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이해를 위한 신학적 기준

2009. 2. 14. 오전 12:30:18

글자
 
이 책의 이해를 위한 신학적 기준
 
 
  어떤 사람들은 '마리아 사제운동'을 이 책 - 「성모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들 사제들에게」 - 과 동일시한다. 다시 말하면, 이 운동이 다름아닌 이 책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사실은 이 양자를 별개의 것으로 구분한다.

   '성모님의 사업'인 이 운동은 사제들을 불러, 그들로 하여금 성모님의 티없으신 성심께 봉헌하게 하고, 교황과 교회에 깊이 일치하게 하며, 신자들을 새로워진 마리아 신심에로 이끌게끔 하려는 데 그 본질이 있다.

   우리가 보다시피 이 운동을 특징짓는 요소들은 이처럼 매우 단순하게 표현된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며 사는 사제는 (누구나), 설사 이 책을 본적마저 없는 경우라 하더라도, 역시 마리아 사제운동에 소속되는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때" '운동'과 '책'은 (엄연히) 구분된다.

   그러나 누군가가 위의 서약들을 진지하게 실천하며 살기 시작할 때 마음속에 의당 이런 질문이 떠오를 것이다.  이들을 실천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내가 실천하고 있다는 확신을 줄 사람은 누구인가?  나로서는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인가?  그러한 질문에 해답을 주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마리아의 티없으신 성심께 드린 봉헌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우리가 가야 할 여정이 이 책에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리아 사제운동은 이 책 없이도 제낼 수 있단 말인가?  이론적으로는 그렇지만, 실제로는 결코 그렇지 않다.  사실 운동 자체가 성모님의 사업이므로, 그 확장을 위해서 또 그 정신을 올바로 이해시키기 위해서 이 책을 필수적 도구로 손수 택하신 분도 성모님이시기 때문이다.

   "이 책이 내 운동의 확장을 위한 유일한 수단이다.  작기 때문에 내가 택한 중요한 수단이다.  이것이 많은 이들에게 사제들 가운데서 하고 있는 내 사랑의 사업을 알려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1974년 6월 24일)

   (그러므로) 여기서 잠시 멈추어, 이 책의 기원 내지 기록 유형, 그 장점과 한계점을 밝혀 두는 것이 유일할 것 같다.  이는 무엇보다도 책의 정확한 이해에 필요한, 건전한 신학적 기준 몇 가지를 지적하기 위함이다.

   이 연구를 위하여 스테파노 곱비 신부의 '회람' 16호, 18호 및 특히 (이 책의) 지난 판(版) 머리말에서 큰 도움을 얻었다.
 
 
 
 
1) 내적 담화

  (1)  이 점에 대해 소신대로 (판단)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이지만, (적어도) 이 책에 제시된 (내용이) '내적 담화'에서 온 것이라는 점만은 조금도 주저없이 확언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신비 신학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즉, 어떤 (신비) 현상들은 너무 과소평가되어 (사실 여부가) 검토되기도 전에 조롱거리가 되는가 하면, 어떤 현상들은 공적 '계시'와 방불할 정도로 과대평가되기도 한다.


   (지금껏) 소홀히 다루어진 것은, (어디까지나) '은총' 덕분에 우리가 하느님의 참 아들들이 되고 마리아께서 우리의 참 어머니가 되신다는 점이다.  게다가, 기도는 독백이 아니라 대화라는 점, 이 안에서는 천상 발언자 편에서 더욱 중대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 역시 우리가 (상당히) 잊고 있었던 점이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알수 있는 공적 형태 외에도, 당신 자녀들에게 말씀하시기 위해 각자에게 가장 적합한 형태를 취하실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신 분이시다.

