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안에 살고 계신 '기쁨의 영'

2005. 8. 31. 오전 12:45:32

글자

그리스도교 안에 살고 계신 영

 

Vom Geist des Christentums

 

베른하르트 벨테 지음

김진태 옮김

 

 

 

† 기쁨의 영

 

루가 복음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주님의 승천의 날 주님께서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져간 뒤에 제자들은 기쁨에 넘쳐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루가 24,52)

그것은 어떤 희한한 종류의 기쁨이었는데, 이 기쁨이 그들 마음 안에 생긴 이상야릇한 변화에 대한 증거가 되어 주었습니다.

 

 이전에, 그러니까 부활주간 첫 날, 예수님의 얼굴에서 나오는 신비로운 영광의 빛살이 제자들의 지친 눈과 실망에 차고 의심으로 뒤엉킨 마음을 꿰뚫어 비추었을 때, 이미 그들의 마음은 처음으로 기쁨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 때 주님께 대한 새로운 친밀감이 생겨났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모든 내적 외적 감각기관에 드러나 금방 알아챌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얼굴에 하느님 마음의 광채, 하느님 나라의 영광, 위대한 화해와 신적 자비의 빛살이 나타났는데, 이는 죽음의 운명에 처해 있고 죄의 늪에 빠져 있는 인간들을 비춰 주고 있었습니다.

바로 우리 인간들과의 유대 속에서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의 길을 걸어가신 것이었습니다.

 

당시 그것은 제자들에게 실로 태양보다 더 밝게 빛나고 눈보다 더 순수하게 비치던 빛이었습니다.

이로써 그들의 마음은 변화되어 갔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그들을 어루만졌습니다.

 그들은 이 형언할 수 없는 것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었고, 그들 자신이 예수님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 주권의 살아 있는 힘에 의해 전염되고 사로잡혔습니다.

 

그들의 가슴이 속에서 불타 올랐습니다.

 성서와 교회 전승은 이 사실을 계속 증언해 주는데, 그것은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우리 마음을 끊임없이 일깨워 주는 귀중한 묵상거리로 간직되어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승천날에 어떤 제2의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을 확인해 주고 증거 해주는 일이 오순절 아침 아홉 시에 벌어진 것입니다.

이른바 주님의 얼굴이 그들의 시야, 그들의 감각에서 멀어져 갔고,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아버지의 영광된 은총의 빛도 동시에 같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새롭고 놀라운 것은 기쁨이 그런데도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 영의 원천이 메말라 버리지 않았다는 것, 그들을 한 차원 높은 생명의 공동체 안에 한데 묶어 주었던 살아 있는 끈이 풀려 버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주님의 떠나가심 속에서, 그리고 주님의 떠나가심을 통해서 그들의 기쁨이 본래대로의 크기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쁨은 이제 완성과 성숙의 상태, 명쾌함의 상태에 다달았고, 이 상태가 곧바로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남아 있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기쁨에 넘쳐 떠나갔던 것입니다.

 

하느님 영광의 공공연한 가시성(可視性)이 사라짐과 동시에 그 가시성이 지닌 궁극적인 현세적 제약과 편파성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그들은 분명히 깨달은 것입니다.

 

인간적인 눈과 마음으로 개념할 수 있는 것이 일체 다 사라져 버림과 동시에 주님은 인간적 상상력과 공상 가능성의 편협성을 벗어 던지고 전적으로 완전하게 되시어, 어떠한 눈도 보지 못하고 어떠한 귀도 듣지 못한 것, 어떠한 인간의 마음에도 스쳐 지나간 적이 없는 것, 어떠한 인간의 마음에도 스쳐 지나간 적이 없는 것 속으로 들어가십니다.

 

 이제 제자들은 가슴으로, 모든 인간적 상상을 뛰어넘어, 사라짐이 완성의 한 표지요, 봉인 이라는 사실, 그래서 사라짐은 한량없는 화해, 어디에나 현존하는 고요한 지복(至福)의 최상의 보증이라는 사실을 밝히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의 얼굴에서 이 지복의 표지(標識)를 인간적으로 볼 수 있는 형태로 간직했던 일이 있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의 마음 안에 믿음과 믿음이 주는 기쁨이 완성되어 갔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거울처럼, 새로운 형태로 다가온, 눈에 보이지 않는 명랑성을 반사해 주었습니다.

