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1)
페미니즘과 계급정치학』 -미셸 바렛 외
이가은
이 책의 주 저자는 '가족은 반사회적인가'라는 이제 페미니즘에서는 고전이 된 책을 쓴 영국의 좌파 페미니스트, 미셸 바렛이다. 특이한 것은 책이 바렛의 논문 '오늘날의 여성억압'에 이어, 몇몇 영국 좌파진영의 페미니스트들이 그것을 비판한 글, 바렛이 거기에 대해 다시 답변한 글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책의 이러한 구조는 내게 낯설고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들의 논쟁은 책을 읽는 내내 나로 하여금 '우리나라의 여성운동 내에는 과연 논쟁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회의적 물음을 갖도록 했다. 어떤 종류의 페미니즘 이론은 항상 소개되는 방식으로만 우리가 접할 수 있을 뿐이었고, 한 이론과 다른 이론이 충돌할 경우에도 그것들은 우열관계 없이 단순히 나열될 뿐이었다. 우리의 운동이 너무도 저열한 적들을 만나 그 동안 숨돌릴 틈 없이 싸워야 했다는 점, 또한 학계에서 여성학이 연구된 역사도 지극히 짧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러한 현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혹시라도 우리의 태도가 안일한 것이 아니었던가를 반성해 볼 필요도 있을 것 같다. 단지 우리가 소수이기 때문에 입장의 차이를 넘어 뭉쳐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입장의 차이 자체를 무화시키는 오류를 범했던 것은 아닌가? 나는 이 물음을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화두로 삼았으면 한다.
바렛은 성별관계의 작동방식을 규명하고 역사유물론에 의해 이해되는 생산/재생산 과 정과 젠더관계는 어디에서 구별되고 연관되는 지를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하고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그는 이를 위해 먼저 '맑스주의 페미니스트 분석의 몇 가지 개념적 문제'라는 글에서 지금까지의 이론들에서 가부장제와 재생산,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개 념들이 어떻게 쓰였는지를 분석하면서 몇 가지 문제지점을 짚어 나간다. 그는 가부장 제를 '생물학적 관계'로 바라보는 밀레트나 파이어스톤과 같은 급진주의자들의 관점은 생물학적 결정론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비판하는 동시에, 크리스틴 델피처럼 거기에 대해 좀더 유물론적인 접근을 시도했던 이들의 경우도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생산양 식'의 관계를 명확히 해명하지는 못했다고 비판한다. 특히, 그녀는 '가부장제'를 초역 사적으로 존재하는 광범위한 남성지배의 일반으로 보거나, 아예 현대 자본주의를 '가 부장제'로 묘사하려는 시도들을 견제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할 때 '가부장제'가 아버 지의 지배로서의 가부장제인지 남성의 여성지배로서의 가부장제인지에 대한 논의가 혼 란을 겪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는 어떠한 역사적 맥락에서 이데올로기로서의 '가부 장제'라는 개념을 한정적으로 사용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하나의 명사화된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을 피하려고 한다.
그는 또한 맑스주의에서 이데올로기 개념이 페미니즘 진영과 피할 수 없는 관련을 맺 고 있음을 지적하고-왜냐하면 여성억압이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거대하게 작동하고 있으므로- 그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하려 한다. 그는 남성들이 그들의 여성에 대한 지 배를 존속시키기 위하여 퍼뜨린 허위의식으로 이데올로기를 바라보는 입장을 거부한다 . 반대로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는 오히려 이데올로기가 경 제적인 부분과 어느 정도의 상호 연관성을 지니는지에 관심을 갖는다. 즉, 알튀쎄가 얘기했던 이데올로기의 상대적 자율성에서 그 상대적인 성격을 좀더 정교하게 밝히는 것이 분석의 열쇠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맑스주의 페미니즘에서 이데올로기 문제와 연관된 것으로서 가부장제에 대한 기능주 의적 설명에 관한 문제가 있다. 기능주의적 설명은 가부장제를 자본의 영속화에 기능 하는 체계로 보는 관점이다. 이러한 설명방식은 역사적으로 꾸준히 있어왔던 모순과 갈등, 정치 투쟁 등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으며, 자본에 대한 투쟁과 결부되지 않은 어떠한 여성주의 운동도 무용한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시키기 때문에 지금까지 많은 페 미니스트들에 의해 비판받아 왔다. 바렛은 여기에 대해서도 위에서 취했던 입장과 유 사하게, 젠더 분업이 자본에 상대적으로 기능한다는 다소 모호하지만 중립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는 기존의 맑스주의적 설명이나 급진주의적 설명이 가지고 있던 환원주의 의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모호함을 감수하고라도 차라리 둘 사이의 위험한 곡예를 선택한 듯 하다.
눈치 빠른 이들은 짐작했겠지만 바렛은 결국 맑스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급진주 의적 페미니즘에서 축적된 유용한 설명들을 효과적으로 통합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따 라서 그는 페미니스트 분석의 핵심 범주인 '가족'에 대한 논의에서도, 자연적이며 본 질적인 단위로서의 가족을 부정하고, 역사적 현실과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변 화 지점으로서의 가족을 상정한다. 즉, 그는 맑스주의적 시각에서 가족을 자본에 기능 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결과로서 인식하는 관점이나,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가 족을 가부장제의 원인으로 인식하는 관점 모두를 극복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를 위해서, 가족의 물적인 측면과 이데올로기적 측면으로서의 '가구-가정이데 올로기체계'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사실상 이는 너무 이론적인 개념으로 보인 다. 그도 밝히고 있듯이 물질적 조건과 이데올로기는 간단히 분리될 수 없는 것들이며 , 그는 여성억압의 고리를 풀수 있는 열쇠가 바로 가구와 가정이데올로기의 괴리를 이 해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결코 그 둘의 괴리를 딱히 보여주고 있는 것 같지 않다.
하지만, 그는 현자본주의의 가구-가정 체계가 남성이나 여성, 부르주아나 노동자계급 중 누구에게 이익을 주고 있는가는 분명한 답이 없으며, 그러한 이익 자체가 매우 분 열적인 것임을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밝혀 나간다. 그가 결론을 확실히 밝히지는 않았 지만 누군가 그에게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가부장제가 아닌 체계 속에서도 최고의 효 율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는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에 이런 말을 잊지 않는다.
