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어떤 일을 하신 분이실까요?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의 통로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시고자 오신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분께서 영광 중에 오셨더라면 세상 사람들은 그분을 더 쉽게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오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루가복음 5장 17절 이하에 나오는 중풍병자 이야기를 여기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와 그를 들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들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한다며 수군거립니다.
“어찌하여 너희는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것과 어느 편이 더 쉽겠느냐?” 여러분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어느 편이 더 쉽겠습니까? 당연히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우리에게 불치병을 하나라도 제대로 치유할 능력이 있습니까? 고명한 의학박사라도 그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 앞에 놓여진 중풍병자는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오랫동안 병고에 시달려 온 사람입니다. 게다가 그에게는 또 하나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불치병이 천벌이라는 무서운 생각... 이러한 생각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 중 누구하나 그래도 너는 하느님께 사랑 받고 있다고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하느님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도 못하는 이들에게 절망을 더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랑이신 하느님 앞을 막아서서는 자신도 그 문을 들어서려 하지 않으면서 남들까지도 못 들어가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 앞에 예수님은, 하느님은 모든 이의 죄를 없애주시는 사랑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아니 하느님께서 지금 이 자리에 와 계심을 드러내십니다. 하느님의 권능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제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 주겠다.” “내가 말하는 대로 하여라. 일어나 요를 걷어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병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벌떡 일어나 깔고 누웠던 요를 걷어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들의 속 편치 않은 말, ‘하느님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말을 중풍병자를 고쳐주심으로 해서 오히려 예수님께서 그를 용서해주셨고 바로 예수님이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말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한 판 승입니다.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성서 이곳 저곳에서 그들 사회의 통념을 깨는 통쾌한 일화를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시몬의 집에 찾아온 죄 많은 여인,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 로마 백인대장, 해안지방에서 만난 이방인 엄마 등등. 예수님은 이처럼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 무거운 짐이 되는 사회통념이 율법으로 탈바꿈하여 거기에 짓눌리는 사람들, 영적으로 갈증을 느끼는 모든 이들에게 끊임없이 샘솟는 생명수가 되어 오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래서 이사야 예언자가 그분에 관해서 미리 고백했던 대목을 읽고 계시는 예수님을 만난 그들, 그분의 음성을 들은 그들은 이제 하느님 나라를 보게 된 것이며, 하느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들은 이 자리에서도 그 일은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랑의 복음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살아 움직이도록 여러분을 사랑 속에 놓는 순간 여러분도 이미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보는 것이며 하느님 나라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지좌본당 하상범(바르나바)주임 신부님
Re:용기있는 자의 사랑(1/7)
2005. 1. 6. 오후 7:2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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