 

뜻하지 않게 찾아온 깨달음, 새로운 내적 즐거움과 깨어남, 더 고요하고 더 위대한 성취, 이것이 그들 가슴속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말로 형헌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 안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깨닫기 시작했고, 그것이 그들을 기쁘게 했습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감각과 거기서 오는 은밀한 감흥, 이 최상의 기쁜 감흥이 마음안에 깨어났습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현상이 우리 인간들 사이에서 목격되는 다른 일들 속에서도 가끔씩 일어날 수 있습니다.

 

가령 사랑의 힘이나 죽음의 힘이 스치고 지나가면 사람들의 내적 감각은 눈뜨기 시작합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 안에서라야 비로소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최상인 무엇인가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을 체험하고 기뻐하는 마음은 더 이상 상처 날 수 없는 마음이라는 사실에 대해 말입니다.

 

제자들도 이와 비슷한 상황에 부딪혔는데, 실은 이보다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획기적인 의미에서 최상의 형태를 하고 있었습니다.

죽음과 사랑의 힘이 그들을 뒤흔들어 놓았던 것이고, 그 힘은 다른 경우에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보다 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감각이 그들의 마음속에 일깨워졌는데, 그것은 어떤 비가시적 서광 같고 결코 이름지어 부를 수 없는 천상은총 같았습니다.

완전한 기쁨도 이렇게 눈을 떴습니다.

이 천상적 변화가 예수님 제자들의 마음을  얼마나 감동시켰는지, 성서는 또 얼마나 단순한 말들로 이것을 담아 내고 있는지, 그것을 우리는 아무런 감격없이 지켜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기쁨에 넘쳐 떠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쁨은 이러저러한 현세적 기쁨이나 슬픔과 경쟁 관계에 있지 않으며, 현세적 기쁨에 의해 눈멀게 되거나 현세적 슬픔에 의해 새까맣게 뒤덮일 위험에 있지도 않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배우게 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과의 가시적(可視的) 친밀감이 가져다준  기쁨은 여전히 그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습니다.

비가시적(非可視的) 영원성이 가져온 기쁨과 은혜로움은 예수님의 사라지심 안에서 마주해 온 것으로, 그것은 이제 도처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기쁨은 아주 고요한 숨결과 같은 것으로, 귀로 들을 수 없다는 그 사실이 가장 상처 나기 어려운 종류의 것이 되게 합니다.

완성되어 있으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이 기쁨으로 인해 제자들이 세상과 동떨어진 사람들이되었다거나 현실의 지반을 넘어 우왕좌왕 허우적거리는 열광에 빠진 사람들이 되었다고 혹시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다 위로 부는 새벽바람처럼 그들 안에 고개를 든 저 기쁨의 영이 이들을 세상 밖으로 몰아내기는 커녕 오히려 세상 안으로 이끌어 들였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갔고, 마티아를 선출했으며 , 오순절에 설교를 했고, 그들의 동족과 논쟁을 벌이는 험난한

체험을 했으며, 이제 막 생겨나고 자라나기 시작한 공동체 안에 내부적으로 있던 갈등들을 몸으로 느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디에 있든 자신들이 위치한 바로 그곳을 출발점으로 삼아 나아가기 시작했으며, 온 세상 안으로 뛰어들었고, 온갖 어려운 세상일에 관여했습니다.

 

이때 그들은 외적 감각과 처신술에만 의존해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내적인 가슴과 행동하고 수용하는 마음의 능력도 동원했습니다.

 

이렇게 현안 문제와 곤혹스러운 일, 논쟁 속에 일부러 빠져들어 갔고, 가능한 온갖 세상사 속으로 점점 깊이 파고들었으며, 거기서 오는 곤경과 밝고 어두운 면면(面面)을 매일 점점 더 많이 체험했습니다.

 

특히 바울로 사도는 이에 대해 많은 것을 보도해 주었습니다.

제자들이 겁내고 주저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거룩한 충동은 항상 남아 있었습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기쁨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쁨보다 더 강하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들이 인간 삶의 현실성을 능수 능란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들이 내적으로 성숙해 갔다는 것, 그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참으로 기쁨의 영 자신이 현실 속에 있는 온갖 형태의 인간적 삶과 곤궁과 혼돈에 밝은 내적 친밀감을 가져다 주셨는데, 이것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이루는 만남 속에서 제일 처음으로 체험할 수 있었던 인간적인 것들과 가지는 구원의 연대성(連帶性)을 반향하는 것이었습니다.

