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휴식
한번은 형제 두 사람이 연로한 수도승을 찾아왔다.
날마다 음식을 드는 것은 이 노인의 습관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형제들을 보자 노인은 반갑게 맞이하며 말했다.
"단식은 나름대로 보상을 받지만, 만일 그대들이 사랑 때문에 음식을 든다면
두 가지 계명을 지키는 일이 되네. 왜냐하면 그대들은 자신의 결심을 양보하는 셈이요,
또한 다른 사람에게 활력을 주라는 계명을 실천하는 셈도 되기 때문이네."
우리 대다수가 인정하기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단식'이나 모든 수련 또는 삶에 접근하는
엄격한 자세(일, 의무, 책임, 사업, 생산성에 전념하는 치열한 집중)가 그 나름의 보답을
받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이를 수행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그 일 자체가 제아무리 힘들게 보일지
라도, 수행하는 열정의 측면에서는 커다란 만족감을 주는 은밀한 무엇인가가 있다.
스파르타식의 엄격한 일과를 팽개치고 연로한 친척을 방문하거나 어린아이들과 놀아주고,
사적인 편지를 쓰거나 개를 산보시키고, 낚시를 가거나 바닷가로 소풍을 나가 저녁식사를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강건하고 고결한 이들을 움츠러들게 만든다.
우리는 중요한 일들에 푹 빠져서 그런 일들을 할 수가 없는 엄숙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인간적이 되기에는 너무나 '바쁜' 자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는 동안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해, 우리네 감성을 탈진시켜 버린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이 새로운 사랑의 영역이나 새로운 종류의 체험 또는 새로운 아름다운
순간들을 자유로이 누비도록 놓아두는 대신에, 똑같은 일에 더 많이 몰입하도록 유도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우리는 그저 똑같은 일을 계속 되풀이할 뿐이다.
무엇보다도 고약스런 것은 우리가 그렇게 살면서도 스스로를 영적으로 고상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우리 영혼의 눈가리개가 덕이 되어버린 셈이다.
우리는 이전에 보았던 곳 말고는 어느 곳도 바라보지 않는 까닭에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을 결코 알아보지 못한다.
휴식은, 성스러운 여가는 관상적인 영혼의 버팀목이며 안식일 신학은 그 초석이다.
성서는 '일곱째 날에 하느님은 쉬셨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한 마디 은유 덕분에, 이 성서 말씀 한 구절 덕분에 성찰, 창조적 정신의 휴식,
초월성, 우리가 지금 모습보다 더 커질 수 있는 권리가 신성한 것으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휴식보다는 일이 더 신성하고 하느님께 더 가치가 있으며 인류에게 더 유익하다는 가정
아래 쉬기를, 놀기를, 잠시 한가롭게 지내기를 거부하는 것은 관상의 뿌리 자체를 흔드는
것이다.
삶이 일보다 더 중요하다. 일은 목적이 빗나갈 경우 쓸모가 없고 심지어 해롭기까지 하다.
만일 진리를 알아보는 관상의 눈과 하느님이 참 좋다고 선언한 만물을 가늠하는 관상의
나침반이 없다면, 대체 무엇이 일의 순수성을 지켜줄 수 있겠는가?
우리가 갈데 없는 뜀박질을 멈출 때, 생산성이라는 회전목마에서 한동안 내려와 마침내
이것이 그저 쳇바퀴 도는 것임을 알아챌 때 우리는 자신의 인간성을 한 조각이나마 되찾
게 된다.
휴식의 목적은 영혼에게 안식일을 제공하는 데 있다.
우리는 자신이 과거에 했던 일들을 평가할 시간이 필요하다.
하느님처럼 우리도 자기 삶을 바쳐 하고 있는 일이 누구에게 정말 '좋은' 것이 되고 있는
지 자문해 봐야 한다. 나? 내 뒤에 올 사람들? 바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
우리는 날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주변 사람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삶을 바쳐 하고 있는 일과 그 일을 수행하는 방식이 우리 자신의 삶이든 우리가
접촉하는 이들의 삶이든 간에, 하나의 삶을 소모할 만한 진정한 가치가 있는지 그 여부를
자문해봐야 한다.
오로지 안식일만이, 휴식만이 자기 자신에게서 뒤로 물러나 생각하고, 흉금을 터놓고 새로
워지고, 눈을 위로 향하고 마음을 연 채 삶을 살아가고, 인생체험에서 인간적인 부분들을
키워나갈 기회를 부여한다.
삶은 암울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은 인내력 시험대가 아니다.
삶은,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갈 때에만 비로소 삶이 된다.
삶이 즐거움을 누리는 일종의 소풍이 되어야 함을 우리는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삶에는 즐길것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다.
만灣 근처에서의 바다낚시, 산꼭대기에서 바라보는 풍경, 언덕 비탈의 산딸기, 근처 길거
리에서 벌어지는 춤판, 좋은 책, 본당 바자회, 도심의 문화, 헤어졌던 가족의 재결합 등등.
삶을 즐기기를 거부하는 종교적 전승은 생명을 거부하는 셈이다.
하지만 생명을 거부하는 종교는 결코 종교가 아니다.
그런 종교는 성스러운 현재와 성스러운 내세를 접목시키지 못한다.
관상가가 되려면, 우리는 자신을 생명으로 이끌어 삶 전체가 우리에게 하느님을 중재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내 가슴에 문을 열다」
조안 키티스터 지음 / 성찬성 옮김 / 성바오로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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