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태어나서 좋은 일을 많이 하고 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나쁜 일만 남기고 가는 사람도 많다. 다같이 아버지 어머니 밑에서 태어나는 것은 똑같은데 누구는 좋은 일을 하고 누구는 나쁜 일을 하는 것인지 타고난 운명대로 가는 것일까.
그 중에서도 국가와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이 남긴 행적을 보면 두고두고 그들의 공과가 나타난다. 특히 만인 위에 군림하며 생살여탈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군주의 경우에는 그 공과가 너무도 뚜렷하다. 어떤 군주는 성군으로 추앙받고 어떤 군주는 폭군으로 폄하된다.
역사상 큰일을 했다고 기록된 사람들은 거개 폭군 아니면 독재군주다. 시이저가 그렇고 칭기즈칸이 그러하며 나폴레옹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진시황 등 무수히 명멸한 임금들이 대부분 혹독한 전제군주였다는 것을 모르는 후세인은 아무도 없다.
우리나라의 역사도 이러한 사례에 근사할 것임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난 여름 필자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인 진시황릉을 관광할 기회를 가졌다. 독립기념관에서 주최하는 광복 60년 중경임시정부 기념식에 참석한 후 모두 서안(西安)으로 옮겨 독립군 제2지대 훈련장을 답사한 다음이었다.
진시황은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했던 ‘황제’로도 유명하지만 또 하나의 세계문화유산인 만리장성을 쌓았다고 해서 널리 알려졌다. 게다가 한국 사람들에게는 불로초(不老草)를 구하기 위해서 동남동녀 3천인을 제주도까지 파견했던 인물로 알려져 글과 노래 속에 숱한 비아냥거리가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만리장성을 쌓을 때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얼마나 많은 세월동안 피눈물을 흘려야 했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만하다. 그 어마어마한 규모의 성터가 인공위성으로도 선명하게 찍힐 만큼 방대하다고 해서 화제가 되고 있지만 그의 끝없는 욕심은 사후(死後)까지도 확실하게 관리하는 것이었다.
만리에 걸쳐 성을 쌓는 일은 당장 처 들어오는 외적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죽은 뒤에 무덤을 지킬 수 있는 군사를 배치한다는 발상은 예수처럼 부활을 믿었기 때문일까. 진시황릉에 대해서는 그 큰 규모에 대해서 여러 사람들이 글을 쓰고 말을 했다고 하지만 크게 관심을 둔 바 없다. 우리에게도 왕릉이 있고 경주에 가면 대묘가 수두룩하기에 그보다 클 것은 이미 예상했던 바다.
그리고 무덤 주위에 토용을 배치한 것이 발굴되었다는 기사를 읽은 일도 있어서 진시황릉의 규모가 남달리 클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던 차에 직접 현지를 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내가 너무나 안이하게 생각했구나.” 신문기사를 꼼꼼하게 읽어두지 아니한 내 자신의 실수이기도 하지만 특히 ‘토용(土俑)’의 실물을 보고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나는 토용이 발굴되었다고 해서 30cm 정도의 크기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 정도의 장난감 병정 같은 토용을 수만개 만들어 무덤 주위에 배치해두면 외부침입자를 막을 수 있다는 일종의 부적 역할을 할 것이라는 심리작용을 한 게 아니었겠느냐 하는 것이 솔직한 내 지식이었다.
그런데 실물은 그게 아니었다. 모든 토용은 키가 175cm에서 195cm이며 완전무결한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비록 흙으로 빚었지만 신발 끈 하나, 단추 하나까지도 실물과 똑같이 만들었으며 창을 든 사람, 칼을 든 사람의 모습이 어쩌면 그다지도 사실적인가.
말을 탄 장군의 모습은 더 거창했다. 이 토용들을 몇 개나 만들었는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 다만 30년 전에 아무 것도 모르는 농부 한 사람이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한 이 토용들은 진시황릉을 둘러싸고 5백여개의 거대한 공구로 나눠져 있으며 현재 발굴되어 관광객의 눈요깃감으로 보여주는 것은 불과 5공구뿐이다. 5백여 공구를 모두 발굴한다면 토용의 숫자는 수십만개가 될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의 견해다.
진시황릉이 그 가운데 있으며 그 무덤은 남산만한 산이다. 현재 알려진 진시황릉은 둘레만도 25km가 넘는다고 하니 놀랄만하지 않은가. 더구나 이 무덤을 조성하기 위해서 그는 70만명의 백성을 노예로 부리면서 장장 14년에 걸쳐 이 작업을 진행시켰다고 하니 그 횡포의 정도를 짐작할 만 하다.
모든 작업이 완성되었을 때 그는 70만명을 한 구덩이에 몰아넣고 생매장했다. 나는 이 무지막지한 폭군의 무덤에 올라가 힘껏 차줬다. 운동장같은 황릉 꼭대기는 진시황을 상징하고 있지만 내 가슴에는 독재와 폭정에 시달리던 무수한 백성들의 울부짖는 모습만이 생생하게 다가오는 듯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구천에서도 환영받지 못할 폭군이 남긴 유산이 이제는 중국의 후손들에게 황금을 안겨주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전 대 열
(한국정치평론가협회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