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부터 1952년까지 북한에서 사목활동을 하다가 북한 공산정권에 의하여 순교한 신상원 주교 와 성직수사 14명 함경도 함흥교구 사제 13명 수녀 3명 또 평신도 1명 과 중국의 연길 교구 사제 2명 외국 의 독일 수도자 25명 입니다.이 분 들은 " 그리스도께 충실한 방법은 오래전부터 순교할 준비를 갖고 있으니 이것이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이다"하였습니다.
순교자 17명은 평양 인민 교회 등 에서 총살.등으로 살해되었고 13명은 옥사덕 수용소에서 굶어 영양실조로 살해당했고,나머지는 해주 인민 재판장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근처 바닷가에서 생매장으로 살해당했습다. 2009년 12월 28일 한국전쟁등 격변기에 신앙을 지키다가 목숨을 잃은 현대 순교자들에 대한 심사와 재판을 시작으로 시성시복운동에 들어갔습니다.
이로써 한국전쟁 등 격변기에 신앙을 증거하며 목숨을 잃은 근·현대 순교자들에 대한 활발한 조사 작업에도 관심이 쏟아질 것으로 보인다.
▧ 순교자 38위는 누구인가
이번에 시복시성을 위해 예비심사를 받은 대상자는 모두 38위로 성 베네딕도회 덕원자치수도원구와 함흥대목구 지역에서 사목활동을 펼치다 1949~1952년 북한 공산정권에 의해 순교한 이들이다.
이들은 신상원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를 비롯 성직수사 14명, 덕원·함흥교구 사제 4명, 평수사 13명, 수녀 3명, 평신도 1명으로 구성돼 있으며 연길교구 사제도 2명 포함돼 있다. 이 가운데 25명은 독일의 7개 교구 출신 수도자들이다.
1952년 살아남은 덕원지역 수도자들은 남한 왜관에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했고, 살아남은 독일인 수도자들 또한 1954년 고국으로 귀환하거나 왜관으로 돌아갔다.
▧ 어떻게 순교했나
부청원인 빌리브로드 드리버 신부는 시복시성 예비심사 청원서에서 “순교자들은 깊은 신심을 지니고 그리스도께 충실함으로써 이미 오래 전부터 순교할 준비가 돼 있었다”며 “순교자들이 직간접적으로 살해당한 이유는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신앙 그리고 가톨릭교회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실제로 순교자 38위는 평양 인민교화소, 옥사덕수용소, 만포 관문리수용소, 함흥 감옥, 원산 인민교화소, 순안 인민교화소, 평양 감옥 등 북한지역에서 순교했으며 몇몇 생존자와 순교자는 증언록과 편지 등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대치하는 공산주의 이념은 이들에게 혹독한 박해와 비인간적 처우를 자행했는데 17명은 평양 인민교화소나 다른 곳에서 총살 등으로 살해됐으며, 2명은 비인간적 처우와 부족한 의료행위로 목숨을 잃었다. 13명은 옥사덕수용소에서 영양실조, 과로, 배고픔, 추위, 육체적 쇠약 등으로 순교했으며 4명은 옥사덕에서 만포수용소로 죽음의 행진을 하던 중 목숨을 잃었다.
또 연길교구 사제인 한윤승 신부는 해주시 인민재판소에서 15년 형을 언도받은 후 살해됐거나 인근 바닷가 모래톱에 생매장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같은 교구 사제 신윤철 신부 또한 강제연행 돼 어디론가 끌려가 살해됐다고 전해진다.
■ 순교자 신상원·김치호의 삶과 행적
이번 시복시성 법정 예비심사대에 오른 ‘신상원 보니파시오와 김치호 베네딕도와 동료 순교자들’은 어떻게 믿음을 증거 했을까. 38위 순교자 가운데 덕원자치수도원구장 겸 함흥대목구장 신상원와 덕원수도원 최초의 한국인 성직수사 김치호, 그들의 고귀한 신앙 흔적을 추적한다.
▲ 신상원 보니파시오 사우어(Bonifatius Sauer) 주교 아빠스
덕원자치수도원구장 겸 함흥대목구장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는 1877년 독일 헤센에서 태어나 1898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수련기를 시작했다. 한국이름은 신상원.
당시 노르베르트 베버 총 아빠스는 뮈텔 주교에게 서울에 선교 베네딕도 회원들을 파견하기로 약속했다. 사제서품을 받고 신부가 된 그는 1909년 한국으로 파견됐고, 서울 백동(현 혜화동)에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설립됨에 따라 그곳에서 원장을 역임한다.
1913년 아빠스로 축성된 보니파시오는 1920년 포교성성이 서울 베네딕도 회원들에게 원산대목구를 위탁함에 따라 원산대목구장으로 임명됐으며 다음해 주교로 서품됐다.
