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제가 뭐라고
예전에 모 본당에서 주임 신부로 사목할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저녁에 사제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본당 자매님 한 분으로부터 급하게 전화가 왔습니다.
당신의 남편이 지금 대학 병원 중환자실에 계시는데, 곧 선종하실 것 같다며 빨리 와서 병자성사를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분과 식사 자리에서 술 한잔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거든요.
그 형제님은 암에 걸려서 치료를 받으셨는데, 완치 판정을 받은 지 5년이 지났고 본당에서 신앙생활을 매우 열심히 하시던 분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완치된 줄 알았던 암이 재발하자마자 갑자기 악화되었고, 결국 선종하시기 직전 상황까지 간 것이었죠.
저는 정신없이 준비를 마치고 병원 중환자실로 향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코로나 전이라 방문에는 문제가 없더군요.
들어가 보니 가족 친지분들이 모두 모여 계섰고, 무척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몇 분은 눈물을 흘리고 계셨습니다.
형제님의 얼굴을 보니, 눈은 겨우 뜨고 계셨으나 눈동자의 초점이 이미 흐려졌고 가뿐 숨을 몰아쉬고 계셨지요.
저는 이미 차디차게 식은 그분의 손을 잡고 귓가에 이렇게 속삭여 드렸습니다.
”형제님! 하느님 기쁘게 만나시도록 제가 기도해 드릴게요. 먼저 가셔서 저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고, 그동안 너무 수고 많으셨어요. 이제는 그분 곁에서 편히 쉬셔요.“
그러고서는 제 나름대로 정성스럽게 병자성사를 집전해 드렸는데, 병자성사의 마지막 기도가 끝나자마자 눈을 스르르 감고 선종하셨습니다.
이미 기력이 다하셨지만 본당 신부가 와서 병자성사를 준다는 말을 들으시고 온 힘을 다해 버티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병자성사가 끝나자마자 바로 눈을 감고 하느님 곁으로 가셨습니다. 왠만하면 잘 울지 않는 저이지만 그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고 말았습니다.
‘내가 뭐라고,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나를 기다리셨나...
아니 사제가 뭐라고, 주님께서 사제의 손을 통해 베푸시는 성사가 무엇이시기에 죽음의 문턱마저 넘지 않으시고 온 힘을 다해 기다리셨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아니 앞으로도 그렇게 저의 사제 직무를 통해 일하시는 주님을 뵙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지 생각하니, 온몸에 전율이 흐를 정도였습니다.
오랫동안 특수 사목의 현장에 있다가 정말 오랜만에 본당으로 온 저는 오늘도 그렇게 저를, 아니 사제를, 사실은 주님을 기다리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제게 성사 집전을 청하기도 하시고, 방문하여 기도해 드리거나 축복해 드리기를 청하기도 하시며,
회합이나 모임에서 좋은 말 한마디를 해 달라고 청하시며 저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라는 사제를 통하여 그분들이 기쁘게 주님을 만나시도록,
혹여 그 만남에 실망하시거나 속상해하지 않으시도록, 무엇보다도, 너무 오래 기다리시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자 오늘도 다짐해 봅니다.
2023/09/03 춘천교구주보 사제단상에서 옳겨온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