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훼님과 바알
이스라엘인들은 본디 주로 양과 염소를 치며 살던 유목민이었다. 이 작은 가축들은 물이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살 수 없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인들은 농경지와 광야의 경계 지역을 떠돌아다니면서, 환경이 허락되는 대로 일시적으로 간단한 농사도 지으며 살았다. 그래서 이들을 광야나 사막 한가운데에서 낙타 같은 큰 짐승을 키우며 사는 종족과 구분하여 ’반(半)유목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된다. 이는 생활 양식이 완전히 바뀜을 뜻한다. 더 이상 물과 풀을 찾아 옮겨 다니지 않고 한곳에 정주한다. 그러면서 목축도 하기는 하지만 주로 농사를 짓는다.
생활 양식은 종교 형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스라엘인들은 야훼님을 섬기며 광야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자연히 자기들의 하느님을 광야 생활과 관련지어 생각하고, 또 그러한 생활 방식에 따라 그분을 섬겼다. 이러한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서 새로운 생활 양식과 함께 생소한 종교 형태를 접하게 된다. 우선 그들은 야훼님 한 분만을 하느님으로 알아 섬겨왔는데, 가나안 땅의 원주민들이 많은 신(神)을 숭배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또 이들이 특히 바알이라는 신을 열심히 숭상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가나안은 물이 귀한 지방이다. 자연히 제때에 비가 알맞게 오느냐, 오지 않느냐에 따라 풍년과 흉년, 더 나아가 삶과 죽음이 좌우되었다. 가나안인들은 이러한 자연 현상을 관장하는 신이 따로 있다고 믿었다. 곧 폭풍우와 비의 신 바알이다. 자연의 풍요와 다산(多産)이 바로 바알에게 달렸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매우 관능적인 의식으로 이 바알을 섬겼다. 신전에서 벌이는 인간의 성적(性的) 행위로써 신도 그렇게 하여 자연의 생식력 또는 생산성을 촉진시킨다는 것이다.
황소의 모습으로 조각되는 이런 바알에 대한 신앙을 보면서 이스라엘인들은 이중으로 유혹을 받게 된다. 첫째, 자기들의 농경지 생활을 주관한다는 바알만 만족시키면 풍요와 다산이 보장된다는 기대이다. 둘째, 바알을 만족시키는 일이 어렵지 않을뿐더러, 그 관능적 의식 때문에 ’인간적’으로도 상당히 끌린다는 사실이다. 이리하여 가나안 땅에 사는 하느님의 백성에게 ’물의 신 바알’이 줄곧 유혹의 대상이 된다.
야훼님과 바알의 ’대결’
이스라엘인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에 야훼님께서 물과 전혀 관련이 없으셨던 것은 아니다. 야훼님은 당신 백성에게 먹을 것과 마실 물을 마련해 주시는 분이셨다. 이는 성서의 여러 전통이 계속해서 강조하는 바이다(출애 15,22; 17,7; 민수 20,1-13; 신명 8,15-16; 느헤 9,15; 시편 78,15-16.20; 105,41 등). 이 전통에서는 (광야에는 비가 거의 오지 않기 때문에) 샘이 문제였다. 그런데 이제 가나안 땅에서는 비가 관건이다. 과연 야훼님께서는 바알보다 위대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 홀로 비까지 내려주실 수 있는 하느님이신가? 백성의 실생활은 불행히도 많은 경우 바알 쪽으로 기운다. 바알만 따르기도 하고, 야훼님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으면서 바알을 끌어들여 신앙의 순수성을 훼손시키기도 한다.
마침내 기원전 9세기 전반부, 아합이라는 임금이 북부 이스라엘 왕국을 다스리던 시대, 가르멜 산 위에서 일대 결전이 벌어진다. 아합은 시돈의 공주 이세벨과 혼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도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을 세우고 이 신을 숭배한다(1열왕 16,31-32). 왕가가 이렇게 솔선수범하여 나서자, 이스라엘 온 땅에 바알 종교가 번창하게 된다. 그리하여 야훼님을 섬기는 예언자 가운데에서 엘리야만 남아 야훼 신앙을 위하여 고군분투한다. 이 엘리야가 우상 숭배에 빠진 아합, 그리고 야훼님과 바알에게 ’양다리를 걸친’ 백성을 가르멜 산으로 불러, 수백 명에 이르는 바알의 ’예언자’들과 대결한다(1열왕 18,20-46). 야훼님과 바알, 둘 가운데에서 누가 가뭄을 면하게 하는 비를 내려주는지, 누가 참 하느님이신지 판가름내자는 것이다. 결과는 야훼님의 승리로 끝나고 백성은 "야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하고 고백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 자리에 없던 이세벨 왕비가 엘리야를 죽이기로 작심하자, 엘리야는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피신한다(1열왕 19,1-8).
이리하여 이스라엘인들의 신앙에 물이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계곡에서 샘이 터져 땅이 곡식을 내놓게 하시는 분은 바알이 아니라 야훼님이시다. 곧 야훼님께서 자연의 풍요와 다산까지 관장하신다는 것이 이스라엘인들의 중요한 교리가 된다. 그래서 시편의 저자는 이렇게 노래한다. "당신께서는 땅을 찾아오셔서 물로 넘치게 하시어 / 더없이 풍요롭게 하시나이다. / 하느님의 개울은 물로 가득하고 / 당신께서는 곡식을 장만하시나이다. / 정녕 당신께서 이렇게 마련해 주시나이다. / 그 고랑에 물을 대시고 두둑을 고르시며 / 비로 부드럽게 하시어/새싹들에게 강복하시나이다 / 당신의 선하심으로 한 해를 꾸미시어 / 당신께서 가시는 길마다 기름이 방울져 흐르나이다"(시편 65,10-12. 그리고 욥 5,10; 12,15; 28,25-26; 36,27-28; 시편 104,10-15; 147,8; 이사 41,18; 44,3; 예레 14,22; 아모 5,8; 9,6 등도 참조).
