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로마서 읽기 제2-1강: 2장

2010. 3. 27. 오후 1: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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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강(1): 로마서 2장

 

로마서 2장 1-11절은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심판은 하느님의 몫입니다. 성경은 “오직 하느님만이 심판자”(시편 75,8)이시며 “모든 사람의 심판자”(히브 12,23)이심을 거듭거듭 가르치고 있습니다.

 

- “하느님께서는 좋든 나쁘든 감추어진 온갖 것에 대하여 모든 행동을 심판하신다”(코헬 12,14).

- “때가 오면 내가 그대로 하겠다. 나는 돌이키지 않고 동정하지도 않으며 뉘우치지도 않겠다. 네가 걸어온 길과 행실에 따라 내가 너를 심판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에제 24,14).

-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로마 14,10).

 

그런데, 자신이 하느님인 양 남을 심판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더구나 “남을 심판하면서 똑같은 짓을 저지르는”(로마 2,1)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의 심판을 모면할 수 없습니다.

 

- 로마 2,5-7

5 그대는 회개할 줄 모르는 완고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의로운 재판이 이루어지는 진노와 계시의 날에 그대에게 쏟아질 진노를 쌓고 있습니다.

6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7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로마서 2장 6절은 시편에도 나오는 말입니다. “당신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십니다”(시편 62,13). 이 말씀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아, 당연히 그래야지. 그래야 온갖 시련을 견디며 하느님께 충실하고 착하게 산 나 같은 사람이 상을 받지.’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아, 큰일이다. 나는 아직 자신이 없는데. 내 악행을 아직 다 보속하지 못했는데.’ 하고 걱정하십니까?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기를 기원하지만, 아버지의 나라가 왔을 때 우리는 과연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또 아버지의 나라에서 “큰사람”(마태 5,19)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VIP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은행에 가도 VIP 고객에게는 특별한 대우를 해 준다고 합니다. VIP 대접을 받으면 기분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접받기에 앞서서 대접받을 만한 행실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은행에서 대접받는 것보다는 하느님 나라에서 VIP 대접받는 것을 더 바라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서 큰사람으로 대접받는 방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 마태 18,4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 마르 9,35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 루카 9,48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예수님이야말로 가장 자신을 낮추신 분, 모든 이의 꼴찌, 모든 이의 종, 가장 작은 분,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신 분입니다. 그래서 가장 크신 분입니다. 루카 7,11-17에서 예수님은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려 주십니다. 그 과부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기 때문입니다. 그 과부는 성모님을, 죽은 외아들은 예수님을 연상시킵니다. 죽은 아드님을 팔에 안고 애통해 하시는 성모님의 모습을 미리 보셨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어쨌든 예수님의 고통 덕분에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하느님이 과연 진노할 수 있느냐, 죄인을 심판하여 영원한 지옥으로 보낼 수 있느냐, 잠시 가두었다가 풀어 주는 것이 아니냐고 묻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원한 형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싶을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느님의 진노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진노란 죄를 조금도 용납하지 못하시는 하느님의 거룩한 품성에서 나오는 죄에 대한 반응입니다. 죄에 대한 반응이 진노입니다. 거룩함은 죄를 전혀 용납하지 않습니다. 거룩하지 않으면 진노도 없습니다.

 

- 하바쿡서 1,13 “당신께서는 눈이 맑으시어 악을 보아 넘기지 못하시고 잘못을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시면서 어찌하여 배신자들을 바라보고만 계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이를 집어삼켜도 잠자코 계십니까?”

 

다른 한 편, 하느님의 진노는 당신의 백성, 당신의 자녀를 징계하시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구약에 보면 하느님의 진노를 가장 많이 받은 백성은 이스라엘입니다. 바빌론도 불레셋도 아니고 이스라엘입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죄를 지으니 때려 고치게 하십니다. (칼 브라이트라는 신학자는 하느님의 사랑은 그의 진노 속에서 구체화된다고 하였고, 에밀 브루너는 하느님께 등을 돌린 사람에 대한 진노가 곧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악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그리 기뻐할 일도 아닙니다. 일시적으로는 감추어져 있겠지만, 결국은 드러날 것이고 심판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욕망대로 살아도, 부당한 짓을 해도, 벌 받지 않고 무탈하니 만사형통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하느님 진노의 표징일 수 있습니다. 차라리 이 세상에서 자신의 죄악이 폭로되어서 창피를 당하고 뉘우치고 회개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것도 크나큰 은총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가 드러나면 오히려 감사합시다. 그것은 내버려 두시는 하느님의 진노가 아니라 자비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진노는 계속 쌓입니다. 그리고는 그 진노는 심판 때에 쏟아져 드러날 것입니다. 댐에 물이 가득 차서 터질 때까지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은 사람은 불행합니다. 하느님의 진노가 가득 차서 터질 때까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더욱 불행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로마 2,6). 천사의 행실을 한 사람은 천당으로, 악마의 행실을 한 사람은 지옥으로 보내실 것입니다.

