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요나라 나가사키
당신 한 사람에 걸었던 사랑/사랑의 그 말 믿었지/
찾고, 또 찾아 홀로 헤매어도/그 사람 안보이고 무심한 돌 보도 뿐/
아, 아, 나가사키엔 오늘도 비가 내렸다네./
밤의 마루야마 내 다시 왔건만/차가운 바람만 옷깃에 스며드네./
마시고 또 마셔 잔뜩 취한들/한잔 술에 그 무슨 원망이 있으랴/
아, 아, 나가사키엔 오늘도 비가 내렸다네./ (중략)
나가사키하면 원폭 피폭지, 일본 개항지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이 엔카다.
어금니 사이로 ‘가널 가널’ 흘러나오는 여가수의 애잔함엔 그저 목젖이 멈춰서고,
특히 그 “아,~아 나가사키” 할때의 코맹맹이엔 오만 간장이 다 녹는다.
필시 나이 탓 일 게다.
.
늙음은 사람의 정서를 가늘게 하고 감정의 폭을 넓힌다.
하여 보다 유치해져서 어린애로 만드는가 보다.
유럽식 돌 보도에 땡땡이 전차가 다니는 나가사키는 막연한 그리움의 항구다.
실수로 바지에 쏟은 향기 좋은 커피처럼 자국이 오래 남는 추억의 도시다.
바람이 세차고 낙엽이 왕창 떨어지는 날, 문득 안부전화 한통하고 싶은 상대가 있다면
바로 저기 저 길모퉁이 카페에서 마주쳐야 하지 않을까.
이번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한 일본 성지순례도 낡아빠진 빈티지 셔츠마냥,
그런 그리움 없이 어찌 가능했겠는가.
<5월10일>,
부산항 국제부두에 중늙은이에서 미시족까지, 멤버구성이 애매모호한 남녀 여럿이
서성거렸다. 사팔뜨기들이다. 박기수 안드레아, 김순진 요안나 이원희 엘리사벳,
김상철 알퐁소, 서종희 로사, 우성미 나탈리아, 김용미 마리아, 김효정 엘리사벳,
그리고 부산에서 합류한 정창순 아그리피나와 단장격인 권동순 프란치스코 등 10명.
동백이라는 뜻의 카멜리아호는 밤 10시30분경 ‘우두득 육중한 몸체를 뒤척였다.
영도다리를 배경으로 셧터를 눌러대거나 선내 욕탕에서 샤워를 마친 일행이
선실에 집합하자 모두는 자판기 기린맥주로 장도를 자축했다.
“위하여~ 위하여~ 자, 우리 늙은 젊음을 위하여”
<5월11일>
후쿠오카항의 아침은 분주하다.
야자풍의 늘씬한 가로수사이로 햇살이 눈부시다.
버스로 하카다(博多)역까지 이동, 인근 호텔에 짐을 맡긴 후 민생고 해결에 나선다.
역전 지하상가에 있는 요시노야(吉野屋).
출퇴근길에 간단히 한 끼를 해결하는 고기덮밥집이다.
한국인 열이 우루루 들어오자, 짙은 눈썹에 수건을 거꾸로 질끈 동여맨
주방장 녀석이 놀라는 눈치다. 오늘 일정은 여성들에게 인기 있다는
전원온천마을 유후인과 벳부지만 출발부터 틀어졌다.
10명의 레일패스 교환하랴, 지정석 교부받으랴, 기차시간 물어보랴
정신없이 뛰어다녀 일을 마쳤는데 한명이 실종이다. 그 순간 화장실행이라니--
유후인은 취소하고 곧장 벳부로 향했다.
규슈동부를 <소닉>호로 도는 두어 시간 기차여행이다
사실 이번 여행의 특징이라면 기차여행이다.
일본은 철도왕국답게 다양한 열차를 많이 운행하고 있다.
