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루터(1483-1546),

2009. 11. 10. 오전 1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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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틴 루터(1483-1546), 회한의 이름


마르틴 루터를 생각하면 회한이 앞선다.

역사 안에서 아무도 스스로 교회를 세운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루터는 주관적 확신을 기초로 교회를 새로 세웠고, 이로써 너도나도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계기가 되었으니... 그저 안타깝고 통분할 일이다. 꼭 그렇게 분열했어야 했나...

다른 개혁가들처럼 가톨릭교회 내에서 개혁했었더라면, 분열은 없었을 것을...


1. 루터와 교회분열

1) 생애

루터는 1483년 독일북부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태어나 에어푸르트(Erfurt)에서 공부하였다. 광부였던 아버지는 그가 법관이 되기를 원했지만, 22살에(1505년) 아오스딩수도회에 입회하였고, 24살에(1507) 신부가 되었다. 그 후 비텐베르크(Wittenberg)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1512)를 취득하고 성서신학교수가 되었다(1512-1519). 하지만 루터는 내적으로 행복하지 못했다.


루터는 늘 '죄의식'과 '하느님 심판에 대한 공포'로 괴로워했다.

수도자가 되었고, 사제로 서품 받고 성서신학박사가 되어 교수가 되었는데도 그는 특히 본능적인 욕구로 괴로워했고 죄의식에 시달렸다. 여자들도 그렇겠지만 독신자들에게 남자들의 본능적인 욕구는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한창 때의 본능적인 욕구는 거의 폭풍우 같다. 본능을 잘 다스려 나가는 것이 성직자나 수도자의 운명이다.


거듭 고해성사를 보고 미사에 참석해 성체를 받아 모셨지만 이것이 불안한 루터의 마음을 진정시켜주지 못했다. 점점 마음 한 구석으로 드는 생각은 이것이었다:


과연 고해성사와 미사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루터는 늘 혼자 조용히 스스로를 돌아보고 새로운 결심을 하곤했다. 피정이라고 한다. 피정(避靜)... 피할 피, 고요할 정이다. 고요한 데로 피하는 것이다. 가톨릭성직자나 수도자는 정기적인 피정을 통해 영육을 재충전한다.


어느 날 루터는 비텐베르크수도원 탑 안에 있는 독방에서 피정을 하면서 로마서를 묵상했는데, 다음의 구절이 루터를 뒤흔들어 놓았다. :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 (로마 1, 17; 4, 5 참조) 30대 나이의 한창 때, 본능적인 욕구로 인한 죄의식에 시달리던 루터는, 인간을 불안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이 '고해성사나 미사'가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라고 확신하였다.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은 '사람은 교회에서 거행하는 고해성사로써 죄사함을 받고, 미사를 통해 하느님과 일치해서 의롭게 되는 것'인데 비해, 루터는 '인간은 고해성사나 미사가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믿음자체로써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됨으로써 고해성사와 미사가 필요 없게 되고, 고해성사와 미사를 집행하는 사제직과 교회체계 자체가 필요 없게 되었다.

그러면서 루터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확신하게 되었다.

첫째, 영적인 교회 : 참된 교회는 영적인 교회이며, 모든 사람들은 자기 믿음에 따라 의롭게 되어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의화)

둘째, 가톨릭교회와 사제직거부 : 가톨릭교회와 신부들의 역할은 폐지된다.

셋째, 성경자유해석 : 각자가 스스로 성경을 읽고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이 대체로 1517년까지였다. 그리고 곧바로 가톨릭교회의 분열이 시작되었다.


2) 분열의 발단과 경과

분열의 발단은 대사(大赦)문제였다. 대사란 죄를 면해주는 대사면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가톨릭교회를 설립하고, 사도들에게 교회를 운영할 권한인 교도권을 맡기면서 사람들을 죄에서 풀어줄 것을 명하였다. :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주면, 나도 용서할 것이고, 너희가 용서해주지 않으면, 나도 용서해주지 않을 것이다." (요한 20, 23) 그리하여 처음부터 가톨릭교회는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사해주고, 고행과 엄격한 보속을 하도록 했다. 대사는 이 고행과 보속을 면제해주는 것이다.


313년,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종교자유를 선포하면서 사도 베드로가 순교한 바티칸 지역을 교황에게 헌납했다. 거기에 성당이 지어졌고, 성베드로 성당으로 명명되었다. 베드로 성당은 천년이 넘도록 비바람에 씻겨 다시 손을 보아야 했다.


