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영 백서"의 서명 명의자 황심 토마스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적 문헌들 가운데서 "황사영 백서"만큼 주목을 받고 비판과 논의를 불러일으킨 문헌은 드물 것이다. 백서(帛書)란 '비단에 쓰여진 글'이란 뜻인데, "황사영 백서"는 1801년 당시 천주교회의 박해 현황과 이에 대해 황사영이 생각한 대책을 북경 주교에게 건의하는 내용의 비밀 편지이다. 이는 가로 62센티미터, 세로 38센티미터의 흰 명주 천에 작은 붓글씨로 쓰여졌는데 모두 122줄, 13311자로 된 긴 글이다.
"황사영 백서"가 작성된 곳은 충청도 배론에 있던 김귀동의 집이었고, 백서에 쓰여진 박해와 순교자들에 대한 이야기들은 주로 김한빈 등을 통해 수집되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정리한 때는 황사영이 배론으로 피신했던 1801년 음력 2월 전후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 백서의 발신자로 서명한 사람은 황사영이 아니라 황심 토마스로 되어있다. 황사영은 이 백서를 북경 주교에게 보내려고 하면서, 이미 조선교회의 편지를 북경 주교에게 전달한 적이 있어 그 이름이 잘 알려진 황심의 명의를 빌려 호소함으로써 그 신뢰를 더하고자 했던 것이다.
황심 토마스(1756-1801년)는 충청도 내포지방의 덕산고을 용머리 사람으로 조선조 영조 32년에 태어났다. 양반가문의 자손인 그는 내포의 사도로 알려진 이존창에게 교리를 배워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 무렵 덕산의 황모실 출신으로 이보현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어려서 부친을 잃고 방탕하게 살았다. 황심은 그에게 모범적인 생활과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 신자가 되게 하였다. 이보현은 입교한 뒤 단정한 처신과 온화한 생활로 주위 사람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다. 그는 박해 속에서도 두려움없이 가족들을 격려하며 해미에서 옥고를 치르고 순교하였다. 황심은 이보현의 누이와 혼인하였다.
황심의 입교 과정이나 신심생활을 특별히 소개한 것은 없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위험을 무릅쓴 북경 왕래와 교회의 부흥을 돕는 기록에 자주 나타난다. 이런 기록들에서 우리는 그의 놀라운 활동상을 엿볼 수 있으며, 또 얼마나 열심한 신자였는지 알 수 있다.
단 한 사람의 선교사도 없이 시작된 한국교회는 박해를 받기 시작하면서 사제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고, 교회재건운동과 사제영입운동을 동시에 전개하여 한국교회 첫 사목사제로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게 되었다. 이때 사제영입운동의 주동자였던 최인길, 지황, 윤유일 등과 함께 황심도 참여하였다. 황심은 1794년 12월 교회의 대표로 뽑혀 국경으로 나가 책문에서 주문모 신부를 맞아들였으며, 그뒤 신부의 전교활동을 도왔다. 그러나 주문모 신부의 입국 사실이 발각되어 최인길, 지황, 윤유일이 순교한 뒤로는 황심이 북경과 연락하는 밀사의 사명을 맡게 되었다.
최인길의 임기응변과 희생으로 피신에 성공한 주문모 신부는 강완숙의 집에 은거하면서, 1796년 9월에 북경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어 조선 천주교회의 현황을 보고하고자 하였다. 이때 황심은 밀사로 뽑혀 주 신부의 라틴어 편지와 교우들의 한문 편지가 쓰여진 명주 두 조각을 옷 속에 감추어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하고 귀국하였다. 황심은 이 일을 계기로 약 3년 동안 여러 번 옥천희, 김유산 등의 동지와 함께 밀사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조선교회에서 성사집행에 필요한 성유 등 성물을 가져와 신부의 사목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정조가 제위 24년 만에 승하하고 순조가 열한 살의 어린 나이로 보위를 계승하였다. 이에 정순왕후 김계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서 1801년 한국 최초의 전국적 박해인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심은 강원도 춘천으로 피신하였다. 이때 그는 황사영이 피신해 있는 제천 땅 배론으로 찾아가, 주문모 신부의 순교 사실과 조선교회의 비참한 사정을 북경 주교에게 알리는 방안을 의논하였다.
이렇게 해서 황사영은 백서를 쓰고 그 명의를 북경 주교와 면식이 있고 잘 알려진 황심의 이름으로 하였다. 자신의 세례명인 토마스란 명의로 된 이 백서를 황심은 그의 동지 옥천희를 시켜 북경에 전달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뜻밖에 옥천희가 책문에서 체포당하고 그의 고발로 1801년 10월 22일 황심이 체포당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옥에 갇힌 황심은 자신이 사실을 자백하면 박해가 확대되지 않으리라는 희망에서, 일찍이 "일이 위급하게 되면 나를 밀고하라."던 황사영의 명에 따라 황사영의 은신처를 알려주었다. 이 때문에 황사영, 김한빈 그리고 현계험 등의 동지들이 모두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
황심과 함께 이들 신앙의 동지들은 황사영의 백서 송사 사건으로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한순간도 흐트러짐없이 신앙을 고백하고 조정의 지나친 의심에 바른 해명을 했으며, 모두 사형판결을 받고 의연히 순교의 길을 걸었다. 당시 황심 토마스에게 내려진 결안은 이러했다.
"황심은 비천하고 비열하여 사교에 빠졌고, 서울과 지방을 돌아다니며 불충하고 상스러운 파당을 위하여 모든 힘을 기울이고 암약하였다. 그는 비밀히 외국에 가서 서양교의 이름을 받았으며, 주문모 신부를 위하여 여러 번 여행하고 그의 편지를 전하였다. 사교를 믿는 자들이 꾸민 일 중에 그가 미리 알지 못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삶과 죽음을 걸고 황사영과 결탁하였고, 황사영이 법망을 벗어나기 위하여 제천으로 간 것을 알자 일부러 그를 만나러 갔다. 또한 밤에 베개를 같이 베고 누워서 그 흉악한 편지를 제 눈으로 읽었는데, 그 편지의 잔학함은 고금을 통하여 하늘 아래 비길 것이 하나도 없다. 붓으로 그 흉악함을 쓸 수 없으니 그러한 일은 일찍이 보도 듣도 못한 까닭이다.
황심은 뻔뻔스럽게도 황사영과 짜고 배들을 불러들여 나라를 위태롭게 하려고 이 편지를 외국인들에게 보내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그의 흉측한 계획은 발각되었다. 그는 역적이요 대죄인이다. 그를 서소문 밖으로 끌어내어 육시를 하고 참수하라."
황사영 백서의 마지막 줄에 "천주강생 후 1801년, 시몬 다두 첨례 후 1일, 죄인 토마스 등 두 번 절하고 삼가 갖추어 아룁니다."라고 하여 토마스라는 세례명으로 서명된 명의의 주인공 황심은 결안대로 참수되고 육시를 당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45세였다.
그의 명의로 작성된 황사영의 백서 원본은 우여곡절 끝에 1894년 고문서 파기 때 발견되어, 당시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전달되었다. 주교는 1925년 7월 5일 로마에서 거행된 조선 순교 복자 79위 시복식 때 이를 교황 비오 11세께 선물하여 지금 교황청에 소장되어 있다.
<김길수 요한/전 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경향잡지 2000년 4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