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일기/김은호

2008. 1. 9. 오후 10:4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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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일기/김은호

 

 

어, 내 '구리무' 어디 갔지?

성당 가는 날은 내가 얼굴에 밀크 로션을 바르는 날이다.

언제부터인가 젊었을 때와는 달리 외모에 도통 신경을 쓰지 않게 된 나이지만

미사에 갈 때만은 집에서 가장 좋은 옷, 단정한 차림으로 얼굴에 로션까지 바르고

가는 습관이 생겼다. 애인 만나러 갈 때 처럼 내 사랑하는 하느님 뵈러 가는데

정성을 안 들일 수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책상 한 구석에 두었던 로션병甁이 보이지 않는다. 동생부부에게서 생일 선물로 받았던

벌써 3년이 넘은 로션. 오래된 화장품은 발라서 손해가 날 수도 있다지만 나는 아직

냄새만 좋다하며 시간이 더 지나 못 쓰게 될 것을 염려하듯 얼굴에 듬뿍 로션을 바른다.

병도 날씬한 게 폼 나게 생겼고 양은 아직 반 이상이나 남아있다. 나는 이 밀크로션을

내 혼자만의 표현으로 크림(cream)의 일본식 발음인 '구리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책꽂이 틈을 뒤지고 화장실의 화장대까지 이러 저리 찾아보지만 보이지 않는다.

‘내 구리무 못 봤어? 내 구리무....’  내가 연신 촌스럽게 구리무를 외치는 소리를

아내가 참고 듣다가  '에이, 구리무는 무슨... ' 그 말 듣기 싫으니 로션이라고 하라

드디어 짜증 섞인 핀잔을 준다.

 

구리무가 뭐 어때서...나는 웃으며 짐짓 더 크게 애인 이름 부르듯 구리무, 내 구리무....한다.

왜 있지 않은가?  허물없는 사람들끼리 머리 굴리지 않고 편하게 쓸 수 있는,

긴장을 풀어주는 말들... 일테면 '똥 마렵다' '오줌 누러 간다'.... 따위. 

‘구리무’는 오늘 아침 나의 고집스럽고 장난기 어린 기쁨과 이완弛緩의 단어이다.

 

내가 듣기 싫어하는 데 일부러 더 그런다고 목소리에 각을 세우는 아내.

짜증과 신경질 다음에는 싸움 밖에 할 일이 없다....내가 어렸을 적 할머니가 쓰던

말에 향수를 느끼고 비록 일본식이긴 하나 발음하기가 편해서 그런다고 했더니

아내는 그래도 싫으니 나이 든 사람답게 품위있고 점잖은 말을 쓰라고 한다.

 

티걱태걱... 영원한 생명에 관련된 거창한 일을 보러 가는 사람들의 속 좁음이란!

하긴 그래서 구원이 필요하고 성당에 가는 것이지만....단어 한 마디로도 사람의

감정이 흔들리고 신경이 씌여지고 고집을 부릴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하다.

 

어쨓든 구리무 아저씨와 로션 아줌마는 한 차를 타고 서로 딴 생각을 하며 성당으로 향한다.

한 사람은 비식비식 웃으며 한 사람은 왜 그리 능글맞게구냐며...잔뜩 못마땅해 하며...

이 분위기가 얼마나 오래 갈지 어떻게 극적으로 바뀔지 나는 은근히 궁금해 하며 차를 몬다.

중간에 할머니 한 분을 차에 태워 드린다. 우리가 그 분이 다니는 교회 앞까지 종종 

태워다 드리는 동네 어르신이다.  ‘할머니 메주 쑤셨어요?’ ...‘그럼, 이곳에서 콩 팔아서

우리 얘들도 갖다 먹으라고 된장 만들었지....’ ' 된장 맛보러 한 번 가도 되요?'....

낮게 틀어놓은 라디오 음악소리를 가리며 아내와 할머니의 대화가 이어진다.

 

나의 촌스런 구리무 냄새와 아내의 세련된 로션 향기가 뒤섞여 수상한 분위기를

자아냈던 차안이 순식간에 구수한 된장 냄새로 가득 차 버린다. 냉전 상황 종료?...

할머니가 내린 후 내가 '그래도 우울증 걸린 남편보다는 낫잖아?' 했더니 이번에는

아내가 비식 웃는다.  금슬 좋은 우리 부부... 어지간히 싸울 일이 없는 가 보다.

성탄절이 가까워져 바쁜 신부님께 하마트면 이런 고해성사를 할 뻔 했다.

 

'부부가 구리무와 로션으로 갈라져 핏대내고 코피 터지게 싸웠습니다. 죄를 사해 주소서... '

 

 



A Lover's Concerto /Kelly Chen(진혜림)

댓글 2

  • 2008년 1월 9일 오후 10:50

    가입은 오래 전에 했지만 그동안 글쓰기를 할 수 없었는데 이렇게 첫 인사를 드립니다. 늦었지만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런데 이런 글을 이 게시판에 올려도 되는건가?

  • 2008년 1월 10일 오전 7:13

    루카 형제님! 잘 오셨습니다. 율리안나 비서께서 좋아 하시겠습니다. 자주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