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철 그레고리오 형제님 제공입니다.)
<<<유다의 파당>>
유다의 파당들은 크게 다섯으로 분류할 수 있다.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에쎄네파, 젤롯파, 그리고 헤로데파이다. 이 유다의 파당들에 관해서는 오세푸스와 복음서의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나자렛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준다.
1. 바리사이파
'바리사이'라는 말의 어원은 분명하지 않지만, 추측컨대 '분리하다, 구별하다'는 뜻의 히브리어(파라쉬)나 아람어(페라쉬)에서 나왔을 것이다. 무엇으로부터 분리하며 어떤 사람들에게서 스스로를 구별한다는 뜻인가? 율법에서 규정한 온갖 부정함으로부터 분리하고, 율법을 모르는 서민 대중(요한 7,49 참조)이나 헬라 문화와 관습에 젖어있는 이방인들이나 유다인들과 자신들을 구별한다는 것이다.
바리사이파는 마카베오 시대에 많은 유다인들이 변절하여 그리스의 문화와 종교를 받아들이는 상황에 직면하여,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귀한 선물로 주신 율법을 무엇보다 중요시 여기며 철저하게 지키기로 하였다. 그들은 다소 일반적이고 때로는 애매하기까지 한 모세의 율법을 더 효과적이고 확실하게 지키기 위하여, 구전으로 전해오는 율법의 해석들과 수많은 시행 세칙들을 한데 모아 '구전 율법'으로 체계화하고 모세오경을 통하여 전수된 '문서 율법' 못지 않게 중요시하였다. 이 구전 율법의 내용은 거의가 다 레위기에서 다루는 정결과 부정에 관련된 것이었다. 구전 율법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문서 율법도 지키게 된다는 것이 그들의 확신이었다.
바리사이들이 폭넓게 받아들인 구전 전승 안에는 신구약 중간시대에 부각된 몇 가지 교리나 믿음도 포함되어 있었다. 불사불멸, 천사와 마귀, 영의 존재, 하느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교리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이 교리에서 다른 교리들이 파생되어 나왔다. 곧 불사불멸과 하느님의 절대 주권은 메시아와 종말에 관한 교리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이런 교리들은 바리사이파의 정치적, 사회적 입지를 결정지었다. 그들은 이 세상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법 아래 예속되어야 한다는 기본 원칙에 따라 율법을 거스르는 모든 체제에 반대하였다. 그들은 하스모니아 가문이 율법을 거슬러 왕국과 사제직을 통합하였으므로 이에 항거하였고, 로마 권력에 하느님의 주권을 대신하는 것으로 드러났기에 이를 배척하였다.
예수 시대의 팔레스티나에서는 바리사이파가 결코 정체세력을 형성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에 관한 해석과 순수한 열정으로 대중 사이에서 인정을 받았고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실제로 그들 가운데에는 모세 오경을 비롯한 성서 전체에 정통한 학자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에게는 '율법학자' 또는 '율법교사'라는 명칭이 주어졌으며, 유다의 랍비(스승이라는 뜻)들은 참다운 후계자로 자처하여 이들에 관한 긍정적인 글을 많이 남겼다.
바리사이파가 정치적 세력을 얻게 된 것은 예루살렘과 성전이 파괴된 기원 70년 이후부터이다. 바리사이파는 성전의 파괴로 그들의 적수인 사제계급 사두가이파가 몰락하자, 로마로부터 큰 권위를 부여받아 구전 전승을 계속 발전시켰고 200년경 기록으로 남겼다. 이것이 나중에 유다의 거룩한 문헌집 탈무드로 발전한 미쉬나이다. 바리사이파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1차 유다 항전) 유다 국가가 사라진(2차 유다 항전) 뒤에도 유일하게 남아 유다교의 율법 전통을 이어준 랍비들을 배출시켰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유다교 예언자 전통의 맥을 이어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2. 사두가이파
'사두가이'는 구약성서 사독 집안과 관련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사독'(본디는 '차독')은 '의로운'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차딕'에서 나왔다. 구약성서의 전통적 사고방식에 따르면, 순수한 사제직의 계승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대사제 사독 가문에서 이루어져야 한다(1사무 8,17; 1열왕 2,35; 1역대 29,22; 에제 44, 15-16) 그러나 마카베오 시대나 예수 시대의 사두가이파가 사독 가문의 직계 후손들인가는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예수 시대에 모든 사제들이 다 사두가이파에 속하거나 모든 사두가이들이 사제였던 것은 아니다.
