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영자 서평 : 교황청 보건 사목 평의회, 생명의 봉사자 - [의료인 헌장]
가톨릭 중앙의료원 옮김, 가톨릭대학교출판부, 1998.
1995년 교황청 보건사목 평의회(Pontifical Council for Pastoral Assistance to Health Care Workers)가 발표한(본 번역본에서는 교황청 보건사목평의회 ‘엮음’이라고 했지만,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이는 위 평의회가 주관이 되어 발표한, 법적 효력을 가지는 헌장이다) 「의료인 헌장」(The Charter for Health Care Workers)이 가톨릭중앙의료원 원목실에 의해 우리말로 번역, 소개됨으로써 우리는 의료 윤리와 그리스도교 윤리를 종합하는 하나의 체계적인 지침서를 갖게 되었다. 지금까지 신앙교리성을 비롯해서 교황청 몇몇 기관들에서 생명윤리에 관한 몇몇 단편적인 주제들에 관한 지침들을 발표하기는 했지만 이번의 「의료인 헌장」과도 같이 생명윤리와 관련된 모든 주제를 한꺼번에 체계적으로 종합하여 발표한 교황청 문헌은 처음이라고 하겠다. 또한 이 헌장은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가톨릭 교회 내의 법적 권한을 갖는 기관들이 구체적으로 협력하여 작성, 발표하였기 때문에 법률적으로 완전한 효력을 지닌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의가 있다.
「의료인 헌장」은 서론을 포함하여 모두 150 개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면서 그 내용은 우선적으로 ‘생명의 봉사자’로서의 의료인의 전형과 역할을 강조하고 나서 인간의 출산, 생명, 죽음이라는 세 가지 주제와 관련한 가톨릭 교회의 명시적인 지침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 헌장 전체에 면밀히 흐르고 있는 기초는 무엇보다도 인간 생명은 하느님으로부터 그 기원을 갖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헌장에서는 인간은 자신의 생명에 대한 주인이기 보다는 오히려 ‘생명의 관리자’이며, 생명을 섬기는 일은 사람 안에 계신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라는 점이 전반적으로 강조되고 있으며, 이러한 기초 위에서 의료인의 직무와 역할이 설명되고 있다.(1-8항) 그러므로 이 헌장은 의료인이라는 직업과 역할, 나아가서 그 소명의 수행을 위해서는 그들이 일상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문제들에 대한 확고한 윤리적 성찰이 중요하며, 그러므로 이를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연구가 요구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곧 인간 생명에 대한 봉사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간에게 윤리적 의무를 부과하는 일종의 명령으로서의 도덕률(Lex moralis)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6항) 이를 위해 헌장은 생명 윤리라고 하는 규범 윤리에서 의료인들의 행동지침을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헌장은 의료인들에게 단순히 직업적 전문성뿐만이 아니라 윤리적 및 종교적 양성까지도 함께 요구하며, 구체적으로 헌장은 의과 대학에서는 생명 윤리 강좌가 실시되어야 하고, 주요 의료 기관에서는 윤리 위원회를 둘 것을 권장한다.(8항)
