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안에 살고 계신 영
Vom Geist des Christentums
베른하르트 벨테 지음
김진태 옮김
† 진리의 영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요한 16,13).
이 말씀으로도 주님께서는 영에 대해 그리고 은사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ㅏ.
주님이 약속하신 이 은사는 위로부터 오는 신비요 동시에 살아있는 물로서, 그분은 이 물이 우둔한 마음의 바위 안쪽 깊숙이에서 솟아나길 바라십니다.
진리의 영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분이 의중에 두고 계신 것은 무엇입니까?
그분이 기억시키고자 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분이 약속하고 권고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주 분명한 것은 진리의 영이 단순한 잡지식의 영을 의미하거나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할 중립적 지식이나 교과 내용을 잔뜩 쌓아 놓는 식의 영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또 참되다 할지라도 경박하고 기만적일 뿐인 종류의 지식과 연결되어 있는 자만에 찬 자기만족을 염두에 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주님께서 위로부터 보내 주시고 내면으로부터 일깨워 주려 하시는 영, 그분께서 항상 우리 마음 안에 살아 숨쉬는 것을 보고자 하시는 영은 이와는 전혀 다른 영, 전혀 다른 진리이십니다.
그분은 결정적인 진리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데, 그것은 우리 인간적 가난으로나 하느님의 크신 약속과 신비들로 볼 때 결국 모든 일에 저적으로 관건이 되는 그런 것입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진리는 하느님께서 우리 전 생애를 거기에 걸어 두신 그 진리이고,, 그래서 어떤 의미로든 인간 삶 전체가 달려 있는 그러한 진리입니다.
우리의 가난한 삶은 본질적으로 이 진리 안에서만 참된 것일 수 있고 참된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 안에 나타나신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바로 이 은총이야말로 크신 진리, 참으로 참되게 하시는 진리입니다.
그분은 살아 있는 은사요 신적 움직임인 이 최상의 진리의 영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은총의 영원한 참빛이 이 신적 움직임 속에서 살아 계신 주재자로서 우리들 위를 휘돌고 계시고, 초저녁 바람인 듯 우리 정서의 들녘을 가로질러 불어오시며, 몽매와 경직의 속박에서 거듭 우리를 풀어 주십니다.
그 빛은 건강하고 참되도록 우리 삶을 생동적으로 모아들이시며, 그럼으로써 우리가 실제로 살아 있는 최상의 진리와 늘 새롭게 관계 맺도록 해주십니다.
진리의 영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고요한 힘으로써 우리 삶의 기만적인 혼돈을 위로부터 그리고 속으로부터 거룩하게 해소시키고 결단 짓게 하실 수 있으시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분은 명확하고 결단력 있는 평화 속으로 우리 삶을 이끌어 주실 수 있으십니다.
진리의 영은, 영이 그렇듯이,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활동하는 데 있어 다양한 형태를 가지십니다.
이제 이들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들 몇 가지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합니다.
제일 먼저 진리의 영은 우리를 마음의 고유한 진리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분의 입김이 이따금씩 우리 마음속에 내려와 있는데, 그것은 소금기에 쩔은 바다의 숨처럼 씁쓸한 맛이 나긴 하지만, 강인하고 건강에 좋습니다.
진리의 영은 우리를 깨어 있게 하시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나, 우리가 너무 쉽게 빠져 버리는 허황된 생각들이 주는 매력에 대해서 불신감을 가지도록 해주십니다.
이는 우리가 자신을 더 잘 지탱해 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진리의 영은 우리가 거의 알아차리지 못한 채 항상 반복해서 걸려드는 착각의 그물, 마치 자신의 신장(身長)을 한 치라도 더 늘릴 수 있다는 듯이 생각하게 하는 착각의 그물을 찢어 버릴 용기를 줄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의 영은 자기 자신을 실지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용기를 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서서히 깨닫게 되겠지만, 결코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즉, 다름아닌 저 용기, 작아지고 가난해질 수 있는 용기, 어딘가는 조금 병들어 있고 어딘가는 적잖이 죄스러워 할 수 있는 용기 말입니다.
저 영은 조용하게 불어오시면서 우리가 우리 마음의 가난한 진리를 감추려고 할 때 사용하는 거짓의 거푸집들을 마구 뒤흔들어 놓으십니다.
저 영은 마음을 하느님께 바칠 수 있는 순수한 용기로 우리를 유인하십니다.
우리 마음이 자기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제 취향대로 있으려 한다거나 자신이 꾸며 놓은 방식에만 만족하려 할 때 이를 저지하시고, 그보다는 그냥 있는 그대로, 본래의 모습대로 있게 해주십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저 영은 하느님 앞에서 진리를 향해 나아갈 줄 아는 순수한 용기로 우리를 유인하시고, 또 이렇게 가난한 마음의 봉헌을 가능하게 해주십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그냥 우리 자신 혼자만으로는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일입니다.