1513년, 대사선포

당시 교황 레오10세는 베드로성당 증개축을 위해 교회건축헌금을 모금해야 했다.

이를 위해 교황은 대사를 반포하면서 다음의 조건을 명시했다. : 1. 회개. 2. 고해성사. 3. 베드로 성당건축기금 헌금. 단, 극빈자는 헌금을 못하더라도 회개와 고해성사를 하면 대사를 허락한다. 이렇게해서 베드로성당 건축기금을 헌금한 사람에게 헌금을 받았다는 '영수증'을 발급해 주었다. 이 영수증이 역사교과서에 '면죄부'란 말로 잘못 번역되어 마치 돈만내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뜻으로 오해되고 있다.


하지만 당시 신부들은 강론을 통해 대사를 강조하면서 헌금을 많이 하도록 경쟁적으로 촉구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그로 인한 폐단도 많아서 대사자체에 대한 불만이 폭넓게 퍼져있었다. 젊은 루터도 교회건축기금을 대사와 결부하여 모금하는 것을 비판하고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1517년, 대사반박 95조

루터는 이것을 95개 조항으로 정리하여 비텐베르그 성당정문 앞에 대자보로 붙였다. 루터는 교회건축기금은 필요하지만, 너무나 심한 모금과 지나친 방법에 대해 비판하고, 절제를 요구했다. 하지만 교회지도부는 루터의 비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1519년, 라이프치히(Leipzig) 논쟁

루터의 비판은 당시 폭넓게 퍼져있던 불만과 스파크를 일으키면서 점점 더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루터와 당시의 신학자 요한 에크신부와 공개적인 신학토론회가 개최되었다. 루터는 여기서 에크와 격렬히 대립하였다. 마침내 에크의 마지막 질문 : "루터신부, 당신은 교황과 주교를 인정하는가?" 루터의 마지막 답변 : "나는 교황과 주교를 거부한다!" 이 말로 루터는 가톨릭교회를 버렸다. 처음에 루터는 가톨릭교회의 여러 폐해들을 우려하고 개혁하려는 순수한 동기였고, 교회건축기금의 남용에 대한 자제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독일에 폭넓게 퍼져있던 가톨릭교회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많은 사람들 루터를 지지하게 되면서 순식간에 문제가 커져버렸다. 루터는 용기를 얻고 가톨릭교회 전체를 마구 공격하였다.


1521년, 루터 파문

루터에 대한 파문이 로마에서 결정되었다.


1521년, 보름스(Worms) 제국회의

1521년, 당시 독일의 가톨릭 황제 카알 5세(1519-1556)는 루터가 로마에서 단죄되자 독일의 종교적인 분열을 우려해서 독일 보름스(Worms)에서 그를 심문하게 되었다. 루터는 의회에서 멋진 연설을 하였다. : "나는 교황도 공의회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이 자주 오류를 범하였고, 스스로 모순되었다는 사실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가르친 것 가운데 아무것도 취소할 수 없고 또 취소하지 않겠습니다. 내 양심을 거역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 하느님,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아멘." 루터의 양심이 진리의 기준이었다.


연설은 의회 의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 다음날 황제도 훌륭한 연설을 하였다. : "독일국가 황제들은 모두 죽기까지 가톨릭교회의 충실한 아들들이었고, 수호자였습니다. 그들의 후예인 나는 그들의 모범을 따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한 개인이 자기 양심을 토대로, 전체 그리스도교에 대항할 때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교 자체가 1500년이나 오류를 범해온 것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루터를 공공연한 이단자로 여겨 조치할 것입니다."


1521년, 황제는 보름스칙서를 통해 루터와 그 추종자를 처벌하고자 하였지만, 때마침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전쟁이 터졌고, 황제는 9년 동안 전쟁을 치루어야 했다. 루터의 추종자였던 작센(Sachsen)의 선제후 프리드리히(Friedrich)는 루터를 바르트부륵(Wartburg)성으로 숨겨서 보호해주었다. 이 기간 동안 루터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스스로의 확신에 따라 새로운 교회를 세웠다.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미사를 없애고, 고해성사를 없애고, 사제독신제를 폐지하고, 새로운 교리를 썼다. 이 새로운 교회는 '루터교'로 명명되었다.