마카베오 시대에 사두가이파는 사제직과 왕권을 겸한 하스모니아 가문의 통치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지배계층의 귀족 계급을 형성하면서 종교를 제외한 그리스 문화의 제반 요소들을 받아들였다. 나중에 팔레스티나의 통치권이 로마에 돌아가자 그들은 즉시 로마의 정치권력을 인정하면서 여전히 서민 대중과는 동떨어진 특권 계층의 부와 권력을 향유하였다.
사두가이파가 현세의 기득권에 집착했던 것은 그들이 견지한 교리와 믿음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바리사이들과는 달리 그들은 구전 전승이나 율법을 배척하고 기록된 율법만을 받아들였다. 기록된 율법은 물론 모세 오경에 담겨 있다. 따라서 그들은 유다교 후기에 나온 구약성서의 다른 책들이나 외경에는 흥미와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후대에 기록된 책들이 전하는 천사의 존재나 영혼의 불사불멸과 죽은이들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철저하게 하느님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을 분리시켰으며, 이 세상 너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고 기대할 것도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지배 계층을 지원하거나 대표하였고 근본적으로 세속주의자들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확인하는 데에도 모세 오경을 이용하였다. 그들 대부분은 사제들로서 예루살렘 성전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 오경의 규정대로 하느님께 합당한 경신례와 제사를 바치도록 철저하게 요구하였다. 로마 권력의 비호 아래 예루살렘에서 제사와 경신례가 안전하게 지속되는 한 그들에게는 부와 권력이 보장되었다. 사두가이파는 바리사이파와는 달리 개인의 정결과 부정, 음식과 여행과 노동과 같은 일상 행위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성전에서의 제사와 기득권의 향유에만 관심을 집중시켰다.
예수 시대에 사두가이파는 예루살렘 성전과 유다 최고의회의 산헤드린을 장악하고 막강한 부와 세력을 과시하였다. 그러다가 기원 70년 유다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면서 사두가이들은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유다와 성전의 몰락은 그곳에서 세속적인 부와 권력을누려온 사두가이파의 기득권도 함께 앗아가버렸던 것이다. 사두가이파에 적대적이던 랍비들은 그들을 '사마리아파' 또는 '보에투시아파'라고 불렀다. 전자는 '적대자들'이라는 의미로 통하고, 후자는 신약성서 시대에 여러 대사제를 배출시킨 집안 사람들을 가리킨다.
예수게서 선포하신 영원한 생명의 약속과 그분의 부활 사상은 사두가이파의 교리와 정면으로 대립된다(요한 11,47; 마르 12,18-27). 더구나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쫓아내신 그분의 행동(마르 11,15-19)과 성전이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는 그분의 예언(마르 13,1-2)은 성전의 권위에 대한 명백한 도전인 동시에 자신들의 기득권에 대한 커다란 위협이었다. 사두가이파는 초대 그리스도인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적수인 바리사이들처럼 영과 천사의 존재, 그리고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었기 때문이다(사도 23,8).
사두가이파는 사제 계급에 속하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제직을 수행하고 있었지만, 거룩함과는 거리가 먼 생활에 젖어있었다. 그들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기 보다 세속의 부와 권력에 집착하였다. 사두가이들은 그들이 삶의 근거지로 삼던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자 역사의 무대에서 영구히 사라져 버렸다. 덧없는 세속의 부와 권력이 참다운 사제직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3. 에쎄네파
에쎄네파의 기원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리스어로 이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도 ‘에쎄네’는 ‘경건한’ 또는 ‘치유자’라는 뜻의 아람어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기원을 기원전 200년경의 묵시론적 종교 분위기까지 끌어올리지만, 일반적 견해로는 기원전 2세기 중엽으로 본다. 그들은 본디 마카베오 혁명에 가담한 경건한 무리, 곧 하시딤의 일부였을 것이다(1마카 2,42). 그들이 마카베오 혁명에 가담한 이유는 시리아가 사독 가문의 대사제들을 마음대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원전 152년 유다 마카베오의 두 형제 요나단과 시몬이 사제 가문 출신이 아닌데도 시리아 임금들에게서 대사제직을 부여받는 것을 보고 배신감을 느껴, 마카베오 가문과 결별한 것 같다.
에쎄네파는 어떤 기존의 정치 체계나 종교 체계를 거부하고 ‘정의의 스승’이라는 한 출중한 사제의 지도를 받으며 사해 북서부 연안 동굴들에 은거하여 수도생활을 하던 쿰란 공동체가 남긴 문헌들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많은 사해 문서 전문가들은 쿰란 공동체가 에쎄네인들을 지도하고 감독할 사제들을 양성한 에쎄네파의 본부 구실을 한 것으로 여긴다.