"여성해방의 가능성이 결정적으로 자녀양육의 재분담에 놓여져 있다는 결론은 절대적 으로 옳다. 이것은 임노동 영역의 성별분리에 대한 완화가 여성억압을 종식시키지 않 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하의 생산조직은 자녀양육이 이런 식으로 분리될 수 없다는 가정을 중심으로 구조화되었다고 여전히 언급된다. 따라서 이러한 자녀양 육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어떠한 자발적인 시도도 성공할 것 같지 않다. 그것은 자 녀양육의 일부분을 구성하는 성별 노동분업이 현재 자본주의 생산관계 안에 뿌리깊게 침투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바렛의 논의에서 몇몇 지점을 지적하고 있다. 브레너 와 라마스는 '여성억압의 재고찰'이라는 논문에서, 자본주의 하에서의 성별분업을 바 라보는 바렛의 관점이 단순하기 짝이 없다고 비판한다. 즉, 그들은 바렛이 '성별분업 이 자본주의 생산관계 안에 뿌리깊게 침투해 있다'고 했을 때, 과연 '무엇'이 성별분 업을 '어떻게' 자본주의 생산관계 안에 뿌리깊도록 했는지를 모호한 채로 남겨두고 있 다고 비판한다. 이들의 비판은 타당해 보인다. 왜냐하면, 바렛의 설명처럼 가부장제가 자본주의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분명히 현재 가부장제가 자본주의에 깊 이 각인되어 있는 이상, 그 원인과 작동구조를 밝혀야만이 오늘날 여성억압을 효과적 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기에 대해 그 원인은 바로 '생물학적 재생산'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동안 이 생물학적 재생산의 주체인 여성을 노동자 로 고용할 경우 자본의 이윤을 감소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성별분업이 일어났다 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성별 분업은 자본주의 사회에 각인되어 있는 것이 아 니라, 자본주의의 특정한 역사적 시정의 복잡한 세력균형에 의해 생산된 것이라고 결 론짓는다. 그러나 나는 브레너와 라마스의 비판이 그 지점은 상당히 정확했으나 생물 학적 재생산의 문제를 '자본주의적 체계' 안으로만 고정시키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나타날 수 있는 효과들-이를 테면 공적 노동의 성별분업 이외에 가족 내의 성별 분업 과 같은-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시 허점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바렛 역시 이러한 점을 근거로 브레너와 라마스의 관점은 분명히 경제적 범주 내에서 만 진정한 설명력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들의 비판에 맞선다. 또한 바렛은 생물학 적 재생산을 정치적, 사회적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생물학적 재생산이 일관되게 자본주의 경제 구성에 어떠한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을 찬성하지 않는다.
책의 끝 부분은 1986년 영국의 '페미니스트 리뷰'에서 열었던 영국 사회주의 페미니 스트들의 좌담회를 정리한 것이다. 이 좌담에는 미셸 바렛을 비롯하여, 안젤라 와이어 , 엘리자베스 윌슨, 베아트릭스 캠벨, 앤 필립스 등이 참여하였으며 정리 글은 그들의 정치적 입장 차이가 첨예하게 드러나고 있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이 맑스주의 페미니즘을 정리해버리고 이제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요즘의 페미니즘을 대변하고 있는 한국에서, 계급과 성 둘 다를 놓지지 않 으려는 위와 같은 다양한 논쟁들은 분명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아직까지 우리는 우리 의 역사를 유물론적으로 분석하여 여성억압의 구조를 설명하려는 기획이 없었다. 항상 현실이 이론을 앞서감을 생각할 때, 그것은 어쩌면 많은 부분 공허하고 낭비스러운 노력이 될 수도 있으며, 그간의 투쟁보다 더 힘든 노력을 요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항상 현실을 해석해내는 틀을 만드는 데 주저함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틀은 또다시 새로운 현실 앞에서 깨져야 할 것이며 이는 치열한 토 론과 진정한 소통을 통해서 만이 가능할 것이다.
서평2)
근대는 남자
근대성과 페미니즘
리타 펠스키 지음
출판사 : 거름
헤마 쓰다
`근대성의 성별(gender of modernity)은 무엇인가?'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근대성의 성별이라고? 응, 그건 물론 남성이지. 많은 이들은 생각할 것도 없이 대답할 것이다. 우리의 일반적 관념 속에서도 근대성은 논리와 인간의 이성, 과학, 자연의 정복 등의 남성성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이며, 근대성을 비판하는 포스트모던의 시각이나 페미니즘의 시각에서도 근대성은 남성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책의 서두를 보자마자 나는 책의 전체적인 내용을 미리 예감했던 것 같다. 그래, 이것은 근대의 남성성을 비판하는 책일 거야. 그러나, 나의 예감은 몇 장을 채 넘기기도 전에 틀린 것이었음이 판명되고 말았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계속, 그동안 내가 근대성에 대한 나의 태도에 별 반성 없이 얼마나 앵무새같은 말들을 반복해 왔는지를 의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책은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는 사람 뿐만 아니라 근대성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까지도 근대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는, `참신한' 책이다.
