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 잘하고 계십니까?

2009. 5. 16. 오후 3:32:34

글자

주제 : 신앙생활 잘하고 계십니까?
강사 : 이상영 그레고리오 신부님


피스칼 신앙은 도박과 비슷하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것은 하느님인데
하느님은 사람으로서는 마지막까지 다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계시해 주셨으므로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지만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 알면 믿을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모르는 구석이 있어야 믿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하느님을 다 알 수 는 없습니다.
하느님을 아는 방법에는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설명하는 것으로 머리로 알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체험입니다.

도박의 성격은
첫째, 결과를 100% 확신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가능성이 많은 쪽에 패를 건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을 도박이라할 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 전체, 곧 목숨을 겁니다.

도박을 하려면 영원한 생명과 맞먹는 것을 걸어야 합니다.
100만원?
10년 봉사?
우리가 가진 최고의 것, 곧 우리 인생전체를 걸어야 합니다.
사실 영원한 생명의 가치가 더 크지만
우리가 내 놓을 수 있는 것은 이것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고돌이를 할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점 십원 일 때 별로 재미가 없습니다.
점 1000원이면 얼굴색이 달라집니다.
점 만원이면 밤 새도록해도 잠도 안오고, 허리도 아프지 않습니다.
단위가 클수록 도박은 흥미로와 집니다.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면 어떻겠습니까?

신앙생활은 목숨이 걸렸으니 쉽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신앙에 입문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호락호락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자들은 전체를 걸지 않고 계속 견주어 보고 있습니다.
선뜻 나서지도 못하고 하느님께 맡기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가능성을 따져봅시다.
신앙생활을 할만한 가치가 있는지 확률을 따져봐야 합니다.
신자의 경우
죽어서 보니 하느님이 있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죽어서 보니 하느님이 없다면 잃은 것은 없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하느님을 믿어서 이웃을 위해서 살며 후손에게 귀감이 되었을 것입니다.

비신자의 경우
죽어서 하느님이 없다면 죽으면 끝이므로 얻는 것이 없습니다.
비신자의 경우도 다른 사람을 위해 살 수 있지만 확률적으로 적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죽어서 하느님이 있다면 그 때는 신세 망치는 결과를 얻게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패를 걸고 살아야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목숨을, 내 인생 전부를 걸어야 합니다.
점 10이면 10에 해당하는 만큼,
목숨 전체를 걸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전체를 걸지 않으면 기대를 하지 않아야하는데
목숨을 걸지 않으면서도 기대를 합니다.
적게 걸수록 배당률은 떨어지게 됩니다.
처음부터 목숨을 걸어야하지만
하느님께서 강요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 모두 같이 앉아 있지만 신앙의 정도는 모두 다릅니다.

하느님께서는 강요하시는 것이 아니라 초대하시는 분이십니다.
식사 초대를 받으면 안간다고 할 수 있듯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목마른 말을 물가로 데려가면 말이 물을 먹지 마부가 먹지 않습니다.

이 도박은 딱 한판밖에 할 수 없습니다.
목숨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또 이 도박은 직접 참여해야지 누구도 대신해 줄 수가 없습니다.
열심한 사람을 부러워하고 존경해 보았자 소용이 없습니다.
광 팔아서 돈 따는 사람이 없듯이
이 도박은 직접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판단은 세속적 논리가 맞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포도원 일꾼의 비유에서처럼
형평성 문제가 있는 듯 보이지만 하느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늦게 온 사람에게도 똑같이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를 바라야합니다.
샘을 내거나 남과 비교해서는 안됩니다.

도박에서 패가 나빠도 한번 해보자고 덤비는 사람이 이길 확률이 많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살아야 합니다.
짜장면을 시켜놓고 다른사람이 짬뽕을 맛있게 먹는 걸 보고 난 뒤
짬뽕 시킬 걸 하고 후회하면서 짜장면을 먹으면 맛이 없습니다.
머리에는 짬뽕 생각, 입에는 짜장면이기 때문에 맛이 없습니다.
둘이 일치해야 합니다.
문제는 나에게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최고, 최상의 상황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내입은 현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살아야 합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이 결단을 언제 하는가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결단을 해야합니다.
우리는 언제 죽습니까?
죽는 사람은 ‘아이고 내가 여기서 죽는구나’ 합니다.

사람은 두개의 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의 틀과 미래의 틀입니다.
과거의 틀은
자기가 경험한 그대로 사람이나 사물을 바라봅니다.
새차를 사고 처음엔 좋지만 한달 정도 지나면 내 소유가 되어
경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내 소유가 되고 다 알고 있으미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께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하느님이 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래의 틀은 이상적인 것, 욕망과 관계가 있습니다.
자신이 바라는 상이 있는데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남편, 자식을 그런 눈으로 보면서 그 틀에 맞추어 넣으려고 하고 강요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지금 여기, 영원한 현재에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과거의 틀로 우리를 보신다면
우리는 감히 하느님을 만나고 용서를 청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지금을 보십니다.
또 하느님께서 미래의 틀로 우리를 보시면 우리는 살아 남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시고 사랑하십니다.

신앙생활에는 이유나 조건이 없습니다.
어떠 어떠했기 때문에 사랑한다거나
무엇무엇을 해주시면 ... 이 없습니다.

이유나 조건을 대는 것은
젖소를 키우는 농부가 젖소를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시는 것에 매달려 있습니다.
이 도박을 계속하면 저도 그만 이겨도 그만이 됩니다.
처음부터 목숨은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신앙생활을 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여유가 생기게됩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자기 생명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고....

하느님께는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신앙생활은 시시한 것이 아니고,
안전한 생활도 아니고,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모험 속으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좋은 부활 맞이하시고
새로운 삶, 변화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댓글 1

  • 2009년 5월 16일 오후 3:37

    모든 님들께서 자신의 신앙생활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