이 에쎄네파는 전통의 순수성을 고수하려던 사람들이다. 첫째, 에쎄네인들은 성서와 다른 옛 문헌들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런 연구 생활을 통하여 그들이 얻고자 하는 것은 사변적 철학이 아니라 윤리/도덕적 삶에 관한 가르침이었다. 그들은 하느님 다음으로 율법 전수자 모세를 경외하였고 율법의 철저한 준수에 역점을 두었다. 율법의 엄격한 해석과 철저한 실천을 두고 유다의 어느 파당도 이들을 따라갈 수 없다.
둘째, 그들은 전통적 사제직과 전례의 순수성을 고집하였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관장하는 자들의 합법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사독 가문만이 그곳에서 사제직을 수행할 수 있다고 믿었다. 성전에 예물은 보내면서도 그들 자신이 성전의 제사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자기들이 만든 달력에 따라 나름대로의 예배와 전례를 거행하였다.
셋째, 그들은 성과 속, 정과 부정의 전통적 구별을 엄격하게 지켰다. 그들이 이룬 공동체의 목적은 빛의 아들들인 자신들을 악에서 분리시키고, 진리와 정의를 실천하며 오로지 선한 가치에만 매달리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위해서 그들은 하느님의 법을 알아모시고 정결함 속에서만 살고자 하였다. 그들은 이제 곧 선과 악, 빛의 자녀들과 어둠의 자식들 사이에 최후의 결전이 다가올 것이라고 믿었다.12) 여기서 빛의 자녀들은 에쎄네파 자신들을, 어둠의 자식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사제들과 율법 해석자들(바리사이파로 대표됨)을 가리킨다. 또 자신들은 이 마지막 때의 공동체이며, 이 공동체를 통하여 ‘아론의 메시아’(곧 ‘사제적 메시아’)와 ‘이스라엘의 메시아’(곧 ‘정치적 메시아’), 그리고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배출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 세 인물 가운데 마지막 전투에서 악의 세력을 쳐부수고 빛의 자녀들에게 승리를 안겨줄 이는 사제적 메시아라고 믿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전투가 아직 계속되는 동안에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여 대신 고통을 받을 의인들로 보았다. 이 마지막 시기에 하느님의 자녀들은 마땅히 이 세상의 부정함, 특히 유다의 성전에 만연된 부정함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정결한 상태를 유지하여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에 물러가 엄격한 규율 속에서 수도생활을 한다.
고대의 문헌에 따르면, 에쎄네인들은 자기 방어 이외에는 전쟁에 가담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요한이라는 이름의 한 에쎄네인이 장교로 로마 항쟁에 참여한 사실을 전해준다(「유다전사」, 2.20.4). 적어도 쿰란 공동체의 에쎄네인들이 제1차 유다 항쟁 때에 로마에 대항하여 싸운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 67년 제1차 유다 항쟁이 일어났을 때, 쿰란 공동체는 이를 성전(聖戰)으로 보고 로마에 저항하다 68년 로마 제10군단의 공격으로 완전히 패망하고 말았다. 그들이 로마 군인들에게 모두 학살당하였는지 아니면 로마인들이 도착하기 전에 도망을 갔는지 알 수 없으나, 그들이 동굴에 숨겨놓은 귀중한 문서들만은 우리에게 확실히 남아 전해졌다.
한마디로 에쎄네파는 구약의 예언직(율법을 올바로 탐구하고 가르침)과 사제직(경신례를 통하여 하느님과 통교함)과 왕직(묵시론적 메시아 사상에 심취함)을 철저하게 실현시키려 했던 사람들이었다.
4. 헤로데파
헤로데파는 라틴어로 헤로디아누스(Hero-dianus), 곧 헤로데 가문에 속한 사람을 말한다. 어떤 이들은 헤로데 집안의 종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다른 사람들은 헤로데의 관리로 여긴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증언에 따르면 헤로데파는 헤로데의 종들이나 관리들이 아니라 헤로데의 통치에 우호적인 세도가들로 드러난다. 말하자면 헤로데파는 헤로데 왕조의 통치를 지지하고 그 권력의 혜택을 나누어 갖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런데 헤로데 대왕은 자기 주변에 유다인 지지자들을 곁에 두려하지 않았으므로, 헤로데파는 헤로데 안티파스 통치 아래에서 발전된 파당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권력의 속성상 더 큰 권력이자 자기들의 기득권을 보장해 주는 로마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지지한다.