근대 시기에 대한 설명이 대부분 합리화, 생산성, 억압 등 남성적인 특성의 지배를 강조하긴 하지만, 근대적 주체성의 수동적이고 쾌락적이며 탈중심화된 성격에서 입증되는 서구 사회의 여성화-그것을 찬성하건 비난하건 간에-를 지적하는 텍스트 또한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p26-27)
리타 펠스키는 페미니즘 이론의 렌즈를 통해 근대를 다시 읽고자 하는 욕망에서 이 책을 썼다고 밝힌다. 그의 이러한 욕망은 위의 인용 글에 나타나듯이 지금까지의 근대성 논의가 근대가 남성이냐 여성이냐의 이분법 속에 갇혀 있었으며 이러한 이분법이 근대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일편 가로막고 왜곡시켰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오히려 근대를 이 두 가지가 뒤엉킨 모순적인 과정으로 본다. 그는 근대의 복잡성과 모호성에 천착하여 근대의 구체적인 문화적 텍스트들을 분석한다. 굳이 근대가 탈근대를 이미 포함하고 있다는 말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그가 보는 근대성은 분명 이것이다라고 일반화시켜 버리기에는 놓지는 것이 너무 많을 단어인 것이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의 변증법』(1947)이라는 책에서 이미 근대의 이러한 성격을 파악하고 있었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의 자유가 계몽적 사유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데 대해서는 어떤 의심도 갖고 있지 않으며 이것은 우리의-아직 검증되지는 않았지만-전제를 이룬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뒤엉켜들어간 구체적인 역사적 형태나 사회제도 뿐만 아니라 이 계몽 개념 자체가 오늘날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저 퇴보의 싹을 함유하고 있다는 것을 또한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고 믿는다.(계몽의 변증법 p49)
여기서 계몽을 근대의 간명한 표현으로 읽어낸다면, 우리는 근대성의 양가적 성격을 유추해 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근대적 여성성에 관한 우리의 의식/무의식 또한 되돌아 볼 수 있다. 여성성은 보수의 시각에서건 진보의 시각에서건 근대의 바깥에 위치하는 개념으로 자리매겨져 왔고, 특히 진보의 시각에서 근대라는 억압적인 역사적 과정을 넘어설수 있는 해방적 메타포로서 표상되어 왔다. 그러나, 리타 펠스키는 이러한 시각 역시 근대적 이분법의 환영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남성들과 동일한 방식대로는 아니었지만 여성들 역시 사회 안에서 근대를 구체적으로 경험해왔기 때문이다. 근대라는 시대에 남성성과 여성성의 경계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경계는 각 정체성들이 서로를 넘나드는 모순적이고 흔들리는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은 제 3장 상상적 쾌락이다. 부제는 `소비의 성애학과 미학'인데 백화점에 관한 분석을 하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백화점에 가는 여성에 대한 분석을 하고 있다. 백화점은 어렸을 때의 나에게는 행복과 동경의 대상이 되어주었던 곳이고, 지금은 경멸의 대상임과 동시에 은밀한 욕구의 장이기도 하다. 이 장이 마음에 든 이유는 아마도 나의 이 모순되고 일면 반동적인 생각의 구조를 밝혀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생산이 아닌 소비의 관점에서 근대를 조명해 보려는 시도 역시 매우 의미 있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19세기 말부터 소비자는 여성으로 묘사되기 시작했다. 물론 이것이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구매를 담당하게된 계층이 실제로 여성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소비자가 여성으로 묘사되는 과정을 탐구하는 것은 단순한 실제 상황 이상을 이해하는 데 단초가 된다. 여성화된 소비자로서의 근대적 주체는 더 이상 이성으로서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던 예전의 그 근대적 주체가 아니었다. 주체는 자제력을 잃고 상업주의의 이익불리기 농간에 놀아나는 희생양으로 이해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상황은 여성이 자신의 욕구 중 적어도 상품에 대한 욕망은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게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여성의 다른 쾌락에 대한 욕망들도 눈을 뜨게 만들어 사회를 전복시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리타 펠스키는 에밀 졸라의 소설 『여인 천국』(1883)을 텍스트로 삼아 이러한 여성 소비자들에 대한 모순적인 가정들이 당대의 사람들의 의식 속에 모호하게 자리잡고 있었음을 보임으로써,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관계가 기존의 페미니스트들이 규정하던 것보다 훨씬 더 다층적이고 복잡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를테면 소설에서 겉으로는 손님의 욕망을 모두 이해하는 척 하면서, 속은 경멸로 가득찬 백화점 주인과 그에 혹해 상품을 마구 사들이는 여자 손님의 관계에 대해 리타 펠스키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상업이 여성의 모든 변덕을 충족시키기 위해 주도면밀하고 철저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여성의 이해는 공적 영역에서 전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근대의 여성성 숭배를 지탱하는 착취적인 경제관계를 은폐한다.(p120)
아내의 충동적 낭비벽을 알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대해 무력한 남편에 대한 에밀 졸라의 묘사는 그가 쾌락주의의 조장은 개별 남성 자본가에게는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주겠지만, 사회전체적인 시각으로 볼 때 남성과 여성의 관계, 가부장제에 미칠 영향은 전복적인 것으로 이해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리타 펠스키는 얘기한다. 이러한 데 대한 공포는 졸라의 또 다른 작품인 『나나』에서도 드러나고 있으며 이러한 태도는 위에서의 백화점 주인과 손님의 관계에 대한 이해와는 매우 모순적으로 보인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소비주의에 있어서 여성의 해방적 차원을 강조하기도 했다. 소비주의가 여성의 욕망이 명명되고 자유롭게 표현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기존에 소비자로서의 여성을 거짓 쾌락에 속아 이것저것 막 사는 수동적 존재로서만 바라보았던 것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될 수는 있으나, 그것이 소비의 주체가 될 수 없는 돈 없는 여성들에 대한 분석은 피해가고 있다는 점에서 적절한 분석은 아닌 듯 하다.
리타 펠스키는 위와 같은 해방적 지점들을 인정하지만 그것들은 상품화된 여성성의 억압적 규범, 그리고 소비에 대한 집착들과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발현되어 왔음을 주장한다.
근대성의 문화는 욕망하는 여성성을 억압했던 몇몇 전통적인 구속을 붕괴시키기도 했지만, 동시에 비록 그보다 뚜렷하게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새로운 사회통제의 그물망을 만들어내기도 했던 것이다. (p147)
그렇다면 여성화된 남성의 이미지, 남성화된 여성의 이미지는 어떠한가? 19세기 말 오스카 와일드를 위시한 소위 유미주의자들의 삶과 텍스트에 드러나는 여성적 취향, 나르시시즘, 인공성, 무절제 등은 당시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서 제기되고 행해지던 생활 양식이었다. 이들은 부르주아 남성 이데올로기에 명백히 대립되는 가치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리타 펠스키는 그들이 이를 표면적으로만 부정했을 뿐 되려 성별 위계질서를 더욱 공고히 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저속함'에 대한 깊은 혐오를 가지고 있었던 엘리트주의자들이었다. 저속한 층은 대중이고, 대중의 가운데에 여성이 있다. 그들이 여성성을 자신의 육체에 각인시켰던 부분은 다름아닌 소비의 영역에서였고 다른 부분은 여성들과 끊임없이 경계를 그어가며 자신들의 우월성을 입증하려 했다. 심지어 작품 속에서 여성의 통제할 수 없는 힘에 의해 남성이 지배당하는 때에 여성은 단지 무의식적이고 훈련되지 않은 주체성의 통제되지 않은 무절제를 상징화하는 육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리타 펠스키는 말한다.
나는 그동안 문화를 다루는 페미니즘적 시각이 `여성적인 것은 해방적이다'라는 암묵적 명제를 견지해 온 것은 정치적이고 전술적인 의미였다고 생각한다. 어떤 문학 작품이나 영화, 미술 등에서 드러나는 여성성을 그 이전의 해석들처럼 허약하고 변덕스럽고 사소한 것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공적인 사회적 관계망 틈새에 존재하는, 사회균열의 힘을 지니고 있는 메타포로 바라보는 것은 단지 그러하다의 설명적 의미 뿐만 아니라 그러하게 해야 한다라는 당위성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리타 펠스키의 글은 매우 흥미롭지만, 위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이전의 일관된 페미니즘의 근대성 분석에 대하여 가지는 보다 나은 실천적 함의는 무엇일까에 대해서는 좀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근대에 나타나는 여성과 남성들의 정체성에 끊임없이 균열을 가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을까?
