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컷뉴스 황진환 기자]

566돌 한글날을 하루 앞둔 8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민들이 세종대왕상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jordanh@cbs.co.kr


오늘은 한글날입니다  2012.10.09. 07:50

 

 

백과사전

10월 9일. 1926년 11월 4일(음력 9월 29일), 당시 민족주의 국어학자들의 단체인 조선어연구회()가 주동이 되어 세종대왕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식을 가지고, 이날을 제1회 '가갸날'로 정하였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1446년(세종 28) 음력 9월 훈민정음이 반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 음력 9월의 마지막 날인 29일을 한글이 반포된 날로 추정하여 '가갸날'로 정하고, 신민사()와 공동 주최로 한글반포 8회갑(:480년)을 기념하였다.

이듬해인 1927년 조선어연구회 기관지 《한글》이 창간되고부터 이날을 '한글날'로 고치고 계속 음력으로 기념하다가, 1932년 양력 날짜로 환산, 10월 29일에 기념 행사를 가졌다. 다시 1934년 정확한 양력 환산법을 적용하여 10월 28일로 정정하였고, 1940년 7월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어 정인지() 서문에 반포일이 9월 '상한()'으로 나타났으므로, 상순의 끝날인 9월 10일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9일을 한글날로 확정하였다.

1970년 6월 15일, 대통령령으로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을 제정·공포하여 공휴일로 정했다. 그러나 1990년 법정 공휴일인 기념일에서 법정 공휴일이 아닌 기념일로 바뀌었고, 2006년부터 법정 공휴일이 아닌 국경일로 지정되었다. 한글날을 전후한 주간에 정부·학교·민간단체 등에서 세종대왕의 높은 뜻과 업적을 기리고 한글의 제정을 경축하는 각종 기념행사를 거행한다.

 

알고 싶은 한글



(

 









   
     
 
  한글의 구성 자음 모음 외래어→한글 한국어→로마자
 
    한글은 이른바 음소 문자로서, 자음을 나타내는 글자와 모음을 나타내는 글자가 따로 만들어져 있다. 그런데 로마자 같은 일반적인 음소 문자와는 달리 자음자와 모음자를 합쳐서 음절 단위로 모아쓰게끔 만들어졌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 점에서 음절 문자와 비슷한 성격도 일부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한글 맞춤법은 1933년 조선어학회가 제정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기초를 두고 있다. 1988년 부분적으로 수정되었으나 기본적인 특징은 그대로이다. 한글은 자음 글자와 모음 글자로 되어 있다. 한글은 음소 문자이지만 음절 단위로 모아쓰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꿀벌’이라는 단어는 ‘ㄲㅜㄹㅂㅓㄹ’로 적지 않고 ‘꿀벌’로 적는다. 글자로서의 음절은 초성과 중성, 받침의 세 위치로 나뉜다. 초성에는 자음 글자 19개가 쓰인다. 19개 중에서 ‘ㅇ’은 소리가 없다. 예를 들어 ‘우유’에서 ‘우’와 ‘유’의 ‘ㅇ’은 소리 없이 자리를 채워 주는 역할만 한다. 중성에는 21개의 모음 글자가 쓰인다. 받침에는 16개의 홑받침 글자, 11개의 겹받침 글자가 쓰인다.
 
 
 
1. 기본 자모 (24자)
2. 복합 자모 (16자)
3. 한글 맞춤법 :
초성 글자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 ㄲ ㄸ ㅃ ㅆ ㅉ ( 19개 )
 
중성 글자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ㅐ ㅒ ㅔ ㅖ ㅘ ㅙ ㅚ ㅝ ㅞ ㅟ ㅢ ( 21개 )
 