야훼님과 물
지난달에 보았듯이 물은 생명의 원천일뿐더러 정화하는 힘도 지닌다. 게다가 가나안 땅에서는 물이 이렇게 종교적 의미까지 지닌다. 그런데 구약성서를 보면 물에는 종교적으로 또 다른 면도 내포됨을 알 수 있다.
창세기 1장 2절은 창조 이전에는 ’땅이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있었으며, 어둠이 심연을 덮었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큰물’ 또는 ’깊은 물’로 옮길 수도 있는 ’심연’이다. 이 용어와 이어지는 창조 이야기의 배경에 깔린 사상은 고대 근동 전역에 퍼져있던 창조 신화와 관련된다.
태초에 신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진다. 바빌론 신화에서는 마르둑, 가나안 신화에서는 바알이 창조 이전의 상태를 가리키는 ’혼돈의 용(龍)’을 쳐이긴다. 이 용이 바빌론에서는 ’티아맛’, 가나안에서는 ’레비아단’ 또는 ’라합’으로 불린다(욥 3,8; 시편 74,14; 이사 27,1 등). 주인공 신은 이 괴물의 거대한 시체를 둘로 나누어 천상과 지하로 만든다. 이로써 혼돈의 ’큰물’이 ’윗물’과(시편 104,3; 148,4 참조) ’아랫물’로(출애 20,4; 신명 4,18; 5,8 참조) 나뉜다. 태초의 물이 없어지지 않고 위와 아래로 밀려 가두어졌을 뿐이다. 이리하여 인간 세상은 호시탐탐 경계를 넘어 지상을 창조 이전처럼 다시 뒤덮으려는 두 ’큰물’ 사이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창조 신화의 배경에는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그리고 나일 강의 범람, 또 언제라도 육지를 덮칠 듯이 넘실대는 거대한 바다로부터 느끼는 인간의 원초적 공포가 깔려있다(물에 대한 이러한 두려움은 홍수와 해수면 상승으로 현대에도 계속된다). 이리하여 물은 서로 배제하면서도 깊은 관련이 있는 두 극 또는 현상을 동시에 포괄하게 된다. 곧 물은 질서와 혼돈, 축복과 재난, 그리고 생과 사를 의미하는 것이다.
성서의 창세기는 이러한 고대 근동의 창조 신화를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신화적 요소들은 모두 제거하고 나서 그것을 이용한다. 절대적 권능을 가지신 하느님께서는 아무런 외적 필요성이나 강제 없이 당신의 자유 의지로, 그리고 어떠한 물질의 도움도 없이 당신의 말씀 하나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다.
그런데 특히 시적인 운문(韻文)에서는 창조 신화의 요소들이 더러 쓰인다. 그 문맥은 먼저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찬양의 노래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반항하는 물을 제어하시고 경계를 정하셔서 그 선을 넘지 못하게 명령하셨다. 근동의 신화에서 창조의 재료로 쓰였던 레비아단도 그분의 조물에 불과하다. 그래서 시편의 저자는 태초의 혼돈, 물과 관련된 하느님의 업적, 그리고 창조 뒤의 모습을 이렇게 노래한다. "당신께서 대양을 그 위에 옷처럼 덮으시어/산 위까지 물이 차있었나이다. / 당신의 꾸짖으심에 물이 도망치고 / 당신의 천둥소리에 놀라 달아났나이다.… / 당신께서 경계를 두시니 물이 넘지 않고/땅을 덮치러 돌아오지도 않나이다.… / 주님, 당신의 업적들이 얼마나 많사옵니까? / 그 모든 것을 당신 슬기로 이루시어 / 세상이 당신의 조물들로 가득하나이다. / 저 크고 넓은 바다에는/수없이 많은 길짐승들이, / 크고 작은 짐승들이 우글거리나이다. / 그곳에 배들이 돌아다니고/당신께서 만드신 레비아단이 노니나이다"(시편 104,6-7.9.24-26).
물은 일상 생활에서 생명의 바탕이다. 그것은 또한 이렇게 생명의 기원 곧 세상의 창조와 관련해서도 중대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 탈출로써 하느님의 백성으로 ’창조된다.’ 이 탈출에서 갈대바다를 건넌 사건이 결정적 의미를 지닌다. 이스라엘의 시인들은 이 건넘을 하느님께서 혼돈의 물을 제어하시고 그 속에 길을 내시어 당신 백성을 혼돈과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신 것으로 표현한다. "하느님, 물들이 당신을 보았나이다. / 물들이 당신을 보고 요동치며/해심마저 떨었나이다.… / 당신의 길이 바다를, / 당신의 행로가 큰물을 가로질렀지만 / 당신의 발자국들은 보이지 않았나이다"(시편 77,17-20. 그리고 출애 15,8; 이사 51,9-10도 참조).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창조와 관련해서든 역사와 관련해서든 모든 면에서 물의 주님이시다. 그래서 물도 사람을 비롯한 모든 조물과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게 된다. "바다와 그 안에 가득 찬 것들, / 누리와 그 안에 사는 것들이 소리칠지어다. / 강들은 손뼉치고 / 산들도 함께 환호할지어다. / 주님 앞에서 환호할지어다"(시편 98,7-9).
<임승필 요셉 신부,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경향잡지, 2000년 6월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 CBCK 홈페이지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