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귀한 나라
사람 몸의 70% 이상이 물이다. 옛날 사람들은 이러한 수치를 몰랐다. 그러나 물이 인간은 물론 동물과 식물에게도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임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집회서의 저자는 "인간 생명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들을 나열하면서 물을 첫번째로 꼽는다(집회 29,21; 39,26).
그런데 성서의 땅은 물이 귀하다. 북쪽에 갈릴래아 호수가 있고 거기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요르단 강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강은 비가 얼마 내리지 않아 사람들이 별로 살지 않는 요르단 계곡을 관통하여 사해(死海)로 흘러든다. 이스라엘인들이 살던 곳은 주로 이 계곡의 서쪽 산악 지방이었다. 그래서 요르단 강은 북쪽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사람들에게 직접으로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다른 하천들이 없지는 않지만 규모가 작을뿐더러 사철 물이 흐르는 곳이 드물고, 일부는 하류 쪽에만 물이 흐른다. 또 많은 하천이 ‘와디(=마른내)’로서 우기(雨期)에만 물이 있다. 아모스 예언자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하고 선포한다(아모 5,24). 여기에서 "강물"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은 본디 "언제나 물이 흐르는 내"이다. 내[川]가 두 종류여서 이렇게 자세히 말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샘은 그런대로 적지는 않았다. 그래도 우리 나라와 같은 땅과 비교하면 귀한 편이었다. 그래서 흔히 샘이 있는 곳에 촌락이 생기고 그 촌락 이름에 ’샘’이라는 말이 들어가게 된다. 예컨대 엔게디(여호 15,62), 엔도르(시편 83,11), 엔로겔(2사무 17,17) 등 지명에서 ’엔’은 샘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샘은 보통 높은 곳에 자리잡은 성밖에 있었다. 그래서 전쟁, 특히 성이 포위될 때를 대비하여 매우 일찍부터 성안과 샘을 연결하는 갱도나 통로, 또는 수로를 만들었다. 유다의 히즈키야 임금이 순전히 바위 속을 뚫어 수로로 완성시킨 예루살렘의 터널은 533미터에 달한다(2열왕 20,20).
우물 역시 매우 귀하였다. 그래서 우물 때문에 싸움이 벌어지고(창세 21,25; 26,18-22) 옛날의 ’우물 파는 노래’가 전해지며(민수 21,17-18), 야곱 선조가 팠다는 우물이 천수백 년 뒤까지 내려온 것이다(요한 4,6). ’우물’도 지명으로 쓰인다. 예컨대 브엘세바(창세 21,31)에서 ’브엘’이 우물이라는 말이다. 지하수가 많지 않아 우물은 주로 평지에만, 그것도 때로는 상당히 깊게 파야 했다.
빗물과 저수 동굴
물은 곧 생명이다. 생존과 생계를 오로지 땅에 의지할 수밖에 없던 옛날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하였다. 성서의 사람들에게는 호수나 하천, 샘이나 우물만으로는 필요한 물을 충족시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빗물이 큰 수자원이었다(신명 11,11 참조). 그런데 팔레스티나 땅은 비와 관련해서 두 가지 면에서 여건이 불리하다. 첫째는 비가 많이 내리지 않는다. 일년 강수량은 해마다 달라지지만, 예컨대 예루살렘은 대략 700밀리미터로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일년에 200밀리미터, 심지어 100밀리미터밖에 내리지 않는다. 우리 나라 역시 지방마다 다르긴 하지만 중부 지방의 강우량을 1200밀리미터 정도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여기에다 강들이 여럿 있음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로써 성서의 땅이 상당히 메마른 지방임을 짐작할 수 있다.
두번째로 불리한 점은 비가 오지 않는 기간이 길다는 사실이다. 우기는 대략 12월초부터 3월초까지이다. 우리 나라의 장마철처럼 한꺼번에 많이 또 며칠씩 비가 오지도 않는다. 이 우기 앞과 뒤로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온다. 그리고 건기 곧 4, 5월에서 10, 11월 사이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다.
이렇게 물이 귀한 데다가 비마저 한정된 기간에 조금밖에 오지 않기 때문에, 팔레스티나 땅에서는 빗물을 가능한 대로 많이 그리고 오래 모아둘 필요성이 절실하였다. 그래서 이 지방 사람들은 인공 못이나 저수지 외에(2사무 2,13; 이사 7,3; 요한 9,7 등), 옛부터 ’저수 동굴’이라는 특수 시설을 고안해 내었다(신명 6,11; 느헤 9,25). 팔레스티나 지방은 바위가 많다. 지하 바위에 인공적으로 동굴을 파서 지붕과 마당이나 거리에 흐르는 빗물을 받아놓는 것이다. 바위가 갈라져 물이 새는 곳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모르타르로 덧칠을 하기도 하였다. 물을 가능한 대로 서늘하게 저장하려고 밑으로는 넓고 위로는 좁게 만들어 돌 같은 것으로 덮었다. 이러한 저수 동굴은 주로 집 곁에 팠지만, 짐승에게 먹이고 농사에 쓰려고 들에 만들기도 하였다(2역대 26,10).
