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독백의 체험을 지니고 있습니다. 독백임에도 거기에는 분명히 대상은
있게 마련입니다.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말하자면 내가 독백의 주인공이면서
내 안에는 그 독백을 듣고 있는 또 다른 내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양면성 또는 복합성입니다. 이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 대해 신기함을 느
낍니다. 사람은 참으로 신비한 존재입니다. 독백은 바로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
는 대화이며 자기성찰입니다. 그리고 독백은 늘 보다 큰 대상, 나아가 절대자
를 지향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독백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독백을
통해 자신을 정립한 다음, 또 다른 독백자 곧 타자를 향해 그와 함께 대화를 해
야 합니다. 말하자면 독백이란 결국 대화를 찾는 무의식적 요구이자 준비단계입니다.
늘 독백에 머물러 있는 사람을 가정해 봅시다. 답답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심한 경우라면 그것이 곧 정신병이 됩니다.
교회는 어떠합니까. 오랜 동안 교회는 늘 독백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세상과는
상관없이 교회건물, 성당 밖의 일에는 눈을 감고 오로지 건물 안에서만 자족해
왔습니다. 과학과 문명이 발달하고 있지만 교회는 그것과 별 관계없이 오로지
같은 의식(儀式)으로, 같은 성서의 말씀만 반복하고 같은 기도, 같은 성가만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속되고 헛된 것이라고 일축했었습니다. 말하자면,
현실 세상의 삶 그리고 성당 안에서의 삶이 둘로 갈라져 있었던 것입니다. 때문
에 성당 안에서는 하느님, 예수님, 십자가, 성모님, 사랑, 천당, 구원 등만 얘기
되었을 뿐, 사람, 정치, 경제, 문화, 과학, 전쟁, 부정, 부패와 같은 것은 얘기될
것이 못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와 세상은 기차길처럼 평행선만을 달리는 결과 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에 살고 있는 나와 성당에서 기도하고 있는 내가 바로 같은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과 성당은 나로 인해 필연적으로 연관을
갖게 마련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하여 세상과의 대
화를 강조하고 세상과 교회가 바로 같은 실체의 양면성임을 선포했습니다. 대
화는 바로 교회의 필수적 요소이자 의무입니다. 사목헌장 2항은 가톨릭 교회
의 대화 상대자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누가 교회의 상대자입니까? 이 세상입니
다. 그리고 그 안에 사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세상사가 곧 교회의 일이며 모든
사람의 문제가 곧 교회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특히 같은 하느님을 믿고 고백
하면서도 갈라져 있는 그리스도인들, 곧 그리스도 정교회, 성공회, 개신교신자
는 물론, 모든 종교의 신자들, 나아가 비신자, 더구나 무신론자들과도 함께 얘
기를 나누어야 합니다. 대화의 대상에서는 그 누구도 배제될 수 없습니다. 원수
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사랑은 하지 못할지언정 대화마저 거부하고
이웃에 대해 관심도 갖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큰 모순입 니다.
우리는 가끔 영화와 연극을 보며 흥미도 느끼며 진지함을 다짐합니다. 그런데
원(原)영화와 원(原)연극은 바로 우리 인생 자체라는 것입니다. 나의 삶, 우리
의 삶, 교회의 삶, 인류의 역사, 전쟁과 평화, 사랑과 증오, 잘못과 용서, 성공
과 실패로 얼룩진 이 역사무대에서의 연기자들은 우리 자신이고 연출가와 감독
은 하느님이 아니실까 하는 생각입니다. 결국 모든 작품에는 그 어떤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 우리교회, 우리 세상, 우리의 역사 현실에는 어
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 의미를 찾기 위해 우리는 서로 얘기를 나누어야 합니
다. 이웃과의 대화가 사랑이며 하느님과의 대화가 곧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것 이 바로 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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