 

지금 무엇 하나 아쉬운 것이 없다면 하느님의 진노 아래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하는 것도 유익할 것입니다. 믿지 않는 내 남편이 아무 일 없이 잘 살고 있다면, 하느님께서 내 남편에게 한 방 먹여서 정신 차리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혼을 구할 수 있습니다. 남편 사업 잘 되고 아이 공부 잘 하고 건강하다고 해서, 하느님의 풍성한 은혜를 받고 있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세속적 행복보다는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로 돌아오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성공을 향하여 달려가기보다 십자가를 바라보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 없이는 희망도 없습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 우리가 구원을 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우리에게 큰 희망이 생긴 것입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이사 9,1; 참조: 마태 4,16).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게 된 것입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3,18).

 

-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습니다”(1테살 5,9).

 

우리가 영원한 죽음을 피하고 그 대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하느님의 진노와 심판을 피할 수 있도록 열어 놓으신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피로 구원의 은총이 땅을 적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죽음이 없었다면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생명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로 피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진노를 면할 수 있습니다. 이 복음을 깨닫게 되어 바오로 사도는 행복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님만으로 충분했고, 그래서 다른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겼습니다.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 3,8).

 

바오로 사도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을 우리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다른 신자들에게도 알리고 싶어 하였고, 또 그렇게 되도록 기도하였습니다.

 

- 1코린 2,2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자나 깨나 예수님의 사랑, 십자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구원은 십자가에서 옵니다. 구원의 기쁜 소식은 십자가에서 선포됩니다. 복음을 다시 들음으로써, 죄를 용서받고 구원의 감격을 다시 체험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나게 됩니다. 세상의 것들을 부러워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입버릇처럼, ‘예수보다 더 좋은 것 없네.’, ‘예수보다 더 귀한 것 없네.’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이 세상 삶이 아무리 고달프고 힘들어도 견딜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무거운 짐은 모두 예수님께서 짊어지셨고, 그 덕분에 우리에게는 가벼운 짐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 마태 11,28-30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하느님의 심판은 공정합니다. “먼저 유다인이 그리고 그리스인까지,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환난과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로마 2,9). 마찬가지로,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선을 행하는 모든 이에게는 영광과 명예와 평화가 내릴 것입니다”(로마 2,10).

 

유다인과 그리스인’이 대비되어 쓰였는데(로마 1,16; 3,9도 참조), 여기에서 ‘유다인’이라는 표현은 마카베오 시대부터, 곧 기원전 2세기경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마카베오는 반유다주의 정책을 실시하던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기원전 168-165년 재위) 치하에서 독립 전쟁을 일으킨 가문(3대)의 이름이며, 고대 이스라엘의 마지막 독립 왕조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로마 2,12-16은 율법을 모르는 민족들도 그 마음에 율법에서 요구하는 행위가 쓰여 있다는 점을 밝혀 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고 단언하며(로마 2,11 참조), 유다인과 비유다인의 간격을 되도록 줄이려고 노력합니다. 유다인이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받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율법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 2,13). 또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 민족들은 “본성에 따라 율법에서 요구하는 것을 실천하면,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들이 자신들에게는 율법이 됩니다”(로마 2,14). 이처럼 하느님께서 심어 주신 본성과 양심을 따라 선을 행한다면 비유다인에게도 “영광과 명예와 평화가 내릴 것”(로마 2,10)이라고 바오로 사도는 천명합니다.

 

반면에, 율법을 자랑하면서도 율법을 어기는 유다인들을 바오로 사도는 질책합니다. “율법을 자랑하면서 왜 그대는 율법을 어겨 하느님을 모욕합니까?”(로마 2,23) 바오로 사도는 율법의 실천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몸의 할례보다 마음의 할례를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속으로 유다인인 사람이 참유다인이고,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할례입니다”(로마 2,29). 심지어, 유다인이 그리스인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이 둘 다 죄의 지배 아래 있다고 단언합니다. “우리가 유다인으로서 나은 점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유다인들이나 그리스인들이나 다 같이 죄의 지배 아래 있다고 고발하였습니다”(로마 3,9).

 

혹시라도 남을 심판하고 있는 자기 모습을 알아차린다면 곧바로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는 멈추는 습관을 들이시기 바랍니다. 남을 판단하거나 비판하는 사람은 자신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말을 더 늘어놓습니다. 그러다 보면, 처음에는 하느님 뜻에 따른 비판이었다가도 나중에는 자기 생각을 늘어놓기 일쑤입니다. 그러니,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것을 끊을 수 없다면, 짧게 줄이는 습관을 들이도록 노력합시다.

 

(묵상: 에제 47,9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2010년 3월 26일, 서울 장안동성당, 노희성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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