받침 글자
홑받침 :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 ㄲ ㅆ ( 16개 )
겹받침 : ㄳ ㄵ ㄶ ㄺ ㄻ ㄼ ㄽ ㄾ ㄿ ㅀ ㅄ ( 11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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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공기의 중요성을 평소에는 잊고 살듯이, 언어나 문자 역시 우리 생활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지만 그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나 자기 나라 말을 표기할 수 있는 적당한 문자를 가지고 있지 못한 민족이 겪게 되는 고통을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민족도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그러한 고통을 많이 겪어야 했다.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에 우리 조상들은 한자를 사용해서 문자 생활을 영위하였다. 중세 유럽에서 라틴어가 민족을 초월한 공통 문어 구실을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 전역에서 한자와 한문은 공통의 문어 구실을 하였기 때문에, 우리 조상들이 한자와 한문을 사용하여 문자 생활을 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자와 한문은 우리말과는 매우 딴판인 중국어를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문자 및 문어이기 때문에, 우리말을 한자·한문으로 표기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말과 글이 따로 노는 상황이 벌어졌다. 원래 글(문자 언어)은 말(음성 언어)을 충실히 반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문자가 오래 사용되다 보면 말과는 다른 독자적인 기능을 갖게 되어, 문어가 구어와 다른 특성을 갖게 되는 일도 많이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문어와 구어 사이의 거리가 그렇게 먼 것은 아니다. 그런데 한문과 우리말의 거리는 엄청나게 멀기 때문에, 우리 조상들은 말과는 별도로 한자와 한문을 배우느라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한자를 가지고서 우리말을 표기하려는 시도, 이른바 차자 표기법(借字表記法)이 등장하기는 했다. 우선 한문 속에서 우리 고유의 고유 명사를 표기할 때 한자를 빌려서 표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로부터 차자 표기법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이런 차자 표기법은 고유 명사 표기 외에도 여러 방면에서 발전하게 되었다. 먼저, 국가 상층부의 공식적인 문서에서는 한문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아전 등의 중인층은 한문 구사 능력이 지배층만큼 능숙하지 못하였고 또 어떤 경우에는 우리말의 조사나 어미 등을 동원하여 글의 뜻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하급 관리들의 공문서에서는 어순을 한문의 어순이 아닌 우리말의 어순으로 바꾸고 조사나 어미 등을 보충해서 표기한 변형된 한문이 사용되었다. 이것을 이두(吏讀)라고 한다. 또한 불교나 유고의 경전을 읽을 때 적당한 곳에서 끊어 읽기를 하게 되고 그 앞뒤 표현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모국어의 조사나 어미를 붙여서 명시적으로 나타내게 되었다. 이것을 구결(口訣)이라고 한다. 한편, 자기 감정을 진솔하게 노래로 읊을 때에는 아무래도 모국어를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그 노래를 글로 옮겨서 오래도록 남기고 싶은 경우도 생기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말로 읊은 노래를 한자를 빌려서 표기하게 되었는데, 이런 노래를 향가(鄕歌)라고 하고 이때 사용한 표기 방식을 향찰(鄕札)이라고 한다.
  이렇게 차자 표기법이 발전하여 사용되기는 하였지만, 한자는 우리말을 표기하기에는 매우 불완전하고 비효율적인 문자였다. 우선 우리말에는 한자의 어떤 음(音)이나 훈(訓)을 빌려서도 나타내기 어려운 것들이 많이 있었고(예를 들어 의성의태어), 하나의 한자에 훈이 여럿 있는 것이 보통이어서, 차자 표기법에 사용된 한자를 어떤 訓으로 읽어야 하는지 분명치 않은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차자 표기법의 이러한 한계 때문에, 지배층이 한문에 익숙해질수록
차자 표기법의 사용은 축소되어 갔으며, 구체적인 표기 방식도 단순화, 투식화(套式化)되어 갔다.

 
 

   한국은 국토의 크기로 볼 때는 작은 나라이다. 그러나 인구 수로 볼 때는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다. 남북한이 합치면 약 7천만으로 15위에 해당한다. 언어를 중심으로 볼 때 한국은 더욱 크다.