저 영이 우리를 이와 같이 이끄시는 것은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복음 정신이 담고 있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즉 감춰져 있는 비구원성(非救援 性)과 감춰져 있는 인간 마음의 비천성과 죄악성 - 이러한 것들이 어떠한 형태를 취하고 있건 타협을 모르는 하느님 구원의 경이로운 법정에 서서 용서받고 빛으로 바뀌게 하기 위해 그것을 고스란히 그분 앞에 놓아 드려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래도 좋다는 사실 말입니다.
진리의 영은 이렇게 우선 우리 마음을 발가벗기려 애쓰십니다.
이때 저 영이 투명하고 명확하게 드러나시는 것이 씁쓸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참으로 좋기도 합니다.
영이 그렇게 하시는 것은 자신의 가난과 벌거벗음을 바라게 된 마음의 벌판 위에 어떤 움직임을 발동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분은 이로써 정의에 대한 굶주림과 목마름이 거기 꿈틀거리게 하시려는 것이고, 고착과 태만으로 인해 소홀히 된 정감을 일깨우시려는 것이며, 속 감춘 채 거짓이나 임시방편으로만 내뱉는 답변들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는 마음의 열정에 불붙이시려는 것입니다.
참된 삶을 향햔 도정(道程)에 있음이 그래서 정직한 삶에 의해 이끌리고 움직이는 것이, 또 정직한 삶 때문에 염려도 하고 영광도 받고 하는 것이 마음의 시련이요 본령일진대, 이러한 마음의 불안이 일깨워져야 합니다.
실로 불안과 굶주림에 차 있는 마음은 궁극적으로 그냥 밍밍하기만 한 음식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최상의 것을 면전에 두고서야, 거룩한 완성과 영원한 천상선물을 면전에 두고서야, 그제서야 비로소 이렇게 외칠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것이구나!
이렇게 진리의 영의 핵 심적 역할은 모든 고정관념과 완고함, 자기만족, 결실 없는 자만심을 말끔히 해소시키는 것으로, 특별히 그분은 신앙과 그리스도교적 생활형태들 자체가 그 살아가는 방식에 있어 자기만족의 대상으로 굳어져 버린 곳에서 그렇게 하십니다.
얼마나 쉽게 이 일이 순전한 무관심과 구태의연한 인습 속에서 흐지부지되어 버렸으며, 얼마나 쉽게 자만과 자기만족 속에 굳어 버리고 앙금이 되어 딱딱해져 버렸습니까.
저 영은 이제, 영적인 것은 항상 영적으로, 불꽃은 항상 불꽃으로 남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진리의 영은 이 영역에서도 자주 불안하게 하고 깨끗하게 하는 힘으로서 발흥(發興)하십니다.
이 힘이 겉보기에 굳어 있어 보이는 것을 혼돈 속에 빠뜨리시지만, 이는 단지 거짓된 경직성으로부터 그것을 일깨워 살아 움직이게 하려 하심이고, 자기만족의 단단한 껍질을 부수어 그 속에 인간을 품위 있게 하는 최상의 열정을 발동시키려 하심입니다.
즉, 다른 모든 것에 앞서, 최상의 진리, 최상의 은총에 대한 굶주림과 목마름을 간직하게 하시려는 것이고,, 이것을 가지기 전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만족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진리의 영은 하나의 또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진리의 영이 행하시는 가장 아름다운 인간적 작업은 아마도, 인간의 마음을 가난에 내맡겨 버리시고는 그 속에 대단한 굶주림과 목마름을 일깨워 주신 연후에, 어린아이의 감성이 가진 고요성과 순수성 속으로 인간의 마음을 이끌어 가시는 일일 것입니다.
이렇게 순수하기 이를 데 없는 눈과 순결무구한 감정은 영의 은사입니다.
깨끗한 마음을 가진 자는 하느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 안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위한 아름답고 소박한 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들이 일편단심의 깨끗한 감정 속에서 주님의 모습, 주님의 말씀, 주님의 희생을 닮았기 때문이고, 또 산상수훈의 숭고함과 주님 죽음의 신비와도 닮았기 때문이고, 또 산상수훈의 숭고함과 주님 죽음의 신비와도 닮았기 때문이고, 또 산상수훈의 숭고함과 주님 죽음의 신비와도 닮았기 때문입니다.
저 영은 이렇게 모든 것 안에 있는 생생한 진리에 대해 꾸밈없는 증언을 하실 것입니다.
이는 그분 우리의 시선을 순결하게 보존해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티없게 해주시며, 우리 안에 어린아이다운 감성을 순결하고 강인하게 보존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어린이다운 순수한 감성은 생의 첫 순간에 하늘이 인간 본성 안에 선사해 주신 생득적 선물입니다.
이제 문제는 이 처음의 선물이 많은 투쟁과 곤경으로 점철된 삶의 경험들 속에서 소멸해 버리지 않고, 그 가운데서 오히려 전적으로 참되게 다시 태어나고 다시 선사되는 일일 것입니다.
저 영은, 우리가 마음을 그분께 신뢰와 인내로써 열어 들리기만 하면,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증해 주려 하십니다.
순수한 마음의 영으로서 진리의 영은 해뜨기 전 신새벽의 정적처럼 예수님의 복음, 예수님의 메시지에 앞서가십니다.
저 영은 우리를 가르치셔셔 구원의 말씀을 그냥 죽어 있는 문자로서가 아니라, 마치 한밤의 짓눌렸던 마음이 빛의 기쁨을 잡아채듯이, 아니면 사랑에 빠진 마음이 빛의 기쁨을 잡아채듯이, 아니면 사랑에 빠진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의 인사말을 반겨 움켜쥐듯이, 그렇게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정녕 영이 영에게, 살아 있는 것이 살아 있는 것에게, 순수한 것이 순수한 것에게 증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진리의 영이 새벽 하늘의 서광처럼 주님의 빛과 그분의 복음 말씀에 단지 길을 터주는 일만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저 영은 또한 이 천상 빛으로부터 나오시고 이 빛을 뒤따르기도 하십니다.
그리고 살아가고 쇄신되는 데 필요한 항구한 원천을 이 빛 속에 간직하고도 계십니다.
그분은 복음에서 그리고 주님과의 내적 친밀성에서 나오시며, 저 사람들, 즉 방랑자요 순례자로서 주님 곁에 머물려고 애쓰면서 그분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늘 새롭게 활동하십니다.
바울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주님 안에서 이루신 놀라운 구원이 아주 가까이 계심을 체험하였는데, 이제 그는 이 체험이 어떻게 자신 안에 거룩한 순수성과 참된 생명력을 늘 새롭게 불붙였는지 증언해 줍니다.
그가 자주 언급하는 바와 같이 감정의 투명한 순수성은 그에게(1고린 5,8; 2고린 1,12; 2,17)주님과 가까이 있다는 의식이 가져오는 자연스런 결과에 속할 따름이었습니다.
아마 우리 역시도 어떤 순수한 사람 곁에 있을 때나 아니면 어떤 의미 깊고 크신 은총 가까이에 있을 때 이와 유사한 경험을 했을 법합니다.
그때 우리 자신이 순수해지지 않았던가요?
그때 그러한 우정과 친밀감으로부터 우리 자신의 감정 안에 어떤 순수하고 참다운 생동감이 일깨워지지 않았던가요?
이렇게 우리는 어느 정도 바울로 사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실지로 이와 비교될 만한 어떤 것을, 아니 그보다 훨씬 더 큰 것을 맛보았습니다.
그가 증언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 안에서도 진리의 영이 비추시는 빛이 이와 비슷하게 쇄신될 수 있고 쇄신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 공동체의 표징들 및 성사들에 참여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그분과의 마음의 친밀성에서 나와야 할 것입니다.
진리의 영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선사되었습니다.
그것에 주목하고, 그것을 잘 보존하며, 항상 새롭게 드리는 기도 안에서 그 쇄신을 청해야 하는 것은 우리 과제입니다.
한 번 선사된 것이 이제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변화무쌍하고 파란만장한 인생살이의 행로를 뚫고 늘 새롭게 선사되어야 하고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가난한 마음의 영이, 정의에 굶주리고 목말라 하는 영이, 어린아이의 깨끗한 눈을 가진 영이 항상 새롭게 우리를 어루만져 주셔야 합니다.
이 영은 깊은 신뢰를 새롭게 드릴 때면 언제나 당신 자신을 큰 위로자로서 드러내 보이십니다.
그분의 위로에 힘입어 위 마음은 명랑하고 자유롭게 되고, 음울함 속에서도 밝게 빛나는 불빛을 만나게 되며, 온갖 편협한 마음을 벗어 던지게 되어, 마침내 헛된 열광과 인생살이의 고집스런 맹목과 우둔에서 벗어나 참된 해방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복음 말씀은 영의 원천, 곧 맨 처음에 영이 나오는 원천이셨고, 지금도 변함없이 영이 나오는 원천이신 바로 그분 곁에 머물라고 권고하심으로써 저위로, 저 위로자께로 나아가는 길을 우리에게 제시하십니다.
즐겨 마음으로 서로를 기억하는 가운데 거리상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라 할지라도 그와 아주 가까이 머물 수 있듯이, 또 그런 기억이 우리를 강인하게 해줄 수 있고 우리 안에 새롭게 용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듯이, 주님을 그렇게 기억해야 합니다.
아닌게 아니라 바로 이분을 두고 수많은 세대에 걸쳐 기쁨과 신앙의 계약이 계속 맺어져 왔던 것입니다.
기억 속에 이루어지는 친밀감 속에서 빛은 꺼지지 않을 것이고, 우리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