 

  (2)  그러면 내적 담화란 과연 무엇인가?  이것에 대해 우선 분명히 해둘점은, 이러쿵 저러쿵 물의를 일으키는 무슨 괴상한 사실이 아니라, 교회 생활안에 있고 영성 신학 개론 안에서 서술되는 하나의 신비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적인 발현에서처럼 오로지 오관으로 감지하면서 예수님, 성모님, 혹은 성인들과 통교하는 현상은 아니다.  여기서는 (그 대상을) 눈으로 볼수도 귀로 들을 수도 손으로 만질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현상이 단지 성령께서 신앙 안에 살며 기도하는 사람의 영혼과 마음에 통상적으로 부어 주시는 어떤 빛, 어떤 좋은 영감만(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진정한 현상으로서의 내적 담화는 하느님께서 알리고자 하시는것, 그 실현을 돕고자 하시는 것을 인간의 생각과 언어 형태로 내려 주시되, 메시지를 받는 사람의 어투(語套)와 (그가 속한 언어) 어법에 따라 내려 주시는 선물이다.


   (이때) 그 사람은 자유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으나 그것을 온전한 동의로 성령의 역사에 내맡김으로써 이 통교의 도구가 되고, 주님의 말씀을 받는 동안 그의 이성은 작용을 멈춘 상태로 있게된다.  다시 말하면, 편지를 쓰거나 정해진 강론을 준비 할때처럼, 생각을 한다든지 생각을 표현할 방법을 찾는다든지 하는 이성적 활동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3)  십자가의 성 요한은 어떤 (사람의) 심령이 자기 아닌 다른 존재로부터 받는 이 명료한 말을 '초자연적 형상어' 라고 부른다.  (이를 받는 것은 사람이) 잠심 중에 있을 때 일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 일 수도 있다. ([가르멜의 산길] 제2권 28장 2항 및 30장-31장 참조)


  (신학자) 땅끄리는 초자연적 말 내지 담화를 (인간의) 내적 혹은 외적 지각(知覺)에 의해 인지되는 하느님 생각의 표현이라고 정의한다. ([영성생활] 3장 1494항)
   그러므로 '내적 담화'는 이렇게 정의될 수 있겠다 : "이는 받는 사람의 마음에서 울려나오는 것으로서, 하나의 메시지를 이루는 극히 명료한 말들(의 모임)이다."  (그런데) '하늘'의 부르심은 거의 언제나 생각지 못한 순간에 일어난다.  메시지를 내릴 시기와 그 내용에 대한 결정권은 '하늘' - 곧, 주님 아니면 성모님, 아니면 천사들과 성인들 - 쪽에 있기 때문이다.

 

  (4)  진정한 영어(靈語)와 사이비 영어(靈語), 즉, 고의적인 속임수나 병적인 자기암시, 혹은 사탄의 직접적인 개입의 결과로 나타나는 거짓 영어(靈語)를 분별하는 데에는 썩 명확한 기준이 있다.  이 점에 대한 저서가 그다지 많지도 않고 현대적인 것도 별로 없긴 하지만, 위대한 신비가들 - 십자가의 성 요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성 이냐시오, 제노바의 성녀 가타리나와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등 - 의 글과 R. 마렝, 탕크리, A. 뿔렝, 가리구-라그랑즈 등의 영성 신학 연구서와 논문들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분별)보다 아려운 것은, 메시지의 본질적 보편적 내용, 요컨대 신적 내용에 대한 분명한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느님 말씀'에 입혀진 인간적 요소의 무게를 측정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흔히 이 책에 실려 있는 메시지(의 횟수)가 너무 빈번하고 또 (내용이) 너무 장황하다고들 한다.  이를 '복음서'의 문체와 교회가 공인한 몇몇 '발현'(이 담고 있는 메시지들)의 문체와 비교하는 시도도 행해지는데, 그것은 권위 뿐 아니라 양상에 있어서도 매우 다양할 수 있는 하느님 말씀의 표현을 우리가 대하고 있다는 점을 망각한 행태이다.


   사람끼리는 서로의 인격과 자유를 존중하면서 하느님만은 유독 예외적으로 대해야 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을 청하시어 우리 취향에 맞게 당신 자녀들에게 말씀을 주실 장소와 시간, 방법과 도구를 택하셔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지혜'의 영 안에서 성장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이렇게 외치시는 예수님과 함께 기뻐하게 될 것이다 :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지혜롭다는 사람들에게는 당신 비밀을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
마태 11,25), 또한 '천상 엄마'의 영혼과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도 부르게 될 것이다 : "주리는 이를 은혜로 채워 주시고, 부유한 자를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 루가 1,53)

 

2) 이 책의 '내적 담화'

   구체적으로 이 책, [성모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들 사제들에게]의 경우, 다음의 몇몇 신학적 기준을 염두에 두는것이 보다 깊은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본다.