  한국어는 지구상에 쓰이고 있는 수천 가지 언어 중에서 중국어, 힌디어, 스페인어, 영어, 아랍어, 벵골어, 포르투갈어, 러시아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말레이인도네시아어 등에 이어 사용 인구 수로 열세 번째를 차지하는 언어이다. 이러한 한국어에 대해 우리는 자긍심을 가질 만하다.

  지구상의 소수 언어가 자꾸 소멸해 간다는 보고가 있고 그래서 앞으로 몇 언어만 살아남을 거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이런 전망에 기대어 영어를 공용어로 삼아야 하고 심지어 우리의 후손들은 한국어 대신 영어를 모국어로 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언어란 단순히 의사소통의 수단만은 아니며 민족의 역사와 얼이 담겨 있는 것이다. 민족언어를 특징으로 한다. 고유 언어를 잃은 민족은 더 이상 민족이라 하기 어렵다. 예컨대 만주족은 만주어를 잃어버림으로써 사실상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 치하에서 우리 민족이 우리말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역경을 헤치고 민족의 역사를 이어갈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고유한 말과 글을 잘 보존하고 지켜 나감으로써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 외국인과 외국어에 대한 열린 마음도 필요하다. 세계사의 흐름에 뒤지지 않도록 외국어와 외국 문화에도 관심을 기울이면서 우리의 말과 글을 계승, 발전시키고 나아가 세계화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하겠다.
 
     
    전 세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수많은 문자들을 분류해 보면, 우선 표의 문자표음 문자로 크게 나눌 수 있다. 표의 문자는, 글자 하나하나가 일정한 의미를 나타내는 문자로서, 한자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반면에 표음 문자는 글자 하나하나가 어떤 의미를 갖지는 않고, 대신 일정한 소리를 나타내는 문자이다. 하나의 언어 체계 내에서, 의미를 갖는 단위(형태소나 단어)는 수만 내지 수십만 개나 되기 때문에, 표의 문자는 글자의 개수가 매우 많아지게 된다. 반면에 하나의 언어에서 서로 구분되는 소리는 수십 개 정도밖에 안 되기 때문에, 표음 문자는 수십 개만 있으면 하나의 언어를 무리 없이 나타낼 수 있다. 표의 문자도 나름대로 장점이 없지는 않지만,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필요한 개념이 엄청나게 늘어나는데 표의 문자는 이들 개념에 해당하는 문자를 하나하나 새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문자 체계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 너무 많은 노력이 소요된다. 또한 글자의 수가 많아짐에 따라 이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데 소요되는 비용과 노력도 엄청나다. 문자의 발달 역사에서 처음에는 표의 문자로 출발했다가, 나중에 그것이 표음 문자로 발달하는 일이 많이 있다. 표의 문자에 비해 표음 문자가 더 진화된 문자 체계인 것이다.