아무리 잘 보관하여도 저수 동굴의 물은 ’죽은 물’로서, ’산 물’ 곧 생수보다는(레위 14,5) 훨씬 못하였다(예레 2,13 참조). 그런데도 물이 워낙 귀하기 때문에, 자기의 저수 동굴에서 물을 길어 마시는 것을 평화와 번영의 표징으로 여겼다(2열왕 18,31).
팔레스티나에서도 물을 길어 나르는 것은 여자들의 일이었다(창세 24,11; 1사무 9,11; 요한 4,7). 그래서 최후의 만찬을 준비할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을 길어 가는 사람을 따라가라고 분부하시는데(마르 14,13), 그 사람이 남자였기 때문에 쉽게 찾아 따라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물과 정화
고대인들은 집짐승과 곡식 등 사람이 먹는 양식을 여러 가지 형태로 신(神) 또는 하느님께 바쳤다. 이스라엘인들은 하느님께 올리는 제주(祭酒)로 포도주를 사용하였다(레위 23,13 등 참조). 그러나 인간에게 그토록 중요한 물은 예물로도 또 그것에 곁들이는 첨가물로도 바치지 않았다(1사무 7,6만 예외인데, 그 의식의 기능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물은 이와 다른 의미의 종교적 용도로 많이 쓰였다. 생명의 바탕인 물은 정화의 능력도 지닌다. 이러한 물이 성전에서 많이 사용된 것이다. 성전용 물만 나르는 사람들이 따로 있었다(여호 9,21). 물을 담거나 나르는 여러 기구도 성전 안에 마련되어 있었다(출애 30,17-21; 1열왕 7,23-39). 이렇게 마련된 물로 특히 사제들은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여러 직무를 수행하기 전에, 그리고 제단에서 의식을 거행하기 전에 몸 또는 손과 발을 씻어야 한다(출애 29,4; 레위 16,24 등). 이는 생사와 관련된 엄한 규정이었다(출애 30,20).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제사나 기도로 그분께 다가가려면 사람과 제물과 기물(器物)이 깨끗해야 한다. 깨끗함은 단순히 외형적·위생적 현상이 아니다. 민족마다 터부 또는 금기가 있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사람 몸에 나타나는 병적·생리적 현상이라든지(레위 14,1-9; 15,25-27), 시체와 접촉하는 것같이(레위 11,24-28) 의도적 또는 무의식적 행동으로 사람이나 기물이 일정 기간 부정하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그 자체로서 범법 행위가 아니다. 부정(不淨)이 어떤 도덕적·윤리적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일시적으로 경신례(敬神禮)를 통한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를 제의적(祭儀的) 정과 부정이라고 일컫는다. 이러한 부정을 벗으려면 일정 기간과 일정 의식 끝에 물로 옷을 빨고 몸과 때로는 기물까지 씻어야 한다. 특히 물에 몸을 담아 씻는 침수(沈水) 의식이 구약성서 말기에 오면서 여러 종교 운동 단체에서 애용된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비롯하여 그리스도교의 세례에서도 물이 큰 구실을 하게 된다.
구약성서에서는 정화의 용도로 쓰이는 몇 가지 특별한 물도 언급된다. 만드는 방법이라든가 기능이 늘 분명하지는 않지만, "거룩한 물"(민수 5,17), "속죄의 물"(민수 8,7), 그리고 "정화의 물"(민수 19,1-10) 등이 있다. 이것들은 우리는 현재 쓰는 ’성수(聖水)’의 전신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구약성서 시대에, 예언자들은 내적 정결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이사 1,16). 그러나 정결례(淨潔禮) 규정들을 신약성서 시대에 오면서 특히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폭넓고 엄격하게 적용했기 때문에, 그들과 예수님 사이에 정과 부정에 관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마르 7,1-23 등).
생명의 물
성서의 땅에서는 생존이 온전히 물에 달려있었다. 그런데 물이 귀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물, 특히 샘이나 우물에서 바로 길어올리는 생수(生水)에 대한 갈망이 뿌리깊이 박혀있었다. 이러한 연유로 하느님께서 장차 마련하실 세상에서는 물이 큰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이스라엘은 "물이 풍부한 정원", "물이 끊이지 않는 샘터처럼" 되고(아시 58,11), 광야와 사막에 강과 샘이 흘러 생명이 솟으리라는 것이다(이사 41,18-19; 44,3-4 등). 에제키엘은 새 세상에 들어설 성전에서 시작한 강이 광야를 거쳐 사해까지 흘러 들어가면서, 주변을 온통 생명의 땅으로 만드는 환시를 보기도 한다(에제 47,1-12).
물이 생명 그리고 삶의 질과 직결되기 때문에, 성서는 다른 이들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치는 의인의 입이라든가 현인의 가르침, 그리고 지혜를 "생명의 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잠언 10,11; 13,14; 16,22). 그러나 참되고 영원한 삶을 보장하고 또 직접 마련해 주는 "생명의 샘" 그 자체는 하느님(예레 2,13; 17,13), 그리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실 수밖에 없다(요한 4,14; 7,37-39; 묵시 21,6).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55장 1절에 이어서,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하고 사람들을 부르신다(요한 7,37과 묵시 22,17). 그래서 우리도 시편 36의 저자처럼 감탄과 감사의 정으로, "정녕 당신께는 생명의 샘이 있나이다." 하고 외칠 수 있는 것이다.
<임승필 요셉 신부,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경향잡지, 2000년 5월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 CBCK 홈페이지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