  (1)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깊은 평화를 느끼게하고, 그분과의 관계에 있어서 더욱 큰 겸손과 신뢰를 불러 일으킨다. 또한 악에서 벗어나 단순하고 항구한 정신으로 선을 실현하게 도와 주며, 우리 자신의 자유와 이웃의 자유를 존중하게 해준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글을 쓰거나 활동하는 이는 누구든지, 스스로의 인간적 한계와 약점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균형 감각과 인류애와 영적 힘으로 (이웃을) 교화한다.


   이 책 속의 어떤 구절이 마음에 걸리면 그채로 계속 속을 끓이기보다는 차라리 책을 덮고 보다 좋은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편이 낫다.

 

  (2)  하느님께서는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나 지상에 살고 있는 당신 자녀들과의 통교를 원하시고 또 그렇게 하실 수 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는 우리가 만나게 된 것의 내용과 교회 교도권에 의해 충실하게 보존되고 그르침없이 제시되어 온 '계시'를 대조함으로써 그것이 참으로 하느님 말씀인지 아닌지를 알아낼 수 있는 능력이 주어져 있다. 


   이 책의 경우, 메시지들의 각 부분은 물론 그 전체 역시 그리스도교 교리의 맥락 안에서 읽어야 하고 또 그렇게 실천해야 한다.  (성모님의) 이 '말씀'의 목적은 다음과 같은 점을 기억하게 하면서 사제들을 보다 쉽고 안정감 있게 성화의 길로 인도하는 데 있는 것이다 :


  ㉠  마리아의 모성은, 거기서 발생되는 그분과 나를 위한 권리와 의무로써, 나를 인격적 개인으로 간주한다. (* 즉, 나와 개인적인 모자관계를 맺는다.)는 점.


  ㉡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겸손하고 순결하신 성모님은 자신을 목적으로 하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 성자 예수님 안에 이루어진 (구원)사업을 완성하시려고 양자들을 (신비적으로) 낳아 길러 주시는 '어머니'시라는 점, 따라서 그 목적은 오로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데 있으니, 이를 위하여 자신의 성소를 완수하고자 애쓰는 사제들을 부르신다는 점.


  ㉢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이시므로, 그분의 활동과 우리 응답의 역사적 맥락은 교회에서 권위를 가지고 성무를 집행하는 이들, 곧 교황과 주교들 및 우리의 법적 장상들에 대한 순종과 그들과의 완전한 일치에 있다는 점.


  ㉣  사제는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하느님께 자신을 바친 자이기에, 신자들에게 성모님께 바치는 봉헌의 기쁨과 풍성함과 서약들을 전달할 의무가 있다고 여겨야 한다는 점. 사제가 앞장서서 봉헌하고 그 실천(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점.

 

  (3)  마리아 사제운동에 소속되려면 연령, 인간적 자질, (주변인들의) 평판, 하물며 긍정적인 것이건 부정적인 것이건 과거의 개인적 체험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교회분파주의적 정신을 지닌 채 가입코자 하는 자는 누구나 이 운동의 성격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을 터이다. 교회에는 불변적 본질과 외형이 있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말' (* 즉, 교의)과 '생명'은 오직 그 외형에 있어서만 시대에 따라 옷을 갈아 입듯 변할 수 있다. 


   과거에 대한 불치의 향수병으로 말미암아, 언제나 그 가치를 지니는 옛것과 언제라도 대치될 수 있는 낡은 것을 혼동하는 이들이 있다.  또한, 극성스럽도록 새 체험을 찾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영원하신 성부보다 더 많이 알고 있기나 한듯이 성령께 새로운 무엇을 일으켜 달라고 졸라대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모든 영혼의 구원이 오로지 기도와 참회의 길에 있다고 여길 수는 없다는 태도이다.

