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 시원한 한 줄기 바람이신 주님 >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은 쉬운 것 같지만, 때로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보다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얼마나 자신을 통제하고 극기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필요로 하는지 모릅니다.
결국 관건은 자신과의 투쟁입니다. 얼마나 자신을 죽이느냐, 그것이 열쇠입니다.
성인전(聖人傳)을 읽을 때 마다 느끼는 바이지만 성인들은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측면에서 우리 범인(凡人)들과 확연한 차이를 보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통제하는 데 있어서 프로들이었습니다. 우리와는 달리 그들은 자신과의 투쟁에서 늘 우위를 보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인들은 ‘과감한 가지치기’의 달인이었습니다.
이 한세상 살아가다보면 우리들의 눈길을 ‘확’ 끄는 대상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곳으로 정신없이 끌려가다보면 그 끝은 수렁이요, 파멸, 죽음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성인들께서는 하느님을 찾아 떠난 여행길을 걸어가는데 있어서 자신의 발목을 붙잡는 각종 유혹들 앞에서 과감한 가지치기를 거듭하였습니다.
한 분야의 최정상에 선 사람들을 보면 다들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신이 설정한 목표 달성을 가로막는 모든 원인들을 철저하게 차단했다는 것입니다.
왼발 프리킥의 달인이 된 한 프로축구선수는 팀 훈련이 끝난 후에도 절대로 외출한다든지 다른 곳을 기웃거리지 않았답니다. 하루에 천 번 가까이, 밤낮없이 프리킥 연습에 몰두한 결과가 달인이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 다하고, 여기 저기 다 기웃거리고, 천 가지 만 가지 일에 다 신경쓰다보면 자연스럽게 하느님은 뒷전이 되고 맙니다.
하느님께 조금도 투자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위해 조금도 시간을 내어드리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고 있으면서 어떻게 강렬한 하느님 체험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분의 은총과 자비를 간구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 말미에서도 예수님께는 구원을 받기 위한 필수조건으로 ‘인내’의 덕을 제시하십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R)
함부로 보낸 날들, 생각 없이 보낸 날, 아주 작은 십자가 앞에서도 불평불만하고 투덜거리며 보낸 지난날들을 돌아보면서 인내의 덕을 청해봅니다.
인생은 짧은 것 같기도 하지만 그렇게 짧은 것도 아닙니다. 구원의 별을 따라 먼 길을 걸어가야 할 우리들입니다. 서두를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사랑으로 채워주시는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신뢰하며 천천히 하느님께로 나아가도록 노력하십시오.
하느님나라는 다른 무엇에 앞서 ‘가능성으로 충만한’ 곳이리라 믿습니다. 낡고 닳아빠진 우리 육신, 과오와 죄로 오염된 우리의 육신을 벗고 새롭게 변화된 영혼으로 다시 태어나는 곳이 하느님 나라이겠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아주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선행이나 기도, 이웃사랑조차도, 하느님의 사랑 안에 풍성한 결실을 거두는 곳, 그래서 백배 천배의 보상을 받는 곳이 이 하느님 나라이겠습니다.
더 이상 고통과 상처, 눈물과 죽음이 없는 곳, 풍요와 기쁨과, 감사와 찬양으로만 가득 찬 곳이 하느님이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 허물과 갖가지 치유되지 않은 상처가 땀처럼 흐를 때 마다 시원한 한 줄기 바람으로 다가오시는 은총의 주님이십니다.
짙은 먹장구름으로만 가득한 것처럼 보이는 우리들의 생애지만, 언젠가 반드시 하느님 도움에 힘입어 환한 하늘이 드러날 것입니다. 살아생전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