그는 7장 성도착의 예술에서 `라쉴드'라는 프랑스 여성작가의 책을 비평한다. 나도 처음 들어보는 작가라 그의 비평에 의존하여 라쉴드의 텍스트를 추리해 볼 수밖에 없었지만 여성의 성욕을 거침없이 묘사했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던져주었다. 그는 인식하고 욕망하는 도착적 여성 주체의 비전을 창출하는 가운데 현대 페미니즘 이론과 뚜렷하게 관련된 주제들을 탐구하고 있다.(p285) 『사드 후작부인』(1887)이라는 책에서는 여성과 남성의 성역할이 뒤바뀐다. 여성은 더 이상 남성 새디즘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지만 기존의 사도-마조히즘 텍스트의 거울상으로 이를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기존의 남성 사디스트가 자신의 권력에 의거해 도착적 행위를 행해 왔다면, 책에서의 여성 사디스트는 유혹의 방법을 통하여 남성을 지배하고 파괴하는 힘을 얻었다.
여성은 타자의 시선과 관련된 위치를 갖기 때문에, 남성이 결코 획득할 수 없는 상당한 자의식을 소유한 존재가 된다. 여성은 더 이상 미분화된 자연과 무의식적 욕망을 상징하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p300)
리타 펠스키는 라쉴드가 남성 주체야 말로 통일적인 정체성이라는 향수어린 환상에 강박을 가지는 존재로 보았으며 여성은 자기 자신이 외부세계에 의해 규정되는 불안정하고 정해져 있지 않은 존재라는 걸 이미 인식하고 있는 근대성의 특권층이라고 보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 소설에서 나타나는 남성을 죽이고 그와 똑같이 만든 사이보그가 그 남성의 대체물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성애의 원천임을 펠스키는 얘기한다. 역시 근대성의 주체가 여성으로 인격화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 보면 라쉴드는 매우 급진적인 존재였을 듯 하지만 그녀는 『나는 왜 페미니스트가 아닌가』라는 책을 써서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고 한다. 그녀는 여성이 `유혹'과 `과장'이라는 특권적 지위를 거부하고 남성과 동등해지는 것은 매우 우스운 이야기로 생각했다. 그녀 자신은 남성과 같이 행동했으나 그것이 대중화 되는 것은 매우 싫어했다. 이러한 지점에서 그의 텍스트는 여성 성욕의 재현이라는 점에서 해방적 의미를 띠고 있지만 또한 한계도 가지고 있다. 펠스키는 책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근대적 주체의 필연적 복수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확장시키는 데 있어서, 그러한 기획은 기존의 시간적 도식과 시대 구분의 구조를 허물고 개조하는 것을 수반한다. 상이한 사회집단의 이질적이고 비동시적이지만 서로 교차하는 근대성들이 나타날 때, 근대의 미학과 정치학에 관한 일반적인 교의는 필연적으로 논쟁과 개정의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p327)
`근대의 성별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이 질문에 대해 어떠한 대답을 얻을 수 있을까?
나는 책이 제시하는 내용이 매우 실제적이고 역사적인 것으로 거기에 대한 분석을 공감하였기 때문에 근대성의 성별에 대해 내가 생각하고 있던 바를 다시 되돌아보게 되었다. 근대성이 남성과 여성이 모호하게, 그리고 모순적으로 뒤섞여 있다는 사실은 여성을 근대라는 역사 내부로 가져옴으로써 근대성이 남성이라는 기존의 관점에 대해서 그것이 가지고 있는 성별 이분화의 틀을 깰 수 있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처음에는 책을 읽으면서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점차 이러한 분석의 실천적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기존의 포스트 모더니즘, 페미니즘 이론은 근대성을 남성으로 고착시키고 그에 대해 공격함으로써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여성성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아이러니칼하게도 이는 그것들이 공격하던 거대서사에 있어서의 환원론적이고 이분법적인 틀을 오히려 공고화하는데 기여했다는 의심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들이다. 어쩌면 근대가 보여왔던 자기모순의 지점들을 파헤치고 그 계기들을 추적해 봄으로써 우리는 좀더 진실에 접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에게 막연한 상징과 은유로서의 해방적 함의를 지니는 여성성에 비해 좀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관계 내에서, 차이들이 권력에 기반한 것임을 인식시키므로써 근대 내부에 여전히 싸울 공간이 남아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서평3)
나 얼마나 더 가난해져야 하는 거야?
-'에코페미니즘'을 읽고
별족
책을 읽는 게 고통스러운 건 이런 때다. 모든 것에 동의하는데, 그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는 나를 자각하게 되는 때.
이 책은, 방랑벽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늘 상황들 사람들로부터 멀어지도록 만들고는, 정규직 노동자의 하루치 근무시간을 차안에서 보내야 겨우 집-고향-에 갈 수 있는, 요즘의 내가 차안에서 읽은 책 중 하나다. 그렇게 읽고 나서 내내 절절히 동의하면서 자괴감에 빠진 거다, 왜 나는 이렇게 살지 못하는가?
부끄럽게도 편협한 나는 '문명의 충돌'을 읽을 수 없고- 알량한 평화주의자-, '507년, 정복은 계속된다'를 읽을 수 없다-좌파, 민족을 버린 국제주의자-. 의도적이든 평화로운 우호의 증거를 보고 싶고, 적어도 세상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장'은 아님을, 믿고 싶다. 다른 철학이 삶의 근거가 되는, 다른 가치가 소중한 세상을 바란다. 그래서, 이 책은 끝까지 읽을 수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내 삶때문에 아프다. 자초한 고통, 그래도 이렇게 살지만, 그래도 동의한다는 몸의 흐릿한 증명 같은 거다.
