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평 묘역은 신축교안시에 희생된 순교자들이 묻혀 있으며, 성직자와 평신도들의 공동 안장지로 사용되고 있는 천주교 성지이다.
제주도에 처음으로 복음이 전래된 것은 1898년 도민의 주체적 노력의 결과였다. 그 후 1899년 파리 외방 전교회원과 한국인 각 1명의 성직자가 파견되어 사목활동을 시작함으로써 제주 천주교회는 공식적으로 설립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01년, 신축교안(辛丑敎案)이라는 뜻하지 않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 불행한 사건의 원인은 단적으로 지적할 수 없는 복합적인 요인들이 얽혀 있었다. 왕실 내장원으로부터 파견되어 온 봉세관의 과다한 조세징수로 도민들의 원성이 심해 갔으며, 봉세관의 마름으로 이용된 일부 신도들이 주민들의 오해를 받을 행동을 했다는 점도 지적할 수가 있다. 그리고 무당들의 굿으로 인한 도민들의 정신적, 경제적 피해와 축첩 등 비윤리적 풍습에 강력히 반대하는 교회에 대하여 토착 세력의 기득권 수호를 둘러싼 갈등도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원인으로 일어선 민군들은 봉세관에 대한 항의, 부당한 조세 징수와 수탈의 시정을 요구하며 제주성으로 진입하였다.
사건이 일어나자 봉세관은 도피해 버렸고, 민군들은 공격의 대상을 교회측으로 돌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700여명의 교인들과 양민들이 관덕정등지에서 피살되었다.
사태가 진정되면서 시신들은 별도봉과 화북천 사이 기슭에 버려지듯 묻혔다. 교안의 수습에 나선 불란서 공사는 조선조정에 편지를 보내어 공동안장지에 해한 조속한 해결을 요청하였다. 1903년 제주목사 홍종우와 구마실 신부와의 접촉으로 블란서 공사와 조선 조정과의 교섭이 원만히 이루어져, 동년(광무 7년) 4월에 조정으로부터 황사평을 양도받게 되었다. 당시 별도봉 밑에 묻혔던 희생자 중 연고가 있는 분묘는 이미 이장해 간 상태였고 무연고 시신들만 이곳에 이장하였는데, 26기의 분묘에 28구였다.
황사평은 약 18,000평으로, 1984년에 공원묘지로 조성하면서 울타리 석축 공사, 성상 건립, 순교자들의 묘를 평장하여 이장하는 공사 등을 진행했다. 그 후 제주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재차 단장을 하고, 1995년에 신 아우구스티노(재준), 김 토마(영만), 양 윤경 등 당시 순교자 28기를 합장하였다. 그리고 현 하롤드 대주교를 포함한 성직자들의 분묘를 이장 축복하였고, 1866년 병인박해 때 경남 통영에서 순교한 김기랑(펠릭스베드로)의 순교비를 이곳에 건립하였다. 우리는 이 성지를 참배하며 신앙 선조들의 굳센 믿음의 정신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