  표음 문자는 다시 음절 문자음소 문자로 구분할 수 있다. ‘간’이라는 음절은 자음 ‘ㄱ’과 모음 ‘ㅏ’와 자음 ‘ㄴ’의 세 음소로 이루어져 있는데, 음절 문자는 하나의 글자가 ‘간’ 같은 음절 전체에 해당하는 것이고, 음소 문자는 하나의 글자가 하나의 자음이나 모음에 해당하는 것이다. 하나의 언어 체계 내에서 음소의 수는 수십 개이지만, 음절의 수는 수백 내지 수천 개나 된다. 따라서 음절 문자는 음소 문자에 비해 글자의 수가 많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음절 문자보다는 음소 문자를 더 발달된 체계로 본다. 다만, 가능한 음절의 수가 많지 않은 언어에서는 음절 문자를 사용해도 큰 불편이 없을 수 있다. 일본어가 그러한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분류 체계를 염두에 두고 한글을 보면, 한글은 가장 발달된 체계인 음소 문자에 속한다. 그런데 한글은 음소 문자들 가운데에서도 매우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자음이나 모음을 나타내는 각각의 글자들이 원자적(原子的)인 것이 아니라, 일정한 내적 특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ㅋ’이나 ‘ㄲ’은 원자적인 하나의 낱글자라고만 볼 수 없고, ‘ㄱ’과 거기에 추가된 하나의 획, 그리고 두 개의 ‘ㄱ’으로 분석할 수 있는 것이다. 한글이 지닌 이러한 체계성을 중시하여, 한글을 단순히 음소 문자로 보지 않고 자질 문자(featural writing system)라는 새로운 범주를 만들어서 거기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자질 문자는 인간이 만들어 낸 여러 문자 체계들 중에서도 가장 발달된 고도의 체계이다. 그리고 이 범주에 드는 문자는 아직 지구상에 하나밖에 없다. 우리는 그런 문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한자와 한문을 공부할 기회가 없는 일반 백성들도 문자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세종의 취지는 당시의 분위기에서는 매우 파격적이고 개혁적인 것이었으며, 그런 생각이 실제로 실현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우선 지배층은 한문을 사용한 공식적인 문자 생활을 여전히 유지하였고, 여기에 한글이 침투할 여지는 거의 없었다. 대신 한글은 한자, 한문과는 차별적인 역할을 맡음으로써 자신의 세력을 서서히 확장시키게 된다.

   한글이 일반 백성들을 위해 만들어진 문자인 만큼, 한글은 우선 백성들 사이에서 주요한 기능을 하게 되었다. 지배층 중에도 한글을 사용할 줄 아는 이가 늘어 갔지만, 이들은 한자와 한문이라는 공식적이고 특권적인 문자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한글을 사용하여 글을 쓰는 일이 별로 없었다.

   반면에 일반 백성들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점차 한글을 요긴하게 사용하게 되었다. 앞에서 보여 준 선조 임금의 한글 교서 같은 글은 당시에 한글이 백성들 사이에 상당히 보급되어 있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백성들뿐 아니라 사대부 계층에서도 한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이가 점차 늘어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사건이 있었다. 1504년 연산군의 폭정을 비판하는 내용의 한글 괴문서가 나타나자, 연산군은 한글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금하고 한글로 된 책을 불사르게 하고 한글을 사용할 줄 하는 사람을 모두 신고하게 하였다. 당시 괴문서를 작성한 이는 양반 계층이었을 텐데, 아마도 자기 신원의 노출을 피하려는 속셈으로 한글을 사용한 듯하다.
 
   한글 사용을 확대하는 데 여성들의 역할이 컸다. 양반 사대부 계층에서는 여성도 한문 교육을 받는 일이 많이 있기는 했지만, 점차 한글을 많이 사용하게 된 듯하다. 그래서 여성들끼리, 또는 여성과 남성이 편지를 주고받을 때에는 주로 한글을 많이 사용했다. 또한 주로 여성들을 독자로 상정하는 책은 한글로 간행된
것들이 많다. 이 또한 한글 사용의 확대에 있어서 여성이 담당했던 중요한 역할을 잘 보여 준다.
     
 
 