그는 선교직무를 효과적으로 이행하기 위해 선교지역과 떨어져 있던 서울 수도원을 원산 근교의 덕원으로 옮겼다. 이후 약 20년 동안 그의 관할구역에는 24개 본당이 설립됐고 대부분 본당에 정부가 인가한 보통학교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같은 성공적인 선교 사도직과 수도생활은 공산당의 집권과 동시에 중단돼야만 했다. 1949년 5월 9일과 10일 사이 정치보위부원들이 수도원에 난입해 장상과 독일인, 한국인 사제들을 체포한 것이다. 이들은 원산교도소에 수용됐다가 평양 인민교화소로 이송됐으며, 재판을 통해 ‘반공산당을 위한 사보타주’라는 죄목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는 당시 심한 천식을 앓고 있었는데 독방에 감금돼 약 6개월 동안 비인간적 대우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루치우스 로트 원장신부는 감옥에서 몰래 보낸 편지를 통해 1950년 10월 15일 내려진 선고의 이유와 당시의 상황을 적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소위 ‘나쁜 사상’ 때문이었다. ‘나쁜 사상’이란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에 대치되는 성서와 그리스도교의 이념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감방을 한 번 둘러보기만 해도, 좁고 더러운 구덩이 같은데 한구석에는 변기가 있어 온통 악취를 풍겨대고 있음을 알 것이다. 아무런 난방장치도 없었기 때문에 주교 아빠스님은 그냥 추위를 견딜 수밖에 없었다. 다른 죄수들보다 적은 쌀로 버텨야 했다. 그는 3일 동안 의식을 잃었다가 1950년 2월 7일 아침 6시 평화로이 숨을 거두고 영원히 잠들었다”고 기록했다.
▲ 김치호(베네딕도, 金致鎬) 신부
덕원수도원 최초의 한국인 성직수사인 김치호 베네딕도 신부는 1914년 3월 31일 서울대목구의 유명한 교우촌인 갈곡리(현 경기도 파주시 법원면 갈곡리)에서 태어났다.
12살의 나이로 서울 백동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에 입회한 그는 1942년 5월 1일 덕원수도원 성당에서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의 주례로 사제서품을 받았다. 다음해 6월 덕원본당 보좌로 부임해 청년사목을 담당했던 그는 1945년 덕원본당 주임으로 임명됐으나 폐병을 심하게 앓아 사목활동에 지장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사제로서의 꿈은 공산당이 집권하며 산산이 부서졌다. 1949년 5월 11일, 덕원수도원에 있던 독일인 수도자들과 한국인 신부들이 체포돼 평양 인민교화소로 압송된 것이다.
경도범 엘리지오 신부의 증언에 의하면 김치호 신부는 여러 명이 함께 수감된 습기 찬 좁은 감방(8㎡ 면적에 18명이 함께 수감)에서 숨을 쉬기조차 어려워했다고 전해진다.
1950년 10월 5일, 북한 인민군들이 북쪽으로 후퇴할 때 그는 폐병으로 각혈이 심한 상태였는데 각목으로 구타를 당해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jpg)
시복시성 전문을 보면서...
하느님의 ‘신상원 보니파시오와 김치호 베네딕도와 동료 순교자들’
38위에 대한 시성시복 예비심사 공고
춘천 주교 장익 요한은 1949년부터 1952년까지 북한에서 선교하던 중에 생명을 바처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 38위에 대하여 시복시성을 위한 예비 심사를 요청 받았습니다. 본인은 이 하느님의 종들의 순교 사실이 확실하다고 판단하여 예비심사를 시행할 것을 공고합니다. 이에 시성성의 규정에 따라 하느님의 종들의 하느님의 종들의 명단과 약력을 한국 천주교회의 모든 교우들에게 공지하며 그분들과 관련된 모든 문서와 아는 사실을 본 주교에게 알려주도록 요청합니다.
♱ 장익 요한
2009년 12월 25일 춘천 주교 장익 요한
이번 시복시성의 공고는 현대 한국교회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큰 사건중에 하나이다. 한국의 세 번째 신부님이셨던 강도영 말구 신부님은 당시 교구장이셨던 민 대주교님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시복시성을 위해 순교 자료 모음과 동시에 신자들의 지속적 기도, 즉 순교자 현양 운동을 펼치셨다.
시복 시성이란 순교자나 탁월한 신앙의 모범을 보인 분들에게 공적인 공경을 바칠 수 있도록 복자나 성인의 품위에 올리는 예식을 말한다. 그동안 우리가 펼쳤던 시성시복에 관한 자료들을 되돌아 보자.
1839년 기해박해부터 1846년 병오박해 순교자 79위의 시복식(諡福式)이 1925년 7월 5일 거행되었고, 1866년 병인박해로 순교한 24위의 시복식이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마침내 1984년 5월 6일,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대회’ 미사 중에 한국 순교복자 103위 시성식(諡聖式)을 거행하였다.
