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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from the Life of St Thomas Aquinas (detail)-LIPPI, Filippino 1489-91. Fresco. S. Maria sopra Minerva, Rome
축일 : 1월 28일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사제 학자 St. Thomas Aquinas San Tommaso d’Aquino Sacerdote e dottore della Chiesa Also known as Doctor Angelicus; Doctor Communis; Great Synthesizer; The Dumb Ox; The Universal Teacher c.1225 at Roccasecca, Aquino, Naples, Italy - 7 March 1274 at Fossanuova near Terracina of apparent natural causes; relics at Saint-Servin, Toulouse, France Tommaso = gemello, dall''ebraico(binoculars, from the Hebrew) Canonized :1323
이탈리아 아퀴노 교외 로까세까(城)에서 태어난 성 토마스는 아퀴노의 란둘프 백작의 아들이며, 로마 황제와 프랑스의 왕 그리고 태오도라와 친척이었다. 그는 불과 다섯 살의 나이로 몬떼 까시노의 베네딕또 수도원으로 보내져서 교육을 받았고, 1239년경에는 그의 교육을 마무리짓기 위하여 나폴리 대학교를 다녔고, 1244년에 가족들의 완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도미니칸이 되었다. 이때 가족들은 그를 강제로 데려다가 15개월 동안이나 로까세까성에 감금시킨 적도 있었다.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으므로, 1245년에 다시 수도회로 돌아갈 수 있었고, 1245년부터 3년 동안을 파리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파리와 쾰른에서 성 알베르또(대)의 문하생으로 공부하여, 1256년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250년과 51년 사이의 어느 대에 사제로 서품되었고, 그 후에는 주로 나폴리, 아나니, 오르비에또, 로마 그리고 비떼르보에서 가르쳤으며, 1259년~68년 사이에 "숨마 꼰뜨라 젠띨레스"를 마루리 지으면서, 저 유명한 "숨마 테올리지까(Summa Theologica.신학대전)"저작에 착수하였다.
파리로 돌아온 1269년에는 수도사제와 교구사제간의 논쟁에 말려들었고, 시제르 브라반트와 요한 펙캄 그리고 파리의 탕피에르 주교의 철학적인 가르침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리용 공의회에도 참석하여 희랍과 라틴 교회의 재일치 가능성을 토의하라는 부름을 받았으나, 리용으로 가는 중에 테라치나 교외 포사 누오바에 있는 시토 수도원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1323년에 요한 22세에 의하여 시성되었고, 1567년에는 비오 5세에 의하여 교회박사로 선언되었고, 1880년에는 레오 13세에 의하여 모든 대학교와 대학 그리고 학교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그의 칭호는 "보편적인 박사"(Doctor Communis)이다. 레오 13세는 모든 신학생들이 그의 사상을 연구해야 한다는 "에떼르 빠뜨리"칙서까지 반포하였다. 그의 주요 사상은 곧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이 되었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교 최대의 신학지이며, 그의 사상은 그의 사후부터 현재까지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지배하고 있고, 그의 저서들은 신앙과 이성 간의 예리한 구분으로 특징 지어지는 탁월한 저작들이다. 그의 "마늄 오뿌스"와 미완성의 대작인 "신학 대전"은 현대 가톨릭 신학의 뿌리로 받아질만큼 위대한 신학 사상을 담고 있다.
이러한 그의 지적 능력 이외에도, 아퀴나스는 지극히 겸손하고 거룩한 사람이다. 그는환시, 탈혼 그리고 계시를 체험하였으며, "그리스도의 몸"축일 성무일도를 집필했고, 지금의 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찬미가, 예컨데 "빤제 린과, 베르붐 수뻬르눔, 라우다 시온, 아도로 떼 데보떼.Devoutly I Adore Thee (Adoro te devote)" 등을 썼다. 또한 그는 주의 기도, 사도신경 그리고 성서 일부에 대한 주해서를 썼다. 한마디로 그는 지성과 성덕의 금자탑이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Triumph of St Thomas Aquinas-TRAINI, Francesco c. 1340.Tempera on wood, 375x258cm.Santa Caterina, Pisa
1225년경 아퀴노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먼저 몬테 카시노 수도원에서,그 다음 나폴리에서 공부했다, 도미니꼬회에 입회하여 파리와 쾰른에서 성대 알베르또의 지도하에 학업을 마쳤다. 철학과 신학에 관한 위대한 저서들 을 남겼고, 많은 이들을 탁월하게 가르쳤다, 1274년 4월 7일 시토회의 포사누오바 수도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1369년 1월 28일 툴르즈로 그 유해가 옮겨졌고, 그때부터 이날을 성인의 축일로 기념해 왔다.
The Vision of Saint Thomas Aquinas. by Stefano Di Giovanni Sasetta.
아퀴노의 성 토마스 사제의 [강의록]에서 (Collatio 6 super "Credo in Deum")
십자가는 온갖 덕행의 모범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를 위해 고나당하시는 것이 과연 필요했겠습니까? 네, 극히 필요했습니다. 두 가지 이유로 그러했습니다. 첫째로 죄를 기워 갚는 치료제로서, 둘째로 우리 행위의 모형으로서 필요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 죄의 치료제입니다. 우리는 우리 죄때문에 닥쳐온 온갖 악을 치료할 치료제를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수난은 우리의 모범으로서도 이에 못지 않게 유익합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은 우리의 전체 생활을 완전히 정향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완덕에 이르고자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멸시하신 것을 멸시하고 또 그리스도께서 지향하신 것을 지향하기만 하면 됩니다. 십자가는 온갖 덕행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여러분이 사랑의 모범을 찾고 있다면 "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는 복음서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하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다면 우리가 그분을 위해서 당하는 곤란이 어떤 것이라해도 그것을 부담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인내의 모범을 찾고 있다면, 십자가 상에서는 그것을 더욱 위대하게 드러내 줍니다. 가장 위대한 인내는 두 가지 경우에서 나타납니다. 즉, 큰 어려움을 인내로이 참을 때나 또한 피할 수 있지만 피하지 않은 어려움을 견딜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극심한 고통을 당하실 때 다음의 성서 말씀대로 그것을 인내로써 견디어 내셨습니다. "그분은 고통을 당하면서 위협하지 않으시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상에서 보여 주신 그리스도의 인내심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리스도는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치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 내셨습니다."
여러분이 겸손의 모범을 찾고 있다면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을 바라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재판을 받다 죽임당하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순종의 모범을 찾고 있다면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신 분을 따르십시오. "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즉 아담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롭게 될 것 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의 것을 멸시하는 모범을 찾고 있다면," 왕중의 왕"이시고 "주님중의 주님"이신 분을 따르십시오. " 그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온갖 보화가 감추어져 있지만" 그분은 십자가 상에서 옷 벗기우고 조롱 당하시고 침뱉음을 당하셨으며 매맞고 가시관을 쓰셨으며 마침내는 쓸개와 초를 마시셨습니다.
옷이나 재물에 애착심을 두지 마십시오. " 그들은 주님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명예를 구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조롱당하시고 매맞으셨습니다. 명예직을구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예수께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었습니다." 쾌락을 탐하지 마십시오. "목마를 제 그들은 주님께 마실 초를 주었습니다." (가톨릭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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