 그 실재는 우리가 하느님의 아가페와 만남으로써 구체화합니다. 이때 예배와 윤리의 흔한 대립은 그대로 무너지고 맙니다. 성찬의 친교인 ‘예배’ 자체 안에는 사랑받는다는 사실과 그에 이어 다른 이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건너가지 않는 성찬례는 그 자체로 불완전한 것입니다. 반대로, 아래에서 더 상세히 고찰하겠지만, 사랑의 ‘계명’은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단순한 요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라는 ‘계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먼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15. 이 원칙은 예수님의 위대한 비유들을 이해하는 출발점입니다. 부자(루카 16,19-31 참조)는 저승에서, 궁핍하고 가난한 이에게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자기 형제들이 알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도움의 호소를 우리가 올바른 길로 되돌아가도록 도와주는 경종으로 삼으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9-37 참조)는 두 가지 매우 중요한 설명을 제시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웃’의 개념은 근본적으로 자기 동포와 이스라엘 땅에 정착한 외국인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단일 국가나 단일 민족으로 구성된 긴밀한 공동체를 일컬었습니다. 이러한 제한이 이제 없어진 것입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 내가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나의 이웃인 것입니다. ‘이웃’의 개념은 이제 보편화되었지만, 구체적입니다. 이웃의 개념이 모든 인류에게로 확대되었지만, 그렇다고 일반적이고 추상적이며 커다란 의무를 지지 않는 사랑의 표현으로 격하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구체적인 행동을 하도록 내게 요구합니다. 교회는 신자들의 일상생활에서 가까운 것과 먼 것의 관계를 언제나 새롭게 해석할 의무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위대한 비유(마태 25,31-46 참조)를 특별히 언급하여야 합니다. 최후의 심판에서 사랑은 한 인간의 삶이 가치 있는 것이었는지 아니었는지를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기준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가난한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 목마른 사람들, 나그네, 헐벗은 사람들, 병든 사람들, 감옥에 갇힌 사람들과 동일시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형제들 가운데 가장 작은 이들 안에서 우리는 바로 예수님을 만나며,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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