머리가 멍해지는 그 짧은 순간, 관계들을 끊어내고 지금 내가 있는 이 곳의 상태가 참으로 무용할 때, 내가 만든 거란 자각없이 내가 참 쓸모없다 느낄 때, 내 자신을 부양하고 있다고 믿으면서도 진정 그러한가 의심이 비죽비죽 솟는 어떤 때, 이 책은 내게 닥쳐서는 '너는 너를 부양했던 게 아냐', '산업에 종사하는 것, 산업화의 무언가를 누리며 네가 더 발전했다고 느끼는 그 순간, 네가 행한 착취는 지구 반대편에서 작동하는 거야', '지구는 하나고, 넌 자원을 더 누리기 위해서 모두가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거짓을 남발하고 있어', '이제 네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지금은 네 주위의 산과 강과 동물과 식물이겠지만, 다음은 아니 이미 너의 피와 살과 장기는 조각조각 일체성을 잃을 거야', '네가 자연과 하나라는 자각을 잃어버릴 수록 넌 점점 무가치해질 거야'라고 닥달한다.
자본이 참으로 무섭다고 느끼는 때는, 바라고 있는 게 무엇이었나를 계속 잊게 만들고, 그 자체로 이미 완결성을 있어 이미 사람에게는 통제력이 없는 게 아닐까 싶은 때다.
파업이 무산되는 경험을 했다. 파업의 전단계에서 내가 좋아한 것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었다. 늘 나누던 짧은 인사나 사무적인 대화말고 이 자리에 모인 만큼은 같은 뜻이라는 동료들과 함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연봉제가 도입되면 노조는 끝장이라는 회사의 협박이 무섭다. '돈을 벌어서 뭐할 건데?'란 질문에 눈만 꿈뻑 꿈뻑하는 사랑할 사람도 시간도 없는 부속이 되길 바라는 게, 그걸 종용하는 관리자조차도 이미 자본에 통제당하는 존재라는 것 때문에 겁이 난다. 그런 자본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단결인데, 그게 얼마나 약한지 알기 때문에 또 겁이 난다.
가치가 다른 삶을 살겠다고 결심한 순간에, 함께 할 누군가가 없다면 기운나지 않을 거라고 의기소침해지고, 또 나만 변해서는 위험하다고 혼자만 파멸하지 않는 무수한 행위들 막아야 한다고 또 안절부절이다.
필요가 적은, 적어도, 내가 돈때문에 소중한 걸 후순위로 미루지 않아도 되도록 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한 순간에 내 삶 어디도 자유롭지 않다는 걸 안다. 심지어 농사조차도 너무 많이 종속되어서는 '그럼, 안 그러면 나눠 먹을만큼도 안 나와'라는 대답을 듣는다. 과학이나 의학따위 미친듯이 달려가지 않도록 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에 '네 아기가 병들어 죽어가도 그럴 수 있어?'라는 사랑을 시험당하는 질문을 받는다. 나를 병들거나 죽게 하는 걸 단 하나의 이유로 말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정작 그 순간 내가 모든 것을 토막낸 그 과학이란 것에 의존하지 않을까, 그만 멈추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근심한다.
소비를 줄이지도 않으면서 자연을 선망하는 불균형을 깨기로, 소박하게도 나 살던 흔적이 정말 적도록 하자고 결심하면서 지금의 나를 변명하기로 한다.
........그런데, 이게 왜 에코'페미니즘'이지?
서평4)
[비디오 아트] 새로운 페미니즘 미학 / 정치학의 실천
성 은 이 |
| ¤ 제목 : 페미니즘. 비디오. 미술 ¤ 저자 : 김홍희 ¤ 출판사 : 재원 ¤ 발행일 : 1998년 |
1. [비디오-아트] 들여다보기 -- 서평에 앞서
'비디오 아트'하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백남준' '여러 대의 수상기와 정신없이 바뀌는 화면들' 정도?
아 너무 무시하지 말라고요? 그래도 이와 대중의 접촉이 '백남준=위대한 한국인 예술가'하는 범주 밖에서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별로 없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아트 혹은 아방가르드, 포스트모더니즘 등등 용어들로 이루어진 이에 대한 담론들은 거리가 멀게 느껴지기 마련이죠.
하지만, 이미 '아트'가 고급 예술이라는 한정된 범주를 넘어 광범위한 문화현상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으며 미학적, 형식적 요소와 더불어 그 정치성이 부각되고 있는 가운데 비디오 아트가 우리의 문화, 예술 지형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상당한 것입니다. "독립 '영화'"로 불리는 <푸른 영상> <노뉴단> 제작 비디오들이 6,70년대 서구, 이후의 제 3세계 정치적 아방가르드의 대표적인 실천으로서의 다큐멘타리와 연결되어 있으며 강력한 탄압과 통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거침없이 드러내면서 80년대 한국 사회, 문화, 예술계의 대표적인 사조로 지칭되던 소위 '사회적 리얼리즘'의 전위에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요.
또한, 기존의 영화와 TV, 이외 사진, 사운드, 기타 전자 기술의 혼성체로서 이미 매체 자체가 포스트모던적이므로 비디오를 이용한 문화, 예술적 실천은 현재 포스트모던 문화 담론의 지형과 지향점을 가장 적극적이고 첨예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비디오 아트는 소위 제도권의 고급 예술에서 시작되어, 60년대 정치, 미학적 아방가르드와 포스트모더니즘 사조에 의해 고급, 저급의 위계가 해체되면서 새로이 정립된 예술 문화적 실천의 첨병이 되었고, 나아가 오늘날에는 기존의 예술 제도와 일상의 간극, 생산자 수용자의 관계를 재조정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80년대에 이르러 홈비디오가 인기를 얻고 이에 대중의 영상 제작과 유통이 활발해지면서 대중이 관람 및 수용 주체이면서 동시에 창작, 생산 행위의 주체의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이 멀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모던, 아방가르드, 포스트모던 등의 예술, 문화 현상과 대중의 일상을 아우르는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는 비디오 아트에 대해 고찰해 보는 것은 지금의 예술, 문화적 실천의 현주소와 지향점을 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페미니즘 비디오 아트에 대한 논의는 이제까지 활발하게 논의되어 온 '페미니즘 문학이론' '씨네 페미니즘' 이후의 새로운 페미니즘 미학과 실천의 방향을 제시한다는 차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2. 『페미니즘. 비디오. 미술』
이제까지 비디오 아트에서 있어온 페미니즘적 실천들을 해석, 정리하는 동시에 매체 발달에 의해 변화하는 사회, 문화 지형 안의 새로운 페미니스트적 지향점을 짚어보는 방대한 사적 작업을 토대로 한 책『페미니즘. 비디오. 미술』이 98년도에 발행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큐레이터이자, 광주비엔날레 조직위원을 맡고 있는 김홍희씨의 홍대 미술사 박사 논문에 비디오와 페미니즘 이론의 개괄적인 소개 부분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우선, 저자는 비디오 아트가 포스트모던적 매체 속성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초기에 모더니즘의 세례 속에서 발전했다면 이를 포스트모던 비디오로 전환시킨 중요 계기 중의 하나가 페미니즘이라는 가설을 바탕으로 비디오 아트의 역사를 정리해갑니다. 이것은 남성 작가, 남성 예술 미학을 중심으로 기술되어 가는 예술사 작업에 대항하여 여성 작가, 여성 미학의 존재와 가치를 발굴하고 이에 따라 예술사를 재기술하는, 기존의 문학, 미술, 영화 등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져 온 페미니스트 예술사 작업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비디오와 페미니즘을 개괄적으로 다루는 1부와 페미니즘 비디오의 주요 작가, 경향을 1,2세대별로 나눈 2부에서 비디오 아트가 현재의 남과 여의 본질주의적 차이, 미학과 정치학의 분리를 해체하는 포스트모던 페미니즘 미학으로 진행되어 가는 과정을 풍부한 작품 사례들과 함께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홍희씨의 작업은 기존의 페미니즘 미학과 이론을 근본적으로 변화, 수정하는 계기를 이루는 새로운 개념들 그리고 새로운 예술적 실천의 사례를 폭넓게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자가 논의의 바탕으로 하고 있는 90년대, 시공간 개념 변화 및 반영성 등의 디지털 멀티미디어 담론들, 그로테스크와 사이보그론 등은 기존의 재현과 차이 및 정체성 등에 기초한 페미니즘 담론에 대대적인 변혁을 가하는 것들이기 때
문이지요. 저자가 페미니즘 비디오의 양대 특성으로 주목하고 있는 '나르시즘'과 '그로테스크'에 대해 논의하는 3부에서는 특히, 90년대 신체 담론과 함께 새로이 부상하는 페미니즘 미학의 주요 경향인 그로테스크를 사이보그 개념과 접목시켜 새로운 성/정체성의 구성 가능성까지 타진해 보고 있습니다.