그 열차 맛을 동기생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계란형 기관차에 좌석 장식이 앙증맞은 <소닉>호,
가죽시트에 테이블이 달린 <츠바메>호, 중후한 <카모메>호,
산악열차인 <규슈횡단 익스프레스>,
그리고 온통 우드(나무) 장식에 열차 홈 바를 갖춘
섹시(?)하기까지 한 <유후인 노모리호> ,
결국엔 이 모든 것을 다 타고 돌아다닌 셈이다.
온천도시 벳부의 한나절은 뜨거웠지만
<지옥순례> 코스중의 하나인 ‘해지옥’은 더욱 뜨거웠다.
깊이 100미터의 이 산성천은 표면온도만 100도. 옥빛 물색이 아름답다.
이곳 온천지역을 통틀어 <간나와> 온천지구라 한다.
뭐, 간이 나와? 왜놈 말 에는 상스러운 발음이 많다.
이<간나와>온천 안에는 또 <씨바새키>(鐵輪)온천도 있다.
참, 망할 노무 스키나라~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효탄 온천욕. 왜색 풍 짙은 온천욕을 형제 셋은 40여분으로
간단히 끝냈건만 자매들은 1시간 하고도40분이 경과해도 나오질 않는다.
폭포 욕에 스기나무 욕, 노천욕에 모래 욕까지 마친 자매들 얼굴이 훤하다.
완전 개 핣아 먹은 죽사발처럼 매꼬롭하고 예쁘다.
저녁 무렵 후쿠오카로 돌아온 우리는100엔 샵 쇼핑에 앞서 초밥을 먹었다.
빙글빙글 도는 회전 스시, 예닐곱 접시에서 열 접시 넘도록.....
<5월12일>
오늘은 본격적인 순례길이다.
나가사키혼센<長崎本線)을 타고 규슈 서부를 돈다. 개 발에 땀나는 날이다.
북으로 평화공원- 니시자카- 26인성인 기념관-원폭기념관-우라카미 성당,
남으로는 차이나 타운-오란다 거리-콜베신부기념관-그로버 정원-오우라 성당 등을
땡땡이 전차로 세차례나 오갔다. 발 집에 물집이 생겼다.
나가사키 짬뽕 전문점 시카이로<四海樓> 4층은 전망이 뛰어나다.
굴곡심한 항구가 훤히 보이는데다, 멀리 미쓰비시조선소 선박까지 다 보인다.
맛은 있었지만 김치 없는 짬뽕은 어불성설이라며 불같이 시킨
단무지는 서너 조각에 200엔.
마지막 한 조각을 스테이크 썰 듯 포크와 나이프를 들이대는
알퐁소의 너스레에 모두 웃었지만, 종업원들은 웃음 반에 띵한 표정들이다.
개인적으론 콜베 신부기념관이 인상 깊었다.
아우슈비츠의 성자 콜베신부는 프란치스칸이다.
꼰벤투알의 수도사제로 일본 선교사로 와 ‘성모의 기사’라는
일본 최초의 종교 월간지를 내신분이다.
“신부님, 신부님의 백분의 일 만큼이라도 제가 사랑하며 살게 하소서.”
미 교포가 쓴 방명록 내용에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게 아직 이런 감정이 있구나--
여행이 주는 뜻밖의 선물은 이런 것일 게다.
평소 잊고 지낸 자신의 까칠함, 치사함,
같은 부끄러운 면을 들추고 보다 삶을 긍정적으로 보게 하는 그 무엇.
1571년 포루투갈 선박 내항 이래 서양문명을 짙게 받은 나가사키는
오란다자카나 천주교회당, 서양식 목조 건물 등 이국적 냄새가 물씬 풍긴다.
성당 종소리와 뱃고동 소리는 낭만적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순교와 원폭의 비극을 간직한 곳이다.
하카다역으로 되돌아왔을 무렵 가량비가 내렸다.
덴푸라 덮밥으로 저녁을 먹고는 모두 제 방으로 들었다.
컴포트 호텔 10층, 모두 모두 컴포터블한 밤이 되길.
