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함이 최고의 꾀

2005. 2. 4. 오전 8:44:55

글자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일이다. 한문 과목을 교무주임이신 국어 선생님이 맡으셨다. 인물이 좋고 풍채가 넉넉한 분이었는데, 항상 웃는 얼굴로 한자를 가르쳐 주셨다. 그런데 선생님의 성격이 너무 부드럽고 좋으셨기 때문일까, 어느 날부터인가 아이들은 서서히 나태해지기 시작했다. 몇몇이 숙제를 안 해 왔다. 그래도 선생님은 “다음엔 숙제를 꼭 해 오거라” 하고만 말씀하셨을 뿐 특별히 야단을 치지 않으셨다.

그러던 어느 날 무려 10여 명의 학생이 숙제를 해 오지 않았다. 그날은 선생님도 화가 나셔서 아이들은 모두 교실 앞으로 나오라고 하신 뒤 회초리를 드셨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매를 대기 전에 아이들에게 “무슨 이유가 있니?” 하고 물으셨다.

혹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숙제를 못해 왔는데 매를 맞으면 억울할 테니, 먼저 맨 앞의 아이에게 왜 숙제를 안 해왔느냐고 물으셨다. 그 아이가 집안에 제사가 있어서 큰집에 가느라 못 했다고 대답하자, 선생님은 용서해 주셨다. 그러자 다음 아이는 노트를 안 가져 왔다고 했고, 또 그 다음 아이는 또 다른 이유를 댔다.

그렇게 아이들은 이러저러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위기를 모면했다. 있는 머리 없는 머리 다 짜내 변명할 구실을 만들어 냈다. 그러다가 마지막 아이의 차례가 되었다. 우리는 그 녀석이 뭐라고 둘러댈지 궁금했다. 이미 둘러댈 만한 변명은  다 나왔기 때문이다. 그 아이는 얼굴을 붉히더니 잠시 머뭇거리다 게을러서 못 했노라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우리들은 모두 간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녀석은 이제 죽었다’, ‘게으른 놈은 맞아야 돼’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굳어 있던 선생님의 얼굴이 환히 펴지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난 커다란 감동을 느꼈다. 사실 그날 숙제를 해 오지 않은 아이들은 거의 다 게을러서 안 해 온 것이었지만 매맞기 싫어서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오직 한 사람, 마지막 아이만 정직하게 자신의 게으름을 인정한 것이었다.

▲ 출처 : <인생에도 지름길은 있단다>, 고정욱 조선일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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