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열며(06.10.22) -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2006. 10. 22. 오전 8:12:26

글자
2006년 10월 22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제1독서
이사야 2,1-5
1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환시로 받은 말씀이다.
2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리라.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3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4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5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제2독서
로마서 10,9-18
형제 여러분, 9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1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12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13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4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5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16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사야도 “주님, 저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18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복음
마태오 28,16-20
그때에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아침에 일어나면서 이렇게 다짐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오늘은 대충 대충 살아야겠다. 어제보다도 훨씬 더 형편없는 하루를 보내야지.’

아마 그런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다 어제보다는 나은 오늘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 역시 새벽에 일어나면 이러한 기도로써 다짐을 하지요.

“주님, 오늘 하루가 당신의 마음에 드는 멋진 삶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당신께서도 도와주소서.”

그런데 문제는 그 다짐처럼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들기 전에 성찰을 하면서 이러한 기도를 바칠 수밖에 없네요.

“주님, 오늘도 당신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글쎄 또 죄의 유혹에 넘어갔네요. 주님, 용서해주세요.”

하루를 시작하면서 했던 다짐과 하루를 마감하면서 자신을 돌아보면 이렇게 차이를 보이게 됩니다. 분명히 내 몸이고 나의 의지로 움직이고 있음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하루를 마감하는 성찰 시간에는 내 첫 마음과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체험을 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인간들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다시금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자신의 몸과 자신의 생각조차도 제대로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스스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대신 주님께 모든 것을 다 맡길 수 있는 겸손한 마음으로 다가서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하긴 예수님을 직접 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예수님의 제자들도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의심하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갈릴래아에 있는 산으로 소집하세요.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직접 만납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직접 만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이들의 의심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죽었다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이지요. 비록 자신의 두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자신의 두 귀로 듣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게 꿈이야 생시야?’하면서 의심했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 의심을 계속해서 범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천년 전에만, 단 일회적으로 활동하셨던 분이 아니지요.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들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 관여하시면서 우리들과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주님의 그러한 활동을 얼마나 의심합니까? 그래서 주님께 “왜 저와 함께 하시지 않습니까?”라고 원망하시는 분들이 또 얼마나 많은지요?

주님께서는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한 말씀을 해주십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 약속에 다시 힘을 내면서, 오늘은 멋진 날로 만들어 봅시다.


전교주일입니다. 전교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지요. 몸으로 행하는 모범을 통해서 훌륭한 전교를 할 수 있습니다. 성당에 다니지 않는 사람에게 좋은 모범을 보이세요.


우리의 마음에는 두개의 저울이 있다.('생각을 바꾸면 성공이 보인다' 중에서)

우리의 마음에는 두개의 저울이 있다.

남에게 줄 때 다는 저울과
남으로부터 받을 때 다는 저울.
두개의 눈금은 서로 다르다.

남에게 줄때 재는 저울은
실제보다 많이 표시되고,

남으로부터 받을 때 재는 저울은
실제보다 적게 표시된다.

그래서 하나를 주고 하나를 받아도
항상 손해 본 듯한 느낌을 갖는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두 저울의 눈금 차이를
적게 할 수 있다면…
만일 눈금 차이를 줄이는 것이 어렵다면,

남에게 줄 때는 조금 덜 준 듯이
남으로부터 받을 때는 조금 더 많이 받은 듯이
생각할 수만 있다면…

적어도 조금은
더 받은 듯 행복을 느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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