<5월13일>
내일 귀국 날을 제하면 사실상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중부 내륙의 세게 최대 칼데라 활화산이라는 아소(阿蘇)를 찾는 날이다.
모두가 싱글 룸이지만 원희엘리사벳-용미마리아,
그리고 성미나탈리아-효정엘리사벳은 트윈이다.
그래선지 호텔 아침식사도 빠르다. 부석한 얼굴로 조식을 끝냈다
아소산정 분화구는 날씨가 조금만 안 좋아도 출입금지다.
종희 로사는 두 번이나 왔다가 못보고 왔단다. 로사의 ‘한’을 풀어주고 싶었다.
구루메<久留米>에서 그 예쁜 노모리 열차를 버리고 츠바메로 갈아탔다.
규슈횡단열차 시발점인 구마모토<熊本>역 홈에서 에키벤(도시락)을 주문했다.
하지만 규슈횡단열차를 타자마자 모두 도시락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정오도 안 된 시각에,
규슈의 얼굴 아소는 복식 활화산으로 아소고가쿠(阿蘇五岳)라고도 한다.
최고봉이1592미터로 동서남북 둘레128키로미터의 장대한 고원이다.
둘레4키로 깊이100미터의 분화구엔 마그마가 끓고 검붉게 탄 암벽사이로
분출하는 유황냄새 자욱한 분연은 장관을 이룬다.
분화구 전망은 91인승 케이블 카로 움직인다.
또한 완만한 경사로 끝없이 뻗어 내린 산비탈 대초원은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순진요안나, 원희엘리사벳, 창순 아그리, 그리고 용미마리아는
하산 길 쿠사센리<草千里까지> 트레킹을 즐겼다.
시커먼 화산 벽, 끝없이 펼쳐진 초원 , 이름 모를 꽃과 새들, 녹색의 장원,
예절 바른 일본 중고생의 해맑은 인사. --, 우리는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까.
후쿠오카에서의 마지막 저녁은 캐널시티의 이치란 라면집으로 택했다.
독서실처럼 칸막이가 쳐진 좌석, 반합에 담겨져 나오는 음식도 특이하지만,
사실 이집은 일본서도 알아주는 라면집이다.
바닷물이 들어오는 케널시티를 뒤로하고 대미를 위해 허름한 선술집을 찾았다.
“모두들 수고했습니다. 한잔하십시다!”
<5월14일>
후쿠오카 부두에서 부산행 페리를 탔다.
선내레스토랑에서 남은 엔화를 긁어모아음식을 시켰다.
“나는 비빔밥, 나는 육개장, 나는 오무라이스”저마다 참새처럼 재잘댔다.
대마도를 지나 오 륙도가 가까워오자 헨드 폰이 팡팡 시원스레 터졌다.
오후 6시 부산역 부근 식당. 자매들은 회덮밥, 알퐁소와 프란치스코,
안드레아는 돼지국밥으로 여독을 달랬다.
그들 모두는 조금 뒤 서울행 KTX를 타야한다.
PS; 허리통증에도 불구하고 인간승리를 구현한 정신적 지주 안드레아님.
아소역서 효정막내의 무릎베개가 되신 자상한 작은 거인 요안나님.
‘아무도 너를’ 귀에 익은 성가독창으로 텅빈 성당을 울린 엘리사벳님.
시도 때도 없는 유머로 좌중에 엔돌핀을 선사한 웃음대왕 알퐁소님.
백만불짜리 눈웃음, 소리없는 수발로 일정을 꽃피운 아그리 명총무님.
분위기를 새콤달콤하게 만드는 잔정 많은 우리들의 참 장미 로사님.
속 정깊고 베품의 미학을 일찍이 깨달은 연하의 어른 마리아님.
상냥하고 소탈한 웃음, 불편함 내색 않고 일정을 소화한 나탈리아님.
궁금한 것 볼 것 많고, 아침 바나나 잘 챙기는 미시 효정엘리사벳님.
모두모두 감사합니다. 사요나라 나가사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