  다음으로는 불교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조선 시대에 표면적으로 숭유억불 정책을 쓰기는 했지만, 일반 민중들의 의식 속에서 불교는 여전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세종, 세조 등 한글 창제 및 초기의 사용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왕실 사람들은 불교의 신심이 독실하였다. 그래서 한글을 사용하여 할 수 있는 여러 사업 중에서도 특히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간행하는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였다. 궁궐 내에 불당을 지어 놓고 예불을 드리고 활자를 가져다가 불경 찍어 내는 일에 사용하는 일이 빈번하자, 신하들은 이에 강력히 항의하지만 세종, 문종, 세조대에 이러한 사업은 꾸준히 이루어졌다. 그 뒤에는 전국의 여러 사찰에서 불경을 한글로 간행하는 일을 계속 진행하였다. 한문을 모르는 일반 백성들도 한글로 불경을 읽어서 불교의 진리를 깨닫고 극락왕생할 수 있게 하려는 취지였다.
  17, 18세기에 이르면 소설이 한글의 보급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당시 지배층은 중국에서 들어온 한문 소설을 탐독하는 이들이 많았다. 정통한 고문이 아니라 백화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 있는 연애 소설, 통속 소설들이 많이 들어와서 사대부들 사이에 많이 읽혔고, 그런 글을 많이 읽은 사대부들은 자기가 쓰는 글에서 그런 소설의 문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이것이 정조에게 문체반정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런 소설은 한글로 번역되어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많이 읽히게 되었다. 한글 소설은 초기에는 필사본으로 유포되다가, 상품 가치가 있기 때문에 방각본(상업적 출판물)으로도 많이 간행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한글은 여성과 일반 백성들 사이에 널리 보급되었다. 어떤 시기에, 예를 들어 18세기나 19세기에 전 국민 중 몇 퍼센트가 한글을 읽고 쓸 수 있었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시기에 우리나라에서 한글로 읽고 쓸 줄 아는 국민의 비율은 당시의 서양에 비해 결코 낮지 않았던 듯하다.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 왔던 프랑스 군인이 돌아가서 쓴 기록을 보면, 당시 조선의 일반 백성들의 집에 책이 많이 있다는 데에 놀라고 부러움 내지 열등감을 느꼈다는 대목이 있다. 당시 동아시아의 문화 수준이 유럽에 비해 결코 처지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이렇게 소설이 유행하고 상업적 출판이 대두되는 것은 근대를 향한 징후였다. 또한 여기에 공통 문어 중심의 중세적 문화에서 민족어를 중시하는 근대적 문화로의 이행이 함께 얽혀 있다. 한문을 대신해서 한글이 우리나라의 지배적인 문자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은 근대를 향한 진보의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갑오개혁으로 국가의 공식적인 문서에서 한글을 사용하게 되고, 개화기에 한문 대신 한글을 사용해야 근대적인 부강한 국가로 발전할 수 있다는 주장이 강력하게 대두되게 되었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할 때 가지고 있었던 생각은,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결국 실현된 것이다

 

 


 




[단독]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공개 말라"던 테러 현장 사진 봤더니

입력 : 2012.10.11 03:01 | 수정 : 2012.10.11 10:42

아웅산 테러 파편 속 셔터 눌렀던 김상영씨, 10여장 사상 첫 공개
"유족 가슴 찢어지겠지만… 이 사진들이 추모비 건립에 도움되길"

당시 정부 "국민을 또 아프게 할 수 없다" 사진 공개 막아
국내 유일의 아웅산 테러 직후 현장사진 29년만에 공개
'꽝'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셔터 누른 뒤 실신… 깨어나 피범벅 상태서 촬영
청와대 경호원에 "소중한 것이 기록돼 있다" 카메라 넘기고 또 의식 잃어
외신 한 곳서 "평생 먹고살게 해줄 테니 필름 달라" 제의… 단번에 거절

 

"의정부에서 왔습니다. 29년간 간직해온 겁니다. (공개하는 것이) 국민의 도리라고 생각해 아무 대가 없이, 아무 사심 없이 드립니다."

10일 오전 서울 중구 조선일보 편집국으로 파란 점퍼 차림의 70대 남성이 찾아왔다. 한 손에 하얀색 봉투가 들려 있었다. 김상영(金相榮·70)씨. 그는 1983년 10월 9일 미얀마 아웅산 폭탄 테러 당시 문화공보부 보도국 사진과 소속으로 현장에 있었다.