 

  (4)  그리스도교 교의와 생명은 그 구성 요소 및 표현이 다양하고 복합적이므로,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그 가운데 어떤 것도 과소평가한다거나 단죄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어떤 표현이, 예컨대, 현대 신학에 관한 언급이 상당히 호되게 보인다면, 그것은 신학 그 자체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몇몇 거짓 신학자들에 의해 제시되는 신중하지 못한 방식과, 더욱 나쁘게도 그들의 가르침이 다른 이들에게 너무도 쉽게 수용되는 방식에 대한 지적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또하나의 예를 들어보면, 사회 내지 일반 사목과 같은 주제들은 분명히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백과사전이 아닌 이 책이 모든 문제에 답을 줄 수는 없기 때문이고, 성모님께 참으로 자신을 맡긴 사람은 탁상공론이 아니라 생활을 통해 사회 사목 문제를 구체적으로 해결해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라면) 보스꼬 신부, 오리오네 신부, 혹은 (現) 교황을 생각해보는 것으로 족하다.

 

  (5)  이 책에 상술되어 있는 '내적 담화' 현상이 일어날 때, 스테파노 신부는 어떤 황홀경이나 탈혼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와 똑같은 태도로 마음 속에서 들려오는 (성모님의) 말씀을 받아 적는다.  즉시 단숨에 쓰기 때문에 다시 생각한다든지 수정한다든지 하는 지성 작용이 끼어들 틈이 없고, 그것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는다.  그 자신의 문체가 빈약하건 풍부하건 개인적 기질이 어떠하건 간에 (자신에게 들리는 대로) 표현하는데, 그가 좀 전까지만 해도 몰랐던 진실이라든지 이전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말씀이 들릴 때도 그렇게 한다.


   이 스테파노 곱비 신부의 글에서 가장 선호되는 부분은 성모님께 대한 온전한 맡김을 복음적인 영적 어린이의 모습으로 훌륭히 비추어 주는 페이지들이다.  이 텍스트의 타당성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고전적 전통적 기준에 꼭 들어맞는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    - 게시 '진리'와의 부합,
   - 겸손과 순종의 항구한 태도,
   - 하느님께 겸손하게 간청하는 확증,
   - 하느님의 말씀을 받는 자가 그 전후에 보이는 차분한 자발성과 평화.


   그러나 무엇보다 긍정적 표로 여겨지는 것은 마리아 사제운동이 수만명의 사제들의 영혼 - 그들 중의 상당수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 에 베푼 엄청난 선익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자들에게 베푼 선익이다.


   그렇듯 많이 생산된 놀라운 열매를 보면 오직 영적 빛 안에서만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는 추정에 이를 수 있다.  성령께서 마리아의 티없으신 성심의 중재를 통해, 이 책을 손에 든 사람의 정신과 마음에 그 빛을 내려 주시는 것이다.

 

  (6)  지금은 교회든 세상이든 주목할 만한 변화를 겪고 있는 때이기에, 현시, 영어(靈語), 치유 능력 등등의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거니와, 이에 대해 마리아 사제운동은 다음과 같은 입장을 취한다 :


   - 우리 '운동'은 초자연적 양상을 띤 어떤 단체나 개인이나 사건과 일절 유대를 맺지 않음으로써 그 무엇과도 동일시 되는 것을 피한다.  우리로서는 (그런 일체에 대한) 인가권도 단죄권도 없음이 사실이다.  그 일은 다만 교회 소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운동에 속한) 모든 사제에게는 신중히 숙고하여 개인 자격으로 처신할 자유가 주어져 있지만, 어느 때나 교회 당국에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 


   - 반면에 마리아 사제운동은 교회 교도권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오류를) 담고 있는 계시들이라든지, 정상적인 인간으로서 또 균형잡힌 그리스도 신자로서 걸어야 할 길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문제일 때, 이 운동에 소속된 이들로하여금 그들이 온전한 충실로 교회에 남아 있도록 보호 감독하게 한다. 


   - 교회가 기꺼이 인정한 사람들이나 사건들의 경우, 마리아 사제운동은 각자의 선택과 취향을 최대로 존중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파티마에서 일어난 일 중에서 일부는 제거할 수도 있다는 (식의)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파티마 사건은 교회가 공인했을 뿐 아니라 보편적 중대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제대로 이해되지도 증언되지도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 발현에 대한 확신을 얻으려면) 교황 바오로 6세와 요한 바오로 2세가 (파티마의) 코바다이리아 계곡을 순례했음을 상기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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