헌장은 다음으로 의료인들의 생명에 대한 구체적인 봉사, 곧 그들의 직무와 역할을 떠받치고 있는 윤리적 충실성이 인간 생명의 시작에서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면서 구체적으로 인간의 출산과 삶, 죽음의 단계를 통해 요구되는 의료인들의 윤리적 행위에 대한 기본 원리와 지침을 제공한다.(11-34항) 헌장은 세밀하게는 인간의 출산 과정에서 야기되는 여러 윤리 문제들, 곧 유전자 조작이라든가 인공적 수단을 사용한 인공 출산의 문제에서부터 인간 생명의 시작에 관한 권위있는 윤리적 가르침을 제공하고 있다. 특히 과학 기술의 발달과 함께 의료 분야 안에서도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는 인간 생명의 위협에 대해 인간 생명의 절대 불가침성을 재확인한다. 의료 기술이 아무리 진보했다 하더라도 기술적 가능성의 평가는 반드시 윤리적 적법성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35-44항)
이 헌장이 인간의 출산과 삶, 죽음이라는 인간의 실존 전체를 통해서 강조하고 있는 생명권, 인간 행위의 윤리성, 연대성의 원리 등의 문제는 의료 윤리와 그리스도교 윤리의 통합과 조화로서의 「의료인 헌장」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헌장은 “생명에 대한 하느님의 주권은 생명권의 기초이며, 보장”(46항)이라는 인간의 기본 권리로서의 생명권을 기초로 하여 인간의 출산, 체외수정, 태아 진단, 배아 실험 및 조작에 관해 의료인들에게 윤리적 지침을 제공한다. 곧 인간 생명은 난자가 수정되는 순간부터 시작되며, 그 이후부터 인간 배아의 온전성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를 마땅히 배격되어야 한다는 것이 헌장이 제공하는 기본 시각이다. 또한 헌장은 생명권과 관련하여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할 권리는 노동 조합의 권리보다 상위에 있음을 상기시킴으로써 환자들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의료 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49항)
가톨릭 교회의 고통에 대한 전통적 가르침 중의 하나는 “그리스도인에게 고통은 속죄와 구원이라는 고양된 의미를 지닌다”(69항)는 사실이다. 그러나 헌장은 고통 중에 있는 말기 환자들에게 있어서 고통은 때로는 보다 큰 선과 유익에 방해가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70항) 헌장은 비오 12세가 가르치는 것처럼 그러한 고통이 있는 환자들에게 진통제를 사용함으로써 혹시 생명을 단축시킬 수 있는 위험이 있다하더라 그 환자가 고통 때문에 윤리적 의무를 수행하기가 어렵다면 진통제의 사용은 정당하다는 점을 말기 환자의 ‘인간적 행위’를 돕기 위한 수단으로서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다.(68-71항, 122-124항) ‘인간적 행위’는 개념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학대전에서 설명하고 있는 개념으로서 인간의 행위 중에서 윤리적 선악을 평가할 수 있는 행위를 지칭한다.(신학대전 2부 1편, 6문-21문 참조)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인간적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서 의지와 자유, 지성과 상황을 들고 있는데 극렬한 고통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러한 조건들을 빼앗아 가고, 따라서 극심한 고통 때문에 심지어 자살을 하거나 안락사까지도 요구하는 환자들에게 고통을 경감시켜주는 의료 행위는 환자들이 편안하게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죽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야말로 인간적 및 그리스도적 품위를 가지고 죽을 수 있는 환자의 권리를 도와주는 행위로서 윤리적으로 허용된다는 것이 이 헌장의 시각이다.