3. 그로테스크-사이보그 : 서구 신체 미술 담론의 현주소그로테스크라는 용어는 비교적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뭔가 기이하고 과장된 듯이 보이는 것들에 붙이는 명칭이지요. 고야, 프랜시스 베이컨, 마그리트의 그림들 혹은 소위 컬트영화로 불리는 <록키 호러 픽쳐 쇼><핑크 플라밍고><이레이저 해드><델리카트슨 사람들> 중의 하나라도 아신다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습니다. 아니면 <프랑켄슈타인>이니 <드라큘라> 심지어 여러 SF물들(<에이리언>에서 최근의 <맨인 블랙>까지)의 역겹고 더럽고 가끔 소름끼치기도 한 분위기를 기억하셔도 됩니다.
그럼 이러한 분위기, 표현들이 어떤 담론을 가능하게 하는지 알아보지요. 저자가 차용하는 그로테스크 담론은 바흐친의 "카니발 그로테스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로테스크는 시대에 따라 그 양식과 의미가 변화를 하는데, 처음에는 서구에서 '고전 양식'의 변방에 있던 고대 로마의 식물, 동물과 인간 신체의 부분들을 얽어 만든 장식적 패턴을 지칭하는 용어였으며 16세기 프랑스의 '라블레'라는 작가에 의해 신체 부위를 묘사하는데 쓰이면서 최초로 '그로테스크 신체' 개념이 작품에 도입되었다고 합니다. (문학 작품『가르강튀아 팡다그뤼엘』이 대표작입니다.) 후에는 이것이 잊혀졌다가 20세기에 미하일 바흐친이란 이론가에 의해 다시 소급되어온 것이지요. 그는 17세기 이후 신고전주의, 낭만주의등 각기 시대의 주류 사조에 의해 변경되어 모더니즘에 이르러 형식주의적이었던 이것의 내용적, 정치적 함의를 부각시켰다고 합니다. 그가 강조한 것 중의 하나가 파편적인 신체, 혹은 신체의 물질성을 강조한 것인데, 이것은 90년대 이후의 신체 미술, 신체 담론의 이론적 근거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최근 서구의 문화, 예술 담론은 "성 정치학/ 정체성의 정치학"에서 이제 바흐친의 그로테스크론과 함께 "신체의 정치학"으로 자리 이동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신체와 정치의 관계? 그건 '정상, 표준'을 벗어나는 이러한 그로테스크 바디가 신체적 기형 이상의 반항과 위반을 대변하는 정치성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지요. 바흐친은 나아가 이것을 민속 행사의 하나인 카니발과 연관시킵니다. 그로테스크 바디는 이전의 재현과 감상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카니발 속에서 직접 참여하고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과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신체(카니발에서 그로테스크 바디가 되지요)는 과도하게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속에서 세상과 교류하며 세상은 '삼킴'으로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이 때, 음식은 신체의 한계를 초월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인간은 세상과의 만남을 입으로 물질적으로 신체적으로 수행하게 된다고 합니다.
카니발의 연희, 절제를 모르는 음식들의 향연 등등 모두 우리의 신체와 관련이 있습니다. 먹는 입, 감촉, 그리고 살들, 연희를 벌이는 신체의 욕망... 신체는 카니발 그로테스크의 중심이 됩니다. 이때 더욱 부각되는 이미지는 '신체의 구멍들, 오목한 곳, 돌출된 곳들 즉 외부를 향해 열려있거나 외부와 가장 근접한 부위들, 가장 유기적이고 액체적이고 접촉적인 부분'입니다. 이에는 신체와 분리되어 나가게 되는 침, 땀, 이외 분비물, 배설물 등등이 포함되지요. 그리고 이에 교미, 임신, 분만, 낙태, 태아 등 탄생의 이미지도 포함이 된다고 합니다. 즉, 우리의 몸과 그 외부의 경계에 놓인 모든 것들을 뜻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늙음과 탄생, 죽음과 분만 등의 양극이 오고가는 곳이란 점에서 양면성을 갖습니다. 책에 있는 바흐친의 말을 인용해 볼까요.
오목하고 구멍 꿇린 이러한 기관들은 한가지 공통점을 갖는데, 그것은 신체와 신체, 신체와 세상의 경계가 그 안에서 허물어진다는 것이다. 상호 교환과 상 호 경사가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그로테스크한 신체 생 활의 주요사건 신체적 드라마의 행위들이 모두 이 공간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그 밖에 땀 흘리고 코 풀고 킁킁거리는 등의 분비 활동 은 물론 성교, 임신 다른 신체에 의해 삼켜지고 잘려지는 모든 행위가 신체와 외부의 경계 늙은 신체와 새로 태어나는 신체의 경계 사이에서 수행된다. 이 모든 사건에서 인생의 시작과 종말이 밀접하게 연결 서로 맞물려 돌아간다.그로테스크 바디는 형이상학적이고 폐쇄적이고 대칭적이고 자족적인 고전의 신체와는 다르게 외부에 대해 열려있고 또한 다른 기관, 대상, 세계와의 결합이 가능하며 물질적이고 저속 취향을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것으로서 의의를 지닙니다.