헤로데파는 사두가이파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고, 때로는 이 두 파가 동일시되기도 하였다. 언뜻 보기에 이 두 파를 연결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인다. 헤로대 대왕은 하스모니아 가문을 배척하였으며, 그와 그의 손자 아그리빠 1세는 하스모니아 가문을 지지하는 사두가이파에서가 아니라 보에투시아 가문에서 대사제를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헤로데 대왕의 아들 아르켈라오의 폐위(기원 6년)와 아그리빠 1세의 유다 통치권 획득(41년) 사이에 상황이 반전되었다. 이 시기에 헤로데 가문이 아니라 로마 총독이 직접 유다를 통치한 덕분에 대사제들은 대부분 사두가이파에 속한 안나스 가문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갈릴래아와 뻬레아를 다스리던 헤로데 안티파스는 모계쪽으로 하스모니아 가문의 혈통을 타고난 헤로디아스와 결혼함으로써 사두가이파의 지지를 얻어냈다. 그리하여 헤로데파와 사두가이파는 로마의 비호 아래 이루어지는 헤로데 가문의 통치를 인정하며 정치적으로 한통속이 되었다. 반면에 헤로데파는 하스모니아 가문과 헤로데 가문과 로마의 지배를 배척하는 바리사이파와는 원수지간이었다.
헤로데파는 70년 유다 항쟁 이후에도 얼마간 살아남았다. 헤로데 아그리빠 2세(마르쿠스 율리우스 아그리빠)는 유다 반란을 저지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유다 항쟁 내내 로마의 충실한 지지자로 남았기 때문에 비록 제한적이긴 해도 유다의 꼭두각시 통치자 행세를 계속 수행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는 예루살렘을 정복한 티투스 황제와도 친분 관계를 유지하였다. 헤로데파는 아그리빠 2세가 말년에 로마로 거처를 옮긴 후 95년 사망하자 그와 함께 사라졌다.
5. 젤롯파
젤롯파는 요세푸스가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와 에쎄네파에 이어 후기 유다이즘의 네 번째 파당으로 매우 자세히 소개한 ‘넷째 사조’(The Fourth Philosophy)이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넷째 사조는 기원 6년 시리아의 총독 퀴리누스가 유다인들의 재산을 정확하게 평가하려고 인구조사를 지시했을 때 갈릴래아의 유다스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세상에 알려졌다(「유다고사」, 18.1.1-10). 유다인들에게 인구조사란 하느님의 고유한 통치 행위에 속한다. 민수 1장과 26장에 보면 하느님께서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인구를 조사하셨다. 다윗도 인구조사를 지시했다가 하느님의 분노를 샀는데 하물며 이방인 총독이 어떻게 감히 하느님 백성의 인구수를 조사할 수 있겠는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시행된 퀴리누스의 인구조사는 처음에는 평온하게 진행되었지만, 나중에 가말라의 유다스와 바리사이파 사람 사톡이 이끄는 민중의 반란을 촉발시켰다. 유다스와 사톡의 눈에는 퀴리누스가 신성모독자였다. 따라서 그들의 반란은 단순한 민중 봉기가 아니라 종교적 항쟁이었다.
유다스의 넷째 사조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신성모독에 대항하여 일어난 마카베오 항쟁의 기본 정신과 비교할 수 있다. 넷째 사조에 붙여진 이름 ‘젤롯’(열성, 열심)은 아마도 마따디아가 항전을 독려하며 거리에서 외치던 말에서 유래한 것 같다. “율법에 대한 열성이 있고 우리 조상들이 맺은 계약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은 나를 따라 나서시오”(1마카 2,27).
요세푸스가 넷째 사조로 분류한 젤롯파의 개념 정립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최근의 연구 결과를 종합하자면 젤롯파를 크게 셋으로 정의한다. 첫째, 하느님의 율법에 열성적인 태도를 보이는 개인들(집회 45,23-24; 48,1-2; 희년사 30,18-20). 둘째, 기원 6년 퀴리누스의 인구조사 때 가말라의 유다스와 사톡이 일으킨 반란에 가담한 이들(요세푸스는 이들의 폭력적이고 종교적이고 혁명적인 운동을 넷째 사조라 부른다). 유다스와 사톡은 항쟁에 나선 동지들에게 “천국은 열성적인 협력자들의 차지가 될 것이다”라고 약속하였다. 셋째, 키샬라의 요한에게 지휘를 받으며 66-70년에 로마의 통치를 반대하여 일어난 유다 항쟁의 투사들(요세푸스는 이들을 강도떼와 악당들의 연합이라고 부른다).15) 그들은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도망쳐 들어와 유혈 혁명으로 사두가이 중심의 귀족 사회를 뒤엎고, 시민들에게 무력을 갖추어 로마 군대에 저항할 것을 촉구하였다.
