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4주일(요한 9,1-41)
맑은 눈을 지니길 희망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들의 바람을 들어 주십니다. 이시간 주님의 사랑에 눈 뜨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못 보는 사람을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스스로 눈이 잘 보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잘 볼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오히려 눈이 가려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육신의 눈은 멀쩡히 뜨고 있지만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눈뜬장님입니다. 그가 참으로 볼 수 있으려면 먼저 눈이 멀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사울의 회심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다르소사람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췄습니다. 사울은 땅에 엎어졌습니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소리를 들었고 사울은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그분께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하셨습니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스스로 세상을 바로 본다고 자부하는 바리사이파 사람이었지만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뵙기위해서 먼저 그 눈이 멀어야 했습니다.
결국 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그릇에는 아무 것도 담지 못하는 법입니다. 선입견이 있으면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장점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은 자기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만을 확신하고 고집함으로써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눈은 있어도 동자가 없는 사람” 다시 말하면 눈은 있으나 ‘정확한 안목과 식견으로 분별’해내지 못하였습니다. ‘아는 것이 병’이었습니다. 우리도 같은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자기 안에 갇혀 있는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의 틀을 깨뜨려야 합니다.
흔히 눈을 3가지로 구별을 합니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눈, 남이 나를 바라보는 눈, 하느님께서 바라보는 눈입니다. 우리는 어느 눈을 의식해야 합니까? 하느님의 눈을 의식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눈은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주님의 눈은 어디에나 계시어 악인도 선인도 살피신다”(잠언15,3). “주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궁전에 계시고 주님의 옥좌는 하늘에 있어 그분 눈은 살피시고 그분 눈동자는 사람들을 가려내신다”(시편34,16).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 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루카11,34).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의 눈에 들기 보다는 사람의 눈에 들기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외면하고 세상 것에 줄을 섭니다. 그렇지만 믿는 이들은 크신 사랑으로, 자비 가득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을 바라봐야 하고 마침내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세상의 헛된 암흑을 멀리하고 깨끗한 눈으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려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호소합니다. “형제들이여, 세상을 두고 기뻐하지 말고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죄 안에서 기뻐하지 말고 진리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허영의 꽃을 두고 기뻐하지 말고 영원의 희망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 얼마나 오래 살든 간에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니 아무 걱정도 하십시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눈먼 사람에게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에 보내시어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한 말씀으로 눈을 뜨게 할 수 있지만 진흙을 발라주는 구체적 행동을 통해 사랑의 표현을 드러내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보아야 할 것입니다. 결국 눈을 떠서 본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머리로 하는 사랑이 아니라 행동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행하는 가운데 빛이신 주님을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뵐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성 아우구스티노).
우리의 눈은 육안, 심안, 혜안으로 구별하기도 합니다. 혜안이란 육적인 눈이 아니라 신앙의 눈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하느님께로부터 받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알게 되기를 기원하였습니다(에페1,18). 그리고 우리는 이미 세례성사를 통하여 주님께서 마음의 눈을 넘어 영의 눈을 뜨게 해 주셨음에도 세상 것의 욕심으로 영의 눈을 자꾸 가리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온전히 깨달아 눈이 뜨이고, 날마다 맑은 눈을 가지고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무엇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는 지혜를 청하며...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