그는 이날 본지에 테러 당시의 처참했던 현장을 생생하게 담고 있는 컬러 사진 10여장을 기탁했다. 김씨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국민을 또 아프게 하지 말라'며 사진 공개를 금지해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보관해왔다"면서 "오늘 아침 신문에 아웅산에 희생자들의 추모비를 건립하고 국민 모금 운동도 한다고 해서 이 사진들이 모금 운동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며 갖고 왔다"고 말했다.

 
(위 사진)29년 전인 1983년 10월 9일. 미얀마 양곤의 아웅산 묘소에 도착한 우리 측 각료와 수행원들이 북한의 폭탄 테러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다. 이들을 청와대 경호원들과 미얀마 주재 대사관 직원들이 달려가 일으키고 있다. 아래 사진은 폭탄 테러 직전 모습. 아래 사진 현장이 위 사진 현장으로 처참하게 변한 것이다. 본지는 처참한 장면이지만 당시 상황을 증언하기 위해 이 사진을 흑백으로 처리해 공개하기로 했다. /김상영씨 제공
 

이어 "이 사진이 공개되면 유족은 또 한 번 기겁하고, 나는 공개하지 말라는 약속을 어기는 못난이가 될지 모른다"면서 "하지만 북한의 테러 실상 증거를 기록하고, 나라를 위해 일하다 숨져간 이들을 추모하는 것이야말로 국민의 도리이고, 대한민국의 존재 가치라는 생각에 기탁한다"고 말했다.

아웅산 테러 직후 현장에서 유일한 사진을 찍은 김씨는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수술 세 번 끝에 납탄 6개를 몸에서 제거했고, 그 후유증으로 왼손을 제대로 쓰지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토록 급박했던 상황에서도 무의식적으로 셔터를 눌러 역사를 기록했고, 이후 29년간 서랍 속에 넣어 보관해왔던 사진들을 본지에 이날 전달한 것이다. 김씨로부터 1시간 30여분 동안 당시 테러 현장의 급박했던 상황과 그런 상황에서 사진을 찍고 보관하게 된 과정, 또 이 사진을 본지에 기탁하게 된 이유 등을 들어 다시 정리했다.

 
아웅산 폭발 직후… 쓰러지며 셔터 눌러 - 29년 전, 아웅산 테러 현장에서 폭탄이 터지던 당시 김상영씨가 순간적으로 셔터를 눌러 찍은 사진이다. 김씨가 의식을 잃고 쓰러지면서 촬영한 사진이라 초점이 흔들려 있다. /김상영씨 제공
 

1983년 10월 9일 아침. 미얀마 수도 양곤의 한 호텔에는 이범석 당시 외무부 장관, 김재익 청와대 수석 등이 모였다. 아침 식사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식사라고 나온 건 까맣게 타버린 토스트 몇 조각과 바나나뿐이었다.


“이거라도 먹어야 우리가 삽니다.”

이 장관은 일행에게 바나나 조각을 권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후 차를 타고 아웅산 묘소로 갔고, 그 자리에서 이들은 북한이 저지른 폭탄 테러에 삶을 마감했다.

“대통령이 곧 도착한다는 소식에 도열해서 기다리는데 갑자기 ‘꽝’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고막을 찢을 듯이 컸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카메라 셔터를 눌렀죠.”

정신을 잃었다가 깨고 보니 김씨 얼굴은 피범벅이었다(그의 미간에 파편이 박혀 있었다).

“아수라장이었어요. 눈앞에 장관들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순간 ‘이거 정말 큰일이구나. 엄청난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주변에서 ‘악’ 하는 비명, 울음소리…. 살이 타는 냄새가 그렇게 역겨울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카메라를 들고 마구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죠. 36장짜리 필름 한 통을 다 썼던 것 같아요.”