젤롯파의 기본 교리는 하느님 밖에는 아무도 자신들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믿음에 바탕을 둔다. 이 교리는 로마의 유다 통치에 정면으로 대치된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넘겨주신 땅은 어떠한 외국 세력의 지배에서도 벗어나야 하며, 그들에게 하사된 하느님의 율법은 어떤 경우에도 준수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현실은 이 같은 그들의 믿음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느님에게서 상속받은 가나안 땅이 로마인들의 손에 넘어가고, 하느님의 발판인 예루살렘 도성과 성전이 황제 숭배로 오염되었다. 이런 상황은 이스라엘 민족의 번영과 자유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이었다.
누군가 과감히 일어서서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로마인들을 심판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주권을 회복해야 했다. 젤롯파가 이 일을 자임하고 나섰다. 때마침 유다교 안에서는 성서의 말씀을 실현시킬 예언자들과 메시아가 출현하리라는 묵시적 기대가 만연되어 있었다. 묵시론자들은 상황이 점점 더 악화됨에 따라 하느님의 결정적인 중재가 임박하였다고 믿었다. 이같은 묵시론적 믿음은 항쟁의 분위기를 더욱 부채질하였다. 때마침 항쟁에 유리한 상황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팔레스티나에 주둔한 로마 군대는 갈릴래아의 반군 요새들을 공격하느라 성채 공격용 축대와 무기들을 소진한 상태였고, 겨울이 닥치자 예루살렘 성벽을 공격하던 시리아 총독 체스티우스(Cestius Gallus)가 군대를 철수하였다. 갈리아인들과 켈트인들이 로마의 통치에 대항하여 소요를 일으키고 로마는 네로 황제가 자결한 뒤 후계자 자리를 놓고 정쟁에 휩싸였다. 많은 유다인들은 체스티우스의 철수와 로마의 정쟁을 하느님께서 승리하실 확실한 징표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베스피아누스의 갈릴래아 정벌에 이어 그 아들 티투스의 집요한 공격으로 유다의 반란군은 점점 수세에 몰리게 되었고 마침내 70년 예루살렘을 로마 군대에 넘겨주게 되었다. 젤롯파 가운데 극단주의자로 알려진 시카르들은 마싸다 요새에 끝까지 남아 로마에 항전하였다(72-73년). 마싸다에서 항전하던 시카르들의 지도자는 갈릴래아 사람 유다스의 친척인 야이로의 아들 엘르아잘이었다. 마싸다의 항전은 시카르들의 자결로 끝이 났고 1세기 이스라엘 땅에서 로마인들을 거슬러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온갖 저항도 종말을 고하였다.
제1차 유다 항쟁을 주도했던 젤롯파는 마싸다 항전으로 최후를 맞았지만 그 저항 정신의 맥은 50년 후 다시 2차 항쟁으로 이어졌다. 131년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예루살렘을 로마 총독부 도읍으로 정하고 이교도적 도시를 이곳에 다시 건설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예루살렘의 성전을 재건할 마음을 품고 있었던 유다인들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이때 자신을 바르-코크바라고 소개하는 한 인물이 나서서 반란을 주도하였다. 바르-코크바의 본디 이름은 바르-코시바였으나, 그는 라비 아키바의 성서 해석(민수 24,17)에 의지하여 추종자들로 하여금 자신을 메시아라 믿도록 ‘별의 아들’이라는 뜻의 이 이름을 받아들였다. 민수 24,17에 보면,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서 왕홀이 일어난다’는 예언이 나온다. 항쟁은 135년까지 계속되었으나 결국 1차 항쟁 때처럼 로마군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고 반란군에 가담한 유다인들은 모두 처형당하였다. 하드리아누스는 예정대로 자기 성(姓) ‘앨리우스’와 로마의 최고신 주피터의 신전 ‘카피톨’을 따서 이름 지은 로마식 새 도시 ‘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를 예루살렘에 건설하고, 유대아 대신 팔레스티나라는 지명을 쓰게 하였다.
폭력에 의지하여 더 큰 폭력에 대항했던 젤롯파의 최후는 이렇게 끝났다. 세속의 왕권과 주권을 쟁취하려 했던 메시아 사상의 한계도 여기서 드러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