“갈림이 없으신 천주 성삼께 영광을 드리고 가톨릭 신앙을 현양하며 그리스도 신자 생활의 증진을 위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복되신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권위로써, 또 내게 맡겨진 권한으로써, 복자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와 정하상 외 101명의 한국 순교자들을 성인으로 판정하고 결정하여 성인들 명부에 올리는 바이며, 세계 교회 안에서 이분들을 다른 성인들과 함께 정성되이 공경하기를 명하는 바입니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한국 순교복자 103위 시성선언)
이번에 시성시복의 영광을 차지할 38분의 가경자들도 이미 성인으로 선포된 103위의 영광스러운 절차를 따라 성인으로 선포될 것으로 믿는다.
우리는 이쯤에서 지난 날 들을 되돌아 보자. 솔직히 말하자면 현실은 너무 부끄럽다. 한국순교자 시성시복 전후를 냉철히 되돌아 보면 시성을 정점으로하여 신앙의 열기가 점점 식어가고 있다고 자평하는데 그것이 사실일까?
이 번의 경우 38위는 103위와 많이 다르다. 아주 평범하고 상식적인 일이건만 지난 날들처럼 불같은 열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 그럴까? 북한이 눈앞에 딱 버티고 있기 때문일까?. 그 곳을 바라보는 시각이 제각각이기 때문일까?. 누군가 교통 정리를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옥사덕, 그 곳은 38명중 많은 이들(17명)이 피를 흘린 곳이다. 그때 그곳을 잘 살펴보면 옥사덕의 공산당은 수도자들을 대하는 태도가 매 시간마다 달랐다. 처움에는 철두철미한 격리 또는 고립 정도로 만족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격리는 제거로 바뀌면서 많은 희생이 따랐다. 생명을 가볍게 여기고 있다는 점에서 103위나 38위 모두 동일하다. 순교란 그 자체가 목숨을 담보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순교의 의미는 무엇일까? “순교자의 피는 새로운 그리스도인을 낳기 위한 씨앗이다” 테르툴리아누스 교부의 말씀이다. 왜 그럴까? 그리스도를 닮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셨는가. 그분은 많은 시간들을 하느님 나라 선포에 사용하셨다. 수난이 다가오자 제자들과 함께 계셨다. 부활후에는 믿는이들과 함께 계신다.
순교자의 진정한 가치는 부활에 대한 확신에 있다. 일반인은 죽음뒤에 알수 없는 절망이 오지만, 순교자는 부활신앙으로 그리스도 함께 기쁨과 영광을 누린다. 그리스도는 믿는이들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103위 시성이후 신앙인의 열정이 식은 이유는 부활 신앙이 빛을 잃어가기 때문이 아닐까? 그 원인은 현실이 너무나 강렬하게 조명되기 때문일 것이다. 황금 만능, 쾌락, 권력......, 이러한 것들은 죽음을 끝없는 공포로 포장하여 현실에 몰두하게 만든다. 때로는 죽음의 그림자 조차 근접할 수 없는 무아지경으로 만들어 현실에 몰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종소리는 역사적 사실보고(옥사덕 수용소등)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두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연스럽게 하느님 나라가 선포될 것이다.
세 번째로 어리석은 십자가의 가치(죽음의 그리스찬적 문화)를 높이 들어 올릴 것이다.
네 번째로 부활 신앙의 재조명으로 많은 이들이 교회품으로 돌아 올 것이다. 이번 기회에 북한이 하느님품으로 돌아 왔으면 좋겠다. 한국교회가 103 시성운동 때처럼 기도 운동을 펼쳤으면 좋겠다.
지면을 통하여 이미 발표된 가경자 몇분을 소개하고자 한다(한국 사람들 몇분...)
2.
|
김치호 베네딕도 신부 1914년3월.11일생 경기,파주 감곡리 순교일;1950.10.5 평양인민교화소 |
장아네타 헌신자 1910년생 황해도 순교일:1950. 10월 함흥인민교화소 |
최병권 마티아 신부 1908년3월3일생 함남 안변 1949.평양인민교화소 |
|
김봉식 마오로 신부 1913년8월24일생 북간도 훈춘 출신 순교일:1950.10.9. 원산 |
김종수 베르나륻 신부 1918년 2월12일생 북간도 삼원봉 출신 순교일:1950년10월3일 평양 |
김동철 마르꼬 신부 1913년1월3일생 부산 영주동 출신 순교일:1950년 신의주 |
|
김이식 마르티노 신부 1920년7월20일생 강원 양양 출신 순교일:1950.10.3 평양 |
구대준 가브리엘 신부 1912년 생 서울 이화동 출신 순교일:1950년 10월 평양 |
이재철 베드로 신부 1912년5월12일 서울 출신 순교일:1950.7. 청진 |
|
이춘근 라우렝시오 신부 1915년 3월 8일생 경기도 양주 신암리 순교일:1950.10.5. 평양 |
한윤승 필립보 신부 1911년6월9일생 북간도 용정출신 순교일:1950.6. 해주 |
신윤철 베드로 신부 1906년 5월28일생 황해 신철 출신 순교일:1950.6. 해주 |
|
|
|
|
|
[출처] 38위 시복시성 약전을 바라보면서...... (봉헌회) |작성자 berdolee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