헌장은 장기 이식의 정당성을 연대성의 원리로써 설명한다. 곧 인간 존재를 결합시키는 연대성의 원리에 따라서 고통 중에 있는 형제 자매들에게 자신을 내어 주는 애덕의 요구가 장기이식을 정당화한다고 밝히고 있으며, 동시에 헌장은 이러한 장기 이식의 기준에 대해서도 명확히 언급하고 있다. 곧 증여자의 자유로운 동의, 증여자 자신의 생명이나 인격적 정체성에 심각할 위험을 초래할 가능성이 없을 때에, 그리고 정당하고 균형있는 이유가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는(85-86항) 장기 이식의 윤리적 한계를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헌장은 이종 장기 이식의 윤리적 정당성의 기준으로 이러한 이식이 인간에게 이로움을 주고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지의 여부가 조건이 된다고 명시함으로써 앞으로 숱하게 많은 윤리적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되는 인간 유전자를 가진 동물로부터의 장기 이식에 관한 윤리성의 기준을 마련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89항)
우리는 이 헌장에서 다음의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그 첫째는 환자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치료 수단을 구분하는 용어의 변화이다. 교황 비오 12세가 처음으로 이 용어를 구분하고 있는데 교황은 1957년 「의사들과의 담화」에서 일반 치료수단(Ordinary means)과 특수 치료 수단(Extraordinary means)의 용어를 사용하여 전자는 환자의 건강을 지키기 위하여 항상 의무적인 반면에 후자는 정당하기는 하지만 항상 의무는 아니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구분은 1980년에 신앙교리성이 반포한 「안락사에 관한 선언」에서도 그대로 인용, 소개되면서 또 한편으로는 일부의 의견이라는 전제 아래 균형(proportionate), 불균형(disproportionate)라는 개념도 함께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선언문 이후 15년이 지나 발표된 「의료인 헌장」은 ‘일반’, ‘특수’라는 개념은 사용하지 않는 반면 (64항에서 사용된 개념은 ‘propoitionate'와 ’disproportionate'이다) 균형, 불균형의 개념만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용어의 이러한 변화는 비오 12세가 사용한 일반, 특수의 용어가 정상적 치료 방법, 예외적 치료 방법을 지칭하는 의미로서 순수하게 환자에게 사용될 치료의 방법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한다면, 「의료인 헌장」이 사용하는 ‘균형’. ‘불균형’의 개념은 사용될 치료 방법의 유형은 물론이고 위험의 정도, 기대될 수 있는 결과, 비용 나아가서는 환자의 육체적 및 정신적 상태까지도 포괄하는 개념으로 발전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두 번째는 뇌사와 관련된 언급이다. 지금까지 가톨릭 교회의 뇌사에 관한 공식적이고도 확정적인 가르침은 없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비오 12세가 1957년 의사들의 모임에서 행하신 담화에서 “죽음의 순간을 결정하는 일은 의사에게 달려 있다”라는 언급이 어쩌면 뇌사와 관련한 교회의 최초의 공식적인 언급이었다면 이 헌장은 직접적으로 뇌사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뇌사를 죽음을 판정하는 기준으로서 언급하는 최초의 공식적인 문헌이 되는 것이다. 헌장은 이렇게 언급한다: “사람을 시신으로 보려면, 기증자의 뇌사, 즉 모든 뇌의 활동이 회복 불가능한 정지 상태인지를 충분히 확인해야 한다.”(87항) “모든 뇌의 활동이 돌이킬 수 없는 정지상태일 때 죽음이 온 것이다.”(129항) 헌장이 의료인들에게 다만 죽음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위하여 다양한 임상적, 도구적 방법들을 가장 정확하게 사용해 줄 것을 요구한다.
헌장의 마지막 부분(137항-150항)은 반 생명윤리적 실상으로서의 낙태, 배아 조작 및 실험 그리고 안락사의 부도덕성을 강도 높게 비난한다. 1995년에 반포된 회칙 「생명의 복음」에서도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그 후계자들에게 부여하신 권위로, 그리고 가톨릭 교회의 주교들과의 일치 안에서 무고한 인간을 직접, 의도적으로 죽이는 것은 언제나 지극히 부도덕한 행위임을 선언”(57항)하면서 구체적으로 낙태와 배아 조작 및 실험, 안락사의 부도덕성을 고발하고 있는 것을 이 헌장이 다시 반복, 강조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의 사회에 만연된 매우 심각한 반생명적 실상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우려와 경고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이 헌장은 물론 그리스도교 윤리에 기초를 둔 의료 윤리의 지침을 제공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리스도교 신자 의료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의료인에게 매우 중요한 지침이 되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모든 의료인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참된 생명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실 정도로 봉사하신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삼아 인간 생명에 철저하게 봉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의료 기술의 눈부신 발전이 인간의 생명을 위해 봉사하기보다는 오히려 점점 더 심각하게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 헌장은 인간 생명을 위한 올바른 가치 기준을 분명하게 제시함으로써 이 세상이 진정으로 생명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