그로테스크가 어떻게 페미니즘과 관련을 갖게 되는가? 그것은 크리스테바의 '비천함'(abjection) 이론에 의해 구체화됩니다.『공포의 파워 : 비천함에 관한 논고』(1982)에서 그녀는 카니발 그로테스크와 라캉의 주체성 이론을 접목시켜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이 비천함으로 불리는 것을 '여성적 표상'으로 규정하여 그로테스크를 여성성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비천함은 오이디푸스기(아동이 어머니와의 '외상적' 분리를 통해 상징계로 진입하게 되는 시기를 칭합니다.-라깡) 이전의 주체와 객체가 구분되지 않는 여성, 모성의 공간을 은
유한다고 합니다. 이 비천함의 대표적인 예로는 출산인데, '이는 내부와 외부가 치환되고 내가 타자로 도치되는 전환의 순간'이라고 하지요. 즉, 비천함과 모성이 만나는 지점이 됩니다. 크리스테바의 언급을 빌자면 "학살과 생명의 정점, 주저함의 숨막히는 순간, 아름다움, 성용과 성적인 것의 명백한 거부"라고 합니다. 바흐친이 그로테스크바디의 전형으로 든 것도 "웃고 있는 임신한 추한 노파"였던 것을 봐도 임신과 출산 그리고 노쇠한 여성의 몸 등이 그로테스크의 대표적인 형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여성의 그로테스크바디는 "구멍없고 세련되고 깨끗한 부르주아적 신체"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고전주의 신체에 대한 대항 담론으로서 신체 노출(주로 숨겨져 온 국부, 비만에 주름진 노파의 몸 등), 성욕 표출, 전도된 복장(남장 여성), 동성애 등을 앞세웁니다.
이러한 여성 그로테스크는, 메리 루소라는 이론가에 의하면 단일 범주로서의 여성 정체성을 강조하여 본질주의에 빠지거나, 이를 해체하면서 기본적인 범주를 상실하면서 딜레마에 빠진 페미니즘에 "이란성 쌍둥이 자매" 라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한다고 합니다. 그로테스크라는 범주 안에서 남녀가 모두 비천함의 공간으로서의 신체와 관계되면서 기존의 성적 다름으로 상정되어 온 남/여의 구분이 와해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로테스크는 단일하지 않고 배타적이지 않은 여성성, 복합적이고 모호한 여성 정체성을 유추시킨다고 봅니다. 가부장적 구조 안에서 형성된 단일한 여성성이 아니라 이렇게 이질적인 것의 섞임, 성별의 붕괴를 담지하는 것 자체가 부계 질서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이지요.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 저자는 논리를 좀 더 구체화하지 못하고 개괄적인 몇가지 주장의 나열에 그치는데, 이것은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현재의 페미니즘 담론의 딜레마-즉, 본질주의와 해체주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이동하고 있는 현실-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렇게 여성-정체적 단일 범주의 설정 자체에 의문을 던지는 시도는 '달딸'에서 이미 있어왔고 앞으로도 좀더 관심을 가지고 전개해 나갈 것입니다 )
신체와 심리의 성별의 초월, 정태적 정체성의 붕괴를 수반하는 그로테스크의 궁극은? 저자는 "포스트 휴먼-사이보그"라고 이야기합니다. 사이보그는 유기체와 기계의 혼성물로서 인간의 신체를 확장시킨다고 하는데, 도나 헤러웨이는 이를 인간과 정보시스템, 인간 공학으로 제어되는 노동과 욕망, 재생산 시스템의 시대의 유기적 피조물로서 그 기본 요소는 소통 시스템, 텍스트, 인간공학으로 디자인된 장치와 같은 기계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사이버
스페이스, 가상 현실에서 점점 비물질화 되어가고 소멸하는 신체 동시에 기아, 질병, 노화 등으로 고통을 겪는 인간의 유기적 신체와 실리콘으로 건조된 불후의 기계적 신체로 이루어진 사이보그는 죽음과 영원한 생명을 한 몸에 지닌 이중적이고 초성적 혹은 양성적인 그로테스크 바디라는 것이지요.
이런 사이보그는 그로테스크 바디의 음식 섭취와 소화, 구토와 배설 등 외부와 접촉하는 방식을 온전히 전도시킨 상태에서 형성됩니다. 즉, 음식을 부정하는 "비음식"을 통해 유기적인 신체의 살을 제거합니다. 유기체와 기계 사이에 먹고 먹히는 심리적인 식인주의가 발생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사이보그 세계에서 타자의 존재와 동일시 과정으로 바탕으로한 즉, 주체와 비주체 사이의 거리를 상정한 정체적 구축 과정은 와해됩니다. 함몰과 병합 등 구강의 논리가 정립됩니다. 신체를 관통하고 파편화함과 동시에 이를 부패하지 않은 상태로 부활시키는데, 이는 대상을 먹음으로서 내부에 그 대상의 성질을 재부활시키는 식인주의적 환상과 같으며 이 속에서 기계와 인간 신체가 상호 밀착, 병합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이보그는 비유기적인 재생으로 인간 한계를 극복하면서 '정보 바다에로 함몰'되어 최초의 내적 공간 즉, 자궁으로의 복귀를 기원합니다.(사이버 펑크 소설에서 사이버 공간을 '매트릭스-모체'로 부르는 것도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함몰의 이미지는 어머니와의 전 오이디푸스적 병합을 꿈꾸는 소외된 주체의 환상을 불러일으킨다고 합니다. 이렇게 그로테스크와 사이보그 모두 부계적 상징적 질서 이전의 곳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욕망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90년대 "후기 신체 미술"로 불리는 서구 예술 조류에서는 바로 이렇게 파편화된 신체, 비천한 신체를 중심으로 한 그로테스크 바디를 재현하고 있으며 비디오 기록과 몽타주는 물론, 설치, 퍼포먼스 그리고 앞으로의 디지털 영상 재현을 포괄하는 혼성적 장르인 비디오 아트가 이를 주도하는 큰 획이 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이러한 작업의 대표적인 사례를 제시하면서 최근의 흐름을 정리해 나갑니다. 물론, 작품들을 직접 관람, 경험해야 할 것이지만 스틸사진 자료와 보충 설명을 통해서나마 우리는 논리와 개념만으로 이해될 수 없는 많은 부분들을 유추해보고 공감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오늘날 '재현 이미지'는 편재하고 현실 세계를 둘러싸면서 소위 가상 현실을 창조합니다. '혼성hybrid'은 거의 모든 사회, 문화 현상을 포괄하는 개념으로서 '포스트모던' 시대를 알립니다. 각 예술 매체와 장르간의 혼성, 예술과 일상의 혼성, 인간과 기계의 혼성, 남성성과 여성성의 혼성, 문화간의 혼성......