독일 곳곳에서 혼란이 일어났다. 루터의 추종자들은 성당을 공격하고, 미사를 드리는 사제를 죽이고, 성당을 접수하였다. 또 수도원을 습격하여 수도자들을 죽이고 수도원도 빼앗았다. 독일 북부 대부분이 루터 수중에 넘어갔다.


1524년, 루터 결혼

루터는 수녀원에서 나온 가타리나수녀와 결혼하였다. 루터 나이 41세, 가타리나 25세였고 두 사람은 6명의 자녀를 두었다.


1530년, 아욱스부르크(Augsburg) 제국회의

9년 동안의 전쟁을 끝내고 황제 카알 5세가 독일에 돌아왔을 때 독일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황제는 즉시 교회 문제를 해결하여 독일의 분열을 막고자 하였다. 루터의 지지자들은 이미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황제는 평화적인 협의로 극복하고자 아욱스부륵에서 제국회의를 개회하였다.


루터측에서 루터의 동료요 친구였던 필립 멜랑크톤(Philipp Melanchton, 1497-1560)은 새로운 신앙고백서인 '아욱스부르크 신조(Confessio Augustana)'를 작성하였고, 가톨릭 측에서는 요한 에크를 중심으로 '아욱스부르크 반박서'를 작성하여 이를 토대로 협상이 시작되었다. 양측은 담판에서 서로를 양보하였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일치를 원했고, 황제가 그것을 변호하였다. 재일치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멜랑크톤의 양보를 신랄히 비난한 루터에 의해 멜랑크톤은 흔들렸고, 결국 담판은 좌절되고 말았다.


1531년, 군사적대결

루터추종자들은 슈말칼덴 동맹을 체결, 황제에 무력으로 대항하려 했다.

1547년, 어려운 상황에서도 황제는 슈말칼덴 동맹군을 전멸시켰지만 분열은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그 와중에 루터는 1546년 사망하였다.


1555년, 아욱스부르크 제국회의

아욱스부르크 제국회의를 통해 마침내 양측의 공존이 결정되었다.

1. 독일의 가톨릭과 루터교는 동등한 권리를 갖고 공존한다.

2. 영주가 자기 영지 종교를 결정한다. 신하들은 종교적 확신에 따라 이주할 수 있다.

이로써 독일의 분열은 고정되었고, 루터교회는 신속히 전파되었다. 독일 전체의 절반(주로 북부), 덴마크, 스칸디나비아반도(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지역이 루터교가 되었다.


루터교회는 기독교 한국루터교회로 또는 복음교회로 불린다.

이제 자기 양심에 따라 새로운 신앙이 저마다 생겨나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하여 여러 신흥종파들이 저마다 참된 교회를 선언하고 나서는 시대가 되었다.

'주관적인 신앙'이 문제다. 분열이란 근본적으로 인간 전체를 위해 불행한 것이다.


2.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 교회를 수습하다

중세말기의 교회전반의 부패, 특히 교황과 고위성직자의 부패는 교회 내에 불만을 가득 차게 했다. 교회개혁의 요구는 이미 100여 년 전부터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교황들은 개혁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517년 마침내 독일의 교회분열이 폭발하였을 때, 독일황제 카알 5세는 교황에게 공의회를 소집해서 재빨리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황제는 교황들(레오10세(1513-1521), 하드리아노6세(1522-1523), 끌레멘스7세(1523-1534))에게 거듭 공의회를 통해 독일에서 일어난 교회분열의 불씨를 잡아야 했었지만, 교황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결국 독일황제의 재촉으로 1545년에 가서야 트리엔트에서 공의회(1545-1563)가 소집되었다. 트리엔트공의회는 수많은 혼란으로 황폐해진 가톨릭교회를 수습하였다. 먼저 개신교를 단죄하고 교황중심의 교회를 확고하게 확인하였다. 나아가 흐트러진 가톨릭교회를 진정시키고 가톨릭교회의 전반적인 개혁을 촉구하게 되었다. 하지만... 공의회가 1545년이 아니라 루터의 문제가 터졌을 때인 1517년 즉시 개최되어 문제를 해결하였더라면... 분열은 없었을 것이다...


분열은 아픔을 준다. 가정에서도 이혼은 아픔을 준다. 분열된 그리스도교는 많은 아픔을 준다. 그래서 서로 일치하자는 운동을 에큐메니칼운동이라 한다.