 
부상당한 한국 기자 - 29년 만에 공개되는 미얀마 아웅산 폭탄 테러 현장. 피 흘리며 쓰러진 당시 연합통신 최금영(2003년 작고) 사진기자를 미얀마 경찰 두 명이 일으켜 세우고 있다. /김상영씨 제공
 


그렇게 찍은 초점 잃은 사진 한 장은 그가 갖고 온 사진 10여장 속에 있었다. 또 사진 중에는 신문에 실을 수 없는 불타고 있는 시신과 피투성이가 된 사망자와 부상자들의 아비규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김씨는 이후 다시 정신을 잃었다가 깨 보니 이번엔 천막 아래였다. 야전병원이었던 셈이다. 교민들이 소독약 대신 물로 상처를 씻어내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허리춤을 더듬었다. 카메라가 있음을 확인했다. 주변을 살펴보니 안면이 있는 청와대 경호원이 지나고 있었다. 경호원을 불렀다.

“소중한 것이 기록돼 있습니다. 내 사무실로 전달해주세요.”

카메라를 건네고 그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김포공항에서 깨어났다. 그의 카메라는 경호원의 손을 거쳐 당시 전두환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됐다. 청와대 측은 “너무 끔찍하다. 국민을 또 아프게 하니 공개하지 말라”고 했고, 결국 테러 직전 도열해 있던 사진과 먼지로 뒤범벅이 된 사고 당시 사진 등 두 장만이 언론에 공개되고 나머지는 29년간 그의 서랍에서 시간을 보내게 됐다.

당시 조선일보 1면 1983년 10월 11일자 조선일보 1면. 큰 사진 속 머리에 붕대를 감은 사람이 김상영씨. 김씨를 비롯한 부상자들은 테러 다음 날인 1983년 10월 10일 밤 9시 KAL 특별기편으로 한국에 후송됐다.
 

김씨는 이후 청와대 경호원에게 “내 필름을 돌려달라”고 수차례 부탁했다. 보름여가 지나고 그의 사무실로 필름이 도착해 있었다. 이후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외신 한 곳에서 김씨에게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아웅산 테러 당시 사진을 갖고 있다던데, 평생 먹을 것 줄 테니 필름을 달라”는 것이었다. 김씨는 “(외신의 제안에) 별로 고민하지는 않았다”면서 “이 사진들은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쓴다면 모르지만 내 개인적으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 이를 공개할 생각도 했지만 점점 사람들이 이 시간을 잊어가고 있고, 별다른 계기 없이 알리는 것도 실없이 보일 것 같아 머뭇거려 온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현장에 몇몇 사진 기자가 있었지만 폭발 후 장면을 제대로 찍은 것은 이게 유일한 것”이라며 “일부 방송사가 대통령이 오는 것을 찍기 위해 아웅산 묘소 정문 근처에 있다가 폭발 장면을 찍은 동영상이 있지만 이 역시 현장과는 거리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당시 이 사진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사람은 경호원과 장세동 경호실장, 전두환 대통령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김상영씨와 피묻은 카메라 - 김상영(70)씨가 아웅산 폭탄 테러 당시 현장에서 직접 찍은 사진 10여장을 공개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당시 김상영씨가 지니고 있던 카메라 3대. 현장에서 수거된 것을 김씨가 병원에서 퇴원한 후 모아서 사진을 찍어 둔 것이다. 왼쪽 카메라에는 폭탄 파편에 맞아 김씨가 흘린 피가 그대로 말라붙은 채 남아있다.
 

김씨는 이날 공개 결심을 한 이유에 대해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했던 이들이 이역만리에서 죽었는데, 30년이 지나 우리 대통령이 그곳을 다시 찾아갔더니 추모는커녕 참혹했던 어떤 테러 흔적조차 없었다니…. 후세를 위해서라도 이래서는 안 된다”면서 “아웅산 테러를 놓고 조작 운운하고, 여기에 ‘옳소’ 하는 사람이 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한없이 답답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의정부의 작은 아파트에서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

※오늘 TV조선 뉴스 '깨' '참' '판'에서도 후속 보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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