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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8월 1일, 영국 육군 중장 베이든 포엘은 브라운시 섬에서 청소년 20명을 데리고 야영을 했다. 19세기 말 기병대 장교로 보어(Boer)전쟁에 참여한 바 있는 포엘 장군은 진정한 애국자를 육성하는 데는 소년시절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스카우트 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현재 세계 155개국이 스카우트연맹에 회원국으로 등록되어 있다. 전 세계 스카우트 회원은 2800만여명. 지난 100년간 연인원 3억명 이상이 스카우트운동에 참여했다.
1922년 10월 5일 오전. 일제 강점하에 놓인 조선의 서울 종로구 계동 중앙고보(현 중앙고등학교) 뒷산에 학생 8명이 모였다. 조철호가 결성한 조선소년군이다. 비슷한 시기에 정성채가 발족한 조선소년척후대가 태어났다. 조선소년군과 조선소년척후대가 한국스카우트연맹의 전신이다.
중앙고보 뒷산에 모였던 조선소년군 멤버 8명 중 현재 한 사람이 생존해 있다. 대구 중구 남산동에 살고 있는 권영섭(權英燮) 옹이다. 1904년 1월 27일 경북 봉화군 닭실 마을에 태를 묻은 권영섭 옹은 일생을 스카우트운동과 함께 한 한국스카우트 역사의 산증인이다.
권영섭 옹은 현재 둘째 아들 내외와 손자들과 살고 있다. 대구 남산동 자택에서 만난 권영섭 옹은 도무지 104세가 믿기지 않을 만큼 허리도 꼿꼿했고 목소리도 우렁찼다. 그 흔한 검버섯도 얼굴에 피지 않아 얼굴이 맑고 깨끗했다. 왼쪽 귀에 보청기를 끼고 있는 것 외에는 104세라는 게 실감되지 않았다. 그는 가부좌를 튼 채 시종 꼿꼿한 자세로 질문에 답했다.
권 옹은 “올해가 조선소년군이 만들어진 지 85주년이 되는 해야”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때는 (일제에 의해) 실내집회가 금지되었어. 그래서 학교 뒷산에 모인 거지. 정식 복장을 입고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23년 3월부터야.”
권영섭 옹은 일제강점기를 조선소년군의 일원으로 헤쳐나갔다. 그의 설명이 계속된다.
“그때는 조선소년군의 활동이 배일(排日) 운동에 가까운 운동이니까…. 일본 정부의 탄압을 많이 받았어. 서울 아이들은 그때도 벼를 쌀나무라고 불렀어. 그래서 조선소년군은 주로 농사실습을 많이 시켰어. 처음에는 일본 헌병대에서 조선소년군을 감독했지. 그러다 감독 업무가 헌병대에서 경찰로 넘어가 버렸어. 경찰은 조선소년군 활동을 아주 까다롭게 감시했어. 총사령관 조철호씨가 경찰에 자주 붙잡혀가 고초를 겪었지. 나도 여러 번 경찰서에 끌려갔지만….”
조철호 총사령관은 후원자가 없었기 때문에 조선소년군을 이끌며 재정문제까지 책임져야 했다. 권 옹은 소년군 대장을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1937년 9월, 일제는 조선소년군과 조선소년척후대를 해산한다. 권 옹의 설명이다.
“일제는 조선소년군의 행군 휘장에 무궁화 무늬가 그려져 있는 것을 구실 삼아 조선소년군을 강제 해산시켰어. 사쿠라가 일본의 꽃이고 무궁화는 조선의 상징 아니오.”
권 옹은 이렇게 말하고 장롱을 열고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이거 때문에 해체된 거야.”
무궁화 무늬가 선명했다. 놀라는 표정을 짓자 권 옹은 “내가 감추어 놓았다”고 말했다.
조선소년군 활동이 중지되었지만 이 경력은 그에게 도움을 줬다. 일본 철도건설회사인 오타(太田)사 제천사무소에 취직이 된다. 조선소년군 대장 경력을 인정 받은 것이다. 일본인 소장은 10명의 일본인 직원에게 그를 이렇게 소개했다고 한다. “이 사람은 한국사람이지만 조선소년군 대장을 지냈다. 너희들과 함부로 비교할 사람이 아니다.” 권 옹은 오타사 제천사무소에서 회계사무를 보며 7년간 일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조선소년군은 활동을 재개한다. 조선소년군은 서울에만 5연대를 조직했을 정도로 세력이 커졌다. 그는 시계수리점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조선소년군 활동을 계속했다.
해방 직후 인촌 김성수는 임시정부 수뇌부가 환국하기 전에 각계대표자회의를 소집했다. 권영섭은 이 모임에 조선소년군 대표로 정복을 입고 참석했다. 경교장의 선전부장으로 있던 엄한섭이 조선소년군 간사장을 맡고 있을 때 권 옹은 김구 선생을 만나기도 했다.
“경교장으로 찾아갔지. 김구 선생이 내 손을 잡으며 ‘자네 수고 많았네’라고 했지. 김구 선생의 손이 꼭 쇠뭉치처럼 단단하고 컸어. 서신왕래는 했지만 서로 얼굴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어.”
권 옹은 생존하는 안동 권씨 복야공파 중 최고령이다. 영남일보 4월 7일자는 ‘보건의 날’을 맞아 100세 이상 대구 거주 노인 3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권 옹이 정신적·신체적으로 가장 건강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권 옹은 2005년 서울 상계동 백병원에서 태어나서 첫 건강검진을 받았다. 권 옹은 “100세가 넘었는데 몸에 병 하나 없다고 의사들이 모두 깜짝 놀랐어”라고 말하며 껄껄 웃는다.
그가 대구에 터를 잡게 된 것은 1·4 후퇴 때였다. 서울에서 36년간을 살다가 중공군을 피해 대구로 쫓겨 내려갔다. 대구에서도 시계수리점으로 식솔(食率)을 먹여살렸다.
그의 집안은 원래 단명(短命)이었다. 조부는 27세에 돌아가셨고 선친 역시 52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우리 집안은 70을 넘긴 사람이 몇 명 없었어”라고 했다. 그의 어릴 적 이름은 다섯 개나 됐다. 오래 살아 대를 이어달라고 집안 어른들이 여러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권씨 집안의 소망대로 권 옹은 현재 104세를 살고 있다. 20세기 벽두에 태어나 21세기를 살고 있는 것이다. 2대 독자인 권 옹은 슬하에 4남1녀를 두었으나 현재는 둘째 아들과 딸만 살아 있다. 증손주도 7명이나 보았다.
“나는 평생에 돈을 못 모아본 사람이야. 그래서 애들에게 떳떳하지 못해. 하지만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와줬지. 그 사람들이 축원해서 내가 지금 이렇게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 같아.”
그는 지금도 전국 스카우트 연례회의 모임이 있으면 혼자서 어디든지 참석한다. 그에게 스카우트운동을 통해 배운 것 중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물었다. 권 옹은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일일일선(一日一善), 하루에 한 가지씩 착한 일을 하자는 것이지. 나는 평생 누굴 해롭게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