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내 친구

2007. 8. 3. 오후 11:5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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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물이

가득하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올려 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마태 13, 47-48)

 

 

멀리 떨어져 있던 친구를 몇년 만에 만날 때가 있습니다. 결혼은 과거 시간과의 단절을 뜻하기도

하고 한계 지어진 울타리 안에서 맴도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니 오랜만에 마음 먹고 시간을 내

어 친구를 만나지요.

 

친구의 얼굴은 세월의 무게가 앉아 있습니다.거울 속에 비친 나의 얼굴과 표정이 비슷해 보입니다

대화 중에도 각박한 생활인의 긴장된 자세가 보입니다. 그러나 표면적인 친구의 외양에도 불구하

고 깊이 감동되는 것은 " 아, 친구는 여전히 살고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올 때입니다.

 

얼굴에 세월의 무게가 얼마나 앉아든지, 혹은 팍팍한 생활인으로 살았든지 친구는 매일 시간을 거

스르지 않고 살고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서 친구가 사라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내 앞에 있지 않아 부재로 느껴지고 부재는 '살고 있지 않음' 으로까지 비약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부재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살아 계시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조건이 한계지어져 있어 만나지 못할 뿐이고, 이성으로 생각하니 비논리적이어서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는 바람에도 계시고 한여름의 뜨거움에도 계십니다. 생활인으로 이모

저모 계산하는 친구에게도 시간의 흐름만큼 함께 계셨습니다.

 

처음 기도를 시작할 때 '내가 피조물임을 보라'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어느 대목이었는지 기억나

지 않는데 몇번을 반복해도 수긍이 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내가 피조물인지..내가 말하고 생각하고 움직이는데.. 어떻게 피조물인지..."

그리고 반발이 생기고 도망가고 싶었습니다.

 

머리 속의 지식으로는 피조물임을 알지만 마음으로는 거북하고 용납이 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우리가 주인이 아니고 수동적인 상태인 것은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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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고르는 권한은 한뿐께만 있다고

합니다. 혼자 선하고 올바르게 사는 것 같아도 주님 보시기에 어떤지 알 수 없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과 예수님의 사랑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은 선택할 수 없고 선택되어진다는 것은 부정하고 싶은 일면이기도 합니다. 피조물임을

받아들이지 못해 도망가고 싶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고 또 마음 먹은대로 성취되

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조용히 귀 기울이면 나즉하게, 세상은 주님께서 움직이시고 그분 원

하시는 대로 이루신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더 좋고 알맞은 것을 주시기 위해 지금의 어려움과 혼란을 주셨음을 깊이 받아

들이고 수긍할 수 있어야 겠습니다. 거부하고 싶어도 받아들인 곳에서 다시 새싹이 움트

고 작은 열매가 열린다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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