가톨릭과 루터교회 사이에 1967년부터 대화를 계속한 결과 1999년 10월 30일 독일 아욱스부르크에서 양교회 대표가 만나 양교회 신학과 신앙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인제 와서 신앙이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선언만 하면 우야노, 후손들은 이렇게 갈라져서 서로 싸우고 해왔는데... 선배들의 잘못으로 인한 분열의 혹독한 폐해를 후손들이 힘겹게 바로잡고 있다.


3. 가톨릭교회를 살린 이냐시오 로욜라(1491-1556)

1500년대 교회분열시기의 독일은 혼란과 공포의 도가니였다.

루터와 그 추종자들은 가톨릭교회를 마구 공격했고 신부와 수도자들을 죽이고 성당과 수도원을 빼앗았다. 독일북부의 대부분이 그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가톨릭교회도 루터추종자들과 맞서면서 곳곳에서 폭력과 살인, 약탈과 방화가 난무했다. 급기야 루터추종자들이 일으킨 군사와 가톨릭을 지지하는 군사들 간의 전쟁으로 독일은 그야말로 쑥대밭이었다.


혼란속의 가톨릭교회, 그 가장 큰 원인은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했던 교회지도부의 안일함과 루터와 같은 급진적인 개혁가의 극단적인 선택이었다. 그 혼란 속에서 누가 교회를 구할 수 있을 것인지...


프랑스 파리는 유럽의 중심도시 중의 하나다. 당시 파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스페인출신의 몇몇 젊은이들은 가톨릭교회가 처한 혼란 앞에 의기투합하였다. 이들이 설립한 것이 예수회였다. 예수회의 젊은 선각자들은 만신창이가 된 교회에 돌풍을 일으켰다.


그 젊은 선각자들의 리더였던 이냐시오 로욜라(1491-1556)는 개혁정신으로 뭉친 투사였다. 스페인 귀족가문의 장교출신이었던 이냐시오는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오랜 병상생활 중에 수도자가 될 것을 결심하고 스페인 살라만카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후(1526-1527) 프랑스 파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1528-1535). 당시는 독일에서 루터의 교회분열 여파가 전 유럽으로 확산되던 난세였다.


이냐시오는 파리에서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만났다. 베드로 파베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야고보 라이네스, 알퐁소 살메론, 시몬 로드리게스, 니콜라오 보바딜라 등의 동지들은 가톨릭교회를 위해 살기로 약속하고 1534년 예수회를 설립하였다.


이냐시오는 가톨릭교회의 신앙과 전통을 알기 쉽고 명확하게 해설하였다. 그리고 루터를 비롯한 당시 개신교 사상을 비판하였다. : 첫째, 신앙은 공적이고 객관적이어야 하는데, 개신교는 자기 주관에 따른 주관적 신앙일 뿐이다. 둘째, 교회는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전통을 기초로 하는데, 개신교는 사도전통을 무시하고 마음속의 영적인 교회만을 주장하는 이상적인 것이다. 셋째, 개신교처럼 누구나 성서를 자유롭게 해석하면 신앙자체가 개인주의신앙이 된다.


이냐시오의 가르침에 많은 사람들이 큰 감동을 받았다.

예수회는 엄격한 조직, 유연한 사고, 불굴의 정신으로 흐트러진 가톨릭교회에 강력한 복음정신을 불어넣었고, 특히 '교육과 영성과 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이러한 예수회의 정신은 예수회가 100년 만에 가톨릭교회에서 최대의 수도원으로 성장하는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 알로이시오 곤자가(1568-1591), 칼 라너(1904-1984) 등이 뛰어난 예수회회원들이었고, 예수회총장 머리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하느님도 모른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당시 낡고 노쇠했던 가톨릭교회와 루터와 같은 교회분열자들의 도전 앞에 교회의 앞날은 암담했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 사명감에 불탔던 젊은 선각자들이 의기투합하여 '교육과 영성, 선교'라는 큰 틀을 설계하고 불굴의 정신으로 미지의 세계를 향해 도전해나갔던 것이다.


이냐시오와 예수회에서 드러나는 트랜드는 적지 않다. : '명석한 두뇌, 유연한 사고, 정확한 판단력, 진취성, 앞서는 정보, 도전정신, 불굴의 의지...' 그 많은 정신들 가운데 오늘날 가장 시급하게 본받고 싶은 것이 '도전정신과 불굴의 의지'다.


우리 시대에도 이냐시오와 같은 리더들이 많이 나오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하느님의 은총도 끊임없는 노력에 주어지는 선물인 것이다.

                                                                                                  (평화방송 교회이야기 전광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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