이러한 혼성 이미지 세계의 행보가 [비디오 아트]에서 펼쳐집니다. 그리고 혼성의 장에서 변화되어 가는 페미니즘 예술, 실천 그리고 이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페미니즘. 비디오. 미술』은 이러한 의미에서 의미있는 저술입니다.
서평5)
영혼의 집
별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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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집'도 그 친구의 입에서 나온 책이다. 그 동화적인 느낌이 좋았노라고, 그 속의 모든 사람에 반했노라고 말했다. 나는 살그머니 그 책을 빌려서 소문 안 내고 읽은 다음 감동하였다. 난 사진이나 영화나 글이나 삶을 옮겨 놓는것은 뭐든 삶을 왜곡시킨다고 투덜거린다. 모르는 사람이 아픈 걸 바로 옆에서 보는 거랑 매체를 통해서 보는 거랑은 다르다. 현실 이 아무리 아파도, 죽음보다 더 심하지는 않은데, 어떤 글도 삶이 아픈 현실을 뚫고 이 어지리라는 확신을 주기에는 허황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늘 살아가는 동안의 낙천성 을 그려내기에 역부족이라고 생각했다. '저럴바엔 죽어버릴래'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상황 을 묘사한 글에서 희망을 읽어내기란 쉽지않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묘사하면서 부드러 운 어조로 위무하는 글을 만나는 것도 어렵다. '영혼의 집'은 그걸 해내고 있다. 선거로 집권한 좌익의 대통령이 군부의 쿠데타로 대통령궁에서 전사한-살해당한 것이 아니라-나라의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곳을 벗어나 있는 자신을 위해서 그녀는 이 이야기를 쓴 듯하다. 정쟁 속에서 언니가 살해당한 어머니, 가장 가난하였으나 국회의원의 자리에까지 오른 아버지, 혁명가수를 사랑하여 짧은 선거승리 의 기쁨과 곧 닥칠 암흑 속의 고통을 바꾼 딸, 그 딸의 딸. '영혼의 집'은 클라라, 그녀 의 딸 비앙카, 그리고 알바로 이어지는 가족 사이다. 클라라는 미래를 볼 수 있는 인물이다. 해외 여행이라고는 제주도가 고작인 내가 상상만 하는 남미는 오랜동안 누린 독자적인 문화 탓에 풍요로운 상상들이 가득한 곳이다. 신 비로운 일들을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하는 대신, 여신이나 저주나 숲의 정령에 대해 말할 법한 나라와 사람들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이 책 때문이기도 하 다. 미래를 보는 클라라의 설정은 가득하게 신비로움을 채워놓는다. 정령이 깃들인 대저 택에 정령과 대화하는 클라라가 억압당하는 사람을 숨기는 거나, 농장을 휩쓰는 개미떼 를 쫓는 앞을 잘 못 보는 노인이나 '죽을때 까지 쭈그러들라'는 저주에 계속 작아지는 사람이나 영적인 면모들이 교차되었으나 현실감각을 잃지는 않는 소설의 분위기가 나는 좋다. 클라라가 사랑한 검은 개와 관련해서는 전세대의 기억이 어떻든지간에 다음 세대가 그 걸 나름대로 받아들이고 다른 추억을 만든다는 것 때문에 흐뭇했다. 그 개는 언니 로즈 가 독살당하던 날 함께 죽는다. 그녀의 남편은 결혼할 첫 날 그녀를 기쁘게 할 의도로 검은 개의 가죽을 침실에 깔고, 그녀는 놀라 기절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 가죽은 지하 실에 있는데, 그녀의 손녀 알바는 그녀의 연인을 미로와도 같은 그녀의 집에 데리고 와 서 그 가죽 위에서 사랑을 한다. 난 클라라 남편의 선량한 의도가 그렇게 어긋나 있는 게 우습고, 그녀가 어찌 여겼건 그녀의 손녀가 그 위에서 행복한 섹스를 한다는 게 우습 다. 아버지가 보수적인 집권당의 국회의원인데도 딸이 사랑하는 이는 혁명가수고, 손녀가 사 랑하는 좌익운동권이고. 난 세대를 배신하는 장면에 매료된다. 적대적으로 뒤엎는 배신이 아니라 가치를 달리 하는 그런 배신, 아버지 세대에 중요하던 것이 전혀 중요치 않은 다 음 세대들, 그런 게 좋다. 배신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비앙카는 실제로 아버지의 의도대로 결혼했었다- 절대 참을 수 없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아서 못하겠는 게 좋다. 결코 당해낼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이에 심한 상처가 나지 않아서 좋다. 난 클라라의 아들들에 대해 기억해내는 데 오래 걸렸다. 그들이 클라라만을 닮았다고 말하려다가 곧 아닌 걸 깨달았다. 큰 아들은 참으로 열성적인 사람이다. 그는 의사였고, 자신의 의술로 다른 사람을 돕기에 바빴고, 전사한 대통령의 친구였다. 클라라가 주는 인상이라면 늘 존재하는 그 평화다. 삶이 성실치 않아서가 아니라, 미래를 아는 사람의 여유가 가득하니까, 큰 아들의 그런 삶은 성공을 잡으려던 가난한 그의 아버지의 모습과 더 많이 닮았다. 작은 아들은 클라라의 정신적인 면모를 많이 닮았다. 신비롭고 영적인 매력으로 사람을 불러모으는 그런 사람이었다. 영혼의 집에 대해 설명하면서 난 늘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주문을 걸 듯이 그 누구에게도 심한 비난을 할 수 없게 하는 매력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 랑에 대한 너그러움 때문에 나는 쉽게 여자들에 동조하게 되고, 그녀들을 느낀다. 내 곁에 누군가에게서 클라라나, 비앙카나 알바를 느꼈다면 그녀들의 강함이나 평화로 움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