 

깨어나게 된 저 기쁨의 비가시적 서광은 바로 예수님의 영으로부터 나오는 영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분은 당신의 제자들이 당신을 묵상할 때 모든 사람들과 그들의 곤경에 가까이 다가가게 이끌어 주셨습니다.

 

영의 기쁨은, 고요하게 있더라도 널리 퍼져 나가려 한다는 사실, 그리고 이렇게 퍼져 나가는 가운데 인간적인 것들을 변화시키고자 한다는 사실이 입증되었습니다.

여기서 다시 이 기쁨의 성령은 참되고 근원적인 모든 인간적 기쁨과 내적으로 닮았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아무리 미미한 형태를 취하고 있더라도 사람들을 서로 친밀하게 해주고, 그들의 음울한 마음을 변화시켜 주며, 사방 모든 방향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 기쁨의 본래적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유사하면서도 이보다 더 경이롭게, 더더욱 하느님께로부터 선사 받은 마음가짐으로, 제자들은 이제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인간의 얼굴, 죄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 모든 것들과 느끼는 친밀감이 바로 저 기쁨의 영으로 부터 생겨나왔음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이 친밀감 속에서, 물론 이것 역시 대부분 눈에 보이지 않는 채로 있었지만, 세상살이의 어려움들이 변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뼈져리게 느꼈습니다.

이제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능숙해진 눈으로 곤경과 가난함, 비천함과 죄스러움 위에 화해의 영, 영원한 자애(慈愛)의 영이 거닐고 계심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이 그들의 마음을 충만케 해주었는데, 그것은 인간적으로 형언할 수 있는 일체의 것을 뛰어 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또 제자들의 길을 밝혀 주는 역할을 했고, 계속 영향을 미치면서 그들의 인간적 삶 구석구석을 동반해 주었습니다.

 

기쁨의 영은 세상 안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안에서 계시되었던 영과 동일한 영이었고, 그분의 사라지심 한가운데서 가장 순수한 형태를 취하고 계셨습니다.

하느님의 기쁨이 제자들과 함께 세상 위로 당신의 길을 걸어가고 계셨습니다.

 

바울로 서간과 다른 성서 구절들 속에서 세상 한가운데 있는 이 기쁨의 분위기를 더음어 가며 느껴 보는 것은 유익한 일입니다.

많은 구절들 속에 아주 구체적이고 분명한 증언이 남겨져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라고 바울로 사도는 로마서에 서 적고 있는데, 여기서 그의 의중에 있었던 것은 이 세상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권고하고 그들에게 "희망 안에서 기뻐할 것"(로마 12, 12)을 기억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고린토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큰 위안을 받고 기쁨에 넘쳐 있습니다."(2고린 7,4). 또한 같은 서간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를 위해 아주 아름다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슬픔을 당해도 늘 기뻐합니다."(2고린 6, 10)

이러한 말씀들은 매우 값진 것들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님께 감동된 사람들의 삶의 체험 한 가운데서 고백되어 나오는 이야기들이고, 그런 체험들을 일관되게 증언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들 말씀들은 요한 복음이 예수님에 대해 보도해 주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말씀과 내적으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지금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아직 세상에 있으면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이 사람들이 내 기쁨을 마음껏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3)

 

복음의 기쁨은 우리에게도 선포되었습니다.

기죽어 있는 우리 마음을 열어 젖히고 저 기쁨을 향해 나아가라는 초대입니다.

 

예수님 안에 드러난 하느님 은총이 우리에게도 증거 되었습니다.

주님의 얼굴이 제자들의 눈앞에서 사라지신 것같이 우리의 눈앞에도 주님의 얼굴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상황은 근본에 있어서 제자들의 상황과 동일합니다.

기껏해야 우리 역사의 흐름이나 우리 중 많은 이들의 사랑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실까지도 제자들이 예수님의 승천날 경험했던 그 체험의 틀 안에 있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 안의 저 첫 형제들처럼 바로 이 캄캄한 상황을 완성의 표지, 완성된 기쁨의 표지로 알아들어서는 안 될까요?

우리도 궁극적으로 자신의 가난을 부둥켜안고 신묘하신 성령, 저 동일한 기쁨의 성령을 우리 안에 체험해서는 안 될까요?

아주 냉철하게 생각하거나 직접적으로 하느님의 위로에 대한 의식을 전혀 가지지 않고 살아갈 때, 그러한 생각이 혹시 너무 뻔뻔스러울 만큼 대범한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올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성서는 아주 단순하고 명료하게 초대하십니다:  성령께 깊이 신뢰하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화해의 손짓을 보이시면서 힘들어하고 수고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나타나 보이십니다.

그 얼굴 위에 드러난 일관된 빛줄기를 기억할 때 우리는 고요히 불어오시는 저 아름다운 영의 바람을 어떻게 감지할 수 있는지 가장 잘 배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첫 형제들이 해주는 이야기와 증언을 가끔씩 통독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근본에 있어 우리 마음보다 더 위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주님을 만났던 것이고, 그분께서 사라지신 후에도 아주 기뻐할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깨달음을 얻었고, 기쁨의 영이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이 과정을 보며 우리는 스스로 읽고 깨달으면서, 우리 마음을 강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또 우리 마음에 감춰진 체 심어져 있는 기쁨의 불꽃에, 소박하면서도 기막히게 좋은 첫 원천에서 나오는 양분을 계속 공급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어떤 것들은 묵묵히 떨쳐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망설이는 마음, 약삭빠른 술수, 태만한 행동거지, 우울한 감정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에게 기꺼이 그리스도교적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하는데, 이런 자질구레하고 기쁨 없는 것들을 말끔히 씻어 내기 시작해야 합니다.

실로 그것들은 그리스도교적이라는 이름을 가질 자격이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이 자질구레한 것들과 맺고 있는 연결 고리를 끊고 나오려고 노력한 만큼 우리 안에서 어떤 힘 같은 것, 어떤 입김 같은 것, 어떤 감춰진 생동감 같은 것이 발흥(發興)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노력과 맥을 같이하고, 함께 움직이며, 결국에 가서는 우리의 노력을 지탱해 줍니다.

끝에 가서 우리는 마음의 지반 위에 불꽃이 남긴 찌꺼기를 발견할 수 있을 터인데, 그것은 오랫동안 감취진 채로 있던 잿불 같은 것으로 이제 조금이라도 공기가 주어지면 금방이라도 불붙어 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 다다르게 된다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건네주신 이 삶을 위해 숨겨진 마음의 중심을 완전히 자유롭게 가져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기쁨의 영의 새벽바람은  저 첫 제자들을 스치고 가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스치고 가셨고, 우리 안에 일고 있는 마음의 움직임과 결합되어 계십니다.

 

이렇게 볼 때 보이지 않는 기쁨에 자신을 열어 드리는 것은 세상과 격리된 어떤 열광적 맹신 속에 묻혀 버리는 것도, 내면 속으로 도피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당연히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저 첫 제자들처럼 세상과 세상의 곤경들 안에서 살아야지, 세상이 현세의 이 조급한 사정에 의해 늘 뒤틀리고 가려진다면 그것은 단지 겉보기에만 그럴 뿐입니다.

이 기쁨은 보이지 않는 그만큼 상처받지도 않는다는 것이 보장되어 있고, 그래서 끝에 가서는 늘 다시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든 인간적인 것들과 가지는 아낌없는 연대성 안으로 우리를 이끌어 갈 것이며, 우리에게 영감을 주어 현실 세계를 향해 나아갈 멋진 용기와 모든 사물과 나눌 마음의 친밀성을 간직하게 해주고, 어쩌면 모든 것들 안에서 유머(Humor)를 가지게 해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우리로 하여금 이름지어 부를 수는 없지만 모든 것 위를 비추시는 빛줄기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게 해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 기쁨의 영이 첫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던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도 보여주시는 것이 됩니다:

곧, 하느님의 기쁨은 전염성이라는 사실, 그것은 동시에 내부에서 나와서 세상의 어둠을 변화시키고 없애 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주님께서 사라지신 산에서 내려와 첫 제자들의 공동체 안으로 돌아온 우리, 이제 우리는 저 첫 제자들과 똑같이 큰 기쁨을 